[르포]다 모여!...‘김대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②
-불갑사와 영광 힐링컨벤션타운을 돌아보며
박정례 선임기자= 대한문에 차를 댄다고 했다. 8시 반부터니까 오는 대로 타면 되고, 차는 9시 출발이라는 공지다. 전남 영광으로 가기 위한 대절버스 말이다. 김대중 사이버기념관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강연과 대담을 겸한 ‘2016년 하계 투어’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같이 가는 방법이 내겐 안성맞춤이다. 여러 가지 부담에서 벗어나 경제적이고도 홀가분한 선택이 된다. “중간 휴식입니다!”하면 잠깐 내려 볼일을 보면 되고, ”아침 안 잡숫고 오셨죠? 김밥과 식수 하나 씩 입니다.“며 건네주는 것이 있으면 받으면 된다. 이런 때 주의할 점은 약속장소에 늦게 가면 안 된다. 하여튼 나는, 주최 측으로부터 초청받은 한 정치인과 통하는 사람들이 단체로 참석하기 위해 대절한 버스에 편승했다.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사뿐히 차에 오를 것을 상상하며 여유 있게 집을 나서서는 “어떤 쪽에 앉아야 가는 내내 햇볕을 받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운전석 반대편 3번 째 줄에 앉았다.
영광을 향해
조금 있으니까 박영림 씨가 올라탔다. 아는 언니가 한 사람 온다고 하면서 그 언니를 기다리다 보니 좌석 여기저기서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기다리느라 20분 넘게 출발이 늦었기 때문이다. 그러게 단체 여행에 시간 늦었으면 피 본다. 뛰다보면 나이든 아주머니들은 헉헉거리기 십상이고 다리가 시큰거리고 아침부터 기운이 쏙 빠지는 등 후유증이 장난 아니다.
출발하면서 받은 것은 토마토 즙과 캔 막걸리와 크림빵이었다. 배고픈 김에 빵을 맛있게 베어 물었다. 그 와중에 카톡 문자를 작성했다. 출발 전 막간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 출발해서까지 이어졌다. 이 선생에게 전달할 사항이 생각나서 잊어먹기 전에 전달의 의무를 다하느라 부지런히 손을 놀려야 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간에 출발하는 일행은 그리 많지 않은, 20명 남짓이었다.
도로는 그리 붐비지 않았다. 7월 마지막 주와 8월 초순, 막바지 휴가기간인데다 월말과 월초가 겹친 주일이라서 굉장히 밀릴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수월하게 풀려나간다. 서해안고속을 타고 가면서 백제휴게소라는 곳에서 한 번 쉬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서면 늘 잠시 궁금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서 온 걸까?”
돌아오지 않는, 실없고도 잡다한 생각을 하면서 이글거리는 운무(雲霧)를 쳐다보노라니 차안으로 빨리 들어가 착석하는 것이 상책이라 싶었다. 더위가 맹위를 떨치는데 비해서 차안은 상대적으로 시원하고도 쾌적할 것이기에.
굴비와 먹거리의 고장 영광 법성포
1시 넘어서 드디어 차가 멈췄다. 그곳은 영광군청 앞이었다. 하지만 곧 다시 돌려서 어디론가 향한다. 식당 측에서 나온 길 도우미를 태우기 위해 잠시 주차한 모양이었다. 버스는 다시 주행을 시작하였고 이내 시장입구에 멈춰 섰다. 아취 형 철제 탑 위엔 ‘영광매일시장’이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초장마차’, 우리가 들어간 식당이다. 원탁과 네모 형 식탁 위에 음식이 준비돼 있었다. 반찬은 겉절이, 멸치 볶음, 콩나물무침, 가지나물, 젓갈, 깻잎, 양파초저림에 굴비까지 모두 11가지 반찬에 대구지리 탕이 가스 불 위에서 일행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고픈 김에 모두 맛있게 먹었다. 반찬솜씨가 일품이어서 ‘초장마차집’을 나설 때는 모두 자발적인 인사를 건넸다. 식탁마다 세 네 번씩 반찬을 더 갖다가 먹으며 밥그릇을 싹싹 비울 정도로 만족하게 먹은 한 끼였기 때문이다.
“사장님은 절대미각을 갖고 계신가 봐요!” 갑자기 들이닥친 20명 넘는 손님에 과년한 딸 둘까지 나서서 어머니를 도와 손님맞이를 하는 것이다. 모두 한 미모 하는 집안이었다.
곧 이어서 불갑사로 향했다. “잠시 경내 구경을 하고 오라”는 안내가 떨어지자 어떤 이는 “절 보다는 계곡에 차를 대주지...”하는 주문을 내놨다. 목적은 어디가고 즉석에서 필요에 의한 희망사항을 내뱉은 경우다. 그런데 개념 없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절 구경을 하고 나온 후엔 강연과 대담프로를 몇 시에 어디서 하는 것인지 확인하지 않고 챙기지 않았다. 이 탓에 4시 경에 혼자 떨어져서 미아처럼 잠시 헤매며 “어디들 모여 있냐?‘고 전화를 해야 했다.
그랬다. 김대중 사이버기념관에서 주관하는 행사는 ‘영광 힐링컨벤션타운’이라는 세미나실에서 열리고 있었다. 총 250여 명이 머무를 수 있는 타운은 각각 치유, 힐링, 숲, 자연, 사랑, 에코라는 이름을 갖은 대형 숙박 동(棟) 6개에 식당과 세미나실을 겸한 연수원 1동으로 구성된 곳이다. 영광힐링컨벤션타운은 지난 5월에 양국진 이라는 사람이 개장했다고 한다. 저녁이 되어 에코 동에 들기까지 우리는 그렇게 불갑사로 향했다.
천년고찰 불갑사
절집 구경은 약 1시간 반 동안 계속됐다. 걸음을 떼자 의외라 싶을 정도로 잡상인이 눈에 띄지 않아서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입구가 잘 정비돼 있었다. 유명 절이나 관광지치고 입구에서부터 상가(商街) 거리가 형성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시골 장에 있는 듯이 혼잡하고 어수선한 모습일 거라는 선입견이 다소 빗나갔다.
“이런 곳도 있네!” 싶어서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단아한 매무새를 하고 있는 마님에게 허술한 나를 들킨 것처럼 멋 적은 기분을 수습하고 걸었다. 양옆엔 잔디밭과 풀꽃 밭이 조성돼 있고 그 선을 넘으면 어김없이 녹음 짙은 나무숲이 보였다. 그런 길을 보며 몇 백 미터는 걸었을 거다.
사전 지식하나 없이 온 절일망정 일주문까지만 가면 종합안내도를 통하여 절의 역사에 대해서 알 수 있으려니 했다. 그랬다. 안내판 앞에 서니 산책코스며 법당건물과 각종 산책로로 연결되는 길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더불어 안내도 양 옆에는 어김없이 절의 설립연도와 불갑사의 역사를 집약해서 적시해 놓았다.
불갑사라는 이름의 유래는 불교가 전해진 이후 처음 건립되어 모든 사찰의 으뜸이며 근원이 된다 해서 부처 佛자에 첫째 甲자를 써서 불갑사(佛甲寺)라 지었다고 한다. 고려 말 각진국사가 주석(主席)할 때 수행승이 1천명이나 됐고 본사에 40여동 500여 칸 규모의 가람을 갖추고 산내에는 31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유재란 때 모두 타고 이후 증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불갑사는 호남 서쪽 불교의 흥기를 이룬 터전이어서 불갑사를 불지종가(佛之宗家)라는 명예로운 호칭으로 불리게 됐다. 동에는 불국 서에는 불갑이란 말이 회자됐다 한다.
한참 만에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호랑이상이 보인다. 절 입구에 웬 호랑이상인가 싶었다. 발걸음을 호랑이상 쪽으로 돌렸다. 필시 무슨 이유가 있겠지. 호랑이도 굴속에서 사는가보구나. 굴도 보이게 말이다. 돌계단 전에 안내문이 보인다. 이 호랑이 모형은 1908년 2월 한 농부에 의해 잡힌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일본인 하라구찌가 당시 논 50마지기를 살 수 있는 값을 지불하고 사들여서 동경에 있는 시마쓰지작소에 의뢰하여 박제 표본 한 것이고, 이를 목표 유달초등학교에 기증했던 것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불갑산은 이 고장 산이니, 관계당국에서도 불갑산에서 잡은 호랑이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와 스토리로 다가왔을 것이다. 남한지역에서 잡힌 유일한 호랑이 박제라는 점에서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리라.
경내가 가까워 온다. 보통 절들은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각조 부도상이 있기에 저것도 부도상의 일종인가 하고 다가가니 ‘탑원’이라는 안내판과 함께 간다라 유구들이 조성돼 있었다. 유구란 대지 위해 남긴 인간들의 흔적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라고 한다. 이 유구 조성은 간다라 지방의 대표적인 불교사원인 탁트히바이 사원의 주(主) 탑을 본떠서 건립했다고 한다.
간다라 불상은 우리나라 불상의 원류로 잘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나 중국의 순례 승들이 그 여정의 처음이나 마지막에 접하는 것들이 간다라 불상이며, 인도의 전도승 역시 처음 접하는 것이 간다라지역의 불교와 불상이었다. 하여 간다라 미술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은 지대했기에 이 고장에 처음 불교를 전해준 동진의 마라난타 존자와 연계해서 마라난타 존자의 출생지인 간다라 지방의 탁트히바이 사원의 유구를 본 때 조성한 곳이다.
영광지방 곳곳엔 불교 지명이 유난히 많다. '법성포'라는 지명도 불교와 연관이 있다. 법성포의 백제시대 지명은 '아모포'로서 '마이타불'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라고 한다. 그 후 성인이 성스러운 불법을 들여온 성스러운 포구라는 뜻으로 법성포라 부르게 되었단다.
불갑사, 사천왕상과 대웅전
드디어 사천왕상이다. 사천왕은 호세사왕이라고도 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이다. 어떤 절이든 절 입구에서 유난히 우람하고 정감이 가는 모습으로 반기는 사천왕상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꼬마시절부터 그랬다. 무섭고도 신비한 모습에 오금이 저릴 정도로 희한한 호감을 거둘 수 없었다. 화려한 색깔, 위로 치켜 뜬 눈, 손에 들고 있는 신기한 물건들, 불갑사의 사천왕상은 예술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사천왕상이며 진흥왕 1년인 서기 540년부터 35년까지 연기조사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조선 고종 7년인 1780년 때 설두대사가 폐사된 전북 무장 연기사에서 나무배 4척을 동원하여 현재의 장소로 옮겨왔다고 한다.
천장의 탱화가 고색창연한 포스를 내뿜고 있다. 채색공사를 하지 않았어도 정교하고도 화려한 면모가 보는 이로 하여금 꼼꼼히 들여다보게 하는 흡인력을 갖고 있다. 불갑사 대웅전의 제일 특이한 점은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가 대웅전 정면을 보지 않고 측면에 안치돼 있다는 점일 것이다.
볼거리로 만만찮게 갖고 있다. 대웅전의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3칸인데 지붕은 옆면에서 보면 팔작지붕인데 장식이 특이하다. 지붕 위부분에 작은 석탑과 보리수를 조각한 장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운데 칸 좌우의 기둥 위에는 용머리를 조각해 놓았다. 건물 안쪽의 모서리 공포 부분에도 용머리를 장식하고 있고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몄다. 창살은 연꽃과 국화무늬 장식이다. 대웅전 기와 가운데 18세기 이전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데 건륭 29년(乾隆二十九年)’이라고 쓴 것이 발견되어 조선 영조 40년(1764)에 고친 것으로 짐작한다. 그 뒤 융희 3년(1909)에 수리하였다.
불갑사가 아름답고 기억에 남는 절인 이유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상사화에 얽힌 스토리와 꽃무릇 등 우리의 가슴을 아릿하게 적셔주는 전설 때문이기도 하다. 불갑사를 내려오는 길엔 더위를 식히느라 아이 둘을 데리고 냇물에 발을 담그며 도란도란 자연학습을 하고 있는 아빠와 두 아이의 모습이 보여 유난히 더 정겨웠다. -③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