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군중 속을 헤치며 거리를 지난다. 그 순간마다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은 어제 누군가 원하는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다채로운 거리 풍경이며 백인백색의 개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발길이 오늘도 분주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따뜻한 나눔'과 헌혈 

지하철에서 빠져나와 명동으로 진입했다. 곧장 걸어가면 예술극장에 맞닿는 큰길이다. 하지만 조금 걷다가 우회전을 해서 좁은 길로 들어섰다. 여기서 헌혈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나눔이 탈을 쓴 홍보맨’을 만났다. 헌혈, 아 그래. 헌혈을 아주 많이 하던 한 청년이 있었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그들을 위해서 격려문을 쓴 적이 있었다. 제목은 <1등 넌 죽었다!>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자라고 있는 중이므로 장래의 꿈이 꼭 하나일 필요는 없다.”고 가르쳤다. “공부는 왜 하니?” 묻고, 살기 위해서라고 답하면서 공부가 너무 힘들고 싫어서 억지로 했다가는 그것은 사는 게 아니라고 말해줬다.

그러니까 얘들아 우린 어른이 되기 전에 등산도 가고 동아리 활동도 해보고 연극도 가고 시도 써보고 헌혈도 해봐야해. 어떤 형은 헌혈을 하고 받은 문화상품권으로 책도 사보고 영화도 간단다. 헌혈을 하면 건강에 좋다는데 벌벌 떠느라 헌혈 한 번 못 해본 친구도 많지? 하고 말했다. 헌혈에 열심이던 그 고교생이 떠올랐다.

명동 한복판에 헌혈센터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친김에 4층 헌혈센터로 들어갔다. 거리에서 홍보를 하고 있는 사람하고는 자세한 얘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명동센터는 대한적십자사 ‘헌혈관리본부’에서 운영하는 분점 격이었다. 그런데 센터에서 뭘 물어보기란 쉽지 않았다. 동사무소나 시청 같이 개방된 공간이라면 모를까 헌혈센터라는 곳이 대중을 상대로 하되 그리 대중적인 기관이 아니고 보니 그랬다. 불친절과 무지와 편협성이 느껴지는, 그래서 자칫 헌혈차 센터를 방문하는 사람들이건 헌혈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방문하는 사람이건 간에 조금은 껄끄러운 기분을 느끼기에 십상이었다. 이런 인상은 노란조끼를 입은 봉사자와 무관하지 않다. 우선 기자 신분을 밝히면서 몇 가지 질문을 해도 괜찮겠느냐고 했다.

“곰살맞게 대답해줬냐고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입에 붙은 말이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럼 안내문이라도 한 장 달라니까 그런 것도 없단다. 아무렴 그럴라고? 영락없이 그렇다. “그럼 헌혈에 관련해서 물어볼 만한 곳은 어디입니까?”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제야 칸막이 너머에서 혈액원으로 전화를 걸어 운영 팀에게 알아봐야 한다면서 전화 번호 하나를 적어준다. 02-6711-0152번, 염창동 에 있는 서부혈액원사업 번호라 했다. 사업을 시행하고 있는 바로 그 현장에서조차도 단 한마디의 질문도 못하고 뺑뺑이 돌림을 당한 것이다. 별별스런 비밀을 캐는 것도 아니고, 질문해봤자 하루에 몇 사람 정도가 이 명동센터에서 헌혈을 하고 있으며, 연령층은 누군가, 정도일 텐데 모른다는 답뿐이니 잠시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답답하고 더울 텐데 ‘나눔이 탈’을 쓰고 거리에서 헌혈을 독려하느라 애쓰고 있는 모습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에 겨워 호감을 가지고 방문한 방문자의 선의가 비 호감으로 변하기 일보 직전이다.

헌혈에 관한 흥미 있는 사실 그리고 인터뷰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뭐, 지금 현재도 목숨이 경각에 달려서 ‘타는 목마름’으로 수혈을 기다리는 환자와 그 가족들을 위해, 선의의 헌혈자 그리고 원만한 채혈을 위해 불철주야 열심히 근무하는 관계자들의 수고를 위해 “난 기어코 취재를 하고 말거야!” 다짐하면서 전화를 돌렸다.

명동센터에서의 헌혈자는 지난 달 4월 기준으로 하루 평균 43명 정도라고 한다. 제일 많이 헌혈자가 있었던 때는 52회가 최고기록이고 이를 합해서 월평균을 내보니 43회이고. 참고로 서울시 전역에서 헌혈이 제일 많이 이루어지는 곳은 2호선의 구로디지털단지 역으로서 하루 평균 80명 정도다. 명동이나 구로동 쪽이나 사람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드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각기 특징이 있다. 명동은 외국인들이 많아서 헌혈이 원활치 않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헌혈을 하기 위해서는 국내에서 1년 이상을 머물러야 자격이 주어지거든요.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이어야 하고요.” 혈액원에서만 19년째를 근무하고 있다는 홍윤정 과장(43)의 말이다.

명동센터에서는 올 2월부터 매달 13일을 ‘헌혈자의 날’로 정하고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 나눔이 탈을 쓴 봉사자가 행인들을 상대로 ‘따뜻한 포옹’이라는 콘셉트로 프리허그를 벌이는 것이다. 시간은 오후 4시에서 6시까지 두 시간 동안 진행한다고 한다.

헌혈도 계절을 탄다. 학생들이 방학을 할 때나 시험기간 중에는 헌혈자가 일시적으로 감소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수혈을 자급자족하는 편이나 알부민이나 혈장은 일부 수입을 하기도 한다. 그 시기가 학생들의 방학과 겹치는 때라고 하니 재밌는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헌혈을 제일 많이 하는 층은 알려진 대로 젊은 층이라는 얘기다. 헌데 명동센터에서만은 30~40대가 헌혈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젊은 층들은 자신의 학교나 대학가에서 많이 머물지만 명동을 찾는 사람들은 학교생활을 막 벗어난 사회인이나 학업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임을 추측할 수 있다.

-혈액센터가 활동하는 시간은? 오전 10시에서 오후 8시다. 그래서 종사자들의 출근 패턴이 둘로 나뉘어 오전 10시에 출근하는 팀과 12시 출근으로 나뉘어 평균적으로 하루 평균 3.5명이 상주하면서 근무를 한다. 어떤 팀에 속하든 하루 8시간 근무는 마찬가지다. 이들 모두 전문적인 업무 수행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병원에 비해서 이직률이 어떤가? 홍윤정 과장이 답변을 계속했다. “일반 병원에 근무하는 사람들에 비해서 저희는 이직률이 적은 편입니다. 그 이유는 “병이 들어서 병원을 찾는 경우와는 다르기 때문일 거예요. 센터를 찾는 사람들은 자기 피를 나누면서까지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희 근무자들도 헌혈자들에게서 좋은 기운을 받는 것이지요.”하고 대답했다.

-헌혈센터 일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은? “캠페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찾아오는 헌혈자들입니다. 그런 분들은 자신의 피를 보태는 것을 비롯해서 혹시나 헌혈증을 기증받을까 싶어서죠. 가족이 뜻하지 않게 사고를 당했거나 장기적으로 피를 투여 받아야만 하는 어려운 처지에 속해 있는 분입니다.”

맺으며

피는 우리 몸에 각종 영양소와 산소를 공급해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가 외국으로부터 혈액을 수입하지 않고 자급자족하려면 연간 300만 명 이상의 헌혈자가 헌혈에 참여해야 한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일지라도 뜻하지 않게 수혈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될지 모른다, 건강할 때 헌혈을 해서 수혈이 필요할 때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무료로 되받을 수 있는 제도다. 우리 몸에서 피가 차지하는 비율은 남자의 경우 체중의 약 8%, 여자는 7% 가량 된다. 출혈이 심하면 인간은 누구나 생명이 위험하다. 피가 충분해야 하는 이유다.

피가 빨강색인 이유는 뭘까? 신이 우릴 그렇게 창조해서일 거다. 인류애를 실천하는 진정한 행위는 무엇일까. 바로 헌혈이 아닌가 싶다.. 피를 나눈 형제란 그 누군인가. 헌혈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박정례/기자, 르포작가, 칼럼니스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4/05/25 18:13 2014/05/25 18:13
태그 :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8434pjr/trackback/169

명동에서의 단상, 거리를 보면 시대의 트렌드가 보인다

                                          -거리는 사람을 부르고 이야기를 피워낸다

 

 [브레이크뉴스 박정례기자]= 명동에 있는 직장에 다니다 보니 명동거리에서 보고 듣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교통수단에 따라서 유입되는 행인들의 모습과 화장품과 패션과 음식 트렌드 등 명동이기 때문에 보고 듣는 것과 보이고 들리는 것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선 거리 모습이다. 전에는 사람들이 명동으로 진입할 때 제일 선호하는 길로 롯데백화점 쪽을 꼽았다. 그리고 충무로 쪽에서 명동성당을 바라보며 들어가는 약간의 경사진 길이 유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롯데백화점 측 입장에서 보면 한숨이 나올 정도로 명동을 방문하는 행인들의 발길이 빈번하게 닿는 길은 지하철 4호선이 멈추는 퇴계로 쪽과 2호선이 닿는 을지로 1가역이라고 한다. 대중교통과 도로사정에 의해서 광광객의 유입경로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서 상권의 판도가 확연히 차이가 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롯데 쪽은 크게 변할 것 같지는 않고 잘 하면 명동성당 쪽에서 들어오는 길은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조짐이 보인다. 왜냐하면 지난 몇 년 동안 명동성당은 재개발의 기치를 걸고 허구한 날 주변에 소음을 유발하는 근원지였다. 망치 뚜닥거리는 소리와 건축자재를 운반하는 덤프트럭이 넘나드는 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땅을 파고 땅을 다지는 포크레인과 쇠기둥에서 쿵쾅거리며 쏟아내는 소음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다 못해서 사람이 미칠 지경이었다. 더하여 성당 입구에는 산성 같이 높은 보호막이 쌓여 있어서 그 앞을 지나노라면 답답해서 고개가 절로 돌아갈 뿐이었다. 무엇인들 그렇지 않을까 마는, 소리와 냄새는 특히 위로 올라가는 성질을 갖고 있다고 한다. 딱 그랬다.

필자가 머무는 사무실은 14층에 있어서 하루 온종일 명동성당 쪽에서 뚜닥거리는 건축소음 때문에 사람이 그만 미칠 지경이었다. 더구나 긴긴 여름 한 철을 자나다 보면 귀도 지치고 사람도 지쳐서 인내심이 그만 바닥날 지경이었다. 어느 날엔가 회사 대표는 견디다 못해서 성당 쪽에 항의 전화를 걸기조차 했다. ‘우린 거룩한 종교기관이니까!’하는 생각일랑 언감생심 가당치 않다. 푸념이 길었다.

반가운 소식일지 모른다. 그런 명동성당이 재개발 공사를 곧 끝낼 모양이다. 어떤 모습으로 그 위용을 드러낼지는 8월 15일 경에 가보면 알겠지만 하여튼 공사로 인한 소음이 멈추고 철벽 같이 높기만 하던 흉물스런 보호막을 걷어내고 새 모습을 보인다고 하니 반갑기 그지 없다. 그동안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다른 구획과는 게임도 안 되게 한산하고 별 볼일 없어 보이던 명동성당 앞쪽도 이제는 쨍하고 볕이 들게 생겼다. 성당 앞에는 어느 결에 스타벅스가 자릴 잡고 앉았다. 해서 가보니 벌써부터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시 거리 이야기다. 거리가 한창 붐빈다.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를 누비다 보면 각국의 언어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4년 전 일본에 후쿠시마 원전사태가 났을 때는 명동을 찾는 외국인 중에 일본인이 제일 많았다. 필자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지금 도피심리가 자리 잡고 있구나!”하는 심증과 함께 “명동거리가 일본인들로 미어터질 것 같았구나!”하고 나도 모르게 내뱉고 있었다. 이를 보면서 잠깐이나마 상대적으로 안전한 내 나라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가 하는 감상에 빠져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명동은 그때에 비해서 사람들의 조밀도가 약간은 떨어지고 중국과 말레시아 인도네시아 쪽 관광객 수가 두드러지게 많아졌다. 그래서 그런지 로드매장 마다 중국어를 외칠 수 있는 점원을 배치하여 손님을 끌어들이기에 고심하고 있다. 시대의 변화와 국제 정세가 꼭 그렇게 굴러갈 수밖에 없는 동인(動因)은 무엇일까. 무슨 이유에서 우리나라를 찾는 방문객들의 색깔이 달라지는지 히잡을 쓴 이슬람 권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지 그 원인과 결과 치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15대 대통령인 고 김대중 대통령은 “관광산업은 굴뚝 없는 산업이다.”라고 일찍이 설파했었다. 거러면서 관광한국의 입지를 세워야 잘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관광산업은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사업일 수밖에 없는데 한 나라의 지도자라면 당연히 이러한 비전을 제시하는 선견지명이 있어야 한다.

따져보면 그렇다. 관광 사업은,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지하막장에서나 행하는 채굴사업도 아니고, 소모품처럼 매번 원료가 재투입되고 자본이 드는 사업도 아니다. 그러니 있는 것을 까먹을 필요도 없고 손 털고 파산할 일도 없다. 그저 조상이 물려준 유적지나 사적지 혹은 아름다운 풍광과 문화를 잘 보존하고 관리 발전하여 보이고 느끼고 체험하게 하는 것만으로 이윤과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화수분이다. 환경훼손도, 공해 유발도, 대단위 위험도 없다. 사람에게 즐거움과 휴식을 선사하여 생활에 필요한 활력과 에너지를 제공한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우리나라가 됐으면 좋겠다. 명동은 워낙이 상업지구로 유명한 곳이니만큼 인사동과는 달리 소비품목이 주를 이뤄도 상관없을 것 같다. ‘옛말에 눈치가 빠르면 절간에서도 새우젓을 얻어먹는다.’고 했다. 거리를 메우는 커다란 물결에 주목하자. 그것에 담긴 뜻을 읽어내는 안목과 센스는 시대의 트렌드로 직결될 것이다. 명동을 보자.

 박정례/ 기자,.르포작가, 칼럼니스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4/05/25 16:13 2014/05/25 16:13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8434pjr/trackback/168

르포, 生生현장 5.18 광주 그 뜨거운 도시-5

-                [생생한 르포] 자유공원, ‘5.18을 체험하는’ 대학생들! -5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5.18자유공원이다. 이곳 역시 상무대가 옮겨간 신도심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규모는 33058제곱평방미터, 당시 신군부에 의해 끌려가서 구타와 구금을 당하고 재판받고 수감되던 군사법정과 영창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고 재현한 곳이었다. 오직 민주화! 이를 위하여 드높은 이상을 외치며 젊음의 뜨거운 열정을 불사르던 장소다. 그 항거는 인권, 평화, 화합의 상징으로서 기억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당시 폭압을 몸소 겪었던 민주열사들이 군복을 입고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맞이하며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과 신군부들이 자행한 만행을 전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60대를 훨씬 넘은 듯한 노병들이었다.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그 날의 함성과 그 날의 항거를 잊지 말기를 염원하면서.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다. 예나 지금이나 피 끓는 영원한 청춘이기에. 민주열사이기에 “여러 분 저는 당시에 전남 도청에 있었던 시민군이었습니다!” 드넓은 운동장에는 80명 혹은 100여 명 씩 무리를 이룬 학생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그날의 함성을 전해 듣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들불열사기념비에 쪽에 있는 학생들에게 물었다. 자신들은 충남대생으로서 충남대 동아리 연합회에서 ‘5.18광주항쟁기념식’에 단체로 참석한 학생들이라고 했다. 참석인원은 100명가량이라고 한다. 군사 법정 쪽으로 가니 거기도 학생들이 있었다. 눈을 들어보니 비슷한 젊은이들이 줄줄이 또 줄줄이 단체로 찾아들고 있었다. 깃발을 치켜 올리고 있는 학생들은 서울시 전역에서 모집돼 온 ‘평화나비’라는 역사동아리에 소속된 학생들이었다. 그랬다. 그들은 하얀 깃발을 펄럭이며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면서 자유공원 안쪽 깊숙이 들어오고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가자던 뜨거운 맹세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박정례/ 기자, 르포작가, 칼럼니스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4/05/23 17:27 2014/05/23 17:27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8434pjr/trackback/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