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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실재적인 것이[1] 되려면 체계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2], 또는 실체의 참모습은[3] 주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은 정신이라고[4] 실토하는[5] 표상에 표현되어 있다. 최근 들어서는 정신이 가장 숭고한 개념으로 취급되고 또 종교에서와 같이 숭배되는 관념이 되었다. [이런 최근 유행사조에서 이야기되는 것을 보면] 오직 정신적인 것만이 실재적인 것이며, 본질, 달리 표현하면 [다른 것과의 관계밖에 있는] ‘물자체적으로’ 존재하는[6] 것이다. 그러나 정신은 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인 것이란 [타자와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고 홀로 있는 물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존재와 관계하는 가운데 자신의 규정성을 자각하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것은 이와 같은 규성성 안에서, 달리 표현하면 [타자와 관계하는 가운데 자기 규정성을 부여 받기 때문에 자신을 벗어난 외부에 달려 존재하는 상태지만] 자신을 벗어난 타자존재양식에서도 [자신을 상실하는 법이 없이 자기가 애당초 펼쳐놓은 본질로서의 테두리인] 자기 안에 머무르면서 [애당초의 본질을] 자각하는 가운데 그것을 온전히 실현해 나가는 존재다[7]. 그러나 [정신이 출현하는 단계에서는][8] 이와 같은
[1] 원문
[2]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체계적인 것이 진리라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체계적으로 되어야 비로서 실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3] 원문
[4] 정신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24) 이렇게 이야기된 바에서 이런저런 귀결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중차대한 것은 지는 오직 학문 또는 체계로서만 실재적이고 서술될 수 있다는 점이다.[1] 여기서 한발 짝 더 나아가면 철학의 원칙이나[2] 원리라고[3] 불리는 것은, 그것이 참다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원칙이나 원리 이상의 것이 되지 않는 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미 잘못된 것이라는 귀결이다. — 그래서 원칙을 반박하기는 쉽다. 여기서 반박은 원칙의 부족함/모자람을[4] 드러내 보여주는 데 있다. 원칙이 [모자란 놈이라는 의미의] 모자란 이유는 그것이 단지 보편적인 것, 달리 표현하면 시초가 되는 원리만이라는 데에 있다. 근본적인 반박은 원칙 자체에서 반박의 논거를 취하고 전개해야지 반박대상이 되는 원칙과 대립되는 단언이나 착상을 외부로부터 끌어들여와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반박의 실상을 따져보면[5] 원칙을 발전시켜 원칙의 모자란 점을 보안해 나가는 것이다. 반박이란 이렇게 [전개를 통한 보안]이란 것인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박의 부정적인 행위만을 골라잡고, 이런 부정적인 행위 안에서의 진행과 결론이라는 긍정적인 면은 의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시초를 긍정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일은 따져보면 역설적으로 시초를 부정하는 태도다. 이 태도는 원칙의 일면적인 형식, 바로 코앞에 떨어져 있는 것, 혹은 목적이라고 하는 것만이 되는 형식을 부정하는 태도다. 행위다. 그래서 [원칙을 긍정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것은] 체계의 바탕을 이루는 것에 대한 반박으로 간주될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반박이란 체계의 근본이니 원리니 하는 것이 사실 시초 이상의 것이 아님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1] 원문 <…wirklich ist und dargestellt werden kann.> 여기서
어원사전에 기대어 마련된 위와 같은
아무튼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별으로는 어원사전에 기대어 살펴본
[2] 원문
[3] 원문
[4] 원문
<형이상학> 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테마가 무엇인지 살펴보는데, „철학(sophia)은 특정한 원리/바탕들과 원인들에 대한 학문이다“ („he sophia peri tinas archas kai aitias estin.“)라고 결론 짖고 „첫째 원인과 원리“(prota aitia kai archai)“에 대하여 앞서간 철학자들이 어떻게 이야기 했는지 살펴보고 비판한다. 이 맥락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와 <여럿>의 문제인데, 개념(logos)세계에서의 동일성과 지각(aitsthesis)세계에서의 다양성이 바로 그 문제다. 관련 플라톤은 두 가지 원인을 적용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적한다. 하나는 개념세계, 즉 정의(horismos)에 적용되는 „본질에 관한 원인“(„he tou ti esti aitia“/무엇인가(ti esti)에 대한 원인)이고 다른 하나는 „질적인 차원에서의 원인“(„he kata ten hylen aitia“) (형이상학, 988a)이 된다. 질의 차원에서는 („hos hylen“) „크고 작음“ („to mega kai to mikron“)이 원칙이 되고, 본질의 차원에서는 („hos ousian“) „하나“(monos)가 원인이라고 한다 (형이상학, 987b). 이 „크고 작음“이 두개/여럿이 되는 원칙이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부재“(apousia)와 „약탈/부족“(steresis)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킨다.
철학개념을 정리해 논 <형이상학> 5권(Δ)에서
[5] 원문
절대적인 것을 주체로 상상하지[1] 않으면 뭔가 아니다라는 느낌은[2] 이런 공허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신은 영원하다>, <신은 도덕적인 세계질서다>, <신은 사랑이다> 등과 같은 명제를 사용하였다. 이런 명제에서는 참된 것이 밑도 끝도 없이 주어의 자리에 주체로[3] 앉혀질 뿐이지 자기 안에서 자신을 반성하는 운동으로는 서술되지 않는다. 이런 유의 명제의 첫머리에는 ‘신’과 같은 낱말이 자리하고 있는데 낱말은 그 자체로 보면 한낱 무의미한 소리일 뿐이며 이름 이상의 것이 아니다.[4] 술어가 있어야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텅 비어 있는 이름뿐인 주어를 채워서 의미를 갖게 한다. 공허한 시초가 이렇게 매듭지어져야만 비로소 실재적인 지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위와 같은 행위는 집어치우라 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술어의 자리에 오는 영원, 도덕적인 세계질서 등에 관해서만, 혹은 철학의 시초기에서 그랬듯이 순수개념, 존재, 일자(一字) 등에 관해서만 말하고 의미 없는 소리는 덧붙이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고집할 수가 있겠다. 그러나 이렇게 고집할 수 없는 이유는 ‘신’과 같은 낱말이 주어의 자리에 앉혀질 때 명시되는 것이 존재, 본질, 혹은 한낱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 반성된 것, 즉 주체적인 것이 주어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어가 이렇게 주체로 설정되었다고 해서 이 주체가 참다운 주체가 된 것은 아니다[5]. 단지 주체라고 미리 내다본[6] 상태일 뿐이다. 여기서 주체는 고정된 점으로 상정되어 있고 어딘가 기대야 하는 술어를 거기에 주렁주렁 달아놓은 격이다. 이렇게 주어에 술어를 주렁주렁 달아주는 운동은 단지 주어가 되는 주체에 관하여 지식을 소유한 자가 하는 운동일 뿐이지 결코 점으로 상정된 주체 자체에 속하는 운동으로는 간주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으로 얻어지는 성과는 단지 [지식을 소유한 자의 운동에 기대고 있는] 내용만이 주체로 서술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유의 운동은 주어로 상정된 주체에 속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유의 운동이 임의로 다른 성질의 운동이 될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7] 주체가 단지 고정된 일개의 점으로 설정되어 있는 한 운동은 위와 같을 성질일 수밖에 없고 주체의 외각을 맴도는 운동일 수밖에 없다. [사태가 이렇게 되면] 절대적인 것이 주체라고 영리하게 잡아채는 예지는[8] 절대적인 것의 개념이 실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개념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위와 같은 예지는 개념을 부동의 점으로 묵어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념의 실재는 이와 반대로 자기운동을 하는 것이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4]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논리학적인 <주어-술어>의 관계를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이성에 관하여 언급된 이와 같은 내용은 또한 이성은 합목적인 행위다라는 표현으로 대치될 수도 있겠다. 자연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사유에 대한 어긋난 생각이 자연을 사유 위에 올려놓는 행위를 나았고 이어서 자연의 외적 합목적성을 축출했던 탓에 목적이라는 형식 자체가 불신대상이 되었다.[1] 그러나 진정 사태는 그렇지 않다.[2]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을 합목적적인 행위로 규정한 것을 보면 목적이란 [최종목적으로] 처음부터 작용하는 것[3], [뭔가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 안에 안주하는] 부동의 것, 다른 것에 의해서 움직여지지 않고 스스로 [자신과 다른 것을 동시에] 움직이는 것이다. 주체도 이와 같다. 주체의 동력은, 추상하자면, 자아로서의 의식[4], 달리 표현하면 순수한 부정성이다. 결과가 시초와 동일한 이유는 시초가 바로 목적이기 때문이다.[5] 이 문제는 실재하는 것과 그 개념의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겠는데[6], 실재하는 것이[7] 그의 개념과 동일한 이유는 다름아니라 바로 애당초 목적으로서 직접적인 것이 자기를[8], 달리 표현하면 자신의 순수한 실재를[9] 바로 그 목적 안에 갖기 때문이다.[10] [실현까지] 완전히 전개된 목적, 달리 표현하면 현실로 존재하는 실재는 엉긴 것이 펼쳐지는 생성으로서의 운동이다. 이렇게 안위하지 못하고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것이[11] 바로 자기다. 이러한 자기가 시초의 직접성 및 단순성과 일치하는 이유는 다름아니라 자기란 결과로서 자체 내로 복귀하는 것이고 바로 이렇게 복귀한 것이 자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는 자신 안에서 자기와 관계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동일성과 단순성[12]이다.
[1] 여기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스피노자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부록에서 목적론을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바로 목적론이라는 편견이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하고(„necessario existere“), 유일하고(„unicus“), 오로지 자기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 존재하고 활동하고(“ex sola suae naturae necessitate esse et agree”), 모든 사물의 자유로운 원인(„omnium rerum causa libera“)이 되고, 모든 것이 신 안에 있고 신에 종속되어 있으며 신 없이는 있을 수도 없고 파악될 수도 없다는 사실(„quod omnia in Deo sint et ab ipso ita pendeant ut sine ipso nec esse nec concipi possint“)을 이해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한다. 스피노자는 목적론의 동기로 사람들이 자신이 욕망을 가지고 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찾는 것처럼 자연도 역시 그런 것으로 생각하여 „자연의 모든 사물이 그들처럼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살아 움직인다“(„omnes res naturales ut ipsos propter finem agere“)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이런 편견이 우상이 되어 신이 자연을 인간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자연의 최종목적을 인식하고 설명하는데 (“omnium rerum causas finales intelligere easque explicare”) 전전긍긍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최종목적을 쫓는 목적론은 질문에 질문을 거듭(“causarum causas rogare“)하지만 최종목적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마침내 „무지의 망명지인 신의 의지로“(„ad Dei voluntatem hoc est ignorantiae asylum”) 도주하여 안위한다고 한다. 스피노자는 이런 목적론자를 자연의 사물을 학문하는 자세로 인식하려고(“res naturalis ut doctus intelligere”) 하지 않고 “자연과 신의 통역자”(“naturae deorumque interpretes”)로 행세한다고 한다. 아무튼 사물이 신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면 이것은 신의 무결성(perfectio)을 지양하는 것이 되는데 그 이유는 어떤 목적 때문에 신이 활동한다면 신은 필연적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는 뭔가를 욕망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구별한 4개 원인 (causa materialis/질료인, causa formalis/형상인, causa efficiens/동력인, causa finalis/목적인)과 관련이 있다. (형이상학, 제1부 3장과 자연학, 제2부 3장 참조). 그리고 헤겔은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에서는 목적인, 형상인, 동력인이 하나라고 했던 것에 기대어 (자연학, 2부 7장, 198a 24 이하 참조) 주체를 설명하는 것 같다.
[6] 원문 <— oder>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인에 기댄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형식(eidos), 혹은 원형(paradeigma)이 사유를 통해서 파악될 수 있는 것으로서 바로 개별적인 것의 본질(ousia)이며, 개별적인 것이 그런 [유의] 개별적인 것이 (to ti en einai) 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식>은 정의로 이어진다. 여기서 정의란 헤겔의
[11] 원문
[12] 원문
(§21) 그러나 이렇게 매개작용을 대하면 기겁하고 몸이 굳어지는 것은[1] 사실 매개와 절대적 인식의 속성이 정말 어떤 것이지 전혀 접해본 일이 없는[2] 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매개란 오로지 자기동일성이 자기를 움직이는 힘일[3] 뿐이다. 달리 표현하면, 매개란 자기 안으로 반성해 들어가는 것으로서 <나>외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하는 순수한 부정인 [자아로서의] <의식>이 행하는 힘이다[4]. 매개의 이런 운동을 순수한 추상화 차원으로 투영해서 이야기하면 이는 단순한 생성[5]이다. [주체성이 깃든] <나>는 [보란 듯이 피어나는 것과 같은] 생성 일반으로서[6], 이와 같은 매개작용은 [분열된 것을 붙들어 안고] 씨름하는 가운데 [통일이라는] 단순성을 지향하기 때문에 바로 [항상] 생성되는 직접성임과 동시에 그 자체가 직접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이런 직접성을 잘못 이해하여] 반성을 [즉 매개를] 진리에서 완전히 축출하고 절대적인 것의 적극적인[7] [실천적인] 힘으로[8] 파악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성을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반성이 바로 [즉 매개가] 참다운 것이 결과가 되게 하고 동시에 또한 이 결과와 그 생성과의 대립을 지양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생성은 결과에서 단순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참다운 것의 형태와 구별되지 않고 오히려 단순성으로 복귀한 [현재]완료형으로서의[9] 생성이기 때문이다. 태아는 [가능]태(態)적으로는[10] 인격체임이 틀림없지만 아직 자기 자신을 인격체로 자각한 상태는[11] 아니다. 인격체로서의 자기 모습은[12] 오직 이성으로 연마된[13] 후에 나타난다. 이성은 이런 연마를 통해서 자기의 본래적인 모습을[14] 실현하여 그때그때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실에 실재하는[15] 이성의 모습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16] 이와 같은 결과도 역시 단순한 직접성을 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결과로 나타나는 이성은 자기 안에서 자기자신을 누리는 자유인데 이런 자기자신을 자각한 자유는 자기와 대립되는 것을 한편으로 몰아내어 거기에 방치해 두지 않고 어디까지나 그것과 화해해 있는 상태에[17] 있기 때문이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für sich>
[13] 원문
[14] 원문
[15] 원문
[16] 원문
[17] 이 부분을 읽으면서 “탈나치화”에 앞장섰던 튀빙엔 대학 수사학 교수 발터 옌스(Walter Jens)를 생각해 본다. 그도 나치 국가사회주의노동당 당원이었음이 2000년대 초반에 드러났는데 다행인지 그는 침해에 걸려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나치당 당원이었음을 의식의 저편에 방치해 두었다. 한번도 그 사실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진정한 자유를 음미해 볼만한 사건이다.
진리란 [모든 것을 다 꿰어놓은] 전체다[1] .[2] 그래서[3] 전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개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완성해 나가는 본질이다. 절대적인 것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는 본질적으로 결과로서 끝에 가서야 비로서 그가 참으로 무엇인지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절대적인 것의 속성, 즉 자기모습을 갖춰가는 것으로[4] 존재함으로써 실재적인 것 또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담겨져 있다.[5] 절대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결과로서만 온전히 인식될[6] 수 있다는 점에는 [절대자의 개념에 대한] 자체 모순이 있는 듯이 보이고 그 점을 계속 우길 수야 있겠지만 이점을 약간만 검토하면 이런 터무니 없는[7] 생각을 금방 바로 잡을 수 있다. 시초, 원칙, 절대적인 것 등 [학문을] 시작하자 마자 곧바로 내세워지는 것은 단지 보편적인 것일 뿐이다. 모든 동물이라는 표현이 동물학을 대신하는 말로 통용될 수 없듯이 신,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 등의 낱말이 그것이 포함하는 것은 말하고 있지 않는 것 또한 분명하다. 낱말을 단지 이와 같이 [외연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사실 직관 또는 직접적인 것을 표현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런 낱말만이 아닌 그 이상의 것에는 매개작용이[8] 따르는데, 낱말이 비록 아주 간단한 문장으로 넘어가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달리 됨을[9] 내포하고 있으며, [이렇게 뭔가 다른 것이 되는 과정에서 낯설게 된 것은] 매개작용을 통해서 다시 자기로 회수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매개작용을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꺼린다. 그 이유는 매개를 절대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또 절대적인 것 안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매개를 이런 것 이상으로 이해하고 허용하면 바로 절대적 인식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 원문
[2] 원문 어쩔 수 없이 견디다 못해 토해내는] 표현에 뱉어내는 것의 뒤를 따라간다. 주시해야 한다. 고통에 혀를 빌려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 요구가 모든 진리에 전제되는 조건이다. 왜냐하면, 고통은 개별자를 압박하는 객관성이다. 개별자가 가장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것, 즉 표현은 객관적으로 매개된 것이다.“ („Sie folgt dem Ausdrucksdrang des Subjekts. Das Bedürfnis, Leiden beredt werden zu lassen, ist Bedingung aller Wahrheit. Denn Leiden ist Objektivität, die auf dem Subjekt lastet; was es als sein Subjektivstes erfährt, sein Ausdruck, ist objektiv vermittelt.“ (같은 책 29쪽)
[3] 원문
[4] 원문
[5] <… zu sein>을 약간 하이데거식으로 번역했다.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19) [지적직관과 관련하여 사태가 이렇기 때문에] 신의 역사와[1] 신적인 인식은 [자위행위와 같이] 자기 자신과 놀이판을[2] 벌이는 사랑으로[3]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부정적인 것을 대하고 그것을 안고 싸우는 진지, 고통, 인내, 그리고 노고가 결여되어 있다면 사랑의 유회라는 그럴싸한 생각은[4] 뭔가 위대한 것 앞에서 엄숙해지고 가슴을 부풀리는 것이지만[5] 김이 바로 빠져 푹석 주저앉고 말 것이다. 원상적으로[6] 신의 역사란 티없이 맑은 자기 동일성과 자기 통일성임에는 하자가 없다. 이런 동일성과 통일성 안에서는 신이 타자존재가 되어서 소외[경험]을 하고 또 그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대결이[7]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의 원상은[8] 추상적인 보편성일 뿐이다. 이러한 보편성 안에서는 살아 역사하는 것의 본성, 즉 [자신을 부정하는 것에 대항하여] 자신을 지켜 다듬어 나가는[9] 속성과 함께 형식의 자기운동 전반이 간과되어 있다. 형식과 본질의 동일성이 진술되는 가운데[10] 이런 명제를 잘못 이해한 나머지 인식은 원상[11] 또는 본질만을 다루는 것으로 충분하고 형식은 생략할 수 있다는 것, 즉 절대적인 기본명제 또는 절대적인 직관이 그 기본명제의 전개나 직관의 발전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는 착각이다. 그러나 바로 본질에 있어서 본질뿐만 아니라 형식 또한 본질적이므로 본질은 한낱 본질로서, 다시 말하면 단지 직접적인 실체 또는 신의 순수한 자기직관으로서만 파악되고 표현되어선 안되고 그에 못지않게 형식으로,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12] 형식을 두로 발전시킨 완벽한 풍부함으로 파악되고 표현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비로서 본질이 실재적인 것으로[13] 파악되고 표현되는 것이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아리스토텔레스/셸링
[11] 원문
[12] 원문
[13] 원문
(§18)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실은][1] 참으로 주체가 되는 존재, 달리 표현하면 참으로 실재적인[2] 존재가 되는 것은 생동하는 실체라는 것이다. 실체가 생동한다는 것은, [그리고 실체가 이렇게 생동함으로써 참으로 주체가 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단지 다음과 같은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데, 이것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정립하는[3] 운동, 달리 표현하면 자신이 알아볼 수 없는 타자가 되는 가운데 이런 자신을 자기의 본래 모습과[4] [다시] 매개하는[5] 운동을 하는 실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주체로서의 실체는 [이렇게] 순수하고 단순한 [자기] 부정성으로[6] 존재하고[7]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단일한 것이 둘로 쪼개지는[8] [양상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단일한 것이 이렇게 둘로 쪼개지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9] 양자로 쪼개지는 프로세스는 아무런 관계 없이 서로 외면하고[10] 이런 식으로 그저 차이와 대립을 빗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이런 대립을 다시 부정하는 이중화된 프로세스다[11]. 애당초의 통일, 달리 표현하면 직접적인 통일이 아니라, 위와 같이 자신을 회복하는 동일성, 달리 표현하면 [자기와 타자로 쪼개진 가운데] 타자의 반성이 곧 자기의 반성이 되는 이러한 동일성이 진리가 된다. 진리란 이런 것으로서 [실체가 주체가 되는 운동을 통해서] 자신의 완성된 모습을 갖춰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는 마치 원과 같은 것으로서, 원이 그 끝과 시초를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완성된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것과 비교할 수가 있다. 원의 시점은 한낱 한 점에 불과한 것으로서 원이 되려면 그 끝을 목적으로 전제하고 바로 그 지점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자신을 전개해 그려나가고 목적에[12] 종착할 때라야 비로소 실재하는[13] 것이 되는 것이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정신현상학에 라는 식의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3] 원문
(§17) 내가 제대로 꿰뚫어 보고 있다면, 진리를 단지 실체로만 아니라 실체에 못지않게 주체가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표현해야만 비로서 지금까지 이야기된 다툼을 해소하는 실마리가 잡힐 것이다.[1] 물론, 이러한 나의 시각은 체계의 서술을 통해서만 자기 정당성을 부여 받게 될 것이지만 말이다. 실체성을 [사유하는데 있어서]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실체성이란 보편적인 것인데, 이런 보편성은 달리 [더 정확히] 표현하면 지의 직접성뿐만 아니라 이와 함께 동시에 지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있는 존재를 또한 내포한다는 점이다. 일정한 시대에 들어와 신을 유일한 실체로[2] 파악하는 생각이 질서 정연하게[3] 표명되었는데 이 생각은 당대의 분노를 야기했다. 그 이유는 한편으론 그와 같은 실체 안에서는 자기의식이[4] 단지 소멸될 뿐 유지되지 안는다는 [생존]본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사유를 사유로서 사수하는 입장을 취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유는 단지 보편성에 멈추는 것으로서 결국 위와 똑같은 단순함, 달리 표현하면 아무런 구별이 없는 부동의 실체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번째로 [사유의 이런 면을 보완하여], 실체의 존재를 사유와 결합하고 직접성, 달리 표현하면 직관이[5] 곧 사유라고 파악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이런 지적직관이[6] 과연 나태한 단순함으로 다시 떨어지고 실재 그 자체를 비현실적인 방법으로 서술하지는 않는지 살펴보는 중차대한 일이 아직 남아있다.
[1] 원문
[2] 역자주 1) 참조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16) 사태가 이런데 형식주의는 이렇게 구멍 하나로 내는 소리와[1] 추상적인 보편성이 절대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단언하기를 그런 단음과 추상적 보편성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절대적인 입장을 취한 다음 거기다 말뚝을 박고 그 말뚝에 자신을 매어 놓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데카르트의 경우][2] [의심의 여지가 없는 뭔가를 찾아내기 위해서] 뭔가에 대한 사상을[3] 반박하려면 그 뭔가를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다는 공허한 가능성만으로 충분했다.[4] 그리고 이와 같은 가능성 자체, 즉 일반사상이[5] 그대로 실재적인[6] 인식이 갖는 모든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 받았는데, 우리가 이제 와서 접하는 것은 이런 방법을 이념에[7] 적용하여 위와 같은 비실재성의[8] 형식을 취한 보편 이념에 온갖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구별되고 규정된 것들을 해체해 버리고, 아니 그보다는 구별과 규정을 공허한 심연에 내던지는 행위가 그대로, 다시 말해서 그런 행위를[9] 더 발전시켜 전개된 구별과 규정 안에서 자기 정당성을 부여 받지 않은 행위가 절대적인 것을 바라보는 양식으로[10] 통용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절대자의 입장에 서서 현존자의[11] 존재양식을 바라보는 행위가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것 이상의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현존자가 ‘어떤 것’이라는 술어부로 규정되지만, A=A라는 형식의 절대자의 양상 속에서는 이와 같은 [술어적인] 규정은 있을 수 없고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똑 같은 것이[12] 된다. 이런 절대자 안에서는 모는 것 다 똑같다는 단조로운 지를[13] 구별가운데 충만을 획득한, 아니 충족을 모색하고 요구하는 인식에 대치시키는 행위는 절대자를 칠흑 같은 밤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속담에서나 볼 수 있는 <한밤중에는 소들이 다 시커멓다>라는 천박한 삼척동자의 텅 빈 인식과도 같은 것이다. — 형식주의는 최근의 철학이 그렇듯이 규탄하고 <물러가라> 외친다고 해서 물러서는 것이 아니다. 우리시대의 철학 한가운데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이 형식주의는 비록 그의 불충분함이 알려지고 느껴지더라도 절대적인 실재에[14] 대한 인식이 자신의 속성을 완벽하고 명료하게 알아보기 이전에는 학문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학문을 전개하는 것이 당면과제이긴 하지만] 학문에 대한 보편적인 관점을 그 관점을 속속들이 전개하는 시도에 앞서 미리 다루는 것이 후자의 이해를 손쉽게 하는 면이 있다는 차원에서 먼저 그런 보편적인 관점을 대략적으로나마 제시하는 것이 유용하겠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철학적 인식에 장애가 되는 몇 가지 습관적인 형식을 제거하려는 의도도 있다.
[1] 원문 <Eintönigkeit>
[2] 원문
[3] 원문
[4] 데카르트의 제2성찰에서 데카르트가 한 말이다. §7 주석4 참조.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즉 이념을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3] 원문
[14]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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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이러한 운동을 가장 명쾌하게 이해하고 학문을 만들어 논 것이 맑스의 자본론이라고 생각한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