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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렇게 진리가 현존하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그의 참다운 형태로는 오직 진리의 학문적 체계만[1] 있을 뿐이다. 내가[2] 목표로 세우고 달려나가는 것은 철학이 바로 이런 학문의 형태에 가까워지도록 있는 힘을 다하는 기여하는 것이다[3]. 즉 철학이 겉옷으로 두르고 있는 <지에 대한 사랑>[4]이라는 이름을 벗어버릴 수 있게 하여 실재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5] 지로 존재하게 하는데 있다. 지가 학문이라는 내적필연성은 지의 본성 속에 스며들어 있다. 이 내적필연성에 대한 만족할 만한 설명으로는 오직 철학[이 해야 하는 일] 그 자체를 서술하는 것 외 다른 것이 없다. 반면, 각 시대의 철학들간의 관계에서는 외적필연성이 작용하는데, 이때 해당 철학자의 우연성과 동기를 사상하고 보편적으로 이해하면 외적필연성은 내적필연성과 똑같은 것, 즉 각 시대가 [내적 필연성으로 완성된] 철학[체계] 계기들의 현존형태에[6] 대한 표상의 형태를 취한 것이다.[7] 이렇기 때문에 철학이 학문으로 뛰어 올라가려고 하는 발돋움과 욕구가 이 시대에 들어와 만연하고 또 그럴 찰나에 와있다는 점을[8] 보여주는 것이 바로 철학을 학문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는 우리의 시도를 참으로 정당화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이런 정당화가 우리 목적의 필연성을 제시하고, 동시에 그 목적을 틀림없이 달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1] 원문
[2] 이렇게 헤겔이 스스로 등장하는 것을 보기 힘든 데, 그걸 깨고 여기서 <나>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자기가 설정한 목적을 끝내 이루겠다는 혈서와 같은 다짐이 엿보인다. 사실 미치지 않으려면 그래야만 했었고. 이 대목을 바울 사도가 필립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내기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오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빌 3.12)라고 한 것과 함께 음미해 볼 필요가 있겠다.
[3] 겸손해 보이지만 헤겔이 자기가 완성하겠다는 의지가 스며있다.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4) 일어나서 먹고 자고 이러기를 반복하는 삶의[1] 모습은 마치 동식물이 자기속성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거기에 묶여 사는[2] 그런 모습과 같은데[3] 이런 자연[시간]의 흐름 속에 가둬진 상태에서 떨어져 나와[4] [한 개인이] 교양을 쌓아나가는 첫 디딤은[5] 언제나 보편적인 원칙과 관점을 사용하는 능력을[6] 훈련을 통해서 자기 것으로 소화해[7] 내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무튼 [보편적 원칙과 관점이 드리우는 빛 속에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는] 사상의 수준으로 [8], 즉 대상에 대한 사유행위의 결과로서 사유행위 안에 내재하는 사상의 수준으로 뛰어 올라가야 하고 이에 못지않게 근거를 제시하여 그런 보편적 원칙과 관점에 대한 지식을 뒷받침하거나 논박하고, 구체적이고 넘쳐 나는 대상의 내용을 <이것은 이것이다>라는 식으로 확실하게 규정하고[9] , 그리고 이렇게 사유된 것들을 따로따로 잘 정리함으로써 대상에 통달하여 진지한 판단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양의 초기 단계는[10] 계단을 올라가는 것과 같이 일직선으로 진행되지 않고 성장하는 소년이 철이 들어 어른이 되면 교양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충만한 삶을 향유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사회생활에[11] 자리를 비켜주게 된다. 이런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 개인은 사태를 몸소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세상살이를 하는 가운데 지식과 판단능력에 개념이 갖는 진지한 운동이 일어나 [12] 사태의 심층까지 파고 들어가는 것이 추가된다면, 이런 것은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사는, 마치 마르틴 루터와 같은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탁상담화에 잘 어울리는 지식과 판단능력이 될 것이다.[13]
[1] 원문
[2] 원문
[3] 서론 §8의 내용을 여기에 삼입함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3] 헤겔은 이런 지식을 절대 폄하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를 번역문에 언급했다.
(§3) 이와 같이 판가름에 용이한 설명을 요구하고 또 그런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이젠 잡화상에서나 볼 수 있는 동전으로 쉽게 사고팔기하는 것이 되었는데[1] 이런 것이 본질적인 것을 다루는 것으로 지금 통용되는 현실이다. 이런 자세는 철학 저술의 숭고한 내면이[2] 목적과 결론이 아니면 어디에서 더 밝혀질 수 있으며, 또 동시대가 같은 영역에서 산출한 것과의 차이가 아니면 어떻게 그 목적과 결론이 더욱 분명하게 인식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따위의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그들은 자긍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위가 인식의 출발점 그 이상의 것으로, 즉 현실을 안고 거기에 몰두하여 싸우는 실재적인 인식으로[3] 간주된다면 이것은 사실 진정해야 할 일은 옆으로 비껴나가면서 이와 같은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서 착안한 잔꾀라고 해야만 할 것인데, 무슨 말인고 하면 겉으론[4] 마치 사태 자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듯한 열정과[5] 사태 자체와 씨름 하는 척하는 노력은 [6] 보란 듯이 내놓지만 막상 그런 열정과 노력은 멀리하고 실지로 면해보려는 짓이라는 것이다. — 왜냐하면, 철학이 안고 해야 하는 일은[7] 그가 붙들어 안은 사태의 목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전개과정을[8] 통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속속들이 다룸으로서 완성되고, 또한 결론이 아니라 결론과 그의 생성과정을 합쳐놓은 것이 참다운[9] 전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목적 그 자체는, 즉 뭔가가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사상(捨象)되어 있는 한[10] 아무런 생명이 없는 것이고, 경향이란 것은 현실에 발 돋음 하지 않는 한낱 요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앙상한 결론이란 경향이 떠나버린 요동 없는 시체일 뿐이다. — 차이를[11] 이야기하는 것은 위와 같은 시체를 알아보는 것과 같은데[12] 차이는 사태의 외피일[13] 뿐이다. 차이는 사태가 끝난 곳에서 나타난다. 달리 표현하면 차이가 아닌 것이 사태다. 그래서 이런저런 철학체계의 목적과 결론, 차이와 판정을 빌미로[14] 한 이와 같은 노력은 겉으로 보기에는 어쩜 굉장히 어렵게 보이지만 사실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철학/행위는 사태를 붙들고 고심하기 보다는 사태는 아예[15] 뒤로 제쳐 놓거나 그 위에 붕 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지는 사태 안에 머물면서[16] 사태에 푹 빠져 들어가 자신을 망각하기보다는 자기 손아귀에 들어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해 계속해서[17] 남의 것을 힐긋힐긋 쳐다보면서 자기 것보다 좀 나은 다른 무언가가[18] 있으면 움켜쥐려고 팔을 뻗기 일쑤다[19]. 그래서 이러 지는 사태와 함께 하고 거기에 몰입하기 보다는 자가자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아집일 뿐이다. 아무튼[20], 내용이 충실하고 건실한 것을 평가하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고, 더 어려운 것은 그것을 파악하는 일이고, 가장 어려운 것은 평가와 파악을 통일하는 서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1] 본문에 등장하는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Bemühen um die Sache].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3] 원문
[14] 원문
[15] 원문 <immer>. 여기엔 <항상>이라는 의미보다
[16] 원문
[17] 원문
[18] 원문
[19] 원문
[20] <아무튼>으로 본문의 삽입구와 연결했다.
(§2)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 철학작품을 다루는데 있어서 그것이 동일한 대상을 다루고 있는 다른 연구결과와[1]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규정하는 가운데 이렇다라고 확신하는 것도[2] 철학 외적인 관심을 끌고 들어와 진리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어둡게 된다. 사람들은 보통 참다운 것과 그릇된 것은 서로 대립한다는 천박한 생각에 젖어있는데[3], 이와 같은 대립이 사람들의 생각에 뿌리를 내려 견고해지면 철학에 대한 기대는 이원논리로 전락하여 기존의 철학체계를 놓고 찬반으로 갈라지고 기존 철학체계에 관한 설명에서도 찬이냐 반이야 둘 중에 한쪽만을 보려는 자세로 굳어지게 된다. 이렇게 차이를 단지 모순으로 생각하는 한 다양한 철학 체계간의 차이를 결코 진리의 점진적인 발전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꽃이 피어남으로써 꽃봉오리는 사라진다. 이것을 보고 위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아마 꽃봉오리가 꽃에 의해서 반증되었다고[4] 이야기할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5] 열매는 꽃을 식물의 거짓된 존재로[6] 선언하고 스스로 꽃이 차지하던 진리의 자리를 차지한다. 여기서 나열된 형태는 서로 다르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들 간에는 결코 어떠한 타협과 화해가 있을 수 없으므로 공존하지 못하고 완전한 상호배척을 이룬다. 그러나 자연의 흐름을 속성으로 하는 식물은 위의 형태들 간의 상호배척에 연연하지 않고 그들을 다 유기적인 통일로 이끌어 내어 거기서 한자리[7] 하게 만든다. 이런 통일 안에서는 각 형태들이 서로 다투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되는 필연적인 것이 된다. 이렇게 모든 형태가 똑 같이 누리는 필연성이 완성되어야 비로서 삶이 완성되고 전체가 숨쉬고 살아있는 것이[8] 된다. 그러나 어떤 철학체계를 반박하면서 자신의 체계를 제시하는 철학자 자신이 모순을 위에서 이야기된 것과 같이 이해하지 않는 자세로 굳어져 있는가 하면 뭔가를 좀 안다고 하면서 그런 철학작품을 읽는 사람조차[9] 천박하게 사유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데[10] 그들 역시 모순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모순을 자신의 편협성에 구속시켜 이해하지 절대 모순을 자기의 편협성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자유롭게 [운동하는 것으로] 보존할 줄 모르고, 결국 갈등과 대립의 구도로 나타나는 외형에서[11] 서로가 서로에게 필연적인 계기가[12] 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 글쟁이들은 글을 쓸 때 몸에 베인 버릇처럼[1] 먼저 자기가 의도하는 목적은 무엇이고 글을 쓰게 된 동기와 더불어 그 글이 동일한 대상을 다룬 전시대나 동시대의 작품과의 관계에서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가 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일을 설명이라고 따로 이름 지어 서설의 말머리에 내놓기 일쑤인데, 그 따위 행위를 철학 하는 데까지 와서 한다면 이것은 부질없는 행위로 보는 걸로 마무리 짓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엄밀하게 철학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붙들고 그 안에 푹 빠져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놓고 볼 때[2], 위와 같은 행위는 진정[3] 철학의 목적에서 빗나가는 아니 그 목적에 반하는 행위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행위에 이렇게 강력하게 대응해야 하는 이유는 철학을 서술하는데 있어서 [진부하고 천박한] 생각이 아주 우아한 생각으로[4]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천박한 생각이 서설이란 곳에서 등장하여 철학 서술에 알맞다는 내용과 방식을 철학 밖의 관점에서[5] 내놓고 진리에 대하여 우왕좌왕하는 주장과 단언들을 엮어 짜 맞추기 식으로 시대의 경향과 각자의 입장, 즉 일반적으로 다루어지는 내용과 결론들을 나열하곤[6] 하는데 그 따위 식이 철학적 진리를 서술하는 방법으로 통용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이 몸에 베어 굳어진 생각만이 이런 천박한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한몫 하는 것은 다른 학문에서보다 유난히 철학에서 일어나는 사람을 확 사로잡는 광채와 같은 확증인데[7], 무슨 말인가 하면 철학은 본질적으로 특수한 것을 내포하는 보편성이란 터전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목적이나 최종 결과만 손에 쥐고 있으면 쓸데없는 껍데기는 다 제거하고[8] 나아가 사물의 완전무결한 본질만이 고스란히[9] 표현되고, 그에 반해 사물을 전개하는 과정은 여기에 비춰 따져보면[10] 있으나 마나 [11]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철학 외 다른 학문은 이와 대조적이다. 해부학의 경우 관념적인 정의로만[12], 예컨대 <해부학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신체의 각 부분을 생명 없는 물체로 다루어서 얻어낸 지식>이라고 정의하는 것만으로 사태 자체, 즉 해부학의 내용을 완전정복 했다고 나서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고 해부학의 내용을 실지로 소유하기 위해서는 시체를 정말[13] 해부해 봐야 한다는 것에 딴말이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 더 지적하고 넘어가자면 이와 같이 잡다한 지식을 단지 한곳에 모은 것이지 학문이라는 이름을 당당하게 내놓을 수 없는 해부학과 같은 취합물의 경우에도 목적 등과 같은 일반성을 운운하는데, 이때 이런 논의는 보통 눈에 보이는 이 신경, 저 신경, 이 근육, 저 근육 등을 내용 자체로 삼아 그저 나열하는[14] 몰개념적인 방식과 전혀 구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태가 이런데, 해부학의 이런 기술방식을 도입하여 철학을 이러쿵저러쿵하는 식으로 짜맞추고 또 그 목적을 이야기 하는 것은 바로 사태를 전개하는 것이 껍데기일 뿐이라고 주장한 자기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되고 자기가 말하는 목적이 해부학에 대한 정의와 같은 것이 되어 스스로 자기가 사용하는 방식이 진리를 포착할 수 없는 방식이라고 자백하는 것이 되고만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역자주 4 참조
[6] 원어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3] 원문
[14] 원문
정신현상학 서설도 서론과 같이 매일 1 문단씩 읽어 내려갈 생각이다. 동시에 서론에서 의문점으로 남았던 것들을 꾸준히 살펴볼 예정이다.
서론과 서설의 관계, 정신현상학 전체의 구조 등에 관한 예비적이지만 결론적인 생각들은 지양하고 정신현상학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바탕, 즉 서론에 대한 이해에 기대어 서설을 읽어 내려가려고 한다.
(§16) 의식은 이와 같은 [피할 수 없는] 필연성을 두루 거치면서[1]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학문으로 향하는 이 도정 자체가 이미 [학문의 형식을 취하는] 학문이며 그 내용에 푹 빠져 들어가[2] 이름 짖는다면 의식이 하는 경험 속에 스며있는 학문이다[3].
(§17) 의식이 자기를 뛰어넘는 행위를 하면서 얻은 경험은[4] 그 개념상 의식이 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을 담아내는 완성된 체계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멈출 수가 없고 계속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 완성된 체계가 바로 진리가 다스리는 온전한 정신 제국이다[5]. 이 제국은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르는 것과는 달리] 이렇게 의식이 행하는 모든 경험을 담은 제국이기 때문에 거기서 진리는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나타난다. 정신제국을 다스리는 진리의 몸체에는 마디마디마다[6] [의식이 도정에서 자신을 뛰어넘는 고비마다 의식의 몸체에 새겨지고 또 거기에 매듭지어진] 독특한 형태가[7] 스며들어 있다. 이렇게 진리의 몸체 마디마디에 새겨진 매듭들은[8] [의식의 구체적인 경험과정을 잘라내 버린 논리학에서 그러듯이] 추상적이고 투명한 [변증법적 운동의] 계기로[9] 나타나지 않고 어디까지나 그것들이 의식에 대해서 있는 것으로, 다시 말해서 의식이 그것과 관계하는 가운데 스스로 등장하는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정신제국을 온전한 총체로 만드는 대목에는[10] 의식이 고비마다 취한 형태가 [반드시] 있다. 의식은 참다운 모습으로 실존할 때까지 자신에게 거듭 박차를 가하는 가운데 마침내 자신의 궤도의 종착점에 이르게 되고 거기에 도달하면 의식은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에서[11] 그 옷이 자기 것이 아니라 남에게서 얻어온 낯설은 것이고 아무리 두르고 있어도 그에게는 남의 것으로만 남아있다고 여기고 [자기가 진정 입어야 할 옷은 다른 것인데 하는 부끄러움, 허위의식, 기세 등 먼지 같은 모든 생각을] 털어내 버리고 [자기의 이런 찢긴 모습을 모두 품고서 아무런 허위의식이 없는] 본향으로 귀향하는 것이다.[12] 의식이 이런 자신의 궤도의 종착점에 이르면 의식에 대한 서술 역시 완성되고 드디어 정신이 군림하는 본래적인 학문의 장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의식은 자기의 본질을 두르고, 그리고 이 옷은 절대지가 정말 어떤 것이지 그 참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옷이 될 것이다.
[1] 원문
[2] 원문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15) 경험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관한 이와 같은 서술의 표면에는 언뜻 보기에 경험에 관한 통례적인 이해와 부합하지 않는 요소가[1] 스며있다. 이 요소는 첫번째 대상과 그에 대한 지에서 두 번째 대상으로 넘어가고 과도에[2] 있다. 사람들은 보통 두 번째 대상을 놓고 경험을 논하는데, 위에서 서술한 바에 따르면 과도란 첫번째 대상에 관한 지, 달리 표현하면 첫번째 Ansich가 의식에 대하여 존재하는 양식이 필히 두 번째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3]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두 번째 대상에 대하여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생각은 위에서 서술된 경험과는 대립되는 것처럼 보인다[4].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한 첫 개념의 비진리성을 경험하게 되는 상황은 우리가 첫번째 대상과 아무런 내적 연관성이 없이 우연히 접하는 전혀 다른, 뜻밖의 대상을 접하게 될 때 이루어지는 것 같이 보인다. 그 결과 이런 식의 경험에서 우리 몫으로 떨어지는 것이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대상의 운동에 직시하는 것과 반대로] 뭔가 아예 처음부터 불변의 완결무결한 상태로 있는 것을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을 갖추면 되는 것처럼[5] 보인다. 이와 달리 앞에서 서술된 견해에 따르면 새로운 대상은 어디에선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의식이 전복[6]됨으로써 생성된 과거를 갖는 것으로서 필연적인 [7] 것이다. 사태를 이렇게 살펴보아야만 비로소 의식이 하는 일련의 경험이 학문적인 발걸음으로 추대될 수 있는데, 사태를 이렇게 고찰하는 것은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가 첨부하는[8] 것이지 우리가 관조하는 의식이 하거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9] 이런 상황은[10] 사실 위에서 의식에 대한 [학문의] 이 서술과 회의주의와의 관계를 다루면서 언급한 상황과 하나도 다른 것이 없다.[11] 그때 한말을 상기하자면 참답지 않는 지에서 매번 얻어지는 결과가 모두 공허한 무가 되어서 흔적이 없이 사라지게 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무엇의 결과로서의 무로서 그 무엇의 무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를 이렇게 결과로 파악하면 그 결과에는 이전에 행해졌던 지에 스며있는 참다운 것이 보존된다. 의식의 운동에 대한 이런 사연이 여기에 와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즉, 처음엔 대상으로 나타나던 것이 대상에 관한 의식의 지로 침강하고, 불변하는 그 무엇이 의식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이 되고[12] 바로 이것이 새로운 대상이 된다는 것이며 이와 함께 또한 새로운 의식 형태가 등장하고 이렇게 새로 등장한 의식에게는 이전 의식에게 본질이 되었던 것과는 다른 것이 본질이 된다는 것이다. 의식의 운동을 둘러싼 이런 궤도(軌道)가[13]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일련의 의식형태를 빠짐없이, 그리고 각자가 갖는 필연성에 따라서 이끌고 나아가는 것이다[14]. 여기에 회의주의를 서술하면서 이야기 한 것과 다름 점이 딱 하나 있는데[15], 그것은 이와 같은 필연성이[16], 달리 표현하면 새로운 대상이 발생하는 것이 의식에게는 전혀 인지되지 않고 그저 숙명적인 우연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필연성은 마치 의식의 등뒤에서만[17] 벌어지는 사건인양 의식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만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만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의 운동에는 자신의 운동을 전혀 꿰뚫어보지 못하고 그 운동을 숙명적으로 이행하는, 아니면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만[18] 알고 있는 면이[19] 스며들어 있다. 달리 표현하면 의식의 운동에는 경험의 와중에 있는 의식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오직 우리만 꿰뚫어 보고 우리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숙명적인[20] 면이 스며들어 있다. 더 정확하게 지적하자면[21]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생성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는 것의 내용은 의식에 대해서 있는 것이며 [학문의 경지에 있는] 우리가 파악하는 것은 단지 그 생성운동의 양식, 달리 표현하면 순수한 생성일 뿐이다. 생성된 것이 의식에 대해서는 단지 [그때 그때의] 대상으로만 존재하지만, 우리에 대해서는 동시에 운동과 깨쳐나감으로 [22] 존재하는 것이다.
[1] 원문
[2] 원문 <Übergang>
[3] 원문
[4] 원문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그러면 의식이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데…
[10] 원문
[11] 필자가 보기엔 이것은 단지 헤겔의 주장인 것 같다. 앞 문단에서 살펴보았듯이 다른 것이 없다는 주장이 최소한 명쾌하지 않다고 반박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12] §13에서는
[13] 원문
[14] 문제는 누가 이끌고 가느냐라는 것이다. 의식이 자력으로 아니면 학문이, 아니면 학문과 의식이 합심하여?
[15] 원문
[16] 원문
[17] §8
[18] 원문
[19] 원문
[20] 원문
[21] 원문
[22] 원문
(§14) 이런 운동을 놓고 우리는 변증법적 운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1] 의식이 자기 안에서 운동하는 가운데[2], 지의 운동뿐만 아니라 대상이 하는 운동 안에서 볼 수 있는 변증법적 운동이[3], 이런 운동을 통해서 새로운 대상이 발생하고 그 대상이 다시 참다운 대상이 되는 정황에 한해서[4], [우리가] 사용하는 경험이라는 낱말이 뜻하는 것의 핵심이다. 의식이 하는 변증법적 운동이 이렇게 이해되는 경험이라는 맥락에서 바로 앞에서 [§13] 언급한 의식의 과정에서 드러나는[5] 한 면을[6] 끄집어내어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면을 아래와 같이 새롭게 조명해 보는 일은 [의식을 관조하는] 우리가 하는 일인데, 이렇게 조명해 보면 [의식이 하는 운동을 서술하는] 학문이 취하는 입장이 훤해지지 않을까 한다.[7] 조명해 보자.[8] 의식은 뭔가를 안다. 이렇게 의식의 대상이 되는 그 무엇이 본질 또는 불변하는 그 무엇이다. 이렇게 지에 대해서 불변하는 그 무엇이 다가 아니다[9]. 이 무엇은 또한 의식에 대한 불변하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의식이 의미하는] 참다운 것이란 원래 불변하는 것으로서의 진리라는 의미였는데 사태가 이렇게 되면[10] 진리가 엇갈리는 것이 된다.[11] 우리가 보기에 이제 의식은 두개의 대상을 갖고 있다. 하나는 [원래적인 의미로서의] 맨 처음의 불변하는 그 무엇이고 다른 하나는 의식에 대한 그 불변하는 그 무엇이다. 후자는 회의주의가 서슴없이 말하듯이[12] 의식이 자기 안으로 반성해 들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분명[13] 보인다. 뭔가를 다시 자기 앞에 갖다 놓는 것이 아니라[14] 첫번째 대상이 되었던 불변하는 그 무엇에 관한 지를 자기 앞에 갖다 놓는다는 것인데, 이때 불변하는 그 무엇을 대상으로 삼았던 지의 행위만이 반성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우리가 위에서 보여주었듯이 그렇지 않다. 회의주의가 관념적으로 그러듯이 이때 첫번째 대상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15] 변화하여 다가간다. 그래서 이 대상은 더 이상 홀로 불변하는 그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식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불변하는 그 무엇이 된다.[16] 이렇게 되면 다음과 같은 결과로 귀착된다. 즉, 불변하는 그 무엇이 의식에 대하여 존재하는 양식이 참다운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더 살펴보면[17] 참다운 것이 본질이 되기 때문에 불변하는 그 무엇이 의식에 대하여 존재하는 양식이 이제 의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대상이 바로 첫번째 대상의 허무함을 내포하고 있는바 첫번째 대상을 딛고 올라서면서 얻은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다.
[1] 원문
[2] 원문
[3] 지의 운동과 대상의 운동을 통합해서 의식의 운동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Einheit der Einheit und Differenz”의 근거가 되는 상황이 아닌가 한다.
[4] 강조는 역자. 회의주의에서는 새로운 대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13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an sich> 가 단지
[5] 원문
[6] 원문
[7] 이 문장은 헤겔이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좀 두리뭉실하게 표현하였는데, 한가지만 집고 넘어가자면
[8] <정신현상학>의 담론적 성격을 살렸다. <정신현상학>을 번역하는데 있어서 이런 담론적 성격 외 독어의 특성이 애로사항이 된다고 역자가 지적한 적이 있다. 한가지 더 지적하자면 <정신현상학>에 무수히 쓰이는 문장기호다. 적절한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 damit tritt die Zweitdeutigkeit dieses Wahren ein.>
[12] 원문 <zunächst>. 여기서 줄곧 담론의 대상이 되는 것은 회의주의이기 때문에 이렇게 옮겨 보았다.
[13] 원문
[14] 원문
[15] 의식에게
[16] 원문
[17] 원문
(§13) 의식을 가름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절제해야 하는 것은 이것 뿐만이 아니다.[1] 개념과 대상, 척도와 잣대질의 대상이 모두 의식 내에 있다는 면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첨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다가 아니다. 우리가 더욱 유의해야 할 점은[2] 양자를 비교하는 본격적인[3] 조사 또한 우리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4] 아니라는 것이다. 의식이 자기자신을 스스로 가름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은 일이란 수수방관(袖手傍觀)하는[5] 것뿐이다. 왜냐하면, 의식이란 한편으로는 대상에 대한 의식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참다운 것에 대한 의식임과 동시에 이렇게 참다운 것을 알고 있다는 의식, 즉 이와 같은 [대상에 대한] 지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자가 다 의식의 행위이기[6] 때문에 의식이 하는 이런 행위 자체가 진리와 지를 비교하는 것이 되고 대상에 대한 지와 대상과의 일치여부 역시 의식의 행위 안에서 의식에게 벌어지는[7] 사건이 된다. 그런데 모두가 이렇게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하고 또 그런 사건만으로 제한한다면[8] 대상은[9] 의식에 대한 대상으로서 단지 의식이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 밖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추궁이 그럴 듯 하다[10]. 왜냐하면, 의식은 자기가 알고 있는 대상을 마치 꿰뚫어 보듯이 하여 그 뒷면에 의식행위와 무관하게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에는 다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식이 아는 대상에는 이렇게 아무런 구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의식은 무엇을 무엇에 갖다 대보는 식으로, 즉 [의식에 대한] 대상을 [즉자적인] 대상에[11] 갖다 대보는 식으로 조사를 진행하여 지의 진위여부를 가름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지 않다. 의식이 대상을 안다고 하는 그 행위 자체를 통해서 의식에게는 [막연하지만] 뭔가가 [의식과 무관하게]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고, 다른 뭔가는 지, 즉 의식에 대한 대상의 존재라는 구별이 주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주어진 구별에 기반하여 비교조사가 진행된다. 이런 비교에서 양자가 일치하지 않으면 의식은 지를 변경하여 대상에 부합하도록 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의 변화는 사실 지에 머무르지 않고 대상의 변화까지 몰고 온다. 왜냐하면, 주어진 지는 본질적으로 대상에 관한 지이기 때문이다. 지가 변하면 동시에 대상도 다른 것이 된다. 왜냐하면, 대상은 본질적으로 지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면 의식은 자기가 이전에 das Ansich라고 했던 것이 이제 와서 보니 사실 불변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단지 의식에 대해서 [한때] 불변하는 것으로 있었던 것이었다고 의식하는 새로운 의식이 된다.[12] 사태가 이렇게 되면, 즉 의식이 자기의 대상에 자기의 지를 가름해보고 지가 여기에 일치하지 않게 되면 대상 그 자체도 의식의 이런 운동에 견딜 수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조사의 잣대도, 그 잣대를 가지고 조사한 것이 그 조사에서 부족한 것으로 나타나는 경우 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사란 단지 지의 조사에 머무르지 않고 지를 조사하는 잣대의 조사가 되는 것이다.
[1] 원문
[2] 역자주 107 참조. 강조된
[3] 원문
[4] 원문 <überhoben>.
[5] 원문
[6] 원문
[7] 원문
[8] 원문
[9] [우리가 학문의 입장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지의 대상과 진리로 구분되지 않고]
[10] 원문
[11] 원문
[12]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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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이 폄하하는 사람들은 세상 삶의 진지함이 없는, 즉 세상살이의 진지함을 글/말로 대체하는 글쟁이 들이다. 이런 차원에서 헤겔이 글쟁이들에게 하는 비판은 겨와 알맹이를 가르는 "구제하는 비판"이다. 단지 학문은 이 차원에 머무를 수 없고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즉 진리가 현존하는 모습으로 뛰어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 헤겔이 지적하는 것이고 정신현상학 서설 다음 문단 (§5)에서 전개되는 내용이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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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헤겔이 역사와 현시대에 나타나는 세상의 모든 현상을 보듬고 얼마나 씨름하고 그러면서 얼마나 통이 큰 사람이 되었는지는, 그런 겨를 지옥불에 던져버리지 않고, 다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의 도정에서 한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자리매김해 주는 아름이 잘 보여준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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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정신현상학의 헤겔이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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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우선 그런 "통"이 될 수 없고 적과 적대적 투쟁, no pasaran-투쟁을 전개해야만 한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