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황토현, 120년 전 관군에 맞서 승리한 동학농민운동의 전적지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맞서 분연히 일으킨 농민혁명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너희가 전쟁을 아느냐? 그것도 진짜 전쟁을. 하고 묻는다면 혹자는 뭐라 대답할까. 사람에 따라서 대답하는 내용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관점이 다르고 생각하는 틀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 다르다. 국가도 그렇다. 그러나 현대는 분명히 말하지만 “역사 전쟁이다.” ‘역사를 잃은 민족을 혼을 잃은 민족’이기에 우리는 현재의 거울인 역사를 들여다보고 한시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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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다. 열흘 가는 꽃 없듯이 시간 앞에 영원한 권력이란 없다. 역사상 가장 넓은 대제국을 건설했던 로마제국도 몽고제국도 지금은 한 낱 건축물이나 유물 같은 얼마 남지 않은 흔적들로 그 실재를 증명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없는 민초들의 삶은 무엇으로 찾아야 할까. 찬란한 문화재를 만들었지만 그것을 함께 누리지 못했던 민중들의 저항은 어디서 그 흔적을 찾아야 할까? 만감에 젖어 갑오농민전쟁의 흔적을 더듬어 본다.

1894년 농민 전쟁은 조선 말 외세를 물리치고 압정에 저항하여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려 한 민중 항쟁이고, 봉건적 신분제를 철폐하여 민중이 사회의 주인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고자 하는 혁명 운동이었다.

그러나 농민군이 집결했던 곳,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졌던 황토현, 이런 곳엔 애초부터 무슨 볼만한 유적이 남아있을 리 없다. 다만 그들이 밟았던 땅에 발 딛고, 그들이 바라보던 들판을 바라보며 어떤 마음으로 흙과 삽과 괭이를 버리고 죽창을 들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목숨을 걸었는지를 떠올려 볼 뿐이다.

동학유적지 황토현(黃土峴)은 글자 그대로 황토로 덮인 작은 언덕이다. 이곳은 태인에서 고부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던 곳으로 해발고도 35.5m의 야트막한 고개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라북도 정읍시 덕산면 하학리에 있는데 전에는 ‘진등’이라고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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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은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못 이겨 봉기하여 이듬해 정월에는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전봉준의 지휘 아래 무기고(武器庫)를 파괴하고 무기를 빼앗았고, 수세곡(水稅穀)을 창고에서 꺼내어 원래의 주인들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萬石洑)를 파괴하였다.

전봉준은 마항 장터에 장막을 치고 사태를 엿보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정부는 조병갑을 체포하고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아 사태를 조사케 하였다. 그러나 이용태는 일체의 잘못을 동학농민군에게 전가하고 탄압하니 전봉준을 중심한 동학군은 격분하여 인근의 접주(接主)들에게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保國安民)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선언하였다.

처음에는 고부읍 북쪽의 백산을 점령하였다. 이때 수만 명이 모여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는데 그는 강령(綱領)을 선포하고 격문을 사방에 띄워 호응을 얻었다. 이어 전봉준은 부안관아를 점령하고 다시 돌아와 도교산에 진을 치고 기다렸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부안이 점거 당했다는 소식에 급히 별초군 250명과 많은 보부상(褓負商)을 이끌고 동학군을 토벌하러 나섰다.

동학군(東學軍)에서는 4월 6일(5월 10일) 어둠을 틈타 보부상을 가장하여 황토현(黃土峴)에 있는 관군을 살피고, 관군이 깊은 잠에 빠진 이튿날 이른 새벽에 군대를 둘로 나누어 편성한 후, 일대는 서쪽과 남쪽의 정면에서 들이치고, 또 하나의 대오는 동북쪽의 뒤쪽에서 기습을 감행하였다.

이 전투에서 수백 명의 관군(官軍)은 목숨을 잃고, 많은 무기와 곡식의 손실을 보게 되었다. 반면에 동학혁명군은 황토현의 승리로 사기가 하늘에 닿을 듯 높아져, 그날로 정읍을 점령하고 죄 없이 갇힌 죄수들을 석방하고, 무기도 탈취하였다. 5월 12일에는 흥덕과 고창, 무장을 석권하고, 이곳에서 동학군이 봉기한 취지를 재천명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황토현은 처음에 전라북도 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되었는데 1981년 12월 10일에 사적 제 295호로 격상되어 성역화사업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기념관 40평을 비롯하여 3월의 백산봉기, 전주집강소, 9월의 삼례 봉기, 우금치전투 외 유품자료 등을 비치하였다. 그 바로 옆에는 높이 2.7 m 좌대 3.7m의 전봉장군의 동상이 서있다.

우리나라는 4대강국에 들러 싸여 예나 지금이나 결코 순탄한 세월을 살지 못하고 있다. 역사문제에서도 그렇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하기에 우리역사의 보존과 바로 알기에 기울여야 하는 지난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역사를 모르는 자, 역사에 휩쓸려 가리라!’ ‘역사를 잃은 민족은 혼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 이기에 우리 역사를 바로 알고 지키려는 정신으로 우리 역사를 잘 보존하고 지켜나가야겠다.

정녕 그렇다. 뿌리 없는 생명은 없다. 뿌리는 생명의 근거이자 삶의 원천이다. 역사는 민족의 뿌리를 말해준다. 우리역사의 뿌리를 튼튼히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동학농민전적지인 황토현과 고부관아와 만석보를 둘러보면서 새삼스럽게 그날의 정신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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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3 09:19 2014/07/03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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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고양이 다락방이 뭐냐구요?

    -명동에서 홍대에서 다양하게 성업 중인 캐릭터 카페들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요즘 특이한 카페가 많다지요? 고양이 카페도 그중 하나랍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고객을 타깃으로 영업하는 곳인 데요 어느 덧 명동과 홍대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지역에서부터 하나 들 고양이 카페가 생겨났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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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각양각색의 특이한 모습의 고양이가 무리를 지어 야옹거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느 녀석은 천연덕스럽게 손님의 무릎에 안겨있습니다. 아무리 굴러도 넘어지지 않는 오뚝이 바구니에 걸터앉아서 장난을 치고 있는 장난꾸러기, 한가하게 낮잠을 즐기는 녀석, 동그란 눈을 뜨고 남의 턱밑에서 눈을 굴리며 호기심 가득한 낯빛을 하고 있는 녀석도 보입니다.

 

명동에 나가면 이런 특이한 콘셉트의 카페를 홍보하기 위해 나온 캐릭터맨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답니다. 오늘도 그런 홍보맨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저 멀리서 뭐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좀 더 다가가면 알게 되겠지요. 와우 특이하네! ‘춤추는 고양이?’ 보기에 훨씬 좋다. 답답하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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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고양이 캐릭터 옷을 입은 홍보맨이 춤을 추고 있네요. 그동안에는 노랑 탈을 뒤집어 쓴 홍보맨이 길 한가운데 표지 석을 세워놓고 서 있는 것이 전부였어요. 그런데 이번엔 다른 경쟁업소에서 나왔나 봅니다. 검은 고양이 복장을 한 젊은이가 날렵한 몸짓을 해가며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면서 그냥 갈 수 있나요. 다가가서 말을 붙여 봤지요. 학생의 나이는 21살, 유근이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간은 낮 1시 반에서부터 저녁 7시 반이고 시급 6300원을 받고 일한답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 멀리 부천에서부터 왔다고 하네요. 

청년이 두른 어깨띠에는 ‘고양이 다락방’이라는 이름이 보입니다. 고등학교에서 광고디자인을 공부했답니다. 괜찮지 않나요? 춤추는 거리의 청년에게 말을 건네는 브레이크뉴스의 기자 모습, 상상해보십시오. 재밌잖아요. 무더운 여름에 시원스럽게 내리는 죽비처럼 신선한 만남입니다.
 
그래요. 영겁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만난 시간은 아주아주 짧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죠, 그러나 우린 그렇게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눴답니다. "안녕, 또 만나요." "네, 저희 카페에도 꼭 한 번 들려주세요!" 청년과 헤어지면서 청년의 핸드폰에 문자를 날렸습니다. 필자가 알고 있는 시 한편이지요. 

"안녕, 또 만나요." " 네, 저희 카페에도 꼭 한 번 들려주세요!" 청년과 헤어지면서 청년의 핸드폰에 문자를 날렸습니다. 필자가 알고 있는 시 한편이지요.

 

봄은 고양이로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香氣)가 어리우도다.

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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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30 06:03 2014/06/30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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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스님의 불심, 자비의 꽃으로 맺히다

                -조계종 상담개발원실장 도현스님의 대학원대학 설립과 교육관 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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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현스님, 그의 이름 앞에는 비구니 천사라는 이름이 뒤따른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른다. 스님이 부처님의 자비 정신을 이웃과 나누기 위해 민간 속으로 뛰어든 것이. 그러나 헤아려보니 35년이 넘었다.

스님은 어린 시절 자주 병고에 시달렸다. “내 한 몸도 구제 못하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구나.” 스님은 아픔 몸으로 생활하는 것이 너무도 힘들고 버거웠기에 누구보다도 건강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 과정에서 한 스님을 알게 됐다. 어려운 학생들을 거두면서 공부도 시키고 병자들에게 침도 놔주면서 사는 분이었다. 도현스님은 그 모습을 보면서 “건강해지면 나도 저 스님처럼 어려운 사람들과 벗하면서 살아야지.”하고 은연중에 발원을 하게 된다.

도현스님은 절을 찾을 때마다 “‘부처님을 잘 모시면 병도 낫고 건강해진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한문으로 된 불경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지장경과 천수경부터 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니 어릴 적 인연이 떠올렸다. 친구로부터 불교서적 한권을 선물 받은 적이 있었는데 흥미도 없었던 터라서 한쪽에 밀쳐놓고 쳐다보지도 않은 책이 있었다. 하지만 몸이 아파서 일도 못하게 되니까 어느 날 그 책을 집어 들게 됐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아픈 내 마음 내 몸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눈에 쏙쏙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몸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아픈 마음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자꾸 묻게 됐습니다.”

  도현스님은 절집을 찾는 횟수가 늘고 부처님에 귀의하고 싶은 마음이 점차 싹트기 시작했던 거다. 그러던 어느 날 책상에 엎드려서 깜빡 잠이 들었다. “중이 되는 꿈을 꾼 거예요. 꿈속이었지만 전생에 중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길로 달려가 불가에 귀의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스님은 선뜻 허락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우선 부모님께 허락을 맡고 와야 한다고 하셨죠.”

지금 스님이 돼계신 걸 보니 허락을 잘 맡으셨나 봐요.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머리를 깍은 지 1년이 지나서 스님이 집에 들렀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바탕 난리가 났다. “쟤 왜 저래?”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스승 스님을 찾아가서 “병 고쳐 달랬더니 누구 맘대로 내 딸을 데려다가 중 만들었냐?”며 멱살을 잡는 소동까지 벌였다. 그러나 스님은 말리는 가족의 손길을 뿌리치고 절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스님의 뒷모습에 대고 “저렇게 살줄 몰랐는데 중이 되다니.... 쟤는 중노릇 절대 못할 아이다.”하면서 엄포도 놓고 야유도 해댔다.

스님 부모님의 종교는 달랐나보죠? “아니에요. 불자였습니다. 기복신앙에 매달리는 정도였던 거죠.” 한바탕 소동이 있은 후로는 부모님도 아무 말 없이 지켜봐주셨다. 도현스님은 해인사 약수암에서 계를 받고 불가에 귀의하게 된다. 이곳에서 행자스님으로 2년 동안을 묵은 다음에 스승님의 배려로 중앙승가대에 입학을 하게 됐다. 지금은 김포로 옮겨간 승가대는 전에는 안암동에 있었다. 그 즈음 스님은 서울대 병원의 법당에서 일하고 있었고, 속가의 부친을 이곳에서 조우하게 된다. 간경화증에 걸린 부친이 입원을 하게 된 때문이다. 부친은 운명하기 직전에 “나 죽거든 우리 살던 곳에 절을 지어라!”고 스님에게 유언을 하시며 돌아가셨다.

스님의 아버지는 조각가였다. 필자는 스님의 아버지가 남긴 뿌리조각품들을 보면서 “스님의 아버지는 괴짜 조각가시네요.”하고 필자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거대한 규모의 뿌리조각품을 보면서 우리나라 산천에서 언제 다시 이렇게 큰 나무들을 뿌리 채 구해다가 그 누가 조형물을 만들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요. 정말 괴짜시죠? 하하하” 뿌리조각품들 만으로도 전문전시장을 만들어도 될 만큼의 어마어마한 양의 작품들을 유산으로 남긴 부친과의 인연이 뭐 그리 간단하겠는가. ‘소매 한 번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허공을 가르듯이 무념무상의 상태로 웃는 스님의 모습에서 측량할 길 없는 수행자의 포스가 묻어났다.

정혜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156-2번지 도현스님이 주지로 있는 절 주소다. 스님은 이곳에서 일정이 잡힐 때마다 힐링캠프를 운영하고 있다. 매주말과 초하루와 보름날은 상설예불도 봉행한다. 주중엔 종로구 우정국로에 있는 조계사 부속 건물인 불교신도회관에서 불교상담개발원장으로서의 공무를 보고 이와 함께 ‘자비의 전화’를 운영하고 있다.

스님의 과거를 더듬어보면 재밌고도 신기한 일이 많다. 학업에 정진할 때다. 상도동에 방 하나를 얻어 자취생활을 하면서 등하교를 하고 있었는데 계를 받은 승려의 몸이란 그가 몸을 의탁하는 곳이 곧 절집이고 포교원도 된다. 도현스님이 자리를 잡은 곳은 상도동의 한 산동네였는데 이때부터 스님과 일반 사대부중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상도동 산 말랭이, 그곳은 부모들이 일용직에 좋사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아이들은 마땅히 오갈 데도 없었던지 하나 둘 스님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스님은 이 아이들을 거두면서 밥도 같이 먹고 숙제도 봐주고 말벗도 돼줬다. 누나 노릇도 하고 보모 노릇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이 상담공부를 하러 다니던 학우가 찾아왔다. 늘 침울한 표정이던 그녀는 그날따라 활짝 웃는 얼굴로 꽃을 한 아름 안고 들어왔다. 참고적으로 말하면 그녀는 남편이 2살과 3살 박이 얘들을 두고 갑자기 죽는 바람에 고통과 원망 속에서 지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학우가 돌아가고 난 자리를 보니 통장 하나와 도장이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450만원이 들어 있었다. 스님은 그 즉시 통장 주인에게 “잃어버리고 놔두고 간 것 없냐?”고 전화를 걸었다. 돌아온 대답은 “남편한테 들어온 부조금인데 안 쓰고 있었던 것이다. 스님에게 드리고 싶으니 불사(佛事)하는데 쓰라.”는 것이었다.

이틀이 지났다. 낯모르는 아주머니 한 분이 찾아와서 “저 건너 산동네에 사는 사람이거 자신을 소개하면서, 세준 거 제외하고 450이면 살 수 있는 집인데 너무 안 팔린다.”는 하소연을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이 집을 사기로 결심을 했다. 만원이 생기면 만원만큼, 2만원이 생기면 2만원만큼 시멘트를 사고 슬레이트를 사서 벽을 고치고 지붕을 수리해나갔다.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 날엔 불상과 법당을 갖춘, 150여 평의 절집이 됐다. 스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갔다.

스님은 이런 틈틈이 공부를 계속했다. 복지사 자격증과 보육교사자격증과 상담사 자격증을 따낸다. 돈 없고, 시간 없어서 걸림돌도 많고 어려움도 많았다. 하지만 용케도 손이 딸리면 봉사자가 나서서 도와주고, 학비가 없으면 독지가가 나서서 어려운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추는데 필요한 소정의 교육과정을 마칠 수가 있었다.

재밌는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애써 가꾼 절을 두고 이사하는 일이 생겼다. 재개발 붐이 분 탓에 집이 헐리게 생겼다. 스님은 약간의 보상비를 손에 쥐고 상도동의 또 다른 터전을 물색해야 했다. 옮겨 간 곳은 오랫동안 개를 키우던 장소였다. 십 수 년 동안 쓰레기 한번을 치우지 않은 곳이라서 스님이 치운 쓰레기만도 청소차 17대 분량이나 됐다. “삼년만 묵묵히 일하면 천일기도가 된다고 합니다.”라고 말하는 스님의 표정을 바라보미 그야말로 무념무상인 거다.

기도도량을 쌓듯이 묵언수행을 하면서 호미로 땅을 파고 다져서 목단도 심고 대나무도 심고 작약도 심었다. 세월이 지나 10년쯤 지나니 꽃동네가 됐다. 개 짓는 소리와 악취로 공해를 이루던 동네가 꽃동산으로 변하게 되지 그제야 구청에서도 칭찬이 자자했다.

그 때 상도동 산동네 신도들이 잊지 않고 이번 초파일에 스님을 찾아줬다. 160여 명, 팔당댐이 보이는 남양주 끝자락으로. 상도동에서 절집을 꾸리던 때가 1980년 대였으니,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가 씻기고 재우고 어린이 법회를 열면서 돌보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 장가가서 아이를 안고 온다. 이름도 지어주고 공부도 시키며 중매도 섰다. 그들은 이웃이자 친한 벗이었다. 가난한 자들과 함께 후미진 곳에서 보낸 세월이 무려 35년이다.

어느 날 불교방송에서 찾아왔다. ‘거룩한 만남’이라는 방송프로를 맡아달라는 청을 하기 위해서였다. 방송 콘셉트는, 아프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찾고 발굴하여 그 사연과 함께 독지가들을 찾아 연결해주기도 하고, 성금을 받아서 도와주는 프로그램이었다. 한 번은 백혈병 환자가 있었다. 혈액카드를 다 써서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돈을 모아가니 이미 운명을 한 뒤였더라는 것이다. 영안실에 모실 돈이 없어서 하루만 있다가 화장실로 직행하는 죽음도 보았다. 스님은 봉사자들과 함께 협업하면서 이 프로그램을 9년 동안 방송했다.

스님은 올 초(1월 24) 종단으로부터 ‘불교상담개발원장’이라는 보직에 임명됐다. 상담개발원에서는 그동안 2년제 상담대학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상담대학원대학을 설립하여 상담분야의 전문 인력 양성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도현스님은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13일 오후 6시30분 서울 장충동 앰배서더 호텔 2층 그랜드볼룸에서 ‘불교상담대학원대학교 설립 및 교육관 불사 후원의 밤’을 개최했다. 이에 따라서 조계종에서는 ‘(가칭)불교상담대학원대학교 설립 및 교육관 불사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고문단과 자문위원, 추진위원 등을 임명했다.

이날 사회는 코미디언 김병조 씨가 맡았고, 초대가수로 ‘찔레꽃’을 부른 가수 장사익 씨와 스님가수 삼진스님 바이올리니스트 강형진 씨가 특별출연을 해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냈다. 개포동 금강선원의 ‘혜거 스님’이 즉석에서 1억 원을 약정해 주는 등 5억 원 성금 모집에 청신호가 켜지는 모습이었다. 이를 토대로 <마음과학의 시대, 불교 상담이 불교의 미래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2016년부터는 대학원대학교 설립에 본격 착수할 예정이다. 속세에 발을 담그며 중생들과 나란히 호흡하는 스님들의 분투정신이 바로 청정심이 아닌가 싶다.

 불가에 귀의하여 마음 가득 부처님의 가피를 입고 이 풍진 세상을 극락세계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수많은 스님들의 노고가 오늘도 눈부시다. 도현스님 이하 불교상담대학원대학의 설립에 뜻을 모은 불사가 곧 현실로 이루어지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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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2 19:10 2014/06/22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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