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1,2,3 전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정동영의 5.18 이야기, 이제는 말한다

                                                                                        -보도되지 못한 5.18 현장 리포트, 이제는 말한다

 

 

들어가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연히 듣게 된 말 한 마디가 불쏘시개가 되었다. 그 불쏘시개는 무언의 재촉이 되고, 이런 재촉에 힘입어 오늘은 기어코 밀린 숙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펜을 들었다. 바로 5월 광주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다.

 

광주 시민들은 5월만 되면 잠을 못 이룬다고 한다. 이른바 5월병을 앓는다. 죄 없는 시민들과 희생자 가족들은 이처럼 5월병을 앓으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사회 일각에서는 어이없는 막말과 경거망동한 작태를 보이는 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이에 신군부 독재 세력들의 총칼에 맞아 부상자가 됐거나 희생자 가족이 된 사람들에게는 위로를, 고인이 된 5월의 영령들에게는 삼가 통한의 진혼곡을 바친다.

 

그럼 보자. 정동영 민주당 상임 고문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기에 지금까지 5.18의 트라 우마를 겪고 있다는 것인지 보자. 정동영 그는 33년 전 5.18을 취재한 MBC 기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훗날 정치인이 되어 집권당의 대통령후보에까지 이른 사람이다. 이런 내 노라 하는 유명인사 조차도 5.18 당시 취재를 위해서 현장에 머물렀다는 기억만으로도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 본다.

 

허면 영문도 모르는 채 졸지에 신군부의 총칼에 희생된 평범한 시민들은 오죽 했을까 싶다. 자신이 겪은 5.18에 관한한 지금까지 그 누구 앞에서도 단 한 번도 입을 열어 본적이 없다는 그다. 하지만 당시의 숨은 비화를 들어야겠다. 정동영 민주당 상임 고문을 찾아가 그가 겪은 5.18 이야기를 들어 본다.

 

 

5.18 광주 국립묘지로 출발

 

2013년 5월 17일 오전 6시. 광주행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달리던 버스가 잠시 강남터미널 앞에 멈춰 섰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 차가 정차하는 틈을 이용하여 한 무리의 사람들이 버스에 오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버스 안은 갑자기 활기에 넘쳤다. 고개를 들어보니 정동영 민주당 상임고문이 버스에 오른 모양이었다. 앞좌석부터 악수를 청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정동영 민주당 상임 고문이 필자에게 다가와 손을 내미는 순간, 때를 놓칠세라 재빨리 “자리에 앉게 되시면 시간을 좀 내 주십시오.”하고 미리 약속된 인터뷰 건을 상기시켰다. 필자는 5,18이 다가오자 인터넷 검색을 해본 터였다. 그 때 흥미 있는 사실 몇 가지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정동영 민주당 상임 고문이 5.18 당시 광주 현지를 취재한 보도기자였다는 사실이다.

 

 

인터뷰를 요청하기까지

 

그랬었구나. 하지만 뭐 그가 2007년도 민주당 대선후보였다는 점은 익히 아는 일 아닌가. 다만 한국의 비중 있는 정치인인 그가 지난 날 5.18의 광주 현장을 취재했던 사람이라는 점이 새삼스러운 소식이었다. 그가 맞닥뜨렸던 상황이 궁금했다. 자초지종을 알아보자. 이런 까닭에 인터뷰를 청했다. 그리고 현지로 출발하는 버스에 편승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광주행은 적게 잡아도 3시간은 걸린다. 평일에 가서 시간을 빼앗느니 5.18 현지로 가는 광주행 차 안에서 이야기를 얻어 듣는 것도 괜찮은 일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찌 해서 정동영은 5.18 기자가 됐을까. 자원한 걸까. 지시를 받아서 가게 된 걸까. 취재 기간은 도대체 얼마 동안이고, 보도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5.18에 얽혀 있는 정동영 민주당 상임고문이 풀어내놓을 이야기의 실타래가 자못 궁금하다. 하지만 다시 금 5.18에 관해서 망 말을 쏟아놓는 철딱서니 없는 족속들의 준동과 거칠기 짝이 없는 언어폭력과 행패 소식이 위험수위를 넘고 있어서 가슴이 다 무거워지고 있었다.

 

 

언론검열에 맞서 ‘검열철폐’를 외친 기자들

 

-어떤 상황에서 광주에 가시게 됐나요. 처음부터 상주기자는 아니셨던 걸로 아는데요. 그 80년 5월에 저는 MBC의 사회부 사건 담당 기자였어요, 경찰서 출입 기자였는데 그 때를 말하자면 80년 5월이었지요. 신군부에 의해서 비상계엄이 선포 돼서 서울시청에 설치된 계엄사 검열 단에 가서 검열을 받아야만 방송이나 신문에 나던 시절이었어요. 거기에 대한 저항으로 기자협회 주최로 “언론 검열을 철폐하라!”는 요구를 내세우고 기자들이 모였지요. 일단 뭉쳐야 하니까, 모여서 단합대회를 열었는데 장소가 서울 마포에 있는 경서중학교였어요. 그곳에서 언론인 축구시합이 열렸습니다.

 

그때 제가 MBC 대표선수로 축구시합에 나가게 됐습니다. 강원일보랑 하는 시합이었지요. 낮 12시쯤 상대 선수와 서로 공을 뺐으려고 헤딩을 하다가 그만 쓰러져요. 거기서 정신을 잃었는데, 순간적인 뇌진탕이죠. 쓰러져서 병원으로 옮겨지고, 실려 가서 6시간 만에 깨어나게 돼요.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 거지요. 일주일을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5.18이 일어났던 겁니다. 그래서 병원에 있다가 나갔어요. 도저히, 그대로는 ‘병원에 못 있겠다.’ 싶어서. 병원에서는 더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뭐 허리도 다치고 이빨도 부러지고 했지만.......

 

경찰서 출입 기자니까 먼저 경찰서로 갔습니다. 갔다가 회사로 들어간 게 5.18일에 이어 5. 19일이 지난 20일 날 회사로 가서, 그 전에는 뭐 회사에서 파견 방침이 없었으니까. 회사에서 광주를 가라! 사진기자 한명과 보도기자 3명이 꾸려져서 광주로 내려갔습니다.

 

 

광주로 가는 과정과 도착

 

-몸도 아프신데 왜 굳이 가셨어요? 제가, 뇌진탕으로 죽다가 살아난 사람이잖아요? 생사를 넘나들다가 겨우 깨어나고 보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광주가 어려움에 처하고 사상자가 막 생겨나고 하니까 ‘가봐야겠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가게 됐어요. 그런데 광주에 쉽게 접근할 수가 없는 겁니다. 막혀있었으니까. 고속도로가 차단되고 차량통행이 되고 막 그래요. 정읍을 지나서 장성까지 갔을 때 비아고개라는 곳에서부터 군인들이 바리게이트를 치고 검문을 하고 있었어요. 거기서부터 ‘못 들어간다.’ 통제를 하는 바람에 갈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차에서 내려 오후에 이제 논두렁 밭두렁 길이 없는 들판을 가로질러 밤새 걸어서 들어갔지요. 21일 날 들어간 것 같어요. 그때는 군인들이 철수한 뒤였습니다. 이른 바 ‘시민공화국’, 1주일의 광주는 그야말로 시민공화국이었고 그 시기에 취재를 하게 된 것이지요.

 

-그때의 일을 잘 기억하고 계시네요. 5.18이 발생한 당시에는 현장에 없었지만, 일단 군인들이 저질러 놓은 만행과 참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5월 21일 도착 당시에도 공수부대원들은 외곽에 있었고, 이들이 광주에서 저질러 놓은 흔적들을 확인하며 취재를 했고요. 광주 도청 앞에 상무대라고 하는 건물이 있었는데 관을 태극기로 덮어서 사망자의 시신을 안치해놓은 안치소가 있었어요. 수많은 시체가 안치돼 있어서 눈으로는 차마 볼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수식을 듣고 찾아와 울부짖는 소리며 통곡하는 그 장면이 너무 가슴 아팠고 참혹하고 그랬어요. (여기서 정동영 씨는 말을 잊지 못하고 잠시 눈을 지긋이 감았다)

 

 

계엄군이 들어오기 전후의 광주

 

-정 고문님이 광주에서 목격하신 상황이 희생자들에게는 굉장히 아픈 부분이네요? 그렇습니다. 5월 26일 날 자정 무렵을 넘어 그게 5월 27일로 넘어가는 새벽으로 연결된 일이었지요. 아~ 그 새벽에 계엄군이 새벽에 광주에 진입하고 있었어요. 도청 앞에 가 볼려고 했는데 숙소에서 들으니 뭐 이게 다 캄캄한 밤중에서 새벽쯤까지 벌어진 일이었을 겁니다. 콩 볶는 소리가 났어요. 총소리죠. 아마 수천, 수만 발이 터지는 것 같았어요. 26일 밤에서 자정을 지나 27일 새벽으로까지 이어지는.

 

그 진압군이 어느 쪽은 있고 어느 쪽은 없는 건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멀리서부터 가까이 근처에서도 났으니까 나갈 수가 없잖아요. 여관방에 엎드려 있다가 총소리가 잦아들고 나서 밖으로....... 이제 날이, 동이 트기 시작할 때 그래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바로 여관 앞에 전남여고가 있는데 전남여고 지붕, 그 학교건물 옥상에서 아래로 피가 죽 흘러 있는 거예요. 아마 거기서도 희생자가 있었던 거지요.

 

그런 다음에 이제 도청 쪽으로 가보니 마지막 사수 대가 몇 십 명 있었어요. 진압이 임박해오는 순간이었는데 지휘자가 그게 윤, 윤상원 열사였죠. 전남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윤상원 열사입니다. 거기서 비장한 최후를 마친 분인데, 그런 사람들이 도청에는 몇 십 명이 끝까지 남아 있었죠. 그래서 광주시내의 표정은 공포와 슬픔과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뭐라고, 차마 말로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져있었습니다. 탱크와 총칼을 앞세우며 밀고 들어온 진압군이 광주를 짓밟고 지나간, 그런 광주가 지금도 기억에 선합니다.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지요.

 

같은 동족끼리 대체 이 나라의 국민인데 어엿한 주권자인데 무고한 시민들이 그렇게 정통성도 없고 정당성도 없는 신군부에 의해서 총칼에 찔리고 총탄에 맞고....... 그야말로 게르니카의 학살이지요. 학살, 킬링필드라고 할까요. 현대사에서 최악의 비극이라 생각합니다.

 

-평온한 광주에 계엄군이 들어 온 것인가요? 광주시는 자체적으로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정부상태였으니까, 신군부 입장에서 보면 무정부 상태라 단정하고 공권력도 철수되고, 행정도 공백 상태라서 명령이 전달 안 되니까 신군부 입장에서는 계속 이걸 방치해 놓을 수 없다 이거겠지요. 광주는 평화롭고 편안하게 그야말로 시민공화국이었죠. 대한민국 전체가 계엄 하에 살벌했는데 광주의 1주일은 자유와 민주주의가 흐르는 홀로 평화로운 섬 같은 상태였지요.

 

 

전두환 신군부세력에 대하여

 

광주에 체재한 당시의 기자가 송고(送稿)한 보도 내용을 보면, 광주는 당시 아무런 문제점이 없는 상태였다. 평온한 가운데 질서를 잘 유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신군부 측에서는 갑자기 탱크를 몰아 광주시로 진입해 온다. 도대체 왜 광주가 군인들로부터 총칼 세례를 받아야 하며 탱크와 군화 발에 짓밟혀야 하는지....... 그들이 저지른 만행과 정권 탈취로 인한 12년간의 군부독재 기간은, 이들이 반민주적이고도 정당성이 없는 독재세력이라는 것을 역설적이게도 대변해준다.

 

박정희 독재자는 그가 신임하는 부하직원으로부터 권총세례를 받고 죽임을 당한다. 그 결과 박정의 1인 독재시대는 막을 내리게 됐다. ‘이제 자유로운 세상이 오려나?’ 그러나 자유로운 세상이 찾아오는 것을 신군부세력들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일종의 금단현상이었다. 군부세력들은 전국을 공포상황으로 몰아가기 위해 계엄령을 발동한다. 이와 더불어 어느 한 지역을 희생양으로 삼아 폭도로 몰아 부친 다음 학살을 자행하고서 ‘니들도 까불면 이렇게 죽어!’하는 대국민 겁주기 공작을 시작한다. 이렇게 시국을 온통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놓고서 체육과 선거를 실시해서 정권을 잡는다. 순서는 이랬다.

 

광주는 질서의 도시였고, 대동정신을 구현하는 상생의 도시였다. 이런 광주의 상황은 당시 MBC 기자였던 정동영 민주당 상임고문이 MBC 본사로 송고한 리포트에도 잘 담겨있다. 당시의 송고 내용 전문을 보자.

 

 

21에서 27일까지의 정동영 5.18 광주리포트

 

이 리포트는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MBC 기자였던 정동영 전 장관이 광주 현장에 내려가 취재했던 내용이다. 하지만 이 리포트는 끝내 보도되지 못했다. 군사독재 정권의 언론왜곡과는 달리 <광주의 진실>이 담겨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광주의 현장에서 그때 보도되지 못했던 1980년 5월 광주가 담긴 ‘보도되지 않은 리포트’ 그 진실을 공개한다.

 

 

<광주에서 정동영입니다 1>

 

“네 저희들은 잘 있습니다. 아니 뭐 교대도 좋습니다만 여기 있으니까 마음은 편합니다. 총탄이, 늘 머리 위로 계속 총성이 나고 해서 그렇지요 마음은 편합니다. 어제하고 오늘하고 완전히 세상이 다릅니다. 어제까지는 일단은 학생들이 장악을 한 생태에서 시민들은 전혀 불안감이나 이런 건 없었어요. 광주 시내의 표정이라든가 이런 건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만발하는 도시였고 황금동 같은 데나 금남로 큰 네거리에서 ‘계엄령 해제 전두환 나가라’는 플래카드가 또 나부끼고 말이죠.

 

사람들 말하는 데는 전혀 거리낌이 없고 그런 데서는 완전히 자유 천하였는데요.

오늘 되면서 일단 상황은 완전히 180도 바뀌었죠.

 

어제 밤에 3시경부터 7시까지 지금도 현지에선 간간히 들립니다. 총성이 수천 번이죠. LMG 클레모어 50 수류탄 투척하는 소리 자동화기 소리해가지고 완전히 전쟁터 공포분위기였기 때문에 시민들이 아침에 나와서 생사 확인하고 말이죠.”

 

<광주에서 정동영입니다 2>

 

“광주 시내에는 지난 21일 이후에 도청 앞 빌딩 벽에 매일같이 대자보와 민주회보가 붙여져서 사태 전개과정을 시민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금남로 주변에 나붙은 서른 장 정도의 벽보에는 광주 시내가 세계적인 빅뉴스로 취급되고 있으며 중앙정보부장 전두환이 우방으로부터 고립돼 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2절지에 매직펜으로 쓴 대자보는 KBS를 통해서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아붙이는 당국의 처사는 광주시민을 모독하고 있다고 말하고 시민군, 자칭 시민군을 앞장세워서 5.18광주봉기를 민주회복의 성전으로 승화시키자고 주장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또 금남로 전남매일 빌딩 벽에는 광주사태를 1면 톱으로 사진과 함께 보도한 5월 22일자 마이니치신문 영자 판이 게시되어 있어서 그 앞에 많은 시민들이 몰리기도 했습니다.”

 

“벽보 외에도 광주시민 민주투쟁협의회라는 명의로 된 ‘민주시민회보’라는 전단이 매일 5~6천장씩 16절지 전단에 프린트가 되어서 광주시내에 배포되고 있습니다.”

 

“또 광주시민 일동 명의로 된 각종전단이 매일같이 뿌려지고 있습니다. 무장 학생들과 경찰의 충돌은 없었고 시민들의 경찰에 대한 적대감도 전혀 없는 그런 형편입니다.“

 

 

광주시가지 거리 통행문제

 

“다음은 광주시가지 거리 통행문제입니다. 광주시가지까지 통행은 새벽부터 밤 7시까지는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광주시장 구용상 씨를 비롯해서 70만 광주시민의 주요한 통행 수단은 자전거가 되고 있습니다.”

 

“금남로에는 아침부터 수천대의 자전거 행렬이 붐비고 있고 장형태 도지사는 오늘 오토바이 뒤에 타고 군부대에서 시내로 들어오는데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시장물가 동향

 

“다음은 시장물가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오늘 오전 광주시 한복판 대인시장에를 나가봤습니다. 무 한 개에 150원에 200원, 5.18 이전보다 50원 정도가 올랐고, 배추한단에 300원 100원 정도 올랐습니다. 양파 2개에 100원, 배정도 올랐고 오이 1개에 80원에서 100원, 어제 KBS에서 시내에서 오이 3개를 천원이라고 했다면서 터무니없는 보도를 비난하는 상인이 많았습니다.”

 

 

신군부세력들의 권력욕과 만행

 

위의 내용은 5.18 당시의 현지 상황이다. 보도 내용을 다시 보건데 광주 시민들은 무력에 짓밟힌 참상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자정자제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행여나 자신들의 행동으로 인해 만에 하나라도 꼬투리가 잡혀서 전두환을 위시한 불순한 군부독재 세력들이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하는 희생제물의 숙주로 이용할까봐서 조심하는 분별심의 일종이었다. 더불어 평화를 사랑하는 정신이 뼛속까지 내재된 시민의식의 자연스러운 발로였던 것이다.

 

그런데 신군부세력들은 18년 이상을 독점하고 있던 자신들의 독과점적인 정치권력 구조가 민주정부로 넘어가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뇌 회로는, 전쟁 놀음에 익숙한 살인적 DNA로 가득 차 있었고 수십 년 동안 다져진 한결 같은 획일성으로 인해 명령어 몇 마디만을 탑재한 로봇 형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신군부가 애꿎은 시민을 향해서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기저에는 권력탈취라는 욕망만이 가장 큰 가치였기에 그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 핏줄을 나눈 동족을 향해서 총부리를 겨눌 수 있었다. 이것이 그들의 실체요 광주를 향한 진실이다. 권력사냥꾼들의 권력쟁취를 위한 자가발전적인 한탕주의 쇼란 말이다.

 

 

버스에서 만난, 5.18을 겪은 사람들의 증언

 

그럼 여기서 잠시 참배 버스에 탑승한, 5.18을 겪은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자.

 

50대 중반의 여성: 임신한 새댁이 자기 집 앞에서 죽은 그 사건 있지요? 교사인 남편을 기다리가 집 앞에서 죽은 사람이 제 고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그 친구 결혼식에도 갔었지요. 임신했다고 기뻐하며 아기 출산 날만 기다리던 순진무구한 새댁이었는데 그런 친구가 글쎄 자기 집 대문 앞에서 총에 맞아 죽은 거예요. 그 소식을 듣고서 저희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5월이 되면 넋이 나간 사람들처럼 잠을 아예 한숨도 못 이룹니다. 5월이 지나야 겨우 마음을 추스르지요.

 

40대 초반 남성: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 저는 중앙초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집 근처에서 사람이 죽고 해서 어린 마음에 무섭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가슴이 짠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사상자 가족들이 달려와서 통곡을 하며 땅을 치던 모습이지요. 그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서며 공포에 떨곤 해요.

 

60대 중반 아주머니 :여기서 밝히게 되네요. 저는 5.18 부상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34살 때였어요. 제가 부상을 입은 것은, 시장으로 물건을 사러 가다가 다리에 총을 맞은 거예요. 그 자리에서 혼절을 했다가 깨어났는데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빗발치듯이 오고 가는 바람에 기절을 하게 됐나 봐요. 바듯이 정신을 차리며 처마 밑으로 기어가서 엎드려 있으니까 사람들이 와서 병원으로 데려다 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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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되지 못한 리포트’의 녹음테이프 광주 MBC 창고에서 발견되다

 

-그러고 나서 서울로 돌아가신 건 언제였습니까. 제가 광주 현장을 취재해서 보도기사를 송고했지만 보도되지는 못했어요. 왜냐면 통신이 우선 차단됐었고 진압군이 들어온 후에 통신이 복구 돼서 서울과 연결됐는데 회사에서는 교대를 하라. 이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27일 본사로 복귀하라는 지시를 받고 서울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한동안 아예 잊고 있었던 내용이 어떻게 됐는지 녹음이 돼서 있었어요. 보도내용을 보셨으면 알겠지만 “여기 있는 게 마음이 편하다. 여기 있겠다.”고 했잖아요? 당시 광주를 더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서 일주일간이나 있었던 거 같애요. 그 후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세월이 한참 지난 요 몇 해 전에 MBC 지하 창고에서 테이프가 발견 됐어요. 흐트러짐 없는 광주의 표정에 대해서 스케치 한 내용이지요. 광주가 이렇다. 채소 값은 또 이렇다 하는 건데, 그거는 결국 계엄사 검열 때문에 나가지 못했어요.

 

-폭도로 몰로 싶었는데 아니니까 보도를 못하게 했나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여건이 좋을 때 ‘내가 5.18의 기자랄지 당시의 진실을 잘 정리해서 알리지 않으셨나요.’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경우 심층취재나 리포트 같은 작업을 욕심내기도 하던데요. 책을 발간하는 거라든지, 그게 좀 아쉬워서 여쭤봅니다. 기자였지만, 살아 남은자의 부끄러움 같은 게 있었지요. 또 기자로 현지에 갔지만 한 줄도 보도할 수 없었다는 죄의식도 있었고요. 제 나름대로는 ‘트라 우마’라고 할까요. 정신적인 외상으로 남아 있는 거예요. 광주에 대한 기억이 그것을 제 개인적인 자산으로 여겨 함부로 꺼내거나 이용한다는 그런 발상은 할 수 없었습니다.

 

-정 선생님의 지금 말씀에 저도 동의합니다만, 선생님께 각인 된 5.18은 평범한 시민들에게는 위로가 될 수도 있고요. 해마다 5월병을 앓으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는 희생자들한테는 유명 정치인이 자기들 하고 비슷한 아픔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되고 사회적인 자산도 될 수 있잖습니까? 제가 당시에 광주에 있었다는 것뿐이지, 아무런 역할도 못한 사람입니다. 이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이에요. 광주 시민들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는 사람이라서.......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요. 하지만 트라 우마든, 죽은 분들에 대한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이든 직접 겪은 분들은 정말 그 상처가 일반 국민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깊은가 봅니다. 그러니까 ‘보도되지 않은 리포트’가 발굴된 것은 한참 뒷일이에요. 방송도 못 탔으니까 그만큼 통제가 심했다는 것이고요. 저도 마음으로는 시민군의 편이 돼서 수없이 싸웠지요. 기자였지만, 그리고 지나간 에피소드지만 광주도청과 전남도청을 오가면서 취재하러 가면 기자들도 같이 머물잖아요. 거기서 항쟁지도부와 대화를 하면서 취재를 하는데 어느 날엔가 꼭대기 층인 4층인가 거기에서 내 친구 동료기자가 한 사람 있는 거예요. 동아방송 기자였는데 박종렬이라는 기자였어요.

 

“여기서 뭐해” 하고 물으며 보니까 뭘 쓰고 있는 거예요. 시민군이 항쟁 방송하는데 손이 딸리다 보니까 원고를 써주고 있더라고요. 이걸 박종렬 친구를 도와 거기서 저도 같이 한나절 동안 도와줬어요. 성명서 같은 거랑, 원고랑. 그 친구는 거기서 계속 있었던가 봐요. 구속됐어요. 구속요. 무슨 혐의로 구속됐는지는 모르지만 엮어 넣었겠지요. 재판을 받고 징역도 살고 그랬습니다. 저 친구가 같이 했다고 말하면 ‘나도 성치 못할지 모른다.’는 상황이었지만 그 친구는 그러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마음에 짐이 많았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 없으세요? 작년에 사람들과 약속한 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켜지지 못했어요. 5.18민주화운동이 정부 특별법으로 법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통과된 기념일인 만큼 서울광장에서도 기념행사를 다 같이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약속이었어요. 그러나 올 같은 경우는 마음이 더 아픕니다. ‘님을 위한 행진곡’만 해도 공식적으로 못 부르게 한다는 말이 들려서 더 그래요. 가슴 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그래서 저 나름대로 준비한 게 있습니다. 김남주 시인의 ‘학살 2’라는 시(詩)에요. 광주시민들과 5월 영령들 앞에 통곡하는 심정으로 이 시를 바칠 겁니다. 정동영 고문은 이날 광주 국립묘지 ‘민주의 문’에서 팦에서 5.18 민주열사 묘에 안장된 김남주 시인의 시를 낭송했다.

 

헌데 인터뷰를 마친 직후 정동영 고문은 먼저 차안에 있는 참배객들 앞에서 예행연습 삼아 낭송해 보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이크를 잡았다. 때마침 차는 망월동 국립묘지의 초입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초여름을 앞두고 연초록 잎새를 자랑하는 나무가 열병식을 치르는 소년병처럼 수줍은 모습으로 도열해 있었고, 신선한 그 가지마다 매달린 만장 같은 깃발들은 내방객들을 환영하듯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렇게 마이크를 통해서 울려 퍼지는 정동영 민주당 고문의 시어(詩語)는 비장한 염원을 담아 그 날의 함성을 설득력 있게 일깨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 낮이었다

 

 

낮 12시

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

낮 12시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다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올려 얼굴을 가려 버렸다

낮 12시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 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리 처참하지는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리 치밀하지는 않았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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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1 17:08 2013/06/11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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