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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오픈 기념 …함세웅 신부 - 김종철 이사장

 

˝제2민주화, 5월광주 - 6월항쟁 힘으로˝
[특집 대담 ①] 홈페이지 오픈 기념 …함세웅 신부 - 김종철 이사장
 
 
기사입력 : 2015.05.18 03:51  |  최종수정 : 2015.05.19 17:52  페이스북  트위터
 
자유언론실천재단 홈페이지가 광주민중항쟁 35주년을 맞이하는 2015년 5월 18일 문을 열었다. 한국 민주화운동사의 횃불로 살아 있는 그 항쟁의 의미를 되새기며 홈페이지의 첫 번째 기사로 함세웅 신부(민주주의국민행동 상임대표, 자유언론실천재단 고문)와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의 대담을 싣는다. 김 이사장이 묻고 함 상임대표가 답변하는 방식으로 인터뷰를 정리했다. 2회에 걸쳐 연재된다. - 편집자.
 



‘암흑 속 횃불’ 광고로 유신독재 대대적 고발 

▷김종철(이하 김) : 올해로 5월 광주민중항쟁이 35주년을 맞았습니다. 그 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평가해주실까요?

▶함세웅(이하 함) : 그날의 ‘광주’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그것은 민중의 용감한 투쟁인 동시에 민족사의 비극이자 참사였습니다. 저는 1987년 6월항쟁 직전에 한 수녀님의 말씀을 듣고 새삼스럽게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서강대 3학년인 청년이 어느 날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고 전국을 여행하다가 광주 망월동묘역에 갔답니다. 그는 13살 된 중학생의 묘비 앞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저렇게 어린 학생이 총탄을 맞아 숨진 것을 알았을 때 부모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겠지. 나는 저 중학생보다 10년이나 더 살았구나.’ 그 청년은 묘지 앞에서 깊은 묵상을 하면서 그 중학생을 항쟁의 대열로 이끈 어떤 신비한 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서울에 와서 성당을 찾아가 고백성사와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를 모셨습니다. 수도자와 사제의 권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그 청년을 하느님께로 인도한 것은 바로어린 학생의 숭고한 죽음이었습니다. 저는 5월 광주의 정신은 십자가의 힘과 같다고 믿으면서 신자들과 함께 망월동묘역 참배를 계속했습니다. 신자들도 그 중학생의 묘비 앞에서는 숙연해지더군요. 

전두환 일파는 망월동묘역을 없애려고 갖은 공작을 벌였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골고다 언덕 같은 그곳을 군사독재의 힘으로 지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갈릴리지방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그들과 기쁨과 희망을 함께하셨습니다. 망월동은 한국의 갈릴리입니다. 갈릴리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곳입니다. 따라서 광주는 고난의 땅이지만 동시에 민족의 부활, 희망의 횃불이기도 합니다. 
 



▷김 : 광주민중항쟁의 정신과 이념을 오늘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구현하면 좋겠습니까? 

▶함 : 민주화를 향한 연대의식으로 박정희의 후계자들인 전두환과 노태우 일파에 맞서 떨쳐 일어난 것이 바로 광주민중항쟁이었습니다. 1980년 5월 17일 이른바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들은 침묵을 지켰지만 광주의 전남대 학생들이 과감하게 쿠데타에 항거하고 나섰습니다. 항쟁 기간에 광주 시민들은 주먹밥을 나눠 먹으며 동지애를 다졌습니다. 거기서는 단 한 건의 범죄도 일어나지 않았지요. 그것이 광주공동체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남한의 5천만 겨레는 바로 그 아름다움을 계승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광주를 방문할 때마다 안타깝고 서글픈 생각이 듭니다. ‘광주 정신’을 물려받고 있다고 자처하는 여러 단체들이 그때의 초심을 잃어버리고 서로 대립하거나 사소한 이익에 집착하는 모습 때문입니다. 

현재 제일야당과 많은 국민들이 보이는 자세도 유감스럽습니다. 지난 2012년 12월 대통령선거 기간에 국정원과 보훈처, 국군사이버사령부 등이 저지른 선거부정이 명백히 드러났고, 투개표 과정에서 일어난 부정행위에 대해 시민 28만여명이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는데도 새정치민주연합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명박 정부 당시의 국정원장 원세훈이 구속되었는데도 소수를 빼고 많은 국민이 침묵했습니다. 이것은 권력의 불의에 맞서 싸운 광주항쟁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물려받은 박근혜를 응징하고 제2의 민주화를 이루는 과업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40여년 동안 민주·민족·민중운동을 함께 해온 동지들, 그리고 젊은 세대의 일꾼들과 뜻을 한데 모아 지난 3월 24일 민주주의국민행동 발기인대회를 가졌습니다. 선조들이 일본제국주의자들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운 3·1운동 때의 투지를 이어받고, 미군정과 야합한 이승만의 독재를 물려받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후예들인 현재의 집권세력을 타파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단을 구실로 민족의 통일을 가로막는 수구보수세력을 척결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하고 재벌을 비롯한 기득권층을 더 부유하게 하는 신자유주의를 추방하고 평등을 지향하는 경제체제를 이룩해야 합니다. 저는 제2의 민주화운동이 광주항쟁과 1987년 6월항쟁의 연장선상에서 추진되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황새 부상 크게 보도… 학생데모는 안 실려” 

▷김 :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려보겠습니다. 신부님이 언론에 관심을 갖게 되신 것은 언제인가요?

▶함 : 1973년에 로마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사목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1974년 4월 박정희 정권이 민청학련사건이라는 것을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습니다. 그리고 5월에는 “북한을 추종하는 노농정권을 세우려고 정부 전복을 꾀했다”는 이유로 인혁당사건을 발표했습니다. 나중에 밝혀졌듯이 두 사건 모두 중앙정보부가 살인적인 고문으로 조작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구속된 분들의 가족을 통해 박정희 정권이 얼마나 야만적인 짓을 저질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심한 일은 언론이 그런 사실을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박 정권은 그해 7월에는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지원했다는 혐의로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님을 구속했습니다. 지 주교님은 구속되기 직전에 유신독재를 강하게 비판하는 양심선언을 발표하셨는데 그 사실조차 신문과 방송에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언론의 속성을 잘 모르던 저는 얼마 뒤에야 그 원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앙정보부 간부나 직원이 동아일보사를 비롯한 언론사에 상주하면서 편집이나 제작에 일일이 간섭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 저항하는 언론인들은 ‘남산’이라고 불리던 중앙정보부에 잡혀가서 고문이나 폭행을 당해야 했습니다. 

저는 당시 사제단 총무와 대변인을 맡고 있었는데 기자들은 이런 하소연을 했습니다. “천연기념물인 황새가 다치면 신문 사회면 머리에 나오는데 학생들이 데모를 하면 1단기사도 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명동성당에서 기자들을 만나면 특히 KBS 기자에게 “당장 여기서 나가라”고 소리치곤 했지요. 그리고 주변에서 감시를 하는 중앙정보부원이나 사복경찰도 나가라고 요구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그런 일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참담한 현실에서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사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빼앗긴 언론자유를 되찾고 ‘기관원’이라고 불리던 정보기관원들의 언론사 출입을 거부한다는 내용이었지요. 저와 동료 사제들은 그 소식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튿날부터 동아일보에 민청학련이나 인혁당에 관한 기사가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김 : 그런 현상을 깨뜨리려고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언론인들이 그해 11월 12일 일으킨 제작거부 운동을 기억하시는지요?

▶함 : 네, 며칠 전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바로 그 전날 서울 명동성당을 비롯한 전국 각 교구 주교좌 성당들에서 일제히 인권회복기도회가 열렸습니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 가족들이 고문의 진상을 폭로하고 사제, 수도자, 교우와 많은 시민들이 그들의 석방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이었습니다.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은 그 기도회가 아주 중요한 사건이니 11월 12일자 석간 1면에 사진을 곁들여 5단으로 보도하거나 사회면 머리에 올리고 동아방송 뉴스에도 맨 앞에 내보내라고 편집국장과 경영진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경영진이 거절하자 기자, 피디, 아나운서들이 농성을 하면서 신문과 방송의 제작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날 하루가 지난 뒤에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는 인권회복기도회가 크게 보도되었지요. 
 



동아일보·방송 기자들 자유언론 투쟁 지원

▷김 :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박 정권이 저지른 만행이 보도되기 시작한 뒤 구속자 가족들의 호소, 천주교의 인권회복기도회와 개신교의 목요기도회 소식이 크게 보도되자 박정희는 최대의 위기라고 생각하고 1974년 12월 하순부터 중앙정보부를 통해 동아일보사에 대해 광고탄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백지로 변하게 된 동아일보 광고면에 격려광고가 실리면서 놀라운 민중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사제단은 그때 동아일보에 많은 격려광고를 실었는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광고는 무엇이었습니까?

▶함 : 12월 31일자 동아일보 8면 전체를 차지한 ‘암흑 속의 횃불’이라는 광고입니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비롯해서 지학순 주교님의 양심선언 등 박정희 유신독재의 실체를 대대적으로 알리는 내용이었지요. 당시 언론은 물론이고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충격적인 사실들이 실렸으니 박정희가 보고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그 광고를 싣기 전에 김수환 추기경님께 문안을 보여드렸더니 이런 내용이 어떻게 신문에 나가겠느냐고 걱정하시더군요. 그러나 정작 ‘암흑 속의 횃불’이 나온 동아일보를 보시고는 매우 놀라시면서 정말 기뻐하셨습니다. ([특집대담②]에서 계속)
 


▲ 김종철 이사장(좌)과 함세웅 신부(우)가 대담을 마치고 담소를 나누고 있다.

〈 인터뷰 진행 및 정리 : 김종철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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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놈 병원에서 내보내라' 우익 민원 때문에"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5/21 07:05
  • 수정일
    2015/05/21 07:05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인터뷰] 세월호 유가족 '유민 아빠' 김영오씨... 46일 단식 그 뒤

15.05.20 20:28l최종 업데이트 15.05.20 20:28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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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민 아빠' 김영오씨
ⓒ 윤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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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고 1년. 특별법 시행령 시행과 인양에 대해 정부와 유가족 및 시민의 지난한 싸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진실규명을 외치는 시민들은 허탈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다. 피해자 가족 당사자들의 심경은 어떨까. 지난해 7월 14일부터 46일간 단식을 하며 싸운, 세월호 사고 희생자 고 김유민양의 아버지 김영오씨. 뜨거운 여름날 사선을 넘나들며 진실을 외친 유민 아빠를 17일 안산시 부곡동 자택 앞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제대로 되는 게 없는 것 같아요. 미운 게 많아질 것 같아요.
"미운 거 많죠. 사람이 미운 게 아니라 현실이 미워요.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건데. 돈을 이야기하다니요. 이렇게 궁지로 몰아가는 현실이 슬퍼요." 

-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답답해하는 시민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다양한 의견들이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하지만 뜻은 같지 않을까요?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진실이니까요. 1년이 지난 지금 저렇게까지 버티면서 훼방을 놓는 것을 보면 분명하잖아요. '(정부가) 감추고 싶은 것이 있다. 틀림없다.' 그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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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민 아빠' 김영오씨
ⓒ 윤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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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식 이야기를 해볼게요. 회복은 많이 되셨나요?
"46일 단식했어요. 회복기간 즉 복식기간을 단식기간의 두 배 들여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90일 넘게 해야 하는데. 40일 정도 되었을 때 병원에서 나가달라고 하더라고요. 민원이 너무 많이 들어온다고요." 

- 민원이요?
"나쁜 놈이 병원에 있다고, 내보내야 한다고. 우익단체 어르신 같은 분들 있잖아요. 그런 분들이 계속 병원에 전화를 했나봐요. 민원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병원에서도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나가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나왔죠. 뭐."

- 후유증이 심하시겠네요. 
"하루 한 끼 정도밖에 못 먹어요. 속이 안 좋아서요. 그리고 피곤을 많이 타요. 하루 외출하고 나면 그 다음 날은 하루 종일 잠만 자게 돼요. 얼마 전부터는 힘들어지면 그냥 자고 싶은 생각만 들기도 해요. 올해 1월부터인가, 유민이가 꿈에 가끔 나오거든요. 예전에는 꿈에 나온 적이 없었어요. 꿈에 안 나오면 좋은 데로 간 거라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무척 그리웠거든요. 꿈에 유민이가 웃으면서 다가와서 폭 안겨요. 잠에서 깨면 울고 있어요. 그래도 좋아요. 너무 그리웠던 유민이를 만났으니까요."

"하루 한 끼밖에 못 먹어... 1월부터 유민이가 꿈에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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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원고 2학년 10반 고 김유민양의 책상. 5월 17일 밤에 촬영.
ⓒ 윤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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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민이 이야기를 해주세요. 어떤 아이였나요?
"큰딸 유민이는 혼자인 저에게 이 세상에서 유일했던 보호자였어요(기자 주 : 김영오씨는 유민 엄마와 이혼했다). 제가 해준 2만9천 원짜리 (휴대전화) 요금제도 비싸다고 1만9천 원짜리로 바꾼 아이. 수학여행 갈 때도 연락하지 않고 갔어요. 알면 아빠가 용돈 부쳐줄 거 뻔히 아니까. 용돈을 받으면 십 원 한 장 안 쓰고 저금을 할 정도로 알뜰했고, 수학을 잘해서 (제가) 은행원이 되라고 했죠.

마음이 고와서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아이. 유민이 동생한테 들었는데요, 한번은 집에 벌레 한 마리가 들어왔는데 종이로 걷어내서 바깥에 날려주면서 '좋은 데로 가라' 그랬대요."

- 유민이랑 가까웠나요?
"같이 못 살아서 아빠가 밉기도 했을 텐데, 만나면 항상 꼭 붙어 있었어요. 가끔 명절 때나 시골(고향)에 가면 삼겹살 파티 같은 것을 했거든요. 제가 고기를 구우면 뒤에서 꼭 안고 있던 아이예요. 저희 6남매 중에 그런 자식을 둔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참 많이 부러워했어요. 유민이랑 동생이랑 제 왼쪽 오른쪽 팔에 끼고 잠들곤 했죠."

- 유민이가 바다에서 언제 올라왔죠?
"(지난해) 4월 25일 164번째요. 깨끗하게 올라왔어요. 그런데 많이 야위어있더라고요. 두 달 전 명절 때 봤을 때 분명이 살이 통통하게 올라서, '우리 유민이가 살이 올라서 보기 좋다'고 했거든요. 혹시 배 안에서 며칠 더 살아 있었을까봐, 고통스러웠을까봐 마음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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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원고 2학년 10반 교실. 5월 17일 밤에 촬영.
ⓒ 윤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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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가장 궁금한 건 무엇인가요?
"많죠. 그 중에서도 저는 대통령이 참사 당시 7시간 동안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싶어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요. UDT가 왔을 때 해경청장이 상부에서 승인이 안 떨어져서 투입 못 시킨다고 했어요. 총리가 내려왔을 때도 그랬어요. 자기는 힘이 없다고. 그러면 승인을 내줘야 하는 사람이 누구겠어요. 대통령이라는 거잖아요. 7시간 동안 무엇을 했기에 골든타임 다 놓치고, 구할 수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냐는 거예요."

- 개인적으로 어떤 점이 제일 속상하세요?
"저를 나쁜 아빠로 보는 거요. 왜 저를 배제하려고 하는지, 왜 저를 정치적으로 보려 하는지요. 대통령은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요, 정치인들은 신뢰를 잃었어요. 저는 아빠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예요. 저는 뭐가 먼저인지 아는 사람이에요. 처음으로 얻은 정규직 직장도 잃었어요. 노가다를 하면 어때요? 저는 다 해봤어요. 두렵지 않아요. 세월호는 대한민국의 축소판이에요. 꼭 진실을 밝혀야 해요. 그리고요, 저는 다른 거 없어요. 이 모든 게 다 끝났을 때,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한마디면 돼요." 

세월호 사고 1주기에 전국에서 많은 시민들이 모여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 다행이었다는 유민 아빠 김영오씨. 학생들이 찾아와 10년 후 자신들이 정치인이 돼 이런 아픔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하는 말에 희망을 봤다고 한다. 그는 얼마 전 시행령을 반대하며 광화문 길바닥에서 노숙을 하다 다리에 문제가 생겨 절뚝이면서도 끝까지 "같이 가자. 함께해달라"고 당부했다.

○ 편집ㅣ최규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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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부터 변질... 신군부 잔혹성·책임자 처벌 등 삭제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5/05/20 13:00
  • 수정일
    2015/05/20 13:00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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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집단발포' 빠진
보수정권의 5.18 경과보고

[분석] 2011년부터 변질... 신군부 잔혹성·책임자 처벌 등 삭제

15.05.20 10:37l최종 업데이트 15.05.20 11:20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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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오전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5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국무총리 직무대행 자격으로 참석한 최경환 경제부총리,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최정길 5·18민주묘지관리소장이 나란히 입장하고 있다. 박 소장(앞줄 왼쪽)은 이날 기념식에서 5·18 3개 단체와 광주지방보훈청장을 대신해 경과보고를 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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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정부 주관의 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식이 열린 국립5.18민주묘지. 최정길 국립5.18민주묘지관리소장이 '5.18 경과보고'를 위해 마이크 앞에 섰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로 시작한 최 소장의 경과보고는 "희망의 새 시대를 만들어가겠다는 것을 5.18 희생영령께 결연히 다짐한다"는 말을 끝으로 3분 50초 만에 마무리됐다. 

최 소장의 경과보고는 즉각 논란을 낳았다. 그동안 5.18 경과보고는 2008년까지 '5월 3단체(5.18유족회, 5.18부상자회, 5.18구속부상자회)'의 대표가, 이후에는 광주지방보훈청장이 해왔다. 광주지방보훈청장은 고위공무원 나급(2~3급)의 일반직 공무원이, 국립5.18민주묘지관리소장은 4급 서기관 또는 기술서기관이 맡는다. 

'임을 위한 행진곡' 문제로 5.18유가족·시민사회단체가 옛 전남도청 앞에서 따로 기념식을 열고, 국무총리 직무대행(최경환 경제부총리)이 기념사를 읽는 등 초유의 상황과 맞물려, "정부가 기념식의 격을 떨어뜨렸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문제는 보고자의 '급' 만이 아니었다. 최 소장이 낭독한 경과보고에는 '신군부', '계엄군의 집단발포', '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 작전' 등 당시 국가 폭력의 책임자와 그들의 잔혹성을 담은 내용이 빠졌다. 이날 기념식에 참석한 진성준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최 소장의 경과보고는) '시위대와 진압군이 밀고 밀리는 과정에서…' 운운하며 전두환 신군부의 학살 만행을 슬쩍 은폐하려 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오마이뉴스>는 이번 정부 주관 기념식에서 최 소장이 읽은 경과보고와 5.18유가족·시민사회단체가 별도로 연 기념식의 경과보고, 또 2008년 이후 열린 5.18 기념식의 경과보고를 분석했다. 그 결과, 이명박 정권 중반부터 축소되기 시작한 5.18 경과보고 내용은, 이후 국가 폭력의 주체(신군부)와 그들의 만행 및 처벌을 묘사한 문구가 조금씩 사라지며 지금에 이르렀음을 확인했다.

두 곳의 기념식, 두 개의 경과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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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을 위한 행진곡' 문제에 항의하며 5.18 유가족·시민사회단체가 18일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에서 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식을 따로 연 가운데, 신대운 전남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가 5.18 경과보고를 낭독하고 있다.
ⓒ 강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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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정부 주관 기념식의 경과보고(편의상 경과보고A)의 문제점은 임을 위한 행진곡 문제로 5.18유가족·시민사회단체가 옛 전남도청 앞에서 따로 연 기념식의 경과보고(편의상 경과보고B)와 비교해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다(기사 하단에 경과보고A·B 전문). 

신대운 전남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가 약 8분 동안 읽은 경과보고B는 5.18의 배경과 과정, 잔혹성, 책임자 및 책임자 처벌, 의미 등을 상세히 담았다. 

반면 최 소장이 읽은 3분 50초짜리 경과보고A에는 국가 폭력의 주체이자 책임자인 신군부라는 단어가 아예 빠져 있다. 이외에도 ▲ 5월 21일 금남로에서 벌어졌던 계엄군의 집단발포 ▲ 도시 외곽 지역에서의 양민 학살 ▲ 5월 27일 탱크와 무차별 사격을 동원한 전남도청 진압 작전 등 신군부의 잔혹성이 담긴 내용도 생략돼 있다. 

"(5.18 이후) 군부정권은 5.18 묘지를 없애버리기 위해 유가족들을 협박하고 회유하여 묘지 이장을 획책하는 등의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는 5.18 이후 정부의 은폐 시도 역시, 경과보고A엔 없다. 또 경과보고B에는 '책임자 처벌 과정'을 설명한 아래와 같은 내용이 실려 있지만 경과보고A에는 정부의 명예회복 노력과 관련된 내용만 담겨 있다.

"1988년 여소야대 국회에서 5.18 진실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가 시작되어 계엄군의 만행이 국민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되거나 부상을 입은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보상이 시행되었습니다. 

1994년 5월, 5.18민중항쟁연합은 광주학살책임자 35명을 서울지검에 고소하면서 5․18진실규명과 학살책임자들의 단죄를 시도하였고, 1997년 결국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학살책임자들을 법정에 세워 단죄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계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 경과보고B 중

'집단발포'가 '공방전'으로... "5.18 폄훼 답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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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5월 19일광주 금남로에 투입된 계엄군이 양손에 진압봉을 받쳐들고 시위군중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 5·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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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국가보훈처가 최종 작성하는 5.18 경과보고와 관련해, 지난해에도 비슷한 논란이 벌어진 바 있다(관련기사 : 보훈처, 5·18 강제진압 작전을 '해산 시도'로). 당시 전홍범 광주지방보훈청장이 읽은 경과보고는 1980년 5월 27일 탱크를 앞세워 무차별 총격을 가한 전남도청 진압 작전을 "해산 시도"라고 명명해 "역사왜곡을 조장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우리가 봐도 의아스럽다"면서도 "지난해(당시 기준 2013년)와 같은 내용인데 왜 그땐 문제제기가 없다가 지금 와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해명했다.

그렇다면 5.18 경과보고는 언제부터 변질되기 시작한 걸까. 5.18의 진상을 충실히 담고 있는 경과보고B는 2008년까지 '5월 3단체' 대표들이 돌아가면서 발표한 내용과 상당 부분 흡사하다. 이후 2009년 당시 장갑수 광주지방보훈청장이 발표한 경과보고(바로보기), 2010년 영상으로 대체된 경과보고(바로보기)도 대체로 이전 내용을 여과 없이 담고 있다.

문제는 2011년에 한 경과보고에서부터 발견된다. 당시 안중현 광주지방보훈청장이 발표한 3분짜리 경과보고(바로보기)에는 처음 '신군부', '계엄군의 집단발포', '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 작전' 등의 내용이 빠졌다. 

신군부라는 단어는 아예 찾아볼 수 없고, 계엄군의 집단발포와 관련된 내용은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고 병원에서 사경을 헤맸다"로 바뀌었다. 

전남도청 진압 작전도 "1980년 5월 27일 열흘 동안의 5.18은 막을 내렸다"로 희석시켰다. 5.18 이후 정부의 은폐 시도, 책임자 처벌 과정도 2011년 경과보고부터 삭제됐고, 이것이 이번에 문제가 된 경과보고A의 기원이 되고 있다.

5월 단체의 한 주요 관계자는 19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참석을 거부한 상황에서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싶지 않다"면서도 "경과보고 뿐만 아니라 임을 위한 행진곡 문제 등 5.18을 폄훼하려는 것과 관련해 그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평을 하고 싶지도 않다"고 토로했다.

아래는 18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정부 주관 기념식의 경과보고A와 같은 날 옛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5.18유가족·시민사회단체 주관 기념식의 경과보고B 전문이다.
 
두 개의 5.18 경과보고
□ 5.18 경과보고A(정부 주관 기념식, 최정길 국립5.18민주묘지관리소장 낭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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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오전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5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국무총리 직무대행 자격으로 참석한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헌화·분향한 뒤 자리로 향하고 있다. 최정길 5·18민주묘지관리소장(오른쪽)은 이날 기념식에서 5·18 3개 단체와 광주지방보훈청장을 대신해 경과보고를 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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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의 경과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로 광주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했습니다.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학생들의 항의시위로 계엄군과 충돌함으로써 518민주화운동은 시작됐습니다. 이날부터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는 시민들이 합류하여 광주 전역으로 확산됨에 따라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감행됐습니다. 

5월 19일 시위 규모가 확대되고 격렬해지면서 인명피해가 늘어나자 시내 기관장 및 유지들이 모여 시위진압을 완화하도록 건의했습니다. 5월 20일 오후 차량시위를 계기로 광주시민들은 광주에서 민주주의와 시민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였습니다. 

다음날인 5월 21일 오후 1시경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계엄군과 밀고 밀리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고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야 했습니다. 5월 21일 오후부터 27일 새벽까지 광주는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헌혈 행렬이 줄을 이었으며 수습대책을 강구하는 등 치안부재의 상황에서도 성숙한 시민자치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1980년 5월 27일 마침내 열흘 동안의 5.18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리게 됐습니다. 5.18의 진실을 규명하고 민주화 실현을 위해 투쟁한 국민들의 승리였으며, 5.18과 그 정신의 계승 과정에서 참여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의 댓가이기도 했습니다. 

2001년 12월, '518.민주화운동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이 제정돼 5.18은 그 명예를 회복하게 됐습니다. 2011년 5월에는 기록물이 우리나라 현대사 자료로는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자료적, 역사적으로 그 가치를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35년 지난 지금도 많은 5.18 유공자와 유족들은 시위 과정에서 얻은 정신적, 신체적 상처로 고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5.18 35주년 기념일을 계기로 온 국민이 감사한 마음을 담아 5.18 유공자와 유족분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드리고, 이 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밑거름으로 해 국민통합을 이룩하고 하나의 대한민국, 희망의 새 시대를 만들어가겠다는 것을 5.18 희생영령께 결연히 다짐하면서 경과보고를 마치겠습니다.

□ 5.18 경과보고B(유가족·시민사회단체 주관, 신대운 전남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 낭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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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 민주광장에서 별도의 5·18 35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5·18유가족회 등 5월 관련 3개단체, 광주전남지역 시민사회단체, 5·18민중항쟁 기념행사위원회가 개최한 기념식에는 5·18 유가족, 시민, 세월호 유가족, 정치인 등 1천여 명이 참석했다. 기념식 참가자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있다.
ⓒ 강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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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를 비롯한 전라남도 일원에서 일어난 5.18의 경과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5.18은 국가권력을 강점하려했던 신군부의 반민주적 책동에 맞서 1980년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대학생들의 시위를 계엄군이 유혈진압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은 시위 여부와 관계 없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진압봉으로 구타하고 심지어 총검까지 사용하는 유혈진압을 자행하여 순식간에 광주는 아비규환의 도시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계엄군의 잔학한 만행에 분노한 광주시민과 전라남북 도민은 5월 20일 차량시위를 계기로 계엄군과 적극적으로 맞서 민주주의와 시민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였습니다.

5월 21일, 분노한 시민들의 저항에 밀린 계엄군은 오후 1시경 계엄군의 잔인한 만행에 대한 정부의 사과와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요구하며 금남로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날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50명이 넘는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수천 명의 부상자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야 했습니다. 오후 광주시내에서 퇴각한 계엄군은 광주를 외부로부터 철저히 고립시키는 작전으로 변경하였고, 광주 외곽에서 주둔하는 동안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이날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는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헌혈행렬이 줄을 이었고, 치안부재 상황에서도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완벽한 시민자치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시민학생민주투쟁위원회가 결성되어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시민군을 조직하여 계엄군으로부터 광주를 지키고 자체의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투쟁을 지속하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 27일 새벽, 신군부는 광주시민들의 평화적인 노력과 투쟁에도 불구하고 불순분자들의 난동에 의해 광주가 무정부상태가 되어 시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조작된 명분을 내세워 무력으로 진압을 강행하였습니다. 탱크를 앞세우고 진입하는 계엄군과 맞서 광주시민들은 마지막까지 전라남도 도청에 남아 저항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또다시 수많은 시민들이 총에 맞아 사망하거나 붙잡혀 끌려갔고, 열흘 동안의 5․18민주화운동은 참혹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5월 27일 도청에 남아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시민군들의 장렬한 희생은 이 나라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들의 가슴에 정의와 양심으로 부활하기 시작했고, 광주학살을 통해 국가권력을 강점했던 신군부 세력에게는 씻을 수 없는 국민학살이라는 원죄를 갖게 만들었습니다.

5.18은 1980년 5월 27일 막을 내렸지만 해마다 5월이 되면 5.18의 희생자들이 묻혀있던 5.18묘지는 이 나라 민주화를 향한 국민적 투쟁의 뜻과 힘을 모으는 결의의 장이 되어 왔습니다. 이에 위기의식을 갖게 된 군부정권은 5․18묘지를 없애버리기 위해 희생자 유가족들을 협박하고 회유하여 묘지 이장을 획책하는 등의 만행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뿐만아니라 5.18의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자들의 처벌을 통해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투쟁하는 민주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자행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이 땅의 수많은 청년, 학생들이 분신과 투신 등으로 산화해 가기도 하였습니다. 

5.18을 계기로 시작된 국민적 민주대장정은 1987년 6월 항쟁을 정점으로 군부정권을 굴복시켰고, 1988년 여소야대 국회에서 5.18 진실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가 시작되어 계엄군의 만행이 국민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5.18 과정에서 희생되거나 부상을 입은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보상이 시행되었습니다.

1994년 5월, 5.18민중항쟁연합은 광주학살책임자 35명을 서울지검에 고소하면서 5.18 진실규명과 학살책임자들의 단죄를 시도하였고, 1997년 결국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학살책임자들을 법정에 세워 단죄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계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상의 투쟁성과를 바탕으로 2001년 12월, 국회에서 '5.18민주화운동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이 제정되어 5.18은 참혹했던 상흔을 딛고 법적, 제도적으로 그 명예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5.18은 반인륜적 학살책임자들의 단죄, 그리고 제도적 명예회복, 민주화를 향한 끊임없는 투쟁의 밑거름이 됨으로써 세계 각처의 민주, 인권, 정의를 위한 운동은 물론, 과거청산과 기념사업의 수범이자 선험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1993년 정부에서는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희생자들의 묘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지금의 묘지가 조성되어 2001년 5.18민주유공자예우법 제정에 의해 국립묘지로 승격되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산 교육장으로서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2011년 5월에는 우리나라 현대사 자료로는 최초로 5.18 기록물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5.18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 민주화의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보편적 가치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다시는 국가폭력과 반인륜적 만행이 발붙일 수 없을 만큼 민주주의를 성장시켰고, 후손에 물려줄 자랑스러운 역사로 5.18이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5.18민주유공자들과 광주시민을 대신하여 그동안 5.18민주화운동의 명예회복과 정신계승 투쟁에 힘과 뜻을 함께 해주신 국민여러분께 존경과 감사의 뜻을 표하며, 1980년 5월 투쟁과정에서 희생되신 분들의 유가족을 비롯하여 부상과 고문 등의 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있는 5.18민주유공자들의 상흔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바,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부탁드리며 경과보고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편집ㅣ손병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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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모욕 ‘말뚝테러’일본인 ‘박정희 참배 요구’

 
 
 
박정희를 추모하고 종북을 외치는 한국 보수와 닮은 스즈키 노부유키
 
임병도 | 2015-05-20 08:43:1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거주하는 ‘나눔의 집’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 무릎 아래가 없는 ‘소녀상’과 ‘다케시마는 일본 영토’, ‘Don`t Korea’라고 적혀있는 상자 등이 배달됐습니다.

소녀상이 들어 있던 상자에는 ‘제5종 보급품’이라고 표기됐는데, 이 용어는 한국전쟁 당시 위안부대를 호칭했던 단어입니다.1 한국도 위안부를 자발적으로 운영했기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도 강제가 아니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제5종 보급품’이라 적혀 있는 소녀상을 보냈다는 점은 할머니들에게는 굉장히 모욕적인 일입니다. 수십 년이 지나도 치유되지 않는 몸과 마음에 더 상처를 주는 행동입니다.


‘소녀상 말뚝 테러범 스즈키 노부유키, 또다시 테러’
 
박스에 ‘제5종 보급품’이라 적힌 소녀상을 보낸 사람은 일본 극우 정치인 ‘스즈키 노부유키’입니다. 스즈키 노부유키는 2012년 주한 일본 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에 ‘다케시마는 일본땅’이라는 말뚝을 세운 인물입니다.

스즈키 노부유키는 5월 16일 ‘유신정당 신풍대표 스즈키 노부유키’라는 블로그2에 ‘위안부 소녀상을 한국 위안부 박물관에 증정했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이날 스즈키 노부유키는 유튜브3에도 ‘한일기본조약 체결 50주년을 기념할만한 해로 정대협4과 나눔의 집에 소녀상을 보냈고, 위안부 박물관에 전시했으면 기쁘겠다’고 밝혔습니다.

스즈키 노부유키가 전시됐으면 기쁘다고 했던 박물관은 ‘전쟁과 여성 인권박물관’입니다. 전쟁과 여성 폭력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행동하는 박물관에5 ‘소녀상’을 보냈다는 자체가 전쟁의 참혹함과 여성인권보다는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정당성이 우선이라는 논리입니다.

그저 일본 극우 정치인의 개인적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굉장히 치욕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입니다.
 

‘일본 극우 정치인 스즈키 노부유키의 실체’

스즈키 노부유키는 ‘유신정당 신풍’의 대표입니다. 단순한 극우 일본인이 아니라, ‘애국 정치 세력을 만들어 일본을 구하자’고 외치며 참의원 선거 등에 출마하는 제도권 내의 정치인입니다.

‘유신정당 신풍(약칭 신풍)’은 1995년에 우오타니 테츠오(魚谷 哲央)에 의해 설립된 정당으로 우익 보수를 표방하는 정치 단체입니다. 우오타니 테츠오(魚谷 哲央)는 현행 일본 패전 후 미군정의 점령하에 설립된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는 진정한 국정 개혁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던 전형적인 극우파 철학을 설파하고 다녔던 사람입니다.

2001년 19회 참의원을 시작으로 20,21회까지 출마했다가 낙선된 우오타니 테츠오는 2010년 22회 참의원 선거는 출마하지 않고, '유신정당 신풍'의 대표를 스즈키 노부유키에 물려줍니다.

2001년부터 우오타니 테츠오와 함께 ‘유신정당 신풍’에 참여했던 스즈키 노부유키는 2007년 21회 참의원 선거 도쿄구에 출마했다가 낙선을 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유신정당 신풍'이 내걸고 있는 정책과 강령,성명서입니다. ‘유신정당 신풍’은 '국방의 최전선은 센카쿠(중국과 분쟁 중인 섬)'이며 현대의 ‘무사도 정신’이라는 강연회 등을 통해 미군정에서 이루어진 헌법을 사무라이 정신으로 개혁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스즈키 노부유키를 처벌하지 못하는 한국’

일본 극우 정치인으로 역사를 왜곡하며 갖가지 방법으로 한국을 모욕하고 있는 스즈키 노부유키를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어렵습니다. 아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표현이 옳습니다.

스즈키 노부유키는 2012년 말뚝 테러 사건으로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불구속 기소됐습니다. 그러나 검찰의 출석 요구에 불응했고, 오히려 욱일승천기 앞에 한국 검찰의 출두요구서를 들고 찍은 사진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스즈키 노부유키는 한국에 입금 금지된 극우 일본인 4명과 함께 ‘さらば韓国 竹島の碑闘争全記録と日韓断交への道’라는 책을 펴낸 바 있습니다.

한국 검찰의 스즈키 노부유키 기소와 재판 과정에는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재판부는 검찰에 스즈키 노부유키에 대한 입국금지 여부와 출입국 현황을 확인해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만약 검찰이 출석요구서를 발송해놓고도 입국 금지 여부를 잘 모르고 있었다면 이상합니다.6

서울중앙지법은 스즈키 노부유키가 재판에 나오지 않더라도 ‘궐석 재판’을 통해 실형을 선고하고 일본과의 범죄인 인도조약에 따라 신병 인도 절차를 밟을 수 있는데, 아직도 감감무소식입니다.

매번 일본에 수사 공조를 요청하지만, 일본이 들어주지 않고 있습니다. 결론은 일본 극우 정치인이 한국을 모욕하더라도 아무런 처벌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박정희를 추모하고 종북을 외치는 한국 보수와 닮은 스즈키 노부유키’

위안부 소녀상에 말뚝 테러를 하고, 위안부 할머니에게 모욕을 준 스즈키 노부유키를 비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과 주장을 보면 한국의 보수와 상당히 닮았습니다.

스즈키 노부유키는 한국 국회의원의 다수가 국가보안법7 체포 경력이 있으며,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을 ‘친북정권’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한구 새누리당 의원이 들고 있는 ‘종북사전’ 사진을 블로그에 게재하며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 운동이 진행되는 2012년 12월, 스즈키 노부유키는 문재인 대선후보에게 ‘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다, 종군위안부 문제도 존재하지 않으며 한국은 ‘한일기본조약’을 맺은 친일파 박정희 대통령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스즈키 노부유키가 한국을 모욕하고 역사를 훼손해도 박근혜 대통령이 그를 비난하기는 어려울 듯 보입니다. 그는 박정희의 사진을 액자에 넣어 매일 아침 예배하고, ‘친일파 박정희’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라며 오히려 아버지를 추종하는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일본 극우세력을 비판하지만,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스즈키 노부유키가 처벌받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을 비난하기 보다, 우리 내부에 있는 친일파 청산이 먼저인 이유입니다.

1. 한국현대사 산책, 강준만. 
2. http://ameblo.jp/ishinsya/theme-10012997877.html
3. https://www.youtube.com/watch?v=I9t9MHRCQYw&feature=youtu.be 
4. 명칭을 한국식으로 번역했음
5.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https://www.womenandwar.net/contents/general/general.nx?page_str_menu=0401
6. ‘위안부 소녀상 말뚝테러’ 스즈키에 공소장 송달. 뉴시스 2014년 6월 16일
http://m.newsis.com/inc/inc_article_search.php?ar_id=NISX20140616_0012986257&cID= 
7. 스즈키 노부유키 블로그에는 간첩법으로 설명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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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한.미 군사훈련 중단해야 해결"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대사,『역사의 파편들』출판 기자회견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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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19  2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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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대사는 19일 오후 회고록 한국어판 출판 기자회견에서 북핵 해결법으로 한.미 연합군사연습 중단을 제시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북한은 핵개발을 시작하고 멈추기도 했지만 핵무기 개발을 계속 유지할 것이다. 미국과 한국이 군사훈련을 계속하고 북한에 대한 공격을 지속하는 한 말이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주한 미대사를 지낸 도널드 그레그(88세)가 제시한 북한 핵문제 해결방안이다. 주한미군의 전술핵 철수와 '팀 스피리트' 한.미 연합군사연습을 중단시키는데 관여한 그가 보기에, 북핵 문제의 출발은 한.미 연합군사연습이라는 것이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대사는 19일 오후 서울 남대문로 밀레니엄서울힐튼 호텔에서 열린 회고록『역사의 파편들』한국어판 출판 기자회견에서, '한국 내 전술핵 재배치' 주장에 대해 "최악의 선택(option)이다. 단호히(absolutely) 반대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북한은 핵개발을 시작하고 멈추기도 했지만 핵무기 개발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며 "미국과 한국이 군사훈련을 계속하고 북한에 대한 공격을 지속하는 한"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이어 "군사훈련 등은 북한이 민감히 반응하고 북한에 두려움을 준다"면서 "이 상황은 북한과의 지속가능한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 (북핵문제는) 대화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한.미 연합군사연습 중단을 북핵문제의 해법으로 제시한 것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다.

그레그 전 대사는 1989년 9월 한국 부임 당시 북한이 핵개발을 생각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뒤 "만약 미국이 한국에 전술핵을 보관하면 북한이 핵개발을 할 수 없도록 저지하는게 불가능하다"고 판단, 노태우 정부와 전술핵 철수 문제를 논의했다. 당시 주한미군은 사정거리 15마일의 전술핵무기 '어니스트 존' 로켓을 갖고 있었다.

그는 노태우 정부와 워싱턴을 설득, 1991년 12월 전술핵 철수 등을 담은 '한반도비핵화선언'을 이끌어냈다. '팀 스피리트' 훈련도 중단시켰으며, 이는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시키는데 기여했다고 평가받았다.

하지만 당시 딕 체니 미 국방장관은 미국 연례 안보참모 회의에서 1993년 3월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하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북한의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레그 전 대사는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 이후 북핵 위기가 왔다"며 "딕 체니를 가장 싫어한다"고 말했다.

현재에도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한.미 연합군사연습 중단이 필요하다며, "한국이 대화를 시작해야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치적 지지가 없기 때문에 오바마의 남은 임기 동안 (북한정책에서)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봤다. "북한에 대해 (이란, 쿠바와 같은) 접근이 되면 좋지만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면서 한국 정부의 주도적 역할을 주문했다.

 

   
▲ 회고록『역사의 파편들』출판 기자회견에서 그레그 전 대사는 남북, 북.미 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그레그 "전작권 환수연기, 굉장히 실망..김정은, 똑똑한 지도자"

그레그 전 대사는 전시작전통제권, 미.일관계 등에 대한 견해도 피력했다.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 연기에 대해 "유감"이라며 "이제는 한국이 반환받을 때이다. 충분히 능력이 있다. 이미 너무 지체된 상황이다. 굉장히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좌우가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것을 멈추고 힘을 함쳐서 북한과 화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빨리할 수록 이 문제(전작권 환수)를 해결하는데 도움되고 지역안정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新) 가이드라인'으로 형성된 미.일 밀월관계에 대해서는 "양국관계가 더 가까워진다고 보지 않는다. 양국은 언제나 가까웠고 그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전체주의 정권이 바뀌기 위해서는 스스로 원해야 한다. 스스로 원할 때 수용소 운영방식이나 인권상황을 개선할 것"이라며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 미국이 먼저 대화를 가져야 한다"고 피력했다.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 대해서는 "똑똑한 지도자"라고 평가하면서 "북한이 붕괴할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미국은 하루빨리 북한과 대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천안함 사건의 북한 소행설에 의문을 제기했던 그레그 대사는 "여전히 (2010년 9월 기고)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신뢰프로세스'에 대한 지지를 표하고 "남은 임기동안 희망적으로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대사 회고록 『역사의파편들』[사진제공-창비]
한편, 그레그 전 대사의 회고록『역사의 파편들』은 미 중앙정보국(CIA) 한국 지국장,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담당관, 조지 부시 부통령 안보보좌관, 주한미대사 등의 이력을 통해 1950년대 이후 미국의 대 아시아정책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담고 있다.

 

그레그 대사는 내외신 기자 1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이날 기자회견에서 회고록 저술 4년 동안 미 CIA,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등의 검열을 거쳤다면서 마지막 장인 '악마화가 부르는 위험'에 대한 필독을 권했다.

"한반도의 분단은 끝낼 수 있고 또 반드시 끝내야 하는 비극이다. 그것은 서로 계속하고 있는 악마화가 대화로 바뀌고 화해가 이뤄질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역사의 파편들』는 이렇게 갈무리했다.

『역사의 파편들』한국어판은 '창비'에서 출판했으며, 가격은 25,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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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총장 개성공단 방문의미와 북미관계 전망

반기문 총장 개성공단 방문의미와 북미관계 전망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5/05/19 [17:57]  최종편집: ⓒ 자주시보
 
 
▲ 개성공단 방문 관련 반기문 총장 기자회견 속보와 관련 후속기사들이 이렇게 순식간에 쏟아져나왔다.     © 자주시보

 

 19일 오후 연합뉴스 와이티엔 속보를 통해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21일 하루 일정으로 남북간 경제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을 방문한다고 밝혔다.

 

이는 대북 봉쇄와 압박으로만 일관했던 미국이 이제는 미국정부는 물론 박근혜 정부와 아베정부를 동원한 대북 압박을 강화하면서도 유엔사무총장과 남한, 일본 경제인을 통한 대북 당근책을 동시에 구사하는 병행정책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사건으로 보인다.

 

물론 이 변화의 계기는 북이 전격적으로 진행한 잠수함탄도탄 수중발사 시험일 것이다.

 

북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수중시험 성공 발표 직후 본지에서는 북미대화가 진행될 것으로 예견한 바 있는데 이렇게 빨리 미국의 반응이 나올 줄을 미처 몰랐다. 최근 들어 유엔 회원국들이 자주적 입장으로 돌아서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유엔의 상층부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그 수장인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방북은 미국의 동의없이 어려운 일임이 분명하다. 연합뉴스가 “반 총장은 본인의 의지에 따라 뉴욕 채널을 통해 북측에 개성공단 방문 의사를 밝혔으며, 이와 동시에 우리 정부에도 관련 내용을 알리고 협조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라고 보도했듯이 미국의 동의아래 진행되는 개성공단 방문임은 명백하다. 뉴욕채널은 미국 뉴욕에 있는 북의 유엔주재대표부 파견 간부들과 백악관 미 간부들의 소통을 의미한다.

 

어제 18일 중앙일보는 첫머리 기사와 여러 심층기사를 통해 전국경제인연합에서 북의 경제개발을 돕고 우리 기업들의 대북 경제협력·투자 사업의 자문을 위해 평양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는 보도를 내놓았다.

전경련은 또한 최근 비공식 경로를 통해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의욕적으로 건설한 강원도 원산의 마식령스키장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정부 측에 전달했다. 전경련은 대북 투자 첫사업으로 이 원산지구를 국제관광단지로 개발 중인 북을 도와 마식령스키장, 원산명사십리, 세포등판목장, 울림폭포 등을 친환경 농업과 국제관광단지로 개발하는 일에 적극 도와나서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였다고 한다. 이미 북에서 기반 시설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가장 빠른 시일 안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사업이 바로 원산국제관광단지 개발사업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전경련은 나아가 북이 평성에 삼성 반도체산업, 나진엔 SK의 석유화학산업, 청진은 포스코의 제철산업, 안변에는 대우조선해양의 조선산업을 유치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해왔다며 차차 이런 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라며 그 첫 단추로 평양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하고 싶다는 의사를 우리 정부에 전한 것이다.

 

삼성, 포스코, SK, 대우 등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지분을 외국 투자가들이 많은 부분을 장악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결국 전경련의 이런 움직임의 배경에도 미국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런 미국의 당근책이 북에 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물론 연락사무소 정도야 개설될 수도 있겠고, 반기문 사무총장의 개성방문 나아가 평양방문도 북은 마다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이런 당근책을 쓴다고 해서 북의 대미 핵억제력 강화 계획을 중단하거나 연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북이 아직 실전배치 하지 않았다고 하는 잠수함탄도탄 수중발사 시험을 공개한 것만 봐도 미국이 북이 바라는 대북핵위협을 제거하면 북도 더 이상의 대미 핵억제력을 강화하는 조치를 중단할 수도 있음을 암시한 것으로 볼 수는 있다. 문제는 바로 그 미국의 대북핵위협의 근본적인 제거이다. 그것이 없다면 북은 어떤 당근책에도 흔들림 없이 대미핵억제력을 계속 강화해갈 것이다. 이는 북이 일관되게 강조해온 내용이다.

대미핵억제력 강화도 김정은 제1위원장의 기질을 놓고 보았을 때 시간을 두고 협상을 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전격적, 연속적으로 진행할 가능성이 높다.

잠수함탄도탄은 현존하는 전략무기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전략무기이다. 그것을 공개했다는 것은 공개못할 무기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 연합뉴스에서 북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를 내놓았는데 결코 낭설이 아닐 것이다.

 

어쨌든 북의 잠수함탄도탄 발사 시험이 미국에게는 심각한 충격을 준 점만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오바마집권기간 내내 끌고오던 전략적 인내 정책이 그 한 방에 끝장나고 결국 오바마도 압박과 대화를 병행하는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마바 정부는 정말 답이 없다. 북에 대한 어떤 봉쇄와 압박도 통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북은 더욱 더 승승장구 강화된 핵억제력을 꽝꽝 과시하고 있다. 오바마 집권 초기에 비해 북의 핵억제력은 비할 수 없이 강화되었다. 이제는 동맹국의 안전은 물론 미 본토마저 북의 타격으로 초토화될 수 있음을 아무리 숨기고 부정하려고 해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북에 대한 대응책으로 사드 등을 도입하려고 하면 중국마저 심각하게 자극하게 된다. 러시아를 봉쇄하여 압박했더니 러시아가 북과 동맹관계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화하는 것으로 대답하였다. 미국이 사드 등으로 압박하면 중국도 그렇게 될 것이 너무나 자명하다.

 

미국이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인내하며 시간끌기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북을 군사적으로 완전히 제압하거나 북과 전격적인 대화를 추진 북미관계를 정상화하여 한반도 비핵화를 이루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국면으로 점점 몰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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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시키고 나 몰라라 미군, 책임 못 묻고 쉬쉬하는 정부

 
이동수 2015. 05. 18
조회수 1279 추천수 0
 

미군은 SOFA에 기대어 무책임하고 비협조적, 정부는 오염자 부담 원칙도 포기할 판

다이옥신 등 유해물질과 퍼내 연료로 쓸 만큼 심각한 유류오염, 비공개로 문제 키워

 

01643973_R_0.JPG» 반환된 미군기지는 종종 맹독성 물질과 함께 퍼내 연료로 쓸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기름으로 오염돼 있기도 하다. 2007년 6월 파주 월롱면 캠프 에드워드의 토양에서 채취한 유류. 사진=이종근 기자

  
지난 3월18일 윤성규 환경부 장관은 반환 미군기지의 오염정화는 “기본적으로 정화가 핵심으로, 누가 정화하느냐는 두 번째 문제”라며 그동안의 환경부 입장과는 상반된 의견을 밝혔다. 우리가 부담한 비용이 이미 막대하고 시간이 갈수록 그 액수도 증가하는 마당에, 환경문제 해결의 기본인 오염자 부담 원칙을 정면으로 부인한 것이다.  
     
2011년 경북 왜관의 캠프 캐럴과 주변 지역은 발칵 뒤집혔다. 흔히 인류가 알고 있는 가장 맹독성의 화학물질이라고 알려진 다이옥신으로 인해 기지와 주변지역이 오염됐을 가능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 다이옥신의 출처는 월남전에서 미군이 사용한 제초제(고엽제)인 ‘에이전트 오렌지’이며, 고엽제가 예전에 한국에서도 사용되었고 일부는 캠프 캐럴에 매립되었다는 것이 퇴역 주한미군들의 증언에서 밝혀졌다.

 

전 국민의 관심과 요구에 못이겨 한·미 합동 조사위원회를 만들고 오염 여부를 조사한 결과 다이옥신 못지않게 악명 높은 다수의 독성화학물질로 터가 오염이 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오염도 또한 현재까지 알려진 국내 어디보다도 높았다.1) 

미군의 증언과 조사 결과 밝혀진 환경오염에도 고엽제 드럼통의 매립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사 결과는 흐지부지되었고 어떤 후속조처가 진행되고 있는지 이제 아무도 모른다.

 

2012년 인천시 부평구의 캠프 마켓 주변지역의 토양 오염에 대한 세 번째 조사가 이뤄졌다. 한때는 캠프 마켓의 터였던 곳으로 유류와 휘발성 유기오염물질, 그리고 중금속의 오염이 심하다는 사실은 그 이전의 두 차례 조사에서도 이미 거듭 확인된 적이 있었다.

 

03931260_R_0.jpg»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 캠프 마켓 담벼락과 부대 안으로 통하는 선로 사이에 파와 콩 등을 심은 텃밭을 가꾸고 있다. 주민들은 기지 오염 사실을 모르고 장기간 채소를 길러 먹었다. 2011년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이 세 번째 조사는 왜관의 캠프 캐럴에 매립됐던 고엽제 드럼통이 반출됐을 법한 곳으로서 캠프 마켓이 떠올랐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유류와 중금속뿐만 아니라 다이옥신이나 그와 유사한 일부 독성 화학물질에 대한 조사 결과 심한 유류와 중금속 오염이 다시 확인됐으며, 일부 지점에서 국내에서는 흔치 않은 수준의 다이옥신 오염도를 보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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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참고문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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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참고문헌 2
 
2002년 서울 녹사평역 주변지역의 유류오염, 캠프 킴 터 경계선 인근지역의 유류오염, 2006년 부산의 미군 폐품 처리기지(DRMO), 2009년 춘천의 캠프페이지, 2011년 동두천의 캠프 캐슬 등 미군기지의 토양오염사례는 반복적으로 확인되어 왔다. 
 
전반적으로 미군기지의 오염은 대단히 심각한 수준으로서, 대표적 오염물질인 석유계 총탄화수소(TPH)는 기준치를 수십배 초과하기 일쑤이며, 독성 중금속, 발암물질인 벤젠과 트리클로로에탄(TCE) 등 유기용제도 기준치를 몇배에서 몇십배가 넘는 경우가 허다하다.1~5)

 
유류오염이 심각했던 평택의 한 미군기지 주변 주민은 새어나온 기름이 물 위에 수십㎝가 넘는 두께의 층을 형성해서 그것을 떠다가 연료로 사용하곤 했다는 경험을 얘기할 정도이다.   
 
01646569_R_0.JPG» 경기도 파주의 반환 미군기지 캠프 자이언트 지하수층에서 채취한 기름층. 오염층의 두께를 짐작할 만하다. 2007년 국정감사 현지조사 때 촬영한 것이다. 사진=류우종 기자 
  
환경오염은 예방이 가장 좋지만 이미 일어났다면 실태를 잘 조사해서 오염 원인자는 최대한 오염발생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상식이자 법이다. 
 
그러나 그동안 미군의 태도는 “혈맹”이라고 부르는 관계가 무색하게 2001년에 양해된 “KISE (Known Imminent and Substantial Endangerment to Human Health: 알려진 급박하고 실질적인 건강위험)의 제거” 조항 뒤에 숨어서 무책임과 비협조로 일관했다. 
 
우선 빌려쓰는 기지를 심각한 수준으로 오염시키고, 오염이 발생한 이후에도 오염을 정화하고 환경을 복구하기 위한  최소한의 사후 수습에도 무책임하다. 기지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기지 밖 인접지역의 오염이 기지 내의 오염원 때문에 발생한 것이 모두에게 명백하게 밝혀졌는데도 오염을 차단하려는 노력을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취하지 않는다. 
 
또한 기지 반환과정 시 법에 따라 미군이 취한 정화작업은 부실하기 짝이 없어서 대다수의 미군기지는 반환 후에 우리 정부의 예산으로 정화작업을 다시 해야 한다. 그렇게 정화작업을 한 곳이 2011년까지 16개소이고 거기에 쓴 국방부의 예산이 대략 1500억원이다.6) 물론 정화비용은 앞으로 더 늘어나서 3000억을 훌쩍 넘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미군은 또한 조사에 비협조적이고, 실태파악에 필요한 자료의 공개에도 인색하다. 예를 들어 캠프 캐럴의 경우 오래전부터 자체적인 조사에 의해 기지의 토양오염이 심각함을 알고 있었고 동시에 오염이 기지 밖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있었는데도 입을 닫아 문제를 키웠다. 
 
그런데도 주변 지역을 오염시켜 일으킨 피해에 대해서 실질적인 보상은커녕 도의적인 사과도 기대하기 어렵다. 오염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나름의 법적 근거와 방패막이를 소파(한·미 주둔군 지위협정, SOFA)에 마련해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04060031_R_0.jpg» 불평등한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를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시민사회에서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사진=김봉규 기자


미국의 무책임함은 대단히 소극적인 우리 정부의 자세와 맞물려 있다. 오염자에게 책임을 묻지 못하고 기지 터를 인수한 뒤 우리의 세금으로 정화작업을 하며 그나마 정화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상세히 공개한 적이 없다. 
 
더욱이 최근에는 미국과 5개의 미군기지(캠프 호비 사격장, 캠프 이글, 캠프 롱, 부산 DRMO, 캠프 캐슬)를 두고 반환협상 중 부산 DRMO와 동두천 캠프 캐슬의 토양오염을 아예 우리 정부가 맡아서 정화하기로 하였다.7)  
 
이는 어렵사리 합의한 공동환경평가절차(Joint Environmental Assessment Procedure)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결정이며 더 나아가서 그동안 환경부가 견지해 오는 듯했던 오염자부담원칙을 공개적으로 포기한 것임과 동시에 미군주둔의 필요성을 주장, 관철한 과정에서 발생한 국민의 피해에 대해 정부가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미군기지의 오염문제를 정의롭고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대로 된 조사와 그 결과의 정확한 해석이 필요조건이라면, 그를 근거로 직접 오염의 피해를 입은 주변지역 주민과 국민을 대표하는 우리 정부와 미군 혹은 미국정부 간의 합의가 충분조건일 것이다. 
 
환경오염을 둘러싼 갈등은 본래부터 간단치가 않다. 특히 미군기지 오염은 양국 정부가 내세우는 국방, 외교, 안보 등의 기세에 짓눌려 제대로 된 협상은 더욱 어려울 것이라는 짐작이 든다. 
 
그동안 우리 정부의 소극성을 참다못해 시민사회단체들과 일부 정치인이 소파의 개정 요구 등 문제제기를 해온 것은 위에서 말한 충분조건을 채우기 위한 노력이다. 2009년부터 새롭게 적용되는 공동환경평가절차는 이러한 노력의 한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는 오염조사 과정이 얼마나 충실하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는 그동안 별로 문제제기가 없었다. 그러나 그간의 오염조사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해 온 경험에 비추어 대부분의 오염조사가 적절하거나 충분히 이루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03959447_R_0.jpg» 2011년 6월23일 경북 칠곡군 왜관읍 캠프 캐롤 앞에서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이장규 신부가 고엽제 매립 의혹에 대한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칠곡/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또한 조사결과가 최선의 과학적 지식으로 면밀하게 검토되었다고 보기도 힘들다. 심한 경우 조사결과를 뒤집는 결론을 내놓기도 한다.

 
예를 들어, 캠프 캐럴에 대한 한·미 공동조사에서는 예전의 조사를 통해 오염되었음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구역의 오염도를 다시 파악하느라 시간과 예산을 소모하는 등 조사의 목적과 전체 범위가 불분명하거나 적절하지 못했다.  
 
매립되었다 하더라도 이후 수십년 동안 분해되어 어차피 지금은 검출되지도 않을 고엽제 성분의 검출 여부와 나중에 다시 파내 기지 외부로 반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엽제 드럼통의 발견 여부 등으로 고엽제 매립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조사방법은 처음부터 부적절했다. 
 
게다가 표토보다 더 높은 농도로 수미터 지하에서 발견된 다이옥신은 고엽제의 매립 가능성을 지지하는 증거인데도  단지 농도만을 문제 삼아 매립된 적이 없는 것으로 내린 결론도 부적절했다.8)

 

table3.jpg

  

출처: 참고문헌 1


13일치 뉴스를 보면, 과거 캠프 마켓에서 맹독물질인 폴리클로로비페닐(PCB)을 처리했다는 미군 기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를 사전에 알았더라면 2012년과 2013년 두 번에 걸친 캠프 마켓 조사의 내용과 초점이 달라졌을 것이고 좀 더 진전된 조사결과를 얻게 됐을 것이다. 
 
미군기지 오염문제에서도 결국 오염자인 미군이 자료를 적극 공개하거나 우리 정부가 공개를 적극 요구하는 것이 오염 해결의 비용과 시간 등 사회적 자원과 갈등을 최소화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첫걸음이다.  
 
■ 참고문헌
 
 1) 캠프 캐럴 한미 공동조사 최종조사결과보고서, 2012.
 2) 부평 캠프 마켓 주변지역에 대한 1단계 환경기초조사 보고서, 2012.
 3) 녹사평역 유류오염 지하수 확산방지 및 외곽 정화용역보고서, 2015.
 4) 2014년도 캠프 킴 유류오염 지하수 확산방지 및 외곽 정화용역보고서, 2015.
 5) 캠프 캐슬 환경오염조사 및 위해성 평가 보고서, 2013
 6) 주한미군기지이전지원사업단 국회국방위 제출자료, 2011.
 7)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82064.html.
 8) http://ecoi.tistory.com/entry/캠프 캐럴의 오염도 조사결과에 대한 평가의견
 
이동수/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환경과 공해연구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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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부정부패학살정권퇴진 외친 정의로운 모든 코리아연대회원들 즉각 석방하라!>

 
  • [사회] 〈박근혜부정부패학살정권퇴진 외친 정의로운 모든 코리아연대회원들 즉각 석방하라!〉
  •  
    코리아연대(자주통일과민주주의를위한코리아연대)가 박근혜<정권>의 최선두에서 민중들을 탄압하는 종로경찰서와 맞짱을 뜨고 있다. 
     
    코리아연대는 오후4시 서울 광화문 세월호농성장에서 <박근혜쿠데타<정권>퇴진 및 코리아연대회원들석방 촉구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부정부패학살<정권>퇴진을 외친 정의로운 모든 코리아연대회원들을 즉각 석방하라>고 촉구했다. 
     
    먼저 131일째 민주주의와수호와 공안탄압저지를 위한 시국농성을 벌이고 있는 코리아연대 이상훈공동대표가 규탄발언에 나섰다. 
     
    이공동대표는 <민중들의 <박근혜<정권>퇴진>요구에 부응해 지영철코리아연대전공동대표와 한지은회원이 청와대까지 진출해 <박근혜퇴진!>을 외쳤고 바로 종로경찰서로 긴급연행됐고, 이를 취재하던 여기자를 202경비단소속 남성경찰이 뒤에서 껴안는 성추행을 당하며 폭력연행당했다.
     
    이에 코리아연대회원들은 종로경찰서앞에서 평화적으로 규탄기자회견을 열었다.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4명의 코리아연대회원과 1명의 시민을 미란다원칙도 고지하지 않은 채 폭력연행했고, 이송하는 버스안에서도 폭언·폭행을 서슴지 않았다. 코리아연대는 다시 오늘오전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어제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자마자 <모욕죄>, <명예훼손>을 이유로 3명을 폭력연행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어 <경찰은 공권력운운하기 전에 기본적으로 국민의 표현의 자유를 생각해야 한다. 경찰이 박근혜의 하수인으로 잘잘못을 파악하지 않고 폭력을 일삼는 경찰들에게 <미친개>라고 하는 것이 표현의 자유고 기본권>이라고 밝히고, <불법적으로 권력을 가진 박근혜가 퇴진하라는 것이 법에 위반되는가?>라고 물은 후,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하는 권리가 국민에게 있다. 우리는 국민들과 함께 싸워나갈 것이다. 박근혜<정권>퇴진을 위해 반드시 청와대로 향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사회연구소 권오창이사장은 <만주벌판에서 독립군을 때려잡던 다까끼 마사오, 박정희가 해방후 5.16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주의를 망쳐먹고 유신통치로 국민을 탄압하더니 그의 딸 박근혜는 부정선거로 대통령이 되고 세월호참사로 304명의 생떼같은 학생들을 수장시켰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어 <이땅에는 박정희 없는 유신통치가 진행되고 있다.>며 <멀쩡하게 합법적인 정당을 해체하고 코리아연대청년들을 가둬놓고 세월호참사를 본체만체하는 이런 대통령 필요 없다. 우리가 단결해서 반통일, 반민중 정권 박근혜<정권>을 몰아내고 우리민족끼리 통일해서 좋은 세상을 만들자. 함께 투쟁해 나가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공동대표와 함께 시국농성을 벌이고 있는 코리아연대 김정희전공동대표는 <코리아연대가 5월16~18일 진행한 집회와 기자회견은 모두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투쟁이고 행동이었다.>며 <불법을 자행한자가 누구인지 다시묻고싶다. 16일 코리아연대회원의 청와대진격투쟁을 취재하던 여기자를 성추행하면서 연행한 곳이, 아이들을 잃고 힘겹게 목숨을 이어가는 가족들을 무참히 끌어내는 곳, 평화적으로 기자회견하던 시민들을 무참히 연행한 곳도 모두 종로경찰서>라고 맹비난하고, 박근혜<정권>은 <광견찰> 종로서장을 당장 파면하라, 박근혜는 세월호참사와 불법자금에 대해 책임지고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끝으로 코리아연대 이상훈공동대표가 낭독했다. 
     
    코리아연대는 <온갖 불법과 폭력을 자행한 <광견찰들의 우두머리>인 윤명성종로서장의 파면>을 강력요구하고, <박<정권>퇴진>을 정의롭게 외치다 연행된 지영철전공동대표를 비롯한 회원들, 여기자, 평화적인 기자회견을 열다가 연행된 코리아연대회원 7명과 영문도 모른채 황당하게 연행된 일반시민 모두를 당장 석방할 것>을 강력촉구했다. 
     
    그러면서 <5.16군사쿠데타, 5.17군사쿠데타는 모양만 바꿔 여전힌 현재진행형>이라며 <군대를 동원해 청와대를 장악한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와 정보원·돈을 동원해 청와대를 차지한 박근혜의 <선거쿠데타>사이에 어떠한 본질적 차이가 있는가.>라고 꼬집었다.
     
    계속해서 <세월호참사는 단순사고가 아니라 <광주학살>과 다름없는 <세월호학살>>이라며 <5.17군사쿠데타에 맞서 5.18항재에 떨쳐나선 광주시민처럼 <12.19선거쿠데타>에 맞서 <오늘의 5.18항쟁>에 떨쳐나서야 한다.>고 밝히고 <광주항쟁정신을 계승한 민주시민들, 우.리민중들은 청와대앞, 광화문거리를 오늘의 전남도청앞, 금남로로 삼고 <오늘의 광주항쟁>, <오늘의 민중항쟁>을 일으켜 반드시 박<정권>을 끝장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청와대앞 분수대광장에서 202경비대소속 경찰들에게 폭력연행된 코리아연대회원 2인과 여기자는 이날오후5시30분경 석방됐다. 
     
    지영철전공동대표는 <비록 5분이지만 박근혜퇴진구호를 외쳤고 코리아연대가 청와대에 왔다는 구호를 외쳤다.>며 <7명이나 석방투쟁하다가 연행됐다고 하는데 7명이 석방될 수 있도록 투쟁하겠다. 코리아연대의 청와대를 향한 행진 투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지은회원은 <박<정권>과 종로경찰서가 얼마나 <악질>인지 새삼 다시 느끼게 됐다. 석방투쟁, 박근혜퇴진투쟁 열심히 하겠다.>고 결의했다.  
     
    다음은 기자회견문 전문이다.
     

    박근혜부정부패학살정권퇴진을 외친 정의로운 모든 코리아연대회원들을 즉각 석방하라!

     

    지난 5월16일 오후 5시45분경 129일째 기독교회관 등에서 농성중이었던 코리아연대 지영철전공동대표와 한지은회원은 청와대앞분수대 근처에서 <선거쿠데타민주파괴! 박근혜정권퇴진하라!>가 적힌 플랭카드를 펼치고 <부정선거로 당선된 박근혜는 퇴진하라!>·<세월호는 학살이다!>구호를 외쳤다. 이는 세월호유족들을 비롯한 민주시민들이 절절히 바라는 청와대를 향한 정의로운 실천행동이었으며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 

     

    그러나 불법정권아래 폭력<견찰(犬察)>은 코리아연대회원들을 폭력적으로 연행할 뿐 아니라 이 과정을 취재하는 21세기대학뉴스 여기자까지 연행하는 폭거를 자행하였다. 여기자가 어떤 사진촬영도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남자<견찰>이 뒤에서 껴안고 온몸을 밀착하며 성적 수치심을 자극하는 성추행까지 노골적으로 자행해 충격을 주고있다. 이과정에서 이를 관할하는 청와대202경비단과 그 단장출신인 윤명성이 서장으로 있고 코리아연대회원들과 여기자를 수감한 종로서는 어떠한 제재나 조치도 취하지않았으며 민주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불법적인 감금을 지금 이순간까지 계속하고 있다. 우리는 한마디로 이 사건이야말로 박근혜정권과 청와대202경비단, 종로<광(狂)견찰서>의 불법성과 폭력성이 단적으로 드러난 반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인 폭거로 준열히 규탄한다. 

     

    또한 <광주민중항쟁계승과 박근혜정권퇴진촉구 집회> 후 진행된 평화적인 행진은 정확히 신고되고 허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불법적으로 봉쇄되었고 불법채증이 노골적으로 자행되었다. 그뿐 아니라 연행자들석방을 촉구하는 평화적인 기자회견마저 삽시간에 야만적으로 무산시키고 4명의 코리아연대회원들과 1명의 전혀 무관한 일반시민까지 무차별적으로 연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과정에서 폭력<견찰>들은 미란다원칙을 고지하지 않았고 버스안에서 <씨발놈아 앉아!>라고 폭언하며 목을 조르고 무릎으로 어깨와 팔을 짓누르는 등 심각한 폭언폭행이 난무하였다. 종로서 뒤에서 식당영업을 하는 일반시민은 이유도 모른 채 코리아연대회원으로 오인돼 황당하게 연행되어 인권위에 진정이 제출되며 항의중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또한 5월18일 오늘 오전11시경 종로<광견찰서>앞에서 완전히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진행된 <종로광견찰서장파면 및 코리아연대회원들석방 촉구기자회견>에 불법으로 난입해 양고은코리아연대공동대표를 비롯 코리아연대회원 3명을 야수적으로 폭력연행한 종로<광견찰서>를 준열히 규탄한다. 

     

    이에 우리는 온갖 불법과 폭력을 자행한 <광견찰들의 우두머리>인 윤명성종로서장의 파면을 강력히 요구한다. 또한 온나라에 들끓고 있는 민심을 반영해 청와대를 향하며 <박근혜정권퇴진>을 정의롭게 외치다 연행된 코리아연대 지영철전공동대표를 비롯한 회원들과 이를 취재하다 황당하게 연행된 여기자와 이 연행자들의 석방을 평화적인 기자회견으로 주장하다 연행된 코리아연대회원 4명과 오늘 또다시 연행된 코리아연대회원 3명, 그리고 역시 영문도 모른 채 황당하게 연행된 일반시민 모두를 당장 석방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오늘 우리는 5.18광주민중항쟁 35돌을 맞이한다. 1000여명의 육사생도를 끌어모아 5.16쿠데타지지시위를 하고 박정희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보안사령관이 된 전두환이 5.17쿠데타를 통해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도륙하고 학살한 그 5월광주를 어찌 잊을 수 있는가. 

     

    5.16군사쿠데타, 5.17군사쿠데타는 모양만 바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대선에서 <관권>·<금권>·<언권>을 동원한 전대미문의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이미 원세훈전정보원장에 대한 구속으로 천문학적인 <관권부정선거>가 법률적으로도 확증되었고 최근 성완종불법정치자금과 관련한 <금권부정선거>도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래서 <성완종게이트>의 몸통인 박근혜도 당장 수사하라는 여론이 빗발치고 있다. 박근혜정권에게서는 정통성과 합법성을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묻는다. 군대를 동원해 청와대를 장악한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와 정보원·돈을 동원해 청와대를 차지한 박근혜의 <선거쿠데타>사이에 어떠한 본질적 차이가 있는가. 

     

    세월호참사 역시 단순사고가 아니라 <광주학살>과 다름없는 <세월호학살>이다. 꽃다운 나이의 300여명의 아이들이 어느날 갑자기 모두 목숨을 잃었다. 충분히 구할 수 있었던 <7시간>동안 박근혜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광주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하였던 5.18과 세월호에 탔다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하였던 4.16은 본질에서 하등의 차이가 없다.

     

    한마디로 박정희가 전두환이고 전두환이 박근혜이다. 5.16군사쿠데타가 5.17군사쿠데타로 이어졌고 또다시 <12.19선거쿠데타>로 이어졌다. 올해 광주민중항쟁35돌을 맞으며, 광주민중을 비롯한 우리민중 모두는 전두환이 가장 존경하고 본받은 박정희의 딸이 누구인가를, 오늘의 전두환이 누구인가를 똑똑히 알아야 한다. 그 전두환의 당을 계승한 당이 어느당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5.17군사쿠데타에 맞서 5.18항쟁에 떨쳐나선 광주시민처럼 <12.19선거쿠데타>에 맞서 <오늘의 5.18항쟁>에 떨쳐나서야 한다. 지금 우리가 심장에 새겨야 할 광주민중항쟁정신은 박정희·전두환의 후예인 박근혜와 새누리당을 끝장내는 투쟁을 광주항쟁처럼 벌이겠다는 결사항전의 각오이다. 광주항쟁정신을 계승한 민주시민들, 우리민중들은 청와대앞, 광화문거리를 오늘의 전남도청앞, 금남로로 삼고 <오늘의 광주항쟁>, <오늘의 민중항쟁>을 일으켜 반드시 박근혜정권을 끝장낼 것이다. 

     

    코리아연대회원들을 비롯 모든 연행자를 즉각 석방하라!

    불법폭력 <광견찰> 윤명성종로서장 즉각 파면하라!

    여기자연행·성추행 폭력<견찰> 즉각 구속하라! 

    여기자연행·성추행 청와대202경비단장 즉각 파면하라!

    세월호는 학살이다. 박근혜는 물러가라! 

    성완종 불법정치자금 박근혜도 수사하라!

    오늘의 박정희, 전두환인 박근혜를 끝장내자! 

    학살정권 부정부패정권 박근혜<정권> 퇴진하라!

     

    2015년 5월18일 

    자주통일과민주주의를위한코리아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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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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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군 창설 65주년과 숙대 ‘여성 안보전문가 육성’ 프로그램

 
2015. 05. 18
조회수 67 추천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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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군단에서 시행한 청파무제에서 찍은 예도무 사진


 여군이 창설된 지 65주년을 맞았다. 2014년 한국 여군의 수는 8천3백여 명으로 전체의 2.9% 수준이다. 최근 여군 비율을 2020년까지 전체 병력의 5.6% 수준인 1만1천500여 명으로 확대하는 국방개혁이 추진되고 있다. 이에 맞물려 여성안보전문가 육성도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대적인 게 숙명여자대학교의 ‘여성 안보전문가 육성’ 프로그램이다. 
 숙명여대는 국가안보와 큰 인연을 맺어왔다. 애초 학교 창설자가 조선 말 육군참장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파일럿 이정희 공군대위 또한 숙명여대 출신이다. 2009년에는 국내 제1호 ‘여성 학생군사교육단(ROTC)’ 창설되어 매년 장교 30명을 배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학부과정에서는 ‘안보학 연계전공’, 국제관계 대학원에서는 ‘글로벌 안보협력 전공’이 있으며 ‘안보학 연구소’까지 있다.  숙명여대를 중심으로 여성과 국가안보, 그 오랜 인연을 되짚어 봤다.

여군들 너무 잘나가서 학군단 순위 공개 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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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자대학교 백주념기념관 앞에서 찍은 학군후보생들의 모습


 안보 분야에서 여대생의 위상은 단연 학군단 성적에서 드러난다. 숙명여대는 지난 2012년 학군단 하계훈련에서 109개 학교 중 종합 1위를 차지했고 2012~2013년 동계훈련에서는 성신여대가 110개 학교 중 1위의 성적을 거뒀다. 여대생들이 2012년부터 화생방과 통신장비, 개인화기, 유탄발사기 등의 과목에서 남자 학군단을 누르고 종합 1위를 차지한 것이다. 게다가 2013년에는 학군사관후보생 4천500여 명 중 졸업성적 1위는 숙명여대 학군단 1기 박기은(당시 23·체육교육과)후보생이 차지했다. 숙명여대와 성신여대 학군단이 2014년과 올해 차례로 110개 학군단 중 훈련 성적 1위를 차지한 데 이은 여성 돌풍이었다. 
 오죽했으면 2014년 여학교 학군단이 계속 상위권을 차지하자 군은 서열화에 따른 사기저하를 우려해 순위매기기를 중단했다. 
 올해 학군사관후보생에 지원한 신혜진(글로벌 협력학과 2학년)학생은 현재 1차 서류평가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학군단에 지원한 이유를 물었더니 “안보에 대해서 아직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앞으로 안보분야에서 일을 하려면 군경험이 필요할 것 같아서 지원했다”며 “혹시 군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을까 걱정도 됐다. 안보에 가장 가까운 분야가 군이라 생각해서 필수로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국가안보의 안방마님 숙명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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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보학 과목인 ‘북한학’수업 중 정재욱 교수와 학생들


 숙명여대는 2009년 국내 최초 여성학군단(ROTC)을 설립했다. 후보생 중심으로 안보학 과목들을 만들었고, 안보학 연계전공을 개설하면서 후보생이 아닌 일반 학생들이 복수전공으로 안보학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숙명여대 안보학 과정은 독립적인 전공은 아니며 각기 다른 전공을 택한 학생들이 연계전공으로 택하는 과정이다. 
 여성 국방․안보 전문가 육성 및 진출을 위해 국내 일반대학교 최초로 개설한 안보학 전공 학위과정이다. 현재 20명의 학생이 안보학 과정을 밟고 있다. 정치외교학과가 다수지만, 역사학과 아동복지학과 생명과학과 등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관심을 갖고 공부 중이다. 
 이 과정은 여성 안보전문가로서 다양한 분야의 연구 및 진출에 요구되는 전문지식을 집중적으로 함양시키는 데 있다. 교과목을 살펴보면 국가안보론, 북한학, 안보리더십, 전쟁과 무기, 국제법, 국제안보론, 국제협상과 위기관리, 외교정책의 이해 등이다.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의 특성상 안보 전문가가 진출할 수 있는 분야는 광범위하다. 특히 점점 더 전통적·비전통적 안보문제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국방부, 국정원, 통일부와 국방․안보 관련 국책연구소 그리고 국내외 국방안보 관련 언론기관, 기업체 등에 끊임없는 수요가 있다. 
 숙명여대에서 안보학을 연계전공으로 공부하고 있는 최보윤(역사문화학과, 3학년)씨는 안보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를 “역사학이 전공인데 역사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전쟁에 대해서 흥미를 갖게 되고 어떻게 진행되는 지 자연스럽게 궁금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사실 20대는 전쟁을 대중매체 등으로만 접한 경우가 대다수다. 이들을 위한 눈높이 통일안보 교육이 중요한 이유다. 숙명여대에서 매주 수요일 열리는 ‘생활 속 북한 알기’ 강좌가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강연에서는 북한방문 경험이 있는 전문가 등이 생생한 통일·안보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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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 속 북한 알기’ 강좌를 듣는 학생들과 강의계획서


 김예진(미디어학부 2학년)씨는 “과거에 들은 북한 관련 강의는 이론이나 책 위주였는데 이 과목은 북한 주민들의 생활을 체험한 분들이 직접 설명해줘 신기하다”고 말했다. 강좌는 젊은이들이 북한을 알아야 통일이 가능하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황선혜 숙명여대 총장은 “박근혜 대통령도 청년들이 나서 통일을 연구하고 남·북간 벽을 허물 길을 찾는 데 동참해 달라고 말했는데 이 강의가 롤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교육을 바탕으로 숙명여대는 육군사관학교가 주최하는  ‘전국 대학생 안보토론대회’에서 출중한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이 대회는 육·해·공군 사관생도는 물론 국내 52개 대학교 학생들과 미국·일본·이탈리아 등 6개국 사관학교 외국인 생도들도 참가한다. 2013년에는 박소원(정치외교·11), 허선필(정치외교·12)씨가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최우수상을 받은 허선필씨는 “관련 경험이 없는 학생들도 대회에 참가하면서 안보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됐다”며 “군과 안보를 남성들만의 영역으로 치부하지 말고 우리들도 건강한 안보의식을 가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여성 안보전문가, 학부부터 연구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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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학 연구소 설립목적 

 숙명여대 국제관계대학원에는 ‘글로벌 안보협력’ 전공과정이 있다. 모든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며 국제사회에서 제기되는 인간, 집단, 국제전 등 다양한 안보쟁점들을 글로벌 거버넌스 관점에서 다룬다. 
 예비역 장성출신 또는 국제기구 및 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전임 및 겸임 교수진들은 현장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한다. 국제관계대학원 내 ’글로벌 안보협력’ 전공은 국내 유일전공으로 졸업자들을 국제기구나 대사관으로 진출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12년 숙명여대는 국내 대학에서는 처음으로 국방부 제안 ‘사업계획서’를 바탕으로 “안보학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여성 국방안보 메카로 도약할 수 있는 연구기관으로 발전하기 해서다. 이화여대의 ‘통일학 연구소’, 성신여대의 ‘동아시아연구소’도 있지만 안보학 분야에서 여성 전문가를 양성하고 배출하기 위한 연구소로는 숙대 안보학연구소가 유일하다. 
 뿐만 아니라 숙명여대는 국방, 안보 전문가 양성을 위한 다양한 커리큐럼을 개발하고 있다. 1년에 한번씩 학술논문집 ‘안보학 저널’을 발간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며 ‘평생지도교수제’를 통해 국방 안보분야 진출 희망자를 위해 국방관련 연구소 인턴을 추천해주는 등 체계적인 경력관리 및 컨설팅도 마련하고 있다. 또한 국방정책학회, 유엔군사령부, 국방대학교 등 주요 안보기관과의 교류 협력을 통해 채널을 구축하고 세미나를 통해 학술교류를 하고 있다. 한국국방정책학회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했고, 학술세미나 연 3-4회 개최된다. 
 안보학연구소는 2013년10월31일에는 ‘한반도 안보와 통일 기원 콘서트’를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서 한민구 당시 합참의장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국방안보’를 주제로 기조연설을 했다. 또 GK전략연구원 배정호 이사장이 ‘한반도 통일의 당위성과 과제’에 대해 강연했다. 
 지난 3월 27일에 안보학 연구소의 주관으로 한국국방정책학회, GE코리아와 함께 "사드(THAAD), 한국은 어떻게 해야하나?"를 주제로 안보학술 콜로키움을 개최했다. 이처럼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여성안보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한 학술회가 열리고 있다. 숙명여대 관계자는 “지금까지 안보 및 국방 분야에 특화된 민간전문가를 양성해 낼 전문적인 연구기관이 부재한 상황에서 숙명여대 안보학연구소 설립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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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출신 안보전문가 이민룡 교수

 숙명여대 안보학 관련 과목을 책임지고 있는 이민룡 교수(이하 이교수)와 정재욱 교수(이하 정교수)를 만났다. 두 교수 모두 육사 출신으로 안보분야 전문가이다. 숙명여대로 온 후 두 교수는 학부과정에 '안보학 연계 전공', 국제대학원에 '글로벌 안보협력 전공'을 개설하는데 기여하고, 안보학연구소에서 학술세미나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등 국방 및 안보분야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학술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현재 한국국방정책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안보학 연구소장 이민룡 교수(이하 이 교수)는 2011년 8월부터 숙명여대에서 안보학을 강의하고 있다. 이 교수는 2009년에는 장군(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여 교수부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숙명여대로 옮기기 전에는 육군사관학교에서 30여년 정치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는 그동안 '자원안보', '환경안보'를 한국 사회에 최초로 소개하고, 관련 이론을 정립하고 연구 활동을 꾸준히 전개해오고 있다. 특히 숙명여대로 자리를 옮긴 이후 국제 저명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고, 매년 학술서적을 펴내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특이한 이력 (사관학교와 여성대학 교수)과 그의 활발한 연구활동을 인정하여 세계적으로 권위를 자랑하는 세계 인명사전 'Who's Who in the World'에서 2016년 등재 후보자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정재욱 교수는 현재 한국국방정책학회와 한국유엔체제학회 이사를 맡고 있다. 정교수는 독일 통일문제연구소, 비확산연구소 초빙 연구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2006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북핵 6자 회담’에 국방부 대표로 참석했고, 2005년부터 5년간 국방부 정책실 북한 정책과에서 총괄장교를 역임한 이력이 있다. ‘일본 방위 산업의 변화와 한국의 대응전략’, ‘북한의 군사 도발과 적극적 억지전략의 국면방향’,‘북한의 군사도발과 한국의 대응전략’등 주요 학술지와 국방저널, 국방개혁보고서에 지속적으로 연구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 안보학 연구소를 설립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민룡 교수(이하 이): 학군단 설치 제안서를 국방부에다 제출할 당시 연구소를 설립하겠다고 제안했다. 그 이유는 국내 최초 여자대학 학군단을 설치하면서 이 기회에 안보학 학술연구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국내 대학 연구소 실태를 조사했는데, 안보학 분야 연구소는 숙명여대가 최초였다. 그래서 안보학 연구소의 가장 중추적인 역할은 여성 인재를 안보-국방분야에 진출시키도록 저변에서 도와주는 일을 꼽는다. 안보학을 연구하는 고급 인재를 석사, 박사로 키워내고, 학부 졸업생들에게는 안보 국방분야 공직에 진출시키는 한편, 국내 기업체에는 주로 방위산업체로 취업을 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추진하는 것이다.

 -안보학 연계전공은 여대 중에서 숙대가 유일한데, 차별화된 부분이 있는가?
 =이: 차별화 된 부분은 글로벌 환경에서 전공 학생들을 국제기구로 진출시킨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여성 안보학 전공 학생들은 미래에 국제사회로 진출하여 유엔이 지향하는 인간안보, 환경안보, 지구안보 쟁점 영역에서 기여할 분야가 많이 있다고 본다. 현재 우리대학에서는 안보분야 뿐만 아니라 통일 분야 전공 까지를 포괄하여 새로운 연계전공으로 추진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학생들이 교육과정을 이수한 후에는 진로를 어느 쪽으로 가는가?
 =정재욱 교수(이하 정): 군대 쪽에는 학군 장교 뿐만 아니라 학사장교로 진출하도록 도와주고 있고, 기업체 쪽으로는 주로 방위산업체를 운용하는 기업체로 진출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리고 국방 분야에서 선발하는 군무원 시험에도 응시하도록 컨설팅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해 여성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면 무엇이 있는가?
  =정: 미래 우리나라의 안보환경을 예측했을 때 향후 10년 후가 되면 여성도 군대로 진출할 여지가 높아질 것이고 본다. 남자들처럼 징병제도는 아니겠지만 모병제로 갈 가능성이 크다. 특히 민간인 신분으로 국방 안보조직에 진출할 기회가 확대되고, 국제사회에도 인간안보 환경안보 분야에서 여성들이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육사 교수로 재직한 이력이 있는데, 수업이해력에 있어 생도들과 여대생들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이: 육사 생도들은 안보의 하드웨어 측면에서 강하지만 여대생들은 소프트웨어 측면에서 매우 강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안보분야에서도 정보 분석, 정밀한 무기 관리, 행정 합리화, 환경 코드 해석 등 여성 인재들이 두각을 나타낼 분야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미래에는 숙명여대 출신의 여성 인재들이 국방 안보 분야에서 지도층을 형성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만큼 숙명여대 학생들이 활동적이고 국방 분야에 적합한 소양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 마지막으로 안보학과 학생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이: 숙명여대에서 안보학을 전공한 학생들은 개척자나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이제 막 개척해서 나간다는 마인드를 가져야 하고, 여기서 배운 잠재력을 가지고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로 진출해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전공 학생 각자가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고, 남다른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정혜수 인턴기자 hally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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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일격 암시하는 북극성-1호

최후일격 암시하는 북극성-1호
 
한호석의 개벽예감 <159>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2015/05/18 [20:41]  최종편집: ⓒ 자주시보
 
 

<차례>
1. 수중시험발사장에 나타난 신포급 전략잠수함
2. 바닷물 가르며 솟구쳐 오른 탄도미사일 2발
3. 발사수심 50m에서 대기하는 전략핵탄미사일 
4. 조선은 대서양에서 최후일격 날린다   

 

▲ <사진 1> 2015년 5월 9일 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장에 나타난 조선의 전략잠수함은 외부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잠수함이다. 그런데 그 잠수함은 전략잠수함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작은 잠수함이다. 전략잠수함에는 가압경수로와 탄도미사일이 들어가야 하는데, 이 사진에서 보는 조선의 전략잠수함은 크기가 너무 작다. 크기가 저렇게 작은 경량급 잠수함이 어떻게 전략잠수함으로 될 수 있을까?      ©자주시보

 


1. 수중시험발사장에 나타난 신포급 전략잠수함

 

핵탄미사일로 무장한 최강의 수중전략무기는 전략잠수함이다. 전략잠수함들에는 강력한 추진력을 뿜어내는 가압경수로가 설치되었다. 가압경수로를 잠수함에 설치하면, 잠수함의 중량이 그만큼 더 무거워지고, 몸집도 더 커진다. 5대 핵강국들인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이 모두 비대화된 중량급 전략잠수함을 운용하고 있다. 중량급 전략잠수함을 비대한 순서대로 열거하면, 러시아의 아쿨라급(Akula-class) 전략잠수함은 48,000t, 미국의 오하이오급(Ohio-class) 전략잠수함은 18,750t, 영국의 밴가드급(Vanguard-class) 전략잠수함은 15,900t, 프랑스의 트리옴팡급(Triomphant-class)급 전략잠수함은 14,335t, 중국의 진급(Jin-class) 전략잠수함은 11,500t이다.


이런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조선의 전략잠수함도 중량급 잠수함일 것이라고 상상하였다. 그런데 <사진 1>에서 보는 것처럼, 2015년 5월 9일 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장에 모습을 드러낸 조선의 전략잠수함은 두 눈을 의심하리만치 작은 경량급 잠수함이었다.


전략잠수함에는 가압경수로, 탄도미사일, 중어뢰를 모두 설치해야 하므로 중량급으로 설계될 수밖에 없는데, 조선의 전략잠수함은 크기가 너무 작아서 중어뢰 이외에 가압경수로와 탄도미사일은 들여놓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 성공소식을 전한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보도기사의 제목에 “전략잠수함 탄도탄수중시험발사에서 완전성공”이라고 썼고, 보도기사의 본문에서도 그 잠수함을 전략잠수함이라고 수차례 명기하였다. 조선에서는 전략잠수함이라는 말을 다른 뜻으로 쓰는 것일까?

 

▲ <사진 2> 신포급 잠수함은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을 함교 안에 수직으로 설치하였다. 그 발사관 안에 탄도미사일이 들어있다. 그렇게 하면 경량급 잠수함에서도 얼마든지 탄도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 다른 핵강국들이 운용하는 중량급 전략잠수함들은 함교가 아닌 함체 안에 수중미사일발사관을 10문 이상 수직으로 설치하였다. 하지만 유사시 조선의 전략잠수함들은 그처럼 많은 탄도미사일을 발사할 필요가 없다. 조선이 말하는 최후일격은 한 방으로 끝내버리는 핵타격이기 때문이다.     © 자주시보

 

 
▲ <사진 3> 위쪽 사진은 신포급 잠수함을 촬영한 것이고, 아래쪽 사진은 조선의 로미오급 잠수함을 촬영한 것이다. 함교의 크기와 높이를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를 알 수 있다.    ©자주시보


미국 국방부는 조선이 이번에 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에 사용한 잠수함을 신포급 잠수함이라 부른다. 조선에서는 크고 무거운 탄도미사일을 경량급인 신포급 잠수함에 어떻게 설치하였을까? <사진 2>에서 보는 것처럼, 조선에서는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을 함교 안에 설치하도록 독특하게 설계하였다. <사진 3>에서 보는 것처럼, 조선의 로미오급 잠수함의 함교와 신포급 잠수함의 함교를 비교하면, 신포급 잠수함의 함교높이가 더 높고 특히 함교폭이 훨씬 더 넓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이 들어갔으니 신포급 잠수함의 함교가 그처럼 커진 것이다.


그런데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을 함교 안에 설치하는 경우, 문제가 생긴다. 잠수함 함교 안에는 4가지 장비가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데,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을 설치하고 남은 공간에는 도저히 그 4가지 필수장비를 들여놓을 수 없다는 게 문제다. 함교에서 해수면 위로 떠밀어 올려놓고 사용하다가 필요에 따라 함교 안으로 완전히 집어넣는 4가지 필수장비는 통신장대(communication mast), 레이더장대(radar mast), 전자교란장대(ECM mast), 잠망경이다.

 

▲ <사진 4> 신포급 잠수함 함교부분을 확대한 사진이다. 붉은 원으로 표시된 부분은 잠수함으로 드나드는 2개의 출입문이다. 함교 안에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을 설치하였으므로, 출입문을은 함교 바깥쪽에 냈다. 푸른 원으로 표시된 미확인 물체가 함교 꼭대기에 설치되었다. 조선의 전략잠수함은 잠망경, 레이더장대, 전자교란장대, 통신장대를 함교에 일렬로 길게 늘어놓지 않고 그 물체 안에 모두 집어넣었다. 함교 안에 수중미사일발사관을 설치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 자주시보


신포급 잠수함의 함교부분을 확대한 <사진 4>를 보면, 붉은 원으로 표시된 것이 잠수함으로 드나드는 2개의 출입문임을 알 수 있는데, 푸른 원으로 표시된 미확인 물체도 보인다. 소형 선박의 돛대 비슷하게 생긴 그 물체는 함교 상판 뒤쪽에 설치되었다. 조선의 잠수함설계가들은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이 설치된 함교에서 통신장대, 레이더장대, 전자교란장대, 잠망경을 일렬로 늘어놓을 공간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그것은 모두 한 다발로 묶은 물체를 함교 뒤쪽에 그렇게 설치한 것이다. 


미국의 해군전문 웹싸이트 <커벗 쇼어즈(Covert Shores)>에 현시된 ‘분석-신포급 탄도미사일 잠수함’이라는 제목의 자료에 따르면, 신포급 잠수함의 함체길이는 68m이고, 함체폭은 6.5m로 추산된다. 한국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한 <조선일보> 2014년 11월 2일 보도에 따르면, 신포급 잠수함의 수중배수량은 2,500~3,000t, 함체길이는 67m, 함체폭은 6.6m로 추산된다.

 

▲ <사진 5> 이 사진에 보이는 프랑스의 루비급 잠수함은 함체크기가 신포급 잠수함과 거의 같은 경량급 잠수함이다. 그런데 그처럼 크기가 작은 루비급 잠수함에 가압경수로가 설치되었다. 조선의 언론매체들이 조선의 신포급 잠수함을 전략잠수함이라고 부른 것은 조선이 그 잠수함을 루비급 잠수함처럼 경량급 핵추진 잠수함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 자주시보


수중배수량이 2,500~3,000t밖에 되지 않는 경량급 잠수함 함교에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을 설치하였다면, 함체 안에 가압경수로도 설치할 수 있을까? 기존 핵잠보유국들이 운용하는 각급 잠수함들 가운데 수중배수량과 함체길이가 신포급 전략잠수함과 아주 비슷한 경량급 잠수함은 <사진 5>에서 보는 프랑스의 루비급(Rubis-class) 잠수함이다. 루비급 잠수함은 수중배수량이 2,600t이고, 함체길이가 73.6m이므로, 신포급 잠수함과 함체크기가 거의 같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신포급 잠수함과 크기가 거의 같은 루비급 잠수함에 48메가와트급 가압경수로 1기가 설치되었다는 사실이다. 수중배수량이 10,000t이 훨씬 넘는 중량급 핵추진 잠수함들에는 출력이 200메가와트가 넘는 대형 가압경수로가 설치되었지만, 크기가 작은 루비급 잠수함에는 소형 가압경수로가 설치되었다. 소형 가압경수로를 설치한 경량급 핵추진 잠수함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의 루비급 잠수함이 핵추진 잠수함이지만 전략잠수함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루비급 잠수함은 사거리 180km의 엑소제(Exocet) 대함미사일과 533m 중어뢰를 실을 뿐, 핵탄미사일은 싣지 못한다. 수중미사일발사관이 없는 루비급 잠수함은 어뢰발사관에서 엑소제 대함미사일을 수중발사한다. 핵탄미사일을 설치하지 못하는 루비급 잠수함은 전략잠수함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프랑스가 1970년대의 잠수함건조기술로 경량급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하였다면, 조선도 2000년대의 잠수함건조기술로 경량급 핵추진 잠수함을 능히 건조할 수 있다. 잠수함건조기술과 핵기술에서 조선보다 뒤떨어진 아르헨티나와 브라질도 핵잠건조사업에 착수했다는데, 지난 40년 동안 독자적인 잠수함건조기술을 축적해왔을 뿐 아니라, 고도의 핵기술까지 개발, 완성하여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만드는 조선이 어찌 핵추진 잠수함을 만들지 못하겠는가.


경량급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하는 데서 결정적인 문제는 소형 가압경수로를 만드는 기술인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하는 것은 녕변핵시설단지에 완공된 35메가와트급 경수로가 이미 2014년부터 시험가동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에게는 이전에 소형 가압경수로를 만들어 신포급 잠수함에 설치해본 선행경험이 있기 때문에, 녕변핵시설단지의 소형 경수로를 그처럼 매우 짧은 기간에 속성으로 건설할 수 있었다. 35메가와트 출력의 경수로는 경량급 핵추진 잠수함에 설치하기에 아주 적합하므로, 신포급 잠수함에 설치된 소형 가압경수로는 35메가와트급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신포급 잠수함은 몸집이 디젤전동식 잠수함만큼 작아도 핵추진 잠수함이기 때문에,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그 잠수함을 전략잠수함이라 부른 것이다.


조선에서는 전략잠수함을 설계할 때 기존 핵잠보유국들의 고정격식화된 발상과 완전히 결별하여 독자적으로 착상하였다. 기존 핵잠보유국들은 중량급 전략잠수함을 만들려고 서로 경쟁하지만, 조선은 정반대로 경량급 전략잠수함을 만든다는 것, 바로 그런 기발한 착상이 중량급 전략잠수함밖에 알지 못하는 세계핵잠건조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신포급 핵추진 잠수함의 작전능력은 어느 정도일까? 프랑스의 루비급 핵추진 잠수함은 침하수심 300m, 승조원 68명이며, 도중에 추가로 식량보급을 받지 않고, 해수면에 떠오르지도 않고 15,700km를 잠항하면서 60일 동안 계속 작전할 수 있다. 디젤전동식 잠수함의 최장잠항일수는 15일밖에 되지 않는다. 디젤전동식 잠수함은 시속 37km로 잠항하지만, 핵추진 잠수함은 시속 60km의 경이적인 속도로 바다속을 종횡무진 누빈다. 조선의 신포급 핵추진 잠수함도 그처럼 뛰어난 수중작전능력을 가졌다.

 

▲ <사진 6> 이 위성사진은 2014년 12월 18일 신포항 부두에 있는 신포급 잠수함을 촬영한 것이다. 그 잠수함에 수중미사일발사관을 설치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붉은 원으로 표시된 매우 큰 직사각형 구멍이 함교 상판에 나있는데, 그 구멍에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을 설치하는 것이다. 수중미사일발사관 설치작업에 사용하는 대형 기중기가 함교 바로 옆에 서 있다. 푸른 원으로 표시된 것은 미사일발사시험선박이다.     © 자주시보

 

 

2. 바닷물 가르며 솟구쳐 오른 탄도미사일 2발


2015년 5월 9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동해에서 배를 타고 현장에 나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신포급 전략잠수함의 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가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그 날 성공을 거두기까지 몇 달 동안 신포급 전략잠수함 1척이 신포항 부두에 계속 모습을 드러냈는데,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이 분석해온 위성사진들에서 그 잠수함의 예사롭지 않은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다. 


첫째, 2014년 12월 18일에 촬영된 <사진 6>은 신포급 전략잠수함에 수중미사일발사관을 설치하는 작업현장을 보여준다. 이 사진에서 붉은 원으로 표시된 것처럼 신포급 전략잠수함의 함교 상판에 매우 큰 직사각형 구멍이 하나 보이는데, 그 구멍에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이 들어가는 것이다. 수중미사일발사관을 함교 안에 수직으로 세워놓을 때 사용하는 대형 기중기가 함교 바로 옆에 서 있다.

 

▲ <사진 7> 이 위성사진은 2015년 3월 2일에 촬영된 것이다. 붉은 원으로 표시된 것처럼, 함교 상판에 열어놓은 수중미사일발사관 사출구 2개가 선명하게 보인다.   ©자주시보


둘째, 2015년 3월 2일에 촬영된 <사진 7>은 붉은 원으로 표시된 것처럼 함교 상판에 수중미사일발사관 사출구 2개를 열어놓은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을 함교 안에 설치하는 작업이 완료된 것이다. 미국 전략군사령관 쎄실 헤이니(Cecil D. Haney)가 연방상원 청문회에서 조선의 잠대지탄도미사일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것은 신포급 전략잠수함 함교 안에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을 설치하는 작업이 완료된 직후인 2015년 3월 19일이었다.


셋째, <사진 6>과 <사진 7>을 다시 살펴보면, 신포급 전략잠수함 왼쪽에 정박된 특이한 형태의 선박 1척이 보인다. 이 선박은 탄도미사일 수상시험발사에 사용되는 것이다. 2015년 1월 23일 조선은 바다에 띄워놓은 그 시험선박에 설치한 수직발사관에서 탄도미사일 수상시험발사를 진행하였다.

 

▲ <사진 8> 이 위성사진은 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가 진행된 다음 날인 2015년 5월 10일에 촬영된 것이다. 푸른 원으로 표시된 물체들은 미사일운반통에 넣은 탄도미사일을 실어나른 대형차량들이다. 붉은 원으로 표시된 물체는 대형차량에서 내려져 X형으로 겹쳐놓아둔 2개의 미사일운반통이다. 미사일운반통을 겹쳐놓은 것은 그 안에 미사일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 자주시보


넷째, <사진 8>은 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가 성공적으로 진행된 다음 날인 2015년 5월 10일에 촬영된 것이다. 사진에서 푸른 원으로 표시된 두 물체는 탄도미사일을 미사일운반통에 넣고 실어나르는 대형차량들이다. 사진에서 붉은 원으로 표시된 물체는 대형차량에서 내려져 X형으로 겹쳐놓아둔 2개의 미사일운반통이다. 미사일운반통이 그렇게 겹쳐놓인 것을 보면, 그 안에 미사일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사일이 들어있는 미사일운반통이라면 X형으로 겹쳐놓을 수 없다.

 

▲ <사진 9> 2015년 5월 9일 신포급 잠수함에서 발사한 탄도미사일이 솟구쳐오르는 출수장면이다. 근처에 소형선박이 보인다.     © 자주시보

 

▲ <사진 10> 위의 사진과 거의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서 촬영한 이 사진에는 근처에 있던 소형선박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신포급 잠수함이 탄도미사일 2발을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발사하였음을 말해준다. 이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탄도미사일은 해수면에서 약 70도 각도로 상승비행을 하였다. 그런데도 미국과 한국의 언론매체들은 신포급 잠수함이 잠대지탄도미사일 1발을 시험발사했는데 150m 정도 날아가다가 해수면에 떨어졌다느니 하는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 자주시보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사진 8>이 촬영되기 하루 전인 지난 5월 9일 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를 진행할 때 신포급 전략잠수함에서 탄도미사일 2발이 발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9>에서 보는 선박 1척은 탄도미사일이 발사될 때 잠수함 곁에 있었는데, 탄도미사일이 발사된 동일한 현장을 촬영한 <사진 10>에서는 그 선박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신포급 전략잠수함이 탄도미사일을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2발 발사하였음을 말해준다.


조선의 잠수함기지는 모두 지하요새화되었다. 조선에서 잠수함을 건조, 개조하거나 수리, 정비하는 작업은 언제나 지하잠수함기지 안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미국의 공중정찰수단들에게 노출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2014년 12월부터 신포급 전략잠수함은 지하잠수함기지에서 나와 신포항 부두에 계속 머물렀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전략잠수함에 수중미사일발사관 2문을 설치하는 작업이 신포항 부두에서 대낮에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수중미사일발사관은 잠수함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그 설치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므로, 건조과정 중에 수중미사일발사관을 함교에 설치하고 나서 신포급 잠수함을 진수한 것인데, <사진 6>은 신포급 전략잠수함에 수중미사일발사관을 설치하는 작업현장을 보여준다. 이것은 신포급 전략잠수함에 없는 수중미사일발사관을 새로 설치한 것이 아니라, 그 전략잠수함에 들어있는 수중미사일발사관을 밖으로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는 재설치작업을 미국의 공중정찰수단에 노출된 신포항 부두에서 대낮에 진행한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그런 재설치작업은 조선이 자기의 전략잠수함 보유사실을 미국에게 알려준 것이다. 조선의 무장장비들 가운데 최강의 수중비밀병기인 전략잠수함의 존재를 그런 식으로 드러내 보인 것은, 조선이 국가적 중대사를 앞두고 미국에게 강력한 경고신호를 보낸 것이다.

 

 

3. 발사수심 50m에서 대기하는 전략핵탄미사일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은 전략잠수함을 보유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핵강국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하였다. 핵보유국이면서도 아직 전략잠수함을 갖지 못한 인도는 러시아에서 전략잠수함 1척을 10년 동안 빌려 쓰고 있다. 전략잠수함 개발에 힘쓰는 인도는 2014년에 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를 2번 진행하였는데, 그 수중시험발사는 해수면 아래로 침하한 잠수함에서 발사한 것이 아니라 수심 30m에 설치해놓은, 판툰(pontoon)이라 부르는 잠함(潛函)에서 발사한 것이다. 인도는 5대 핵강국을 추격해온 후발핵보유국이지만, 잠대지탄도미사일 개발과정에서 제기된 공학기술적 난제들을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중거리탄도미사일을 만들 수 있는 군사과학기술강국이라면 잠대지탄도미사일도 만들 수 있다. 이를테면, 중국은 중거리탄도미사일을 잠대지탄도미사일로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인도는 중거리탄도미사일을 만들면서도 왜 잠대지탄도미사일을 아직 완성하지 못한 것일까? 그 까닭은 잠대지탄도미사일을 만드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그 미사일을 쏘아올리는 수중미사일발사체계를 만드는 것이 기술적으로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 <사진 11> 이 사진은 발사수심 50m에 침하한 미국 해군의 핵추진 잠수함에서 수중미사일발사관 사출구를 열고 탄도미사일 트라이던트-1호를 발사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가압공기가 발사관 안으로 고속사입되기 시작한 찰나에 물거품이 뿜어져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 자주시보


해수면 아래 발사수심까지 침하한 전략잠수함은 수중미사일발사관 사출구를 열고 탄도미사일을 발사한다. 탄도미사일을 발사수심 50m에서 해수면 위로 밀어올리는 수중고속사출은 <사진 11>에서 보는 것처럼, 발사관으로 고속사입시킨 가압공기의 폭발적인 힘으로 무거운 탄도미사일을 밀어올려 밀도가 강한 바닷물을 뚫고 상승시키는 것이다. 수중고속사출에 필요한 몇 가지 공학기술을 열거하면, 잠수함 안에서 공기를 초고압으로 압축시키는 기술, 가압공기를 발사관으로 고속사입시키는 기술, 고속사출시 함내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소음과 충격을 감소시키는 기술, 탄도미사일이 해수면 위로 출수하는 순간 로켓엔진을 1초 이하의 단위에 맞춰 점화하는 기술, 탄도미사일이 해수면 위로 출수할 때 상승비행자세를 유지하는 기술 등이다.


위에 열거한 것처럼, 탄도미사일 수중발사기술은 인공위성 공중발사기술보다 더 어려운 고난도 기술이다. 그래서 5대 핵잠보유국들이 그 고난도 기술을 반세기 동안 장기독점해올 수 있었다. 그 기술이 오죽 어려우면, 달궤도에 관측위성을 쏘아올리는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을 가진 인도가 탄도미사일 수중발사기술을 아직 정복하지 못하였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조선은 이번에 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에 성공함으로써 5대 핵잠보유국들이 반세기 동안 유지해온 독점구도에 파열구를 내고 여섯 번째의 핵잠보유국으로 등장하였다.

 

▲ <사진 12> 2015년 5월 9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배를 타고 동해로 나가 수중시험발사과정을 지켜보는 가운데, 발사수심까지 침하한 신포급 전략잠수함은 북극성-1호를 발사하였다. 수심 50m에서 고속사출되어 굉음을 내며 솟구쳐오른 그 미사일 동체에 북극성-1이라고 쓴 붉은 글씨가 선명하다. 유사시 핵탄이 들어갈 탄두부는 검은 색을 칠했고, 동체의 앞쪽과 뒷쪽에 굵고 검은 띠를 하나씩 둘렀다. 그 미사일은 화염과 연기를 뿜으며 동해의 하늘로 높이 날아갔다.     © 자주시보


2015년 5월 9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배를 타고 동해로 나가 수중시험발사과정을 지켜보는 가운데, 발사수심까지 침하한 신포급 전략잠수함이 탄도미사일 북극성-1호를 발사하였다. 수심 50m에서 고속사출되어 바닷물을 가르며 솟구쳐 오른 북극성-1호는 <사진 12>에서 보는 것처럼 굉음 속에서 화염과 연기를 내뿜으며 동해의 하늘 높이 날아갔다.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그 놀라운 장면을 격동적인 필치로 이렇게 묘사하였다. “잠시 후 바다면을 뚫고 불쑥 솟구친 탄도탄이 거세찬 불줄기를 뿜으며 창공 높이 날아올랐다. 시험발사를 통하여 함내소음준위, 발사반충력, 탄도탄의 수면출수속도, 자세각 등 전략잠수함에서의 탄도탄수중발사가 최신군사과학기술적 요구에 완전히 도달하였다는 것이 검증확인되였다.”


북극성-1호의 작전성능은 육안관찰로 검증하는 게 아니라, 현장에 측정기구를 배치해놓고 수중시험발사과정을 정밀관측하는 것이다. <사진 9>에서 붉은 원으로 표시된 선박은 측정기구를 싣고 현장에서 북극성-1호의 작전성능을 검증한 조선의 관측선이다.


미국의 온라인언론매체 <워싱턴자유횃불(WFB)> 2015년 5월 11일 보도에 따르면, 해수면 아래로 침하한 신포급 전략잠수함이 수중미사일발사관에서 탄도미사일을 사출하는 수중시험발사는 2015년 4월 22일에 진행되었고, 4월 말과 5월 초에도 각각 한 차례씩 진행되었다. 지난날 5대 핵잠보유국들은 탄도미사일 수중시험발사에서 20여 차례 실패를 거듭한 끝에 성공하였는데, 조선은 북극성-1호 수중시험발사를 4번 만에 성공시켰으니 세계가 놀랄 경이적인 사변이다.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그 경이적인 소식을 전하면서 “완전성공”이라고 썼다.


조선이 그처럼 잠대지탄도미사일 개발을 완성하였으니, 이제는 신속한 실전배치일정만 남았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전략잠수함 탄도탄이 계렬생산에 들어가고 가까운 시일 안에 실전배비”될 것이라고 말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은 북극성-1호 수중시험발사를 4번 실시하였으므로 그 미사일을 8발 발사하였고, 그보다 먼저 2015년 1월 23일 조선은 바다에 띄워놓은 시험선박에서 탄도미사일 수상시험발사를 선행하였으므로 그 미사일을 모두 10발정도 발사한 것인데, 그런 수량이라면 북극성-1호 계렬생산체계는 이미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북극성-1호의 작전성능을 파악하려면, 지난 시기 미국, 소련, 중국이 각기 자기 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었던 잠대지탄도미사일과 비교, 고찰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폴라리스(Polaris)는 길이 8.7m, 지름 1.4m, 중량 13.1t이고, 소련의 R-13은 길이 11.8m, 지름 1.3m, 중량 13.7t이고, 중국의 쥐랑(巨浪)-1호는 길이 10.7m, 지름 1.4m, 중량 14.7t이다.

 

▲ <사진 13> 핵잠보유국들의 잠대지탄도미사일들 가운데 조선의 북극성-1호와 형태가 가장 비슷한 것은 중국의 쥐랑-1호다. 이 사진에 나타난 미사일은 컴퓨터그래픽으로 모사한 쥐랑-1호다. 두 미사일을 비교하면, 쥐랑-1호가 북극성-1호보다 조금 더 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북극성-1호는 길이 약 10m, 지름 약 1.3m, 중량 약 13t인 것으로 추정된다.     © 자주시보


여기 열거한 세 종류의 잠대지탄도미사일 가운데 미사일형태가 북극성-1호와 아주 비슷한 것은 <사진 13>에서 보는 쥐랑-1호인데, 쥐랑-1호가 북극성-1호보다 조금 더 커 보인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북극성-1호는 길이 약 10m, 지름 약 1.4m, 중량 약 13t인 것으로 추정된다. 웹싸이트 <커벗 쇼어즈>에서는 북극성-1호가 길이 9.3m, 지름 1.5m인 것으로 추정하였다.   


미사일의 작전성능을 살필 때 시선이 가장 먼저 가닿는 것은 사거리다. 북극성-1호의 사거리는 몇 km가 되는 것일까? 기존 핵잠보유국들의 사례를 보면, 미국의 폴라리스는 사거리가 1,800km, 소련의 R-13은 사거리가 600km, 중국의 쥐랑-1호는 사거리가 1,700km다. 
사거리를 비교할 때, 소련의 R-13이 미국의 폴라리스나 중국의 쥐랑-1호에 비해 매우 짧은 까닭은, 소련이 초기의 미사일제작기술로 R-13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R-13을 만든 직후 긴 사거리를 가진 후속미사일들을 연속하여 만들었는데, R-15의 사거리는 1,000km이고, R-21의 사거리는 1,400km다.


위에 열거한 핵잠보유국들의 선행경험을 살펴보면, 그 나라들이 자기의 잠대지탄도미사일을 1,000km 이상 날아가도록 만들었고, 후속미사일을 만들면서 사거리를 단계적으로 늘려갔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북극성-1호의 사거리가 1,000km 이상이라는 점이 자명해지는데, 쥐랑-1호의 사거리가 1,700km이므로, 크기가 그보다 조금 작은 북극성-1호의 사거리는 1,500km로 추정된다. 

 

▲ <사진 14> 조선의 북극성-1호가 연기를 뿜으며 동해의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있다. 이 미사일의 사거리는 1,500m인 것으로 추정된다. 길이가 약 10m로 추정되는 그 미사일이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은 고도를 비행하였는데도, 미국과 한국의 언론매체들은 150m밖에 날아가지 못했다는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 자주시보


북극성-1호의 사거리가 그처럼 길기 때문에 수중시험발사를 진행할 때는 사거리를 대폭 줄여서 쏘아야 한다. 지난 5월 9일에 진행된 수중시험발사에서 북극성-1호가 단축된 사거리를 날아가 떨어진 동해상의 탄착점은 어디쯤이었을까? 잠대지탄도미사일은 광역타격수단이므로 점타격에 사용되는 전술핵탄을 장착하지 않는다. 광역타격수단의 정밀도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진 14>에 보는 것처럼, 북극성-1호는 육안으로 그 동체를 볼 수 없을 만큼 높은 고도로 날아갔다.


미사일의 작전성능을 거론할 때, 사거리와 함께 중시하는 것은 파괴력이다. 북극성-1호의 파괴력은 얼마나 강한 것일까?
잠대지탄도미사일에는 반드시 핵탄이 장착된다. 핵탄이 아니라 고폭탄이 장착된 잠대지탄도미사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와 달리, 잠대지순항미사일에는 핵탄이 아니라 반드시 고폭탄이 장착된다. 그래서 잠대지순항미사일로 무장한 잠수함은 전략잠수함보다 한 급 낮은 공격잠수함으로 분류된다.


다른 핵잠보유국들이 초기에 만들었던 잠대지탄도미사일의 파괴력을 살펴보면, 미국의 폴라리스에는 600킬로톤급 핵탄 1발이 장착되었고, 소련의 R-13에는 1메가톤급 핵탄 1발이 장착되었고, 중국의 쥐랑-1호에는 300킬로톤급 핵탄 1발이 장착되었다. 이런 사례를 보면, 조선의 북극성-1호에는 300킬로톤급 전략핵탄 1발이 장착될 것으로 보인다.

 

4. 조선은 대서양에서 최후일격 날린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2015년 5월 9일 북극성-1호 수중시험발사를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조선이 북극성-1호를 보유한 것은 “적대세력들의 뒤잔등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탄을 매달아놓는 것으로 된다”고 지적하였고, “적대세력들을 임의의 수역에서 타격소멸할 수 있는 세계적 수준의 전략무기를 가지게 되였”다고 말했다.


적대세력들의 잔등에 시한탄을 매달아놓은 것이라는 표현은 북극성-1호의 타격범위가 미국의 후방작전구역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조선과 미국이 70년 동안 무력으로 대치해오는 상황에서 태평양이 미국의 전방작전구역이라면 대서양은 미국의 후방작전구역이다. 적대세력들을 임의의 수역에서 타격소멸할 수 있게 되었다는 표현은 태평양이나 대서양을 가릴 것 없이 전후방작전구역 어디에서나 미국을 타격소멸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전시에 북극성-1호가 대서양에서 미국 본토를 향해 불시에 발사될 것임을 예고한다. 다시 말해서, 신포급 전략잠수함이 북극성-1호를 싣고 대서양에 가서 미국 본토 동부지역을 불시에 기습타격한다는 뜻이다.


미국의 중량급 전략잠수함들은 태평양작전구역과 대서양작전구역에 각각 나누어 배치되었는데, 그런 잠수함대국과 대치한 조선의 경량급 잠수함은 동해에서 연안작전이나 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조선의 잠수함작전능력이다. 그런 까닭에 태평양에도 가지 못할 조선의 경량급 잠수함이 지구를 반바퀴나 돌아 대서양까지 가서 원정작전을 할 것이라고 말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과장어법으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북극성-1호라는 이름에 들어있는 깊은 사연을 알면, 그런 낡은 고정관념은 사라질 것이다. 


자국산 미사일에 별이름을 붙이는 것은 조선에서 볼 수 있는 오랜 관례다. 이를테면, 조선에서 대전차미사일은 수성(나중에 불새로 개칭)이라 부르고, 대함미사일은 금성이라 부르고, 도로이동식 지대지미사일은 화성이라 부르고, 수직갱발사식 대륙간탄도미사일은 목성이라 부르는데, 잠대지탄도미사일에는 북극성이라는 별이름을 붙였다.


조선의 미사일들에 붙여진 수성, 금성, 화성, 목성이라는 이름은 태양의 주위를 도는 행성들의 이름인데, 유독 잠대지탄도미사일은 지구로부터 434광년 떨어진 천구의 북극점에서 밝게 빛나는 별의 이름으로 부른다. 신형 미사일을 만들 때마다 태양계 행성의 이름을 순서대로 붙여온 조선의 미사일작명관례에 따르면, 잠대지탄도미사일은 토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데 그런 관례에서 벗어나 그 이름을 북극성으로 정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조선의 잠대지탄도미사일이 북극성이라는 색다른 별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 미사일이 북극성과 관련된 사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연은 무엇일까? 아래의 정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전시에 조선이 미국과 추종국들의 아시아태평양작전구역을 타격할 때는 전술핵탄을 쓰게 될 것인데, 신포급 전략잠수함에 전략핵탄 2발이 실리는 것은 그 잠수함의 타격범위가 아시아태평양작전구역을 넘어 미국 본토로 향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둘째, 선제핵타격에는 점타격수단인 전술핵탄이 사용되고, 보복핵타격에는 광역타격수단인 전략핵탄이 사용되는데, 신포급 전략잠수함에서 발사할 핵탄미사일은 미국의 전술핵타격을 받았을 때 보복핵타격에 사용하는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사실을 종합하면, 조선의 북극성-1호는 미국 본토에 대한 보복핵타격에 사용되는 최강의 전략무기라는 점이 자명해진다.


전시에 조선은 전술핵탄을 발사하는 동시다발-기습타격으로 미국과 추종국들의 아시아태평양작전구역을 선제공격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미국도 전술핵탄으로 조선의 군사기지들을 보복공격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이 조선의 선제핵타격을 받아 아시아태평양작전구역을 상실한 뒤에도 항복하지 않고 전술핵탄으로 조선에게 반격하는 경우, 조선은 최후일격으로 미국을 멸망시키려고 할 것이다. 조선이 최후일격에 사용할 비장의 전략무기가 바로 북극성-1호다. 북극성-1호에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300킬로톤급 전략핵탄 1발이 장착된다. 누구나 예상하는 것처럼, 전시에 조선이 북극성-1호를 발사하는 최후일격은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 디씨를 타격하는 것이다.


2005년 11월 19일 미국의 핵시대평화재단(NAPF) 웹싸이트에 현시된 ‘워싱턴 디씨에서 발생한 300킬로톤급 핵폭발 결과’라는 제목의 글은 전시에 미국의 심장부를 덮칠 핵재앙을 아래와 같이 예언하였다.  


워싱턴 디씨 상공에서 일어난 핵폭발로 발생하는 거대한 핵섬광은 하루 중 태양빛이 가장 밝은 시간대인 정오에 사막지대에 내려쬐는 강렬한 태양빛보다 5,000배나 더 밝다. 그 핵섬광을 바라보는 순간 사람들의 두 눈은 즉시 멀게 된다. 천지를 뒤덮는 핵섬광과 함께 지름이 2km나 되는 거대한 핵화염이 터져나오는데, 핵화염 중심부의 온도는 태양 중심부의 온도보다 4~5배나 더 높은 섭씨 1억1,100만도이므로 지상의 모든 물체는 핵화염 속에서 형체도 없이 타버리거나 녹아버린다. 또한 핵폭발 1초 뒤 폭심에서 발생한 시속 1,200km의 초강력한 핵폭풍과 그 핵폭풍을 따라오는 시속 480~640km의 후폭풍은 방사선형으로 휘몰아치면서 지상의 모든 물체를 폭심으로부터 바깥쪽으로 멀리 날려버린다. 그로부터 4초 뒤에는 거대한 핵화염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르면서 발생시킨 초강력한 흡입력에 의해 핵폭풍의 방향이 반대방향으로 갑자기 바뀌면서 시속 80~112km의 역폭풍이 몰아쳐 모든 물체를 폭심쪽으로 날려버린다. 그로써 100~168㎢ 안에 있는 모든 물체는 완전히 파괴, 소멸된다.


미국은 자기의 심장부가 조선의 전략핵타격으로 형체도 없이 사라져 멸망하는 참극을 어떻게 해서든지 피해야 한다. 미국이 조선과의 전쟁에서 자기 본토를 지키려면, 아시아태평양작전구역에 대한 방어는 포기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조선이 전술핵탄을 발사하는 선제공격으로 미국과 추종국들의 아시아태평양작전구역을 파괴해도 미국은 조선에게 보복하는 반격을 포기해야 하는 뼈저린 선택을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전쟁씨나리오는 어디까지나 예견이다. 조선은 예견만 믿고 미국과의 최후결전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상황을 오판한 미국이 전술핵탄으로 조선에게 보복공격하는 최악의 씨나리오에도 당연히 대비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전시에 조선은 미국의 심장부를 최후일격으로 날려버릴 보복핵타격준비도 갖춰야 하는 것이다.


전시에 조선의 신포급 전략잠수함이 워싱턴 디씨에 최후일격을 가하려면 대서양으로 가야 한다. 북극성-1호의 사거리는 1,500km로 추정되기 때문에, 신포급 전략잠수함이 미국 본토 서부해안에 근접한 태평양 바다속에서 그 미사일을 쏘면, 사거리가 너무 짧아 워싱턴 디씨에 도달하지 못한다. 샌프란시스코 시청에서 백악관까지 직선거리는 3,923km이므로, 신포급 전략잠수함이 샌프란시스코 해안에서 200km 떨어진 태평양 수역에 수중매복하는 경우 사거리가 4,500km인 잠대지탄도미사일을 쏘아야 하는데 경량급 잠수함은 크고 무거운 미사일을 싣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전시에 신포급 전략잠수함은 미국 본토 동부해안에 근접한 대서양 수역에 수중매복해야 하는 것이다.


냉전이 막바지 이르렀던 1980년대에 수중배수량이 9,300t인 소련의 얭키급(Yankee-class) 핵추진 잠수함은 미국 본토 동부해안에서 약 1,000km 떨어진 버뮤다라는 섬의 동쪽에 있는, ‘초계초소(patrol box)’라 부르는 구역에 수중매복하며 미국의 심장부에 최후일격을 가할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그 잠수함에는 500킬로톤급 전략핵탄을 장착한 R-31 탄도미사일이 실려 있었다.

 

▲ <사진 15> 베링해를 지나 북극해로 들어서면 북극점을 중앙에 두고 두 개의 항로가 나타난다. 캐나다 최북단을 오른쪽에 끼고 북극해를 지나는 북서항로가 바로 조선의 신포급 전략잠수함이 전시에 미국의 심장부를 공격하기 위해 지나게 될 원정항로다. 북서항로를 타고 북극해를 지나 대서양에 들어선 조선의 신포급 전략잠수함은 대서양수중매복구역에서 최후일격으로 미국의 심장부를 초토화하기 위해 수중매복에 들어갈 것이다.     © 자주시보


전시에 신포급 전략잠수함이 동해의 지하잠수함기지를 떠나 미국 본토 동부해안에 근접한 대서양수중매복구역으로 가는 항로는, 동해→오호쯔끄해→베링해→북극해→래브라도해를 통과하여 대서양으로 가는 북극항로밖에 없다. <사진 15>에 표시된 것처럼, 북극항로는 북서항로와 북동항로로 갈라지는데, 북서항로는 베링해에서 북극해를 거쳐 북미주로 가는 항로이고, 북동항로는 베링해에서 북극해를 거쳐 북유럽으로 가는 항로다.


북서항로는 냉전기에는 물론 요즈음도 러시아군 잠수함들이 쿠바를 오갈 때 이용하는 중요한 항로다. <뉴욕타임스> 2009년 8월 5일 보도에 따르면, 쿠바를 향해 가던 러시아의 전략잠수함 2척 가운데 1척이 미국 동부해안에서 약 320km 떨어진 위치에 머무르고 있었다. 전시에 조선의 신포급 전략잠수함도 북서항로를 따라 대서양으로 갈 것이다.


전시에 신포급 전략잠수함이 대서양수중매복구역으로 가기 위해 북서항로를 지나려면 거대한 빙산들이 들어찬 북극해 바다속을 잠항해야 하는데, 디젤전동식 잠수함은 빙산바다 속을 잠항하지 못한다. 핵추진 잠수함이라야 북극해 바다속을 지날 수 있다. 조선이 미국과의 최후결전에서 이기기 위해 경량급 핵추진 잠수함을 반드시 만들어야 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1958년 8월 태평양을 출발한 미국의 1세대 핵추진 잠수함 노틸러스호가 북서항로를 타고 대서양으로 나갔다. 노틸러스호가 북서항로를 지날 때 시속 17km의 잠항속도로 4일 걸렸는데, 전시에 동해를 출발한 신포급 전략잠수함은 대서양수중매복구역까지 12일이면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이 최후결전을 앞두고 북극성이 빛나는 북서항로를 지나게 될 조선의 잠대지탄도미사일이 북극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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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사건, 제36차 공판 방청기2편

 
 
5년 전 기록을 들추어 보다, 천안함의 진실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
 
장유근 | 2015-05-19 09:53:5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5년 전 기록을 들추어 보다 
-천안함 사건, 제36차 공판 방청기2편-

천안함의 진실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

지난 11일 오후 2시부터 서울중앙지법 서관 524호 법정에서 천안함 사건 제36차 공판(형사36부 재판장 이흥권 부장판사)이 속개됐다. 이날은 전국에 봄비가 예고되고 있었지만 법원으로 가는 길은 봄날씨 답지 않게 후텁지근했다. 마치 여름을 방물케 하는 날씨랄까. 지하철 교대역에서 법원으로 가는 짧은 여정을 통해 필자(‘나’라고 한다)의 머리속은 별로 개운치 못했다. 천안함 침몰사건이 5년을 맞이했지만 적지않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이 사건은 지워져 가고 있었던 것.

단정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이와 유사한 사건 등에 대해 등을 돌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랬다. 천안함 사건 뿐만 아니라 세월호 침몰사건 조차 정부와 여당은 물론 야당까지 등을 돌리고 있는 상황에 대해 사람들은 서서히 체념을 배워가는 듯 정부 혹은 위정자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것. 자국민들이 목숨을 잃거나 말거나, 국민들의 세금이 허투로 쓰여지거나 말거나, 우리는 서로 등을 돌린 채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것.

사람들은 진실에 목말라하지 않았다. 지위 등을 통해 사람들을 적당히 속이면 돈을 얻고 명예까지 얻을 수 있는 ‘능력 있는 자’가 되지만, 진실은 무지개가 되어 쫓으면 쫓을수록 사회로부터 멀어지며 도태되는 것이랄까. 천안함 사건의 중심에서 '진실'의 화두를 붙들고 지난 5년 동안 법정에서 세월을 보내온 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단 민간위원(진실의 길 대표)을 법정에서 만나는 일은 썩 유쾌한 일이 못됐다.

법원으로 가는 발길이 무거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설령 천안함의 진실이 밝혀져 명예를 회복하고 향후 국가를 상대로 그만한 댓가(?)를 얻는다 할지라도, 신 선생에게 남은 건 상처 뿐이자 진실을 갈망했던 사람들까지 허망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데 거짓을 양산한 사람들이나 국가기관은 여전히 뻔뻔스러울 것이며 ‘자기의 잘못은 없다’며 버틸 것.

주목해야 할 이종인 대표의 증언

그동안 법정에서 봐 왔던 증인 등의 모습이 주로 그랬다. 하나같이 그들은 천안함의 진실로부터 멀어지려 애쓰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표정은 결코 밝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방청석에 앉은 내게 눈에 띈 건 증인들의 증언이 석연치 않았다는 점이다. 그동안 증언들은 누군가로부터 학습을 받은 내용이거나 정체가 모호한 누군가로부터 감시를 받는 듯한 모습들. 천안함 침몰사건 이후 우리사회에 던져진 사건의 실체가 주로 그런 느낌이랄까.

이날 법정에는 두 사람의 증인이 출두했는데 피고인측 증인으로 나선 알파잠수공사 이종인 대표의 증언은 주목할만 했다. 그는 관련 업계에서 몇 안되는 최고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는 베테랑이었다. 이 대표는 이날 자기의 지식과 경험등을 증언을 통해 “천안함에는 폭발 흔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크게 놀랄만한 주장사실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이 대표의 주장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정부가 기관을 총동원해 ‘과학으로 포장된 거짓주장’을 하고 있었다면, 이 대표의 이날 주장은 (전문가의)지극히 상식적인 것들이었다. 천안함에 폭발 흔적이 없었다는 당신의 주장이, 한 때 천안함 피격사건의 실체를 부정하는 70%의 여론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들이랄까. 법정을 나선 후 속기록을 정리하면서 맨 먼저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동안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사실을 다시 되돌려 보는 것.

5년 전 기록을 들추어 보다

나는 귀가하는대로 짬잠이 관련 데이터베이스를 뒤져 5년 전의 기록을 살펴봤다. 천안함의 폭발(?)이 세뇌된 정보인 지, 사실인 지 등을 상식적으로 되짚어 보는 것. 5년 전, 그러니까 지난 2010년 5월 20일 오전 11시 경부터 필자의 카메라에 담긴 ‘천안함 피격사건의 실체’는 온 몸을 부들부들 떨리게 만들어 카메라의 초점까지 놓치고 있었다. TV를 통해 방영된 합조단의 발표 속에서 차마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던 것. 잘 살펴보시기 바란다. 이런 모습들이었다.

(5년 전에 기록된 장면들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시는가?) 당시 나는 합조단이 생중계로 발표한 이런 장면들을 캡쳐해 두고 분노하고 있었다. 나의 상식에 전혀 부합하지 못하는 장면들이 공중파를 통해 버젓이 안방으로 송출되고 있었던 것. 지난 36차 공판 당시 증인으로 나선 알파잠수공사 이종인 대표가 ‘천안함에는 폭발이 없었다’는 주장을 하게 된 게 주로 이런 모습들이었다. 그는 법정 증언에서 합조단이 제시한 북한제 (1번)어뢰(?)를 보는 순간 “4~5년은 됐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5년 전의 기록속에서 다시 만나게 된 1번 어뢰의 민낯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당시의 기록들 중에는 법정의 증언을 통해 상식 밖의 일 등으로 정리되고 있었다. 천안함 침몰사건에 ‘폭발이 없었다’는 걸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이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상식밖의 일들을 과학으로 증명해 보이겠다는 것 만큼 더 어리석을 일도 있을까. 지금 법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소인의 우격다짐을 보면서 내가 해야 할 일 몇 가지를 정리했다. 5년 전의 기록을 들추어보며 상식과 몰상식 혹은 과학 등을 비교해 보는 것. 이종인 대표는 그러한 과정을 한마디로 정리하고 있었다.

“...천안함에는 폭발 흔적이 없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5&table=dream_jang&uid=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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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동? 간첩? 내란? 5.18 진상 담은 '20분 영상'

 

5.18기념재단·기억하겠습니다 5·18, 35주년 기념 영상 공개

15.05.18 21:26l최종 업데이트 15.05.19 09:00l

 

 



'기억하겠습니다 5.18' 캠페인을 벌여 온 동명의 페이스북 페이지(바로가기)가 18일 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 영상을 공개했다(관련 기사 : "1980년에 SNS가 있었다면" 조국도 함께한 캠페인). 

5·18기념재단과 함께 영상 제작 작업을 진행한 '기억하겠습니다 5.18'은 "5.18민주화운동을 기억한다는 것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박제화하는 것이 아니라, 2015년 지금 여기 우리의 삶으로 그 정신을 실천해가는 것입니다"라면서 영상을 페이스북과 유튜브에 올렸다(유튜브에서 보기).

"지금 광주 큰일났습니다. 군인들이 시민들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화면으로 시작하는 영상은 5.18민주화운동의 경과와 의미를 여러 근거와 증언을 빌려 설명하고 있다. 

영상에는 5·18 생존자와 희생자 가족은 물론, 당시 계엄군이었던 5.18 최초 양심선언자도 출연해 5.18의 진상을 증언했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홍구 한신대 교수, 최정운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임철우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순태 소설가, 나경택 당시 <전남매일신문> 사진기자, 안종철 5.18기록관 추진기획단 자문위원 등도 목소리를 보탰다.

영상 말미에는 캠페인에 참여한 이들이 '기억하겠습니다 5.18'이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찍은 사진 여러 장과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장면이 담기기도 했다.

아래는 영상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5.18, 현행법이 규정한 명백한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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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 영상, <기억하겠습니다 5·18>.
ⓒ 5.18기념재단, 기억하겠습니다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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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그때 우리에게 SNS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나경택 "그 당시에 그런 게 있었으면 정말로 광주의 진실이 바로…."

2014년 11월 SNS를 통해 전세계로 확산된 미국의 퍼거슨 시위. 2011년 1월 이집트가 이뤄낸 페이스북 혁명. 2002년 한국 여중생 추모 촛불집회. 함께 지켜봐주고 함께 응원하는 마음 안에서 불필요한 폭력은 사라졌고, 새롭고 힘찬 가능성이 시작됐습니다. 끝을 알 수 없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네트워크. 그 개방적 확장성이 민주주의가 발전해나갈 수 있는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의 민주주의는 완전히 고립돼 있었습니다.

피로 물든 역사가 지나가고 그 자리에 자유라는 꽃이 피어났습니다. 쾌적한 환경, 자유로운 분위기, 소중한 권리를 지켜주는 법과 제도, 그 모든 것들 틈 사이사이, 아직 마르지 않은 이전 세대들의 핏방울들이 스며 있죠. 5.18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와 자유를 활짝 꽃피우게 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조국 : "5.18은 현행 법률과 판례에 따라서 민주화운동으로 명백히 규정돼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나라 대법원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5.18은 폭동이나 내란이나 간첩 이런 게 아니라 민주화운동의 중심적 사건으로 규정돼 있습니다."

2011년 5.18민주화운동의 기록물들이 한국 현대사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5.18에서 나타난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 민주, 평화의 정신이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공유되고, 계승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절대로 잊혀서는 안됩니다. 인류의 양심과 기억의 일부분으로 영원히 남아있어야 합니다." - 로슬린 러셀 박사(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장)

"어떻게 사람에게 택배네, 썩은 홍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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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 영상, <기억하겠습니다 5·18>.
ⓒ 5.18기념재단, 기억하겠습니다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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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들의 뚜렷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신군부가 계획적으로 전파한 5.18에 대한 부정적인 첫 인상은 오늘날 지역적, 정치적 갈등의 요소로 남아 희생자들을 괴롭힙니다. 

김점례(고 장재철 열사 어머니) : "어떻게 사람을 갖고 택배네, 일광욕을 허네, 썩은 홍어에다 비교를 해서 쓰겄어. 오메, 글 안해도 기가 맥히고 그런데 그런 소리르 들으니 난 몇날, 며칠 잠을 못 자고, 밥을 못 먹고. 기가 콱 맥혀부러갖고."

유족들을 가장 외롭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무관심과 무지.

문건양·김길자(고 문재학 열사 부모) : "몰라도 너무 모르죠. 너무 모르고. 우리 지역에서만 알지 다른 데서는 모르잖아요."

1980년 5월 당시에도 다른 도시의 사람들은 광주의 진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신군부에 의해 시외전화가 두절됐고, 광주로 들어오는 모든 육로도 완전히 차단됐기 때문입니다. 

임철우(소설 <봄날> 저자, 5.18 당시 전남대 4학년) : "광주 바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여기서는 이 난리가 일어나고 있는데, 이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바깥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설마 (광주의 상황을) 모르겠는가? 그렇게 생각했죠, 당연히."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이듬해, 정권을 차지한 군부의 중심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3선 개헌, 유신헌법, 긴급조치. 폭압성을 더해가던 그의 독재에 시민들은 저항했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정권은 부하 김재규의 총탄과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12.12 군사쿠데타는 민주화를 열망하던 전국의 대학생들을 1980년 5월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국민의 기대와 요구를 저버린 신군부의 계엄령 확대로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정문 앞에서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그 열흘 간의 악몽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안종철(전 5.18 기록물유네스코 등재 추진단장) : "타 지역에서 5.18을 조금씩 알아가는 게 1985년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 저)라는 책이 발간되지 않습니까.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됨에 따라서 518의 진실을 좀 알기 시작했고."

1988년 형성된 여소야대 정국. 야당은 12.12쿠데타와 5.18민주화운동을 쟁점화시켰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른바 광주 청문회를 통해 그 동안 왜곡되고 은폐됐던 진실들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1997년 4월 17일 전두환은 무기징역을, 노태우는 징역 17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총기 수없이 풀려도, 어디 한 군데 털린 곳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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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 영상, <기억하겠습니다 5·18>.
ⓒ 5.18기념재단, 기억하겠습니다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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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자가 처벌되기까지 걸린 17년의 세월. 5.18민주화운동의 역사는 침묵의 역사이자, 왜곡의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도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위대한 항쟁의 힘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마침내 평화의 역사, 민주주의의 역사로 바꿨습니다. 이제 우리가 기억하겠습니다.

한홍구 : "공권력이 완전히 무너졌어요. 총기가 수천 정이 풀렸어요. 그런데 은행, 금은방, 슈퍼마켓, 전당포, 어디 한 군데 털린 데가 없었습니다. 말이 안 되는 얘기에요. 말이 안 되는 높은 도덕성이에요."

송희성 오월민주여성회장 : "보급도, 장사도 안 되고, 교역이 안 되니까 집집마다 쌀이 떨어질 거 아닙니까. '쌀 없어' 그러면 '응 내 거 같이 먹어' (그러고), '김치 없어' 그러면 김치 갖다주고. 대동정신이 살아난 거예요. 정말 나는 그런 세상 한 번 다시 살고 싶어요." 

하지만 신군부는 대동세상을 꿈꾸며 평화를 지켰던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5월 21일 자정, 시외전화가 일제히 두절됐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시민들이 도청 앞에서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던 오후 1시, 스피커에서 돌연 애국가가 흘러 나왔습니다. 공수부대는 애국가를 배경으로 2만여 명의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시작했습니다.

이경남 평택 효덕감리교회 목사(오일팔 당시 계엄군, 계엄군 최초 양심선언자): "제가 광주 전남도청 지하실에 내려가 쉬고 있었어요. 지하에 있는데 갑자기 애국가를 틀더라고. 그래서 내가 '아니 왜 갑자기 무슨 방송이 나오나', 이상하게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근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애국가를 틀면서 사격을 했다고 그러더라고."

나경택 : "그때 (내가) 계엄군들 사이에 들어갔었습니다. 12시는 넘었고, 1시는 못 됐었습니다. 그때 차 모 대위, 아주 잘생긴 대위였습니다. 차아무개 대위가 '야 통신병, 발포명령 어떻게 되는 거야' 막 다그치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근데 통신병이 '아직 발표명령이 없습니다' 그런 거예요. 그러다 한 10분 후에 '발표 명령입니다' 하더라고. (차 대위가) '그래?' (하는) 그 순간에 이제 막 총으로 갈겨대고 그랬죠."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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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 영상, <기억하겠습니다 5·18>.
ⓒ 5.18기념재단, 기억하겠습니다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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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7일 자정, 광주 전역의 시내전화가 두절됐고, 오전 3시 신군부가 탱크와 헬기를 동원해 도청을 조여왔습니다. 오전 4시 10분 공수부대의 일제 사격으로 시작된 최후의 항쟁. 그곳을 마지막까지 지킨 이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끝내 인간의 존엄성을 지켰습니다. 

최정운 :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게 인간의 존엄성이라고 하는 것,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로서의 어떤 가치, 그게 사실은 생명보다 더 중요한 거고, (전남도청 안 최후의 시민들은) 그걸 지키려고 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양인화씨(평화반점 운영, 518당시 도청 항쟁 생존자) : "깨끗이 입고 죽어야 천당에 간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옷 갈아입고 이모님한테 '저 주민등록증 넣고 가니까 아버지한테 내 시체라도 가져가라고 하슈' 말했죠. 근데 이렇게 살아있네요. 아유, 목이 메일라 그러네. '내가 오늘 여기서 죽음으로써 광주시민 아니면 내 형제가, 많은 사람이 살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만 가졌지…." 

조국 :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두 개의 축이 뭘까 생각하면 한편으론 권위주의 정권으로부터의 결별인 것이고, 하나는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거든요. 이걸 잊는 민족, 나라는 희망이 없는 거죠." 

피와 통곡의 역사위에 피어난 꽃, 자유. 그 자유가 우리에겐 묻습니다. 당신은 현재만을 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입니까.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 과거를 되풀이할 운명에 처한다." - 조지 산타야나

정부는 518민주화운동 관련 공식 사망자 수를 165명으로 발표했지만 암매장으로 인한 행방불명을 고려하면 추측되는 사망자 수는 훨씬 많습니다. 35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최초 발포를 명령한 책임자가 누구였는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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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언론’은 ‘광주’를 어떻게 말했나?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5/18 09:43
  • 수정일
    2015/05/18 09:43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광주사태가 전두환의 정권 장악을 위해서라고 보도했던 외신’
 
임병도 | 2015-05-18 09:12:5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35년 전 5월 18일, 대한민국 광주는 수많은 시민이 죽고 다쳤습니다. 우리는 이를 가리켜 5.18광주 민주화운동이라 부릅니다.(공식 명칭은 5.18민주화운동) 지금이야 우리가 민주화운동이라 부르고 있지만, 당시 언론은 광주를 가리켜 ‘폭동’과 ‘폭도’라 불렀습니다.

1980년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신문 대부분이 발행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일보는 5월 18일 1면에 5,17쿠데타라 불리는 ‘전국비상계엄 확대’를 보도했습니다.

한국일보는 전국비상계엄이 북한의 동태와 전국적인 소요 사태를 감안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이 있음에도 전두환이 군부를 장악, 정권을 노리고 있다는 얘기는 없었습니다.

1980년 5월, 언론은 광주를 어떻게 말했는지 그때의 언론을 다시 살펴봤습니다.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광주 이야기’

1980년 5월 18일 오전, 전남대 학생들은 교문 출입을 저지하는 공수부대와 마주칩니다. 공수부대에 맞서던 생들은 공수부대원에 의해 구타를 당했고, 5월 18일 오후 광주 시내에는 공수부대가 투입됩니다.

계엄군은 시민들과 학생을 무차별 폭행을 하고, 이에 항의하던 학생과 시민을 향해 5월 21일 집단 발포가 시작됩니다.

이미 5월 18일부터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과 폭력, 발포가 발생했지만, 신문에 광주 이야기가 나온 것은 5월 21일이었습니다. 이전에 광주 이야기는 신문에서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5월 21일 자 동아일보 1면의 광주 이야기도 ‘계엄사령부는 지난 18일부터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는 짤막한 단신으로 처리됐습니다.
 
시민과 학생이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 어떤 언론도 광주의 진실을 보도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광주 이야기는 신문에서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광주 이야기를 숨겼던 신군부’

모든 언론이 광주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전남매일 신문은 광주에서 벌어진 참혹한 진상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5월 20일 전남매일 신문 기자들은 계엄군이 광주 시민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했다는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전남매일 신문 기자들은 학생들을 유혈 진압했고 시민들이 합류했지만, 계엄군이 발포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작성했고, 신문을 발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간부들의 방해로 결국 5월 20일 전남매일 신문은 발행되지 못했습니다.

5월 20일 전남매일 신문 기자들은 사장에게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는 유인물을 내놓습니다.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에 의해 죽어가는 사실을 목격한 기자들이 기사를 작성했지만, 대한민국 언론 그 어디에서도 광주 시민들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광주사태가 전두환의 정권 장악을 위해서라고 보도했던 외신’

대한민국 언론이 광주에서 시민들이 죽어가도 보도하지 못하고 있을 때, 외신 기자들은 광주사태를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진실을 보도했습니다.

5월 28일 CBS 뉴스는 ‘한국 정부가 광주사태의 원인을 공산주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고 왜곡함으로써 시위가 계엄령 반대와 군부의 과잉진압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숨기려 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5월 28일 ABC 뉴스는 ‘전두환 장군과 소수의 선택된 장군들이 민간 정부를 완전히 무시하고 새로운 혁명의회를 구성해서 군사독재를 감행하려 하고 있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 오고 있으며, 광주사태와 더불어 군사독재 가능성이 우려된다’고 보도했습니다.

외신들은 이미 광주사태의 원인이 전두환의 군사쿠데타에 의한 정권 장악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진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진실을 보도하지 못했습니다.

광주사태가 벌어지기 하루 전인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은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인 고영재(경향신문 사회부), 정교용(중앙일보 월간중앙), 이수언(부산일보 서울지사 정치부), 이홍기(KBS 경제부)와 감사 박정삼 (서울경제 정경부), 편집실장 김동선 등 6명을 체포했습니다.

이들이 체포된 이유는 5월 16일 한국기자협회가 신군부의 검열거부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신군부가 언론을 검열하고 언론인을 체포한 5월 17일 직후에 구속된 언론인은 모두 24명이었고, 그중 19명에게 유죄판결이 선고됐습니다.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해 광주를 진압하기 전, 이미 언론을 장악했고, 신문사와 방송은 무자비한 총칼 앞에 검열을 택했습니다.

만약 1980년 5월 18일 광주의 진상이 제대로 언론에 보도됐다면 과연 전두환이 정권을 잡고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결코 시민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광주를 제외한 다른 도시의 시민들은 1980년 광주가 간첩들이 일으킨 폭동이라는 언론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동원해 광주 시민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언론이 진실을 어떻게 보도하느냐에 따라 역사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 한국의 대다수 언론은 침묵했고, 오히려 광주 시민을 폭도와 간첩으로 몰았습니다. 35년이 지난 지금도 일부 언론은 광주 민주화운동을 북한군이 개입됐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대한민국 언론은 1980년 5월과 비교해 나아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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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분열 넘어 통일로 한걸음


[친절한 통일씨] 민족무예의 탄생과 분열, 그리고 통합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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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17  21:3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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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이 주도하는 세계태권도연맹(WTF) 시범단이 지난 12일 러시아 첼랴빈스크에서 열린 ‘2015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막식에서 시범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WTF]
   
▲북한이 주도하는 국제태권도연맹(ITF) 시범단이 지난 12일 러시아 첼랴빈스크에서 열린 ‘2015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막식에서 시범을 보이고 있다. [사진제공-WTF]

북측 태권도 시범단 22명이 사상 최초로 한국 주도의 세계태권도연맹(WTF)이 주최하는 ‘2015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 참석, 12일(한국시간) 대회 개막식 무대에 올랐다.

북측 조선태권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배능만 단장이 이끄는 국제태권도연맹(ITF) 시범단은 러시아 첼랴빈스크에서 이날 오후 6시부터 시작된 개막식에서 약 20분 동안 대련과 고공 격파 등을 선보였다.

당초 참석하기로 했던 북측 장웅 ITF 총재가 동행하지는 않았지만, 조정원 WTF 총재는 지난해 11월 장 총재에게 시범단 초청의사를 밝혔고, 올해 1월에 처음으로 공식 초청장을 보냈다.

이는 두 단체가 지난해 태권도 발전을 위해 체결한 의향서에 따른 것이다.

지난해 8월 21일 장웅 ITF 총재와 조정원 WTF 총재는 제2회 유스올림픽에 참가한 기회에 중국 난징에서 만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토마스 바흐 위원장 입회하에 태권도 발전을 위해 서로 협력하기로 합의한 의향서에 서명한 바 있다.

당시 의향서에 따르면, 두 단체는 상호 이해와 단결을 목적으로 상대방이 주최하는 대회에 선수를 파견하기로 하고 교류의 일환으로 시범단도 서로 파견하기로 했다.

또 이르면 내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하계올림픽에 ITF선수들도 참가할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명기했다.

지난 2011년 미국인 최초로 북한에서 태권도학 박사학위를 받은 조지 바이탈리 씨는 남북 태권도인들이 나란히 선 이번 행사를 ‘역사적인 무대’로 평가했다.

또 이번 교류를 기점으로 두 태권도 연맹 선수들이 서로의 경기규칙을 준수하면서 상대 단체가 주최하는 대회와 행사에 교차 출전할 수 있는 길에 더욱 다가섰다고 말했다.

태권도의 탄생과 WTF·ITF분열

태권도는 1955년 당시 육군 소장이었던 고 최홍희 장군이 민족무예를 집대성해 창시했으며, 그는 1959년 창립한 대한태권도협회를 중심으로 1966년 ITF를 창설하고 총재로 취임했다.

최홍희의 회고록 『태권도와 나』에 따르면, 조선학병 출신으로 반일조직을 도모하다가 발각돼 6년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은 최홍희는 박정희를 늘 아래로 내려다 봤으며, ITF를 창설한 이후 자신이 노란 띠를 달아준 경호실 출신의 김운용을 박정희가 총재로 임명하려한다는 걸 눈치챈 후 캐나다로 망명을 결행한다.

이후 최홍희는 캐나다를 중심으로 ITF의 국제화 사업을 벌였고 그 과정에 북한에도 태권도를 널리 보급하던 중 1979년에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게 된다.

민족무예를 집대성해 태권도를 창시한 최 총재의 공로를 인정한 김 주석의 지원을 받으며 활동을 벌이던 ITF는 2002년 최 총재가 평양에서 사망한 후 줄곧 북측 인사가 총재를 맡아왔다.

그 사이 국내에 있던 대한태권도협회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설립하고 초대 총재로 IOC위원과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을 역임한 김운용을 선출했다.

   
▲2015년 5.1절 125돌 경축 수도건설자들의 체육경기가 열린 김일성경기장에서 진행된 ‘건강태권도’ 시범경기 모습. [캡쳐사진 - 노동신문]
   
▲2003년 10월 제주민족평화축전에서 선보인 북측의 태권도 시범. [자료사진 - 통일뉴스]

WTF는 형의 종류와 동작, 기술명칭 그리고 대련규칙을 비롯한 전반적인 형식이 ITF와 다르며, 오랫동안 대립관계에 있었다.

지난 2002년 서울을 방문한 북측 태권도 시범단은 WTF 규칙을 따르는 남측과 달리 보호장구 없이 도복만 입고 마우스피스와 손·발 글러브를 착용한 채 시합하는 국제태권도연맹(ITF)의 경기 시범을 보여 관심을 집중시킨 바 있다.

WTF에서 ‘품새’, ‘겨루기’, ‘격파’라고 사용하는 용어를 ITF에서는 ‘틀’, ‘맞서기’, ‘위력’으로 쓰고 있었으며, 품새는 태극 1~8장, 고려, 금강 등 16가지로 구성돼 있는 반면, 틀은 천지, 단군, 도산, 원효 등 24가지로 이뤄져 있었다.

또 겨루기에서도 WTF와 달리 주먹을 이용한 안면 가격을 허용하는 등 박진감 넘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남측 태권도 관계자들은 남북이 기본 동작에서 큰 차이는 없지만, 북측은 60년대 태권도의 고유한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 또 남측이 태권도의 기술적인 측면을 발전시켰다면 북측은 힘을 바탕으로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태권도 통일과 올림픽 정식종목

IOC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부터 태권도를 정식경기로 추가했으며, 경기에는 WTF 규칙을 적용하고 참가자격도 WTF 소속선수에게만 부여해왔다.

두 단체는 IOC의 권유를 받아들여 지난 2005년부터 2009년까지 통합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WTF는 기술통합을 우선시하고 ITF는 기구통합을 전제로 앞세워 여전히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러시아 첼랴빈스크에서 열린 ‘2015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막식 무대에 함께 오른 WTF와 ITF 시범단의 교류는 ‘태권도 통일’을 향해 내딛은 첫 걸음일지 모른다.

대회 기간 중 2년에 한번씩 열리는 세계태권도대회의 다음 개최지로 전라북도 무주가 정해진 가운데, 내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이어 무주에서도 ITF 선수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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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정부 대북정책 근본적으로 재검토 필요

박근혜정부 대북정책 근본적으로 재검토 필요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5/05/17 [16:38]  최종편집: ⓒ 자주시보
 
 
▲ 6.15공동선언실천 남측본부 이창복 상임대표 의장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16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6·15 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대변인이 16일 담화를 통해 "북과 남, 해외 민간단체들이 합의한 공동행사 장소와 내용을 남측 당국의 강요에 의해 바꾼다는 것은 그 누구도 납득할수 없는 일"이라며 8.15남북공동행사를 평양에서 하기로 한 합의를 절대로 바꿀 수 없으며 정치색을 배제한 순수 문화, 체육 교류행사로 진행하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고 한다.

 

15일 본지에서 보도한 ‘광복 70주년 한반도정세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라는 기사에서 우려한 바가 바로 하루만에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본지에서 심양회담에 참석한 남측 민간단체 관계자를 취재하는 과정에 원래 남측 6.15공동선언실천위원회에서 6.15를 서울에서 8.15는 평양에서 진행하기로 북에 제안을 했었는데 그 구체적인 행사진행을 논의하는 심양회의 자리에 와서 갑자기 정부의 요구라며 6.15, 8.15를 모두 서울에서 하거나 8.15만은 서울에서 반드시 해야 한다고 갑자기 말을 바꾸어 북이 강하게 거부감을 표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양회의에 참가한 한 관계자는 올해가 광복 70주년이어서 8.15가 주변국이나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 수 있는 행사여서 정부가 갑자기 8.15 행사를 서울에서 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왜 정부가 민간교류행사에까지 이렇게 심하게 간섭하는지 모르겠다. 정 8.15를 남측에서 추진하고 싶었다면 애초부터 그렇게 제안을 했어야지 6.15 행사를 한 달여 남겨둔 시점에서 갑자기 말을 바꾸는 것은 누가 봐도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민간교류행사는 말 그대로 민간교류행사이다. 민간단체들끼리 합의한 내용을 정부가 존중해주고 더 잘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입장을 가져야지 합의한 내용까지 뒤집으라고 지시하고 간섭한다면 민간교류와 정부교류의 구분을 없애버리는 문제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남과 북 정부교류와 민간교류는 각기 다른 몫이 있다. 물론 정부교류가 결정적이라는 점은 6.15, 10.4선언과 이산가족상봉 행사만 봐도 익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잘 풀리지 않거나 막혔을 때 민간차원의 교류협력사업으로 꼬인 실타래를 풀어갈 수가 있고 선거에 의해 정권이 바뀌어 정부차원에서 서로 밀고 당기기를 할 때에도 민간차원의 교류협력 사업만은 계속 진행되게 하여 남북교류의 맥은 유지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민간교류도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라야 하고 일정한 정부의 통제를 받아야한다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행사 내용도 아닌 이미 합의한 일정과 장소까지 정부에서 사사건건 간섭하고  뒤집어엎게 지시한다면 이는 누가 봐도 과도한 정부의 간섭이 아닐 수 없다.

 

이병박 정부 내내,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임기 절반이 흐를 때까지 제대로 된 민간교류 행사가 제대로 한 번 열리지 못한 것도 바로 이런 정부의 통제와 간섭 때문이었다. 모든 민간 행사를 정부에 완전히 틀어쥐고 허가 하네 마네 하면서 벌서 7년 여 허송세월만 보냈다.

물론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를 원천 차단함으로써 북의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잡아주었다고 자화자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한반도문제 전문가들은 남북관계에 있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최악의 정부였다는 평가를 내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대선 기간 박근혜 후보도 강조했던 내용이다. 그러면서 박근혜 후보는 전쟁 중에도 적장과 대화는 필요하다며 남북정상회담 추진 의지도 밝히고 민간교류 특히, 인도주의적 교류는 적극 지원하겠다는 국민들 귓맛 좋은 말들을 적지 않게 흘렸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정권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드레스덴 연설이니, 통일은 대박이니 뭐니 하는 말을 대대적으로 언론에 흘리거나 러시아를 방문하여 러시아의 천연가스관을 남쪽으로 연결하겠다는 한러정상합의 발표로 국민들을 혹하게 하여 남북경협주 주가를 하늘 높이 올려놓았다. 하지만 후속조치는 전무하여 결국 주가는 곤두박질로 끝나는 일이 계속 반복되어왔다.

 

이런 장밋빛 말은 많았지만 천안함 사건으로 시행한 5.24 대북제재조치를 절대 풀 수 없다는 원칙론을 앞세워 정부차원의 남북교류는 전무했고 민간교류도 통일부에서 완전히 차단해왔다. 지난해 처음으로 개천절 행사에 30여명 남측 인사 방북을 최소한으로 허용한 것이 유일했다. 최근 들어 기업인과 대북인도주의적 지원단체의 부분적 방북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 그나마 박근혜 후보 남북관계 공약 이행의 유일한 내용일 것이다.

 

서독은 오히려 이런 민간교류를 적극 지원해주었고 오히려 사회주의권이었던 동독정부가 못하게 통제했었다. 대만도 민간차원의 교류와 경제교류만은 친중국이건 반중국이건 무조건 보장해주었으며 중국 정부와 관계가 아무리 악화되어도 민간교류만은 막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뭐가 그렇게 두려운지 남북 민간교류 사업을 거의 전면 불허하다시피 해왔으며 최근 들어 민간교류를 조금씩 허용하는 듯 하더니 실제로는 이렇듯 철저히 간섭하고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도 박근혜 정부가 생각하는 대북 정책의 기조라면 뭐라 할 말은 없지만 이런 자세로는 남북관계를 조금도 발전시킬 수 없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북은 남측과의 교류협력사업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거나 무슨 도움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다. 북은 개성공단도 남측 중소기업을 돕고 남과 북이 우리민족끼리 정신으로 서로 힘을 합치면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최전방 핵심 군부대까지 후방으로 철수시켜가며 공단자리를 마련해주었다고 말해왔다.


그리고 이런 남측과의 교류가 없더라도 북은 지금 다른 나라가 1년 걸릴 경제발전을 1달도 안 되어 달성하며 폭발적인 속도로 경제강국 건설을 다그쳐가고 있다고 발표하고 있다. 한국보다 훨씬 더 경제력이 커진 중국과 교류가 활발한데다가 최근에 러시아까지 북과 경제협력에 비상한 속도를 내고 있다.
거기에 전통적인 우호국인 이란, 시리아, 쿠바, 베네수엘라 등 제3세계 여러 반미국가는 물론 인도, 브라질 등 신흥브릭스 경제대국들도 북과의 교류협력에 적극 나서고 있다. 물론 북은 외부와 완전 차단되더라도 이제는 흔들리지 않을 자립경제 기반을 다져놓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런 교류협력이 없다면 지금처럼 북이 빠른 속도로 경제발전을 구가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봉쇄가 더 이상 먹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남측과의 경제교류 없이도 북은 얼마든지 경제강국 건설을 다그쳐갈 자신이 있다고 발표하고 있다. 사실 중국 관광객만 잘 유치해도 북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어있다.

 

오히려 남북경협이 시급한 쪽은 우리 남측이 아닐 수 없다. 성장 동력이 고갈되어가 가고 있다. 중국과 인도, 베트남 등 신흥 산업국들이 무섭게 추격하고 있다. 유럽, 일본이 저환율정책을 펴 한국 수출품들을 갑자기 비싼 고가상품으로 만들어버렸다. 미국은 한국에서 조금이라도 더 빼가려고 삼성, 엘지, 코오롱 등 별별 소송을 다 제기하며 우리 기업들의 피를 말리고 있다. 이젠 정부의 세금까지 최대한 뜯어내려 론스타는 5조원대 소송을 제기해 최근 첫 심리가 열렸다. 요즘 추세를 보면 미국과 소송에서 연전연패다. 삼성, 현대, 엘지, 코오롱도 다 미국 기업들에게 특허 도용, 연비과장, 덤핑 판정 등으로 수백억, 수천억의 배상금을 물어주었다. 거기다가 미국 무기 사들이느라 천문학적인 세금이 마구 미국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정부의 재정 적자는 갈수록 심화되어가고 있는데 국민들은 세월호 후 최악의 경제사정으로 못살겠다고 아우성이다. 최경환호가 예산 조기 집행, 부동산 거래 활성화로 경제를 살리려 몸부림을 쳤지만 아무런 가시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잘나가던 수출마저 급감하는데다 가계부채는 천문학적으로 높아지고 있어 언제 가계부채폭탄이 폭발할지 모른다는 전문가들의 우려와 걱정이 날이면 날마다 신문지면을 채우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보수언론들도 이제 살길은 남북경협 북방진출이라는 말을 자주 제기하고 있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서 특히 이런 보도를 많이 내놓고 있다. 기업연구소 중에서는 현대경제연구소가 앞장서서 남북교류협력의 중요성을 연일 강조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박근혜 정부 비서진에서 이젠 더 이상 대북제재는 무의미하다는 발언을 내놓는 등 북과 관계개선에 나서겠다는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 민간교류행사에 협의에 간섭했던 것과 같은 태도로 북에 접근한다면 무슨 사업추진은 고사하고 대화의 물꼬도 트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 지금 정부의 태도라면 북은 조만간 개성공단 노동자 전면철수와 같은 조치도 거침없이 단행할 우려가 높다.

하도 정부에서 북에 대해 통제를 많이 해서 구체적이니 상황은 알 수 없지만 북을 여행하고 온 해외 여행객들이 인터넷에 올린 글이나 북의 여러 행보들만 종합해봐도 북은 남북경협에 아쉬울 것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과 같은 정부의 태도의 근본적 변화가 없다면 남북관계는 더욱 악화될 것이며 서해 등지에서 전례 없이 위험한 극단적인 위기 상황도 조성될 우려가 높다.

 

박근혜 정부는 이제라도 대북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국민들이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이것마저도 못한다면 경제위기에 내몰려 희망을 잃어가는 국민들의 실망은 극에 달할 것이 자명하다.

이런 식이라면 정말 남북관계를 발전시킬 뜻이 있는지 국민들은 그 진정성을 의심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부는 남북관계 파탄 책임을 북으로 돌려 책임을 피하려고 하겠지만 그것을 모를 국민들이 아니다. 어쨌든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는 잘 나가던 남북관계가 이명박 박근혜 정부들어 전혀 열리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인지 국민들이 왜 모르겠는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국민과 식견있는 학자들의 심판만 봐도 이는 명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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