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의도 ‘김대중 평화공원’...스토리텔링의 보고
<현지르포-③>‘김대중 평화정신’과 ‘하의도 역사’

DJ의 섬 하의도, 목포에서 뱃길로 57.9km라 한다. 돛대.삿대 하나인들 변변했을 리 없었던 오래전이었을 게다. 성능이 보잘 것 없는 작은 배와 바람에 의지하던 풍선(風船)으로 물살을 가르던 시절엔 너 댓 시간이나 족히 걸렸다는 하의도였다.

그렇지만 DJ가 태어난 1924년부터 따져보더라도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속도와 더불어 오늘 날의 해로교통사정은 가히 상전벽해라 할 정도로 발전을 거듭한 생태이다. 요즘 같은 시대엔 목포에서 쾌속선(엔젤호)으로 달리면 1시간 10분 정도요, 일반 차도선(뉴 조양페리)로 바다를 건넌다 해도 2시간 30분이면 너끈히 닿을 수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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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이주와 하의도 생가

세상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과 관련해서는 처연하고도 장엄한 장면 몇 개가 겹쳐온다. 고향을 떠나오던 날의 DJ는 어땠을까. 손때 묻은 가재도구를 싣고, 어린 자식들을 이끌고서 뭍을 향해 가는 DJ모친의 심정은 또 어땠을까. 똑똑하고 영특한 아들의 싹수를 보고 내린 결정이라고는 하지만, 낯선 도시에서의 생활과 사랑하는 아들의 학업을 책임져야할 어머니로서의 얼굴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으리라. “‘대중’이를 위해서라면 ‘뼈마디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겨내리라.”는 결심 하나는 단단했지만 말이다.

모친은 용감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아들은 마침내 큰 꿈을 이룬다. 천로역정이었으나 제 15대 대통령에 오른다. 대한민국 최초로 수평적인 정권교체를 이루었고, 경제난국을 극복했는가 하면, 재임시절 내내 남북의 평화공존시대를 열었다. 그 공로로 김대중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밀려드는 상념을 뒤로 하며 DJ의 집터에 들어섰다. 그 집이 소옥이든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든 획일적인 인상을 주는 곳만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탄생지 안팎에는 대통령의 목포상고 시절부터 시작하여 그의 정치여정을 바라볼 수 있는 사진들이 맞아주었다. 일행은 안채로 들어가 옷매무세를 가다듬었다. 영정사진 앞에서 향을 사르고 열을 맞춰 절을 올렸다. 유난히 숙연한 표정들이다. “좀 웃어요!” 말을 던지며 지인들을 위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방명록에 서명을 했다. “눈물이 솟네요. 생애 처음으로 찾아뵙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후광리에서 대통령님의 정취를 듬뿍 느끼고 갑니다.” “남도 출신이지만 하의도에는 처음 왔습니다. 생각해보니 대통령님의 재직 기간이 제일 평화로운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방명록에 적힌 내용이 제각각이다. 베로니카 씨와 문 선생이 생가 지킴이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혼자 언덕바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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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탈의 표적이 된 간척지

언덕뒤편에는 논.밭이 널려 있었다. 하의도는 강수량이 많은 곳이라 했다. 섬치고는 농수(農水) 걱정이 별로 없는 조건이었던 셈이다. 그래서인지 수탈지가 되는 운명을 거친다. 선조는 정실부인에게서 난 맏딸 정명공주를 홍씨 문중으로 시집보내면서 농지기로 하의3도의 농토 24결을 하사하고 세미(稅米)를 받게 하였다. 후손 4대까지 만이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지역민들이 자체 개간하여 일군 땅까지 합하여 총164결(약 49만9000평)을 수탈지로 삼았던 것, 하의주민들은 장구한 세월 동안 국가와 홍씨 가문에 시달렸다. 이른바 이중과세에 해당하는 일토양세(一土兩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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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이 거셀 수밖에 없었다. 농지반환쟁의 역사가 360년간이나 계속된다. 해결점을 찾았을 때가 1956년이었다. 정부는 하의도 땅을 유상몰수*유상분배의 원칙을 세우고 농민들에게 넘긴다. 간단치 않은 역사였다. 하의도 농민들의 쟁의는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고, 일제 수탈기간을 거쳐 해방을 맞고도 11년이 지나서야 종결을 본다.

하의3도에는 흔히 말해서 두 종류의 밭과 논이 있다고 전해진다. 하나는 곡식을 경작하는 밭이고, 나머지 하나는 소금밭이다. 김대중의 생가 앞은 소금밭이었다. 갯벌로 둘러싸인 섬 속의 섬이라 말하는 곳, 그 옛날, 아주 작은 새끼 섬 하나가 있었는데 이를 없애 염전을 일군 장소가 집 앞이다. 하의도 주민들은 갯벌을 드러난 곳이면 어김없이 달려가 간척지를 만들었다. 쌀은 온갖 물산 중에서도 천하가 알아주는 으뜸물산으로 꼽혔다. 그러기에 “오직 쌀!” 쌀을 낼 수 있는 땅을 소유한 자라야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간척지에 목을 맨 이유다. 피와 땀과 눈물 없이는 소출을 허락하지 않는 야박한 곳 간척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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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러운 건물 ‘유스호스텔’

그러니 간척지 위에 세워진 김대중의 생가 터를 두고 “그 삶이 바다를 메워서 길을 내듯 험했다”며 생가 주변의 평범함과 한가로움을 약간 비틀어 "대통령께서는 혼자만의 힘으로, 혼신의 노력으로 오늘에 이른 것 같습니다." 말씀드렸다던,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 집필가요 언론인인 김택근 씨의 말은 여전히 유효한 말이라 싶다.

올해는 김 대통령 서거 8년째다. 하의도는 DJ의 선양사업지로 부상하고 있다. 전라남도에서는 2009년도에 도비와 지방세 85억여 원을 들여서 ‘노벨평화공원’을 조성하기로 발표하다. 해당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생가 뒤편에 축구장 6개 면적을 확보하고 기념탑과 공원, 노벨평화관을 짓기로 한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약속했던 노벨평화관은 간 데 없고 그 자리에 박준영 전 지사의 지시로 유스호스텔이 세워지는 것으로 끝난다. DJ 서거 8년이 지나도록 개장도 못한 건물이 됐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혈세를 낭비한 면에서는 울어야겠지만 역설적이긴 하지만 본 기자가 바라본 관점에서는 유스호스텔을 개장하지 못한 점은 다행이라 싶다. 건물이 들어앉은 장소는 인체로 치면 생가의 뒷목덜미에 해당하는 곳이고, 좀 과장해서 말하면 뜬금없기 이를 데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유적지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다. ‘노벨평화공원’이라는 알맹이는 사라지고, 허울 좋은 시멘트건물 하나가 주인공 행세를 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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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스토리와 세계의 정원

꽃과 김대중, DJ는 옥살이를 하면서도 꽃을 가꾼 분이다. 1,5평의 독방에서도, 2.3천명의 경찰들이 집 주위를 에워싸며 겁박을 일삼을 때에도 정원을 돌보며 지냈다. 정적들이 목숨을 노릴 때나, 교도소에 갇혔을 때나, 가택연금으로 인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도 꽃과 나무를 통해서 위안을 얻고,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다독였다.
 
그랬다. 그의 일생은 늘 자유를 억압당하고, 공간의 제약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DJ는 남들이 허투루 여기는 자투리 시간에도 ‘정의와 평화와 통일’에의 비전을 구상했으며, 비좁은 공간에서도 이름 없는 꽃들과 대화를 나누며 희망을 선물한 사람이었다. 이는 김대중이 김대중을 치유하는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세상을 향해서 건네는 자유와 평화의 메시지였다. 아무도 김대중의 머릿속 재산은 어쩌지 못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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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김대중 대통령이 죽어서나마 넓고 아름다운 정원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살아서는 생명의 위험을 5번이나 겪고, 6년간의 옥살이에, 55번이나 가택연금을 당하면서도 기어코 도달한 그의 인간승리의 역사만큼이나 찬연하게 빛나는 정원, 춘,하,추,동 철따라 피고지는 귀물다운 꽃들이 가득한 그만의 정원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세계적인 정원 몇을 소개한다. 캐나다의 ‘부차드공원’은 시멘트 공장에 석회석을 공급하던 채굴장이었다. 브라질의 ‘이뇨칭 공원과 야외갤러리’는 폐 광산을 활용하여 조성한 공간이다. 이집트의 ‘아즈하르 공원’은 난개발과 폐기물 매립지로 얼룩진 곳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우주적 사색의 공간’도 사람이 가꾼 독특한 정원이다. 세상은 지금 개발로 인한 자연의 상처를 치유하여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려 기를 쓰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디제이 생가 주변은 ‘유스호스텔’이라는 시멘트 건물이 들어서 뜬금없는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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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오물이 가득하고 해충이 우글거리는 곳을 자랑하지 않는다. 올바른 인간이라면 더럽고 음습하며 악취가 진동하는 흉측한 곳을 내세우진 않는다. 석회석 채굴장이었던 부차드 공원과 폐 광산이었던 이뇨칭 야외미술관이, 이집트의 카이로가 특히나 폐기물 매립지였던 이즈하르공원을 자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놀랍도록 아름다운 힐링 공간이라서가 아니겠는가. 그렇다. 내나라 내 땅에서 자라고 있는 꽃과 식물들이 “이만큼 예쁘고, 이만큼 아름답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김대중에 헌정하는 ‘김대중 평화공원’

DJ의 후예들은 안목을 키우자. 하의도를 넘어서 전국을 아우르는 인식의 폭을 넓히자.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될 수 있다는 원대한 꿈을 갖고 앞을 내다보자. DJ의 생가가 ‘척박한 간척지 위에 자릴 잡았네 마네’만 되 내지 말고 하의도를 다시 보고. 김대중을 제대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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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DJ가 탄생지 뒤편에 유스호스텔을 지어달라던 사람이었던가? 아니다. 치워버려야 한다. 그 자리에 ‘김대중 평화공원’을 조성하자. ‘노벨평화공원’이라고 할 필요도 없다. 노벨은 빼고 그냥 ‘김대중 평화공원’이라고 하면 된다. 대통령을 찾아오는 사람이나 그를 반기는 DJ나 서로 마주보며 꽃 웃음 한 번이나마 크게 웃을 수 있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자.

역발상을 해보자. 지구상에, 온 우주 안에 DJ처럼 사면팔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외딴 섬에 태어난 대통령이 어디에 있는지(...) DJ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스토리텔링이 되는 사람이다. 오직 DJ만이 그처럼 슬프도록 처절하고 아름다운 환경에서 탄생했다. 측은지심이 들 정도로 척박하고 외딴 볼모지에 자란 대통령, 그럴수록 스토리가 넘친다. 그러니 DJ만큼 눈물 날 정도로 서러운 오지에서 갯바람 흩날리는 가운데서 태어난 사람이 또 어디에 있는지 헤아려 보자. 대한민국은 물론 세상 세상 어디에도 9개소의 유인도와 49개소의 무인도로 둘러싸인 섬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은 없을 거다. 재밌는 이야기는 현대 판 ‘권력’이라고 한다. 이처럼 DJ에게는 스토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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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위한 당부

사족 한 가지를 덧붙인다. 평창 올림픽 플라자는 개.폐막식이 끝나면 최소 4개 층이 헐린다고 한다. 1163억원이 공중에 나라가는 턱이다. 인천아시아올림픽에서도 익히 보지 않았나. 수천 억 원대를 들여 지은 경기장들이 쓸모없는 애물단지가 되어 연간 수십억 씩 돈 잡아먹는 하마가 되고 있는 사실 말이다.

85억 원의 세금이 아깝긴 하다. 그렇지만 몇 번 쓰고 허물어버릴 경기장 하나 짓는데도 수천억 씩 허비하는 것에 비하면 85억 원은 조족지혈이라 할 정도로 작은 돈이라 생각하고 털어버려야 한다. 그래서다. ‘하의도 해양테마파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지금껏 개장 한 번도 못해 본 유스호스텔에 대한 미련일랑 정말 버려야 한다. 비워두는 날이 더 많을 것이 뻔한 곳인데 어설프게 개장을 하려했다간 수도세, 전기세, 가스 값, 인건비 등 유지관리비가 더 들어 간다. 그러니 유스호스텔을 아깝다 생각지 말고 과감하게 허물어 버려야 한다.

예컨대 ‘김대중 평화공원’을 조성하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통일에의 꿈이 무지개처럼 빛날 수 있는 ’넓고 아름다운 정원‘을 하의도를 찾는 사람들과 세계인들에게 보여달라. ’360년 하의도의 토지반환투쟁 역사’와 함께 김대중의 스토리를 올바르게 펼쳐야 한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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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30 15:19 2017/11/30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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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탄생지...하의도가 선물하는 비보(裨補)사상 메시지
<현장 르포-②>‘개척자 김대중’의 값진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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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의도는 어떤 곳일까. 기다림 반 설렘 반으로 새벽을 가르며 어둠 속에 섰다. 여객선 터미널로 가기 위해서였다. 선구상이 즐비한 해안로 249번지에 있는 마리나베이호텔을 뒤로 하고 하의도를 향해서 출발하는 시간이었다. 5시 반에 일어나서 행장을 차린 사람은 모두 세 명, 하의도 길을 안내해줄 문화기획가 문철권 씨와 서양화가이자 칠보예술가인 박베로니카 씨다.

섬으로 들어갈 쾌속선은 7시10분에 물살을 가를 것이다. 편도 요금이 2만4천원인데 도서민들의 배 삯은 5천원이라고 했다. 하의도를 일생에 몇 번 찾을까 말까한 여행객과 지역민과의 차이는 배 삯부터 달랐다. 일반 철부선이 좌석 없이 우리네 온돌방 같은 형태로 돼 있다면 쾌속선은 좌석 제였다. 여차하면 꺼내서 착용할 수 있도록 좌석 밑에는 개인 별 구명조끼가 비치돼 있었다. 우리 일행은 창문 쪽에 일렬로 앉았다. 선창 너머로 하얗게 얼굴을 내미는 포말을 대하는 재미를 즐길 수 있으리란 기대감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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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30분도 채 되기 전에 차렷 자세로 앉아 있는 것에 싫증이 난 탓에 모두들 선실 밖으로 나갔다. 바람을 쏘이고 싶어서다. 창 너머로 바라보는 흐릿한 풍광은 직접 바라다보는 수평선만 못했다. 그랬다. 넘실거리는 파도의 하얀 이(齒)를 육안으로 대하고나서야 모두 가슴을 활짝 펴며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변화를 주면 이리도 좋은 것을!” 숨을 크게 쉬며 갯바람 냄새를 맡다가 다시 선실로 들어왔다.

이번엔 촘촘하게 배열된 좌석을 비켜 통로 쪽에 자릴 잡고 앉았다. 간격이 비좁은 객실 의자에 차렷 자세로 앉아 있을 때보다 훨씬 넓고 편했다. 1시간 10분 만에 하의도에 당도했다. 쾌속선 덕분에 운행시간이 반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선실에서 나오자 맨 처음 마주친 것은 하의도 주민들이었다. 뭍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며 서있던 그들의 눈망울에서는 척 봐도 자부심이 묻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대통령을 배출한 고장이라는, 결이 다를지는 몰라도 하의도를 찾는 우리들의 심정도 그들의 자부심에 못지않을 거다. 대통령 ‘김대중’을 중심에 놓고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기리려 대통령을 나은 고장을 찾은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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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착장을 빠져나오자 단단하게 생긴 조형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진남색이 주조를 이뤘지만 빨강색 기둥이 포인트를 주며 떠받치고 있는 여객터미널이었다. 외지인들 중에서는 잠깐이지만 의식을 치르듯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사람이 있다. 처음 와보는 곳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려는 본능에서이리라. 본 기자도 그랬다. 넘실대는 해면을 한눈에 넣을 듯이 눈 운동에 여념이 없었으니까. 7.8월에는 김대중 평화센터에서 단체로 찾는 방문객들로 붐빈다지만, 우린 겨울로 들어서는 초입에 불현 듯 찾은 특별한 경우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뭐 상관없다. 누가 뭐래도 우린 하의도 땅을 밟고 있으니까.

도착시간은 8시 조금 너머였다. “아침밥을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문 선생이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뒤돌아보면 매표소와 바다만 보이는, 생판 낯선 섬마을에 발을 디딘 기분을 조금 더 유지하고 싶은 심리에서다. 앞으로 나아가자니 아는 곳이 없고, 뒤를 돌아보니 바다뿐이었기 때문에 잠시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은 이심전심이었다. 기자는 그 틈을 이용하여 선착장 건물 옥상에 올라 바다 풍경 과 터미널 건물을 행해 셔터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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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있어 “저기 하나로마트가 있다.”면서 베로니카 씨가 앞장서며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캔 커피와 빵 세 개와 ‘초콜릿이 덩어리째’라고 쓰여 있는 비스켓과 맛동산 한 봉지를 샀다. 괜히 그냥 사봤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일 게다. 세끼 식사 외에는 간식이나 군것질을 하는 체질이 아닌 사람들뿐이니까. 실제 문 선생의 경우 신안군 자라도가 고향이라서 “목포에 왔으면 생선매운탕을 먹어야죠.” “하의도에 왔으면 낙지연포탕을 먹어야 제격이지요.”하며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생선요리를 대접하려 애를 쓰는 편이었지, 길에 서서 인스턴트커피나 과자를 쉽게 받아먹는 체질이 아니었다.

문 선생이 콜택시를 불렀다. 일행은 콜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하의중고등학교를 구경했다. 학생 수가 그리 많지 않은, 건물만 댕그랗게 남은 교사였다. 인구가 늘지 않은 탓일 거다. 문 선생이 부르는 소리에 택시에 올랐다. 드디어 하의도 투어가 시작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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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생가 터인 후광리로 차를 몰았다. 그 시간 방문객은 우리가 유일했다. 그래도 생가 지킴이는 일찍 나와 마당을 쓸고 있었다. 반겨주는 모습이 여간 살갑지 않아서 기분 좋은 출발이 시작된 셈이다. 마당에서부터 대통령님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도록 연대별로 사진이 구성돼 있었다. 출입구 왼편에 있는 우물을 잠시 들여다 본 후 초가 지붕으로 눈을 돌렸다. 우리 일행은 중앙 우측 칸으로 들어가서 향을 피우고 절을 했다. 벽면에는 막중한 책임과 함께 영광의 시절이기도 했던 대통령 재임시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세파에 홀로 맞서며 독학으로 쌓아온 알짜 실력과 장례를 넓고 크게 내다보는 혜안으로 국가와 민족에게 ‘평화의 비전’을 제시한 관록이 묻어났다.

생가를 돌아보고 나자 급한 불을 끄고 난 사람처럼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집을 둘러싸고 있는 지형을 살피기 위해 발길을 생가 왼쪽으로 돌아 언덕을 올랐다. 풍수지리가를 흉내 내서 생가 뒤편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죽(竹)은 배산이요. 넘실대는 잔물결과 함께 앞마당 너머에 조성돼 있는 염전을 임수로 보아 이야말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에 자릴 잡았다는 퍼즐 맞추기식 답을 뇌여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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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을 집필한 김택근 씨는 대통령의 생가를 다녀온 소감을 “간척지 위에서 태어난대 다가 간척지 지명인 후광을 아호로 삼았으니, 그 삶이 바다를 메워서 길을 내듯 험했다”고 말한다. 이어 생가 주변의 평범함과 한가로움을 약간 비틀어 "대통령께서는 혼자만의 힘으로, 혼신의 노력으로 오늘에 이른 것 같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보는 관점과 표현 방법에 따라서 차이도 많고 반면교사로 삼아 자기 인생에 적용하는 방식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기자의 관점도 여기서 출발한다. 한 가지 더 우리나라의 풍수지리 사상은 운명론적 관점에서 ‘한 번 정해지면 빼도 박도 못한다.’는 식으로 굴레를 씌우는 학설이 아니다. 팔자소관이나 숙명론에 치여 어쩌지도 못하는 사상이 아니다. 비보(裨補)사상! 이야말로 부족한 것은 메꾸고 채워 삶을 개선하고 발전시켜 승리로 나아가도록 견인하는 생활철학사상이다. 비보사상이란 문자 그대로 ‘도와서 모자라는 것을 채운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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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든 지역사회든 국가사회든 허(虛)한 것은 채우고, 과한 것은 덜어내며 부족한 것은 노력과 실천을 통해서 개선하는 삶의 형태다. 섬마을에서 갯벌을 막아 농토를 만들고 소금밭을 일구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요즘 적폐청산이 한창이다. 국가적으로도 썩은 곳은 도려내고 쌓인 적폐는 청산하는 격이다. 비보사상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자기 앞의 생(生)’을 개척하여 반전시킨 실천의 대가이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무료의무교육을 시킨다. 어린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겠기에 독립적인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위해서다. 그런데 우리네 교육이 지금 자주자립에 기초한 참다운 교육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한들, 해방 이후 지금까지 “교육,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항변한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것이 우리 교육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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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올바르게 살아낸 사람을 표상으로 삼고, 개인과 사회,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도 개척자의 삶을 산 사람을 제대로 찾아서 본받을 수 있는 교육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우리는 제대로 된 참교육이 부족하고 우러러 닮고 싶은 진실한 표상이 절실하다. 속담에 ‘큰 부자는 하늘이 내고, 작은 부자는 동에가 낸다.’는 말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야말로 이 두 가지 사실에 부합하는 삶을 살았다 할만하다.

검증해보자. 대통령의 생가 터는 그리 넓지 않았다. 김대중 생가에서 바라본 정면 내지 좌우 면은 바다라서 간척지와 염전을 일군 길목 언덕 아래에 질박하게 자리를 잡은 모양새다. 선생의 가족은 경작지도 염전도 그 어떤 땅뙈기 없는 형편이었다. 대통령의 모친은 그야말로 반찬솜씨와 노동력을 밑천 삼아 밥집을 경영하여 자식들을 건사한 억척스런 여인네였다. 당시 화염으로나마 소금을 만들러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며 대통령의 모친은 밥집을 경영한 1인 창직자(創職者)자가 되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의 모친은 목포 이주를 단행한다. 하의도의 섬 소년이 후광리 좁은 바닥에서 탈출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길을 향한 첫걸음은 모친의 도움으로 결정되었던 셈이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은 모친의 결단에 경의를 표하며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하지만 모친의 목포이주 결정 이후 김대중은 홀로 뼈를 깎는 노력과 도전으로 정치기로서 일가를 이룬다. 끊임없는 노력과 담금질로 선박회사 사장과 신문사 사장에 이어 국회의원이 된다. 이어 제 15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고, 세계적으로는 아시아 최초로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된다.

더할 것도 없는 인생이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동네부자도 되고 하늘이 낸다는 세상이 알아주는 부자, 나아가서는 세계가 알아주는 부자도 된 셈이다. 김대중이 발신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노력하고 개척하라. 그리하여 자기 실력으로 선구적인 비전을 제시하라!

*글쓴이/박정례 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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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2 22:07 2017/11/22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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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적 도(島) 행정의 완결은 ‘천도천색 날갯짓으로’
-‘신안군의 새로운 역사’ 안좌.자라 도교 완공 눈앞에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선임기자]= 큰맘 먹고 나선 하의도 길이었다. 그 도중에 자라도에 들렸다.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건만 대중교통이 발달하고 전동차 연결망이 끝내주는 서울에서만 살다가 섬을 향해서 가자니 막상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문화 기획가 문철권 씨가 동행해줬다. 수월한 출발인 셈이다. 문 선생이 내건 조건은 단 하나 “자라도에서 일을 본 후에 하의도로 넘어가야한다.”는 것, 본 기자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왕에 나선 하의도 답사 길인지라 뜻하지 않게 남도의 섬 한 곳을 더 둘러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었다. 문 선생의 볼일이라는 것이 ‘망화산 둘레길’과 전망대 조성에 관해서 지역주민들에게 자문해주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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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신안군수(고길호 군수)가 지역 순회를 하는 터라서 주민들은 민원사항을 모아 전달하는 기회를 살리느라 여념이 없었고, 대처에 나가 사는 문화 기획가인 문 선생은 고향 발전에 일조를 할 겸 고향 땅을 모처럼 밟는 모양새였다. 참고로 자라도는 문씨 집성촌이라고 했다.

아침 5시 50분배에 올랐다. 자라도 도착은 여객선 조양호가 목포를 출발한지 1시간 반 남짓 만이었다. 문 선생의 7촌 작은 아버지인 문인옥 씨의 주선으로 마을회관에서 아침을 먹었다. 일행은 곧 완공을 앞둔 안좌.자라 간 도교를 향해 출발했다. 섬마을의 유용한 교통수단은 마을 공용버스라 적혀있는 봉고차였다. 현지인은 무료, 타지인은 1천원의 요금을 내는 식이고, 운전기사의 봉사료는 1년 단위로 수고비 약간을 챙겨주는 것으로 가름하고 있다는 귀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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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좌.자라 도교 공사 현장에는 신안군 장산면 출신의 군의원 장미라 씨, 전 자라도 면장 최철재 씨, 신안군 발전위원인 김이현 씨 그리고 문 선생과 문인옥 씨와 본 기자가 탑승했다. 일행의 도교(渡橋) 현장 확인은 11시 30분에 자라도를 찾을 신안군수 일행이 도착하기 전에 민원사항을 차질 없이 전달하기 위한 사전 조사의 성격이 짙었다. 안좌.자라 도교가 완공돼야 목포에서 하의도까지 차로 달리는 시대가 빨리 열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야 다리는 또 자라에서 장산까지 이어지고, 다음 순서로 장산에서 하의도까지 이어질 판이다. 장산에서 하의도까지는 바닷길이 멀어서 2km에 이르는 마지막 공사요 난코스가 될 거라는 전언이다.

주민들의 시간관념은 정확했다. 면사무소를 들려서 잠시 환담을 나누는가 싶었는데 어느 덧 선착장으로 몰리는 모습이다. 모두 신안군 전용 행정선의 도착을 기다리는 사람일 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순식간에 면장이며 이장이며 보건소 직원에 다수의 마을 주민들까지 눈에 띄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조금씩은 들떠있는 표정이었다. 당연한 일인지 몰랐다. 자신들의 삶과 마을 발전에 도움이 돼줄 사람들의 방문이니 얼굴 표정이 저절로 밝아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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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쾌청하고 바람은 부드러웠다. 비소식과 추위소식을 전하던 일기예보도 빗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훈풍이 감돌고 유난히 평화로운 기운이 잔잔한 물결과 함께 소근 대고 있었다. “우리가 복 받았나 보요”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던 주민 한 사람이 정색을 하고 던지는 말소리가 귓가에 스치는 가운데 공용건물인 마을회관에 모두 자리를 잡았다. 고길호 군수를 위시해서 같이 온 공무원들의 일정은 마냥 느슨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속도감 있게 마을 사람들의 질문과 요구가 이어지고 이에 맞춰 고 군수의 대답이 시작됐다.

큰 문제는 선착장 구획 77m의 도로 포장 건과 주차장 도장, 안좌.자라간 연도(連島) 상황과 식수문제, 이어 망화산 둘레길 조성과 전망대 설치문제, 더해서 도로변 폐가(廢家) 우선 정리 사업에 관해서다. 고길호 군수가 전체적인 맥락을 짚고, 각론으로 가서는 신안군청 소속 도서개발과장과 복지과장이 돌아가며 민원처리 결과를 전하고, 새롭게 접수되는 사항 등을 챙기는 순서였다. 장미라 군의원도 섬 주민들, 특히 어르신들의 의견을 받아서 비오는 날엔 회관에서 마당에 있는 화장실까지 오가려면 비 맞는 일이 빈번하여 힘드니 가림 막을 해달라는 민원을 전달하느라 발언기회를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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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문즉답 식의 주민간담회였다. 흥미로웠다. 서울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남도의 작은 섬 끝자락에서 바라보는 군행정의 현장을 관찰자의 시점에서 목격하는 순간 말이다. 군수 이하 군청직원들의 대답은 에둘러 말하거나 회피하지 않아서 인상적이었다. 먼저 고길호 군수가 전체를 짚어 말하고 담당과장들이 군수의 말을 받아 확인해주는 식이다.

“신안군의 섬은 총 1095개이다. 이중 유인도가 76개인데 일찍이 천도천색이라는 행정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사람으로서 주민들께 부탁할 일이 있다.”며 운을 뗐다. 고 군수는 이어 “어떤 일이든 단발성 민원으로 제기하면 일의 효과도 반감되고 예산낭비가 이중 삼중일 수가 있다. 민원 하나를 제기하더라도 유관한 것들은 놓치지 말고 종합적으로 모아서 해 달라.” 부탁 아닌 부탁인 셈이다. 금방 마무리한 곳을 얼마 안 있어 또 파헤치는 경우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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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좌.자라 연도는 연말까지 사람 통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완전개통은 내년 봄쯤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상수도 시설은 80억을 들여서 2군데 증설할 것이고, 자라도 주민들이 망화도 둘레길을 조성하고 싶은 뜻을 갖고 있다면 그 전에 도로변 폐가정리며 환경정비에 힘써달라는 점도 짚으며 나갔다. 그러면서 “얼굴이 더러운 사람이 화장만 한다고 예쁘게 보일 리 없다. 마찬가지로 흉물스러운 도로 변 폐가(廢家) 정리부터 깨끗이 해야 아름다운 섬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슬레이트 지붕 철거의 당위성으로는 암 유발물질인 석면제거는 건강과 환경을 위해서라도 시급하다는 점에서 군은 30만원 씩 지원하고 있다는 점을 주지시켰다.

고 군수는 또한 풍랑을 만나 청산도에서 3일 동안 지냈던 경험을 회상하며 “청산도가 평범해보였지만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유는, 섬 전체가 온통 유채꽃으로 뒤덮인 점이 아닌가?”라며 자라도도 “수령 300년 이상 된 동백나무 군락지를 살려서 망화산 힐링로를 조성할 의향이 있다면 주민들이 먼저 뜻을 모아 참신한 계획을 내달라.”고 다시 한 번 강조를 하는 대목에서는 행정가로서의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주민 참여를 이끌어내야 마을재정사업이든 환경정비든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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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특색을 지닌 고유의 색깔을 가진 고장으로 발전하기 위해서 2억, 1억, 5천만 원의 상금을 내걸고 주민사업을 공모하고 있는데 제대로 역량을 보여주는 마을은 좀 더 큰 사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획기적인 지원계획도 갖고 있음을 밝혔다. 그렇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발로 뛰고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 마을재정사업이든 힐링공간 만들기든 해당주민들의 자발적인 의지가 보태져야 성공한다. 직접민주주의 시대를 맞아 주민들은 발언권이 세진 틈을 타서 요구만 하고 의무는 소홀히 한다면 좌우로 날아야 할 새가 한쪽 날개만 있는 격이다. 이런 새의 날갯짓은 온전할 리 없고 순식간에 추락할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안좌.자라 도교 완공을 눈앞에 둔 마당이다. 천도천색의 신안군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주고받기에 여념이 없는 관계자들의 몸부림, 이를 지켜보는 기자의 눈에서도 덩달아 열기를 내뿜었다. 남녘의 섬마을에서 해해연년 색깔 있는 이야기가 들려오길 기대한다.

*글쓴이/박정례 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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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0 11:22 2017/11/20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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