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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

오늘 아침 화장실에서 읽은 유난히 가슴에 와닿은 기사가 있어서 여기 옮겨본다.

 

 

 



일본 작가 에쿠니 가오리와 즈지 히토나리의 이야기를 풀어간 연애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는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이다. 연애소설을 즐겨 읽는 편인지라 이 작품을 일찌감치 챙겨보았던 나는, 요즘 들어 이 소설의 제목인 ‘냉정과 열정 사이’를 자주 떠올리곤 한다. 작품 내용과는 별개로 말이다. 그런데 그때마다 드는 느낌은 썩 좋은 것이 아니다. 얼마 전 끝난 장애인 올림픽과 서울 대광고등학교 학생 강의석의 외로웠던 싸움이 자꾸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끝난 뒤 시작된 장애인 올림픽에 대해 관심을 가진 한국 사람은 과연 몇 %나 될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난 아테네 올림픽 때 보였던 요란함에 비하면 수치상 채 십분의 일도 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십분의 일도 과한 수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테네 장애인 올림픽은 그저 어느 먼 나라의 풍문처럼 슬쩍 사람들을 스쳤다가 가뭇없이 사라져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장애인 올림픽이 한창이었을 때 어떤 선수가 어느 종목에 출전하여 얼마만큼의 성적을 거두었는지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반면, 체조선수 양태영의 ‘빼앗긴 금메달’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정은 아직 건재하다. 언론매체들은 여전히 양태영 선수의 ‘금 되찾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국의 대다수 국민들은 폴 햄이 하루빨리 ‘대오각성’하여 괜한 집착을 버리고 원래 주인인 양태영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주길 바란다. 허나 달리 생각해 보면, 양태영의 잃어버린 금메달에 대한 무수한 한국 사람들의 바람 또한 집착이 아닐까. 물론 ‘공정한 평가’라는 그럴 듯한 명분이 있지만, 내 눈엔 그 명분의 이면에 도사린 금메달 수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보일 뿐이다.

까짓거, 백보 양보해서 금메달에 목숨 거는 한국 사람들의 그 특별한 열정을 일단 긍정해 보기로 하자. 그래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금메달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과도한 열정은 그 종류에 따라 매우 ‘선택적’으로 발휘되기 때문이다. 똑같이 금으로 만든 메달이어도 그냥 올림픽과 장애인 올림픽에서 딴 것은 다른 취급을 받는다. 전자는 ‘핫’한 대접을 받지만, 후자는 ‘쿨’한 대접을 받는 것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올림픽에서 딴 금메달 한개와 장애인 올림픽에서 딴 금메달 열개를 가지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 보라고 하면, 대다수의 한국사람들은 전자를 택할 게 틀림없다. 한국인들의 이러한 선택적인 열정으로 인해 장애인 올림픽에서 흘린 땀의 무게는 한없이 가벼워지고 만다.

지난 9월25일, 대광고 학생 강의석이 46일 동안의 금식을 풀었다. 학내 종교 선택의 자유를 주장한 고등학생 강의석의 외침은, 그러나 지극히 외로운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언론이 가끔 그의 고독한 외침에 귀 기울여주는 ‘척’했을 뿐이고, 그나마 시민단체와 일부의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었을 뿐, 학내 종교 선택권을 얻기 위한 강의석의 노력은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저 ‘강 건너 불 구경’하는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이 한 고교생의 외침에 그렇게 ‘쿨’한 관전법을 구사하지만 않았어도, 강의석이 46일 동안 그렇게 쫄쫄 굶어가며 죽을 고생을 할 필요까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추석 연휴의 와중에, 러시아의 테니스 선수 마리아 샤라포바가 ‘국빈’ 대접을 받으며 한국에 왔다. 이 ‘팔등신 미녀’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을 훑어보는 한국사람들의 시선이 ‘후끈 달아오르는’ 사이, 아테네 장애인 올림픽이 폐막되었다는 소식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만 들려왔다.

이렇듯, 한국사회에서 구사되는 ‘냉정과 열정 사이’의 간극은 너무도 크다. 분명 그 까마득한 틈이 서서히 좁혀져 갈 때에야 이 나라에서 외로운 사람들의 숫자도 점점 줄어갈 것이다. 순진한 사회적 상상력일지 모르지만, 나는 여전히 그렇게 믿고 싶다.

 

 

이휘현 자유기고가

한겨레신문, '야! 한국사회', 2004.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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