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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 반도체 산업, 빛과 그림자
흔들리는 반도체 신화, 한국 경제 '알몸' 드러나나?
[IT 일상다반사] '공룡' 반도체 산업, 빛과 그림자(上)
<프레시안> 2010-09-15 오전 9:26:41
성현석 기자
"베스트셀러 한두 권 냈을 때가 위험하다."
한 출판사 사장에게서 들은 말이다.
대략 이런 식이다.
목돈이 들어오면, 처음에는 좋다. 빚도 갚고, 여기저기 생색도 낸다.
베스트셀러의 저주문제는 그 다음이다.
슬슬 착각하게 된다.
숱하게 낸 책들 가운데 고작 한두 권이 성공했을 뿐인데, 마치 대형 출판사라도 된 양 착각한다는 게다.
그러나 시장은 변덕스럽다.
불티나게 팔리던 책이, 갑자기 뜸해진다.
계속 잘 팔릴 줄 알고, 잔뜩 찍어냈던 책은 재고로 쌓인다.
이때 정신을 차려야 한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출판사가 거둔 막대한 매출 가운데 베스트셀러가 차지하는 몫을 빼면, 경영 상태는 오히려 위험 수위라는 점을 애써 무시한다.
이미 성공한 베스트셀러와 유사한 책을 또 내면, 역시 잘 팔릴 줄 안다.
그러나 잔치는 끝났다.
시장은 새로운 기획을 원한다.
한두 차례의 성공 경험은 이제 족쇄가 된다.
새로운 상상력이 싹트는 것을 방해한다.
출판사는 '한때의 베스트셀러'와 함께 천천히 잊혀진다.
무역 흑자 절반이 반도체에서…반도체 착시 효과
그런데 여기서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반도체를 넣으면, 그대로 한국 경제 이야기가 된다.
반도체가 '베스트셀러'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올해 초부터 지난 7월까지 한국의 무역흑자는 228억 달러인데, 반도체 흑자가 107억 달러다.
무역 흑자의 약 47%가 반도체에서 나왔다.
앞서 예로든 출판사의 사례에 딱 들어맞는다.
본격적인 시동이 걸린 지 50년쯤 된 한국 경제는, 출판사로 치면 베스트셀러를 네댓 권쯤 냈다.
반도체, 휴대폰, 자동차, 조선, 철강 등이다.
1등 공신은 역시 반도체다.
삼성이 한국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삼성이 반도체 산업을 일궈냈으니까.
반도체 산업의 매력은 높은 수익률이다.
전체 수출액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율이 10%안팎인데. 무역 흑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거의 절반이라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수출액이 조금만 늘어도, 흑자는 훨씬 짭짤해진다.
국가 경제를 운용하는 입장에선 기특할 수밖에 없다.
이어지는 이야기도, 앞서 예로든 출판사와 똑같다.
반도체에서 워낙 높은 이익이 나오다 보니, 다른 부문에서 죽을 쑤는 게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이른바 '반도체 착시효과'다.
반도체 가격, 바닥 없는 추락…
한국 경제, 빨간불징후는 이미 나타났다.
지난 7월 기준으로 전체 광공업 생산은 한 달 전보다 1.1%포인트 늘었다.
그러나 반도체를 빼면, 계산이 달라진다.
반도체를 제외한 광공업 부문 생산은 한 달 전보다 0.1%포인트 줄었다.
반도체가 계속 한국을 먹여 살려주면 될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거기서도 빨간불이 들어왔다.
지난 7월 반도체 재고는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69.4%포인트 늘었다.
반면, 반도체를 제외한 광공업 부문 재고 증가율은 7.3%에 불과하다.
재고가 늘어나는 '속도'도 빨라졌다.
재고를 가리키는 그래프의 기울기가 높아졌다는 말이다.
지난 7월 반도체 재고가 한 달 전에 비해 늘어난 비율은11.1%다.
4~6월에는 3% 안팎에 그쳤던 수치다.
반도체 가격도 떨어지고 있다.
DDR2 1Gb 667㎒ D램의 경우, 지난해 1월 이후 꾸준히 가격이 올라서 지난 3월 26일 3.00달러로 정점을 찍고 꾸준히 하락세다.
지금은 2.00달러 안팎이다.
DDR3 1(Gb) 1066㎒ D램의 경우도 지난 5월 2.72달러를 기록한 뒤 가격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
경제학 교과서 첫 장에 나온 내용대로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반도체 수요는 줄었는데, 공급은 늘었다.
당연히 가격이 떨어질 밖에.
'치킨게임' 주도하는 삼성…도박의 끝은?
반도체 공급을 늘린 힘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에게서 나왔다.
지난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으로 천문학적 규모의 삼성 비리가 세상에 알려진 뒤, 이 회장은 한동안 삼성 경영에서 손을 뗐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지난해 말 이명박 대통령이 이 회장을 사면했다.
면죄부를 받은 이 회장이 경영에 복귀하며 내린 첫 지시가 반도체 공장 증설이었다.
이 결정에 따라 삼성전자는 내년까지 약 20조 원을 반도체 공장 증설에 투자하기로 했다.
반도체 수요가 하락 추세인데, 공급을 늘리겠다는 결정이 어떻게 나왔을까.
이 회장의 정확한 속내는 알 수 없다.
사면이라는 특혜에 부응하는 투자 결정을 해야 했고, 마침 이 회장이 복귀한 지난 3월에는 반도체 경기가 좋았다는 점이 배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보다는 다른 해석에 더 무게가 실린다.
반도체 산업의 특성을 고려한 해석이다.
삼성전자의 주력제품인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도박판에 가깝다.
미래 예측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막대한 자본 투자 결정을 해야 한다는 점이 그렇다. 경쟁기업이 어떤 전략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전략이 바뀌는 게임이라는 점도 중요한 특징이다.
게임이론 연구자들이 종종 반도체 시장을 연구 주제로 삼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그 가운데서도 '치킨게임' 개념이 잘 적용된다.
'치킨게임'은 1950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놀이에서 나온 말인데, 한밤중에 도로의 양쪽에서 두 명이 각자의 차를 몰고 정면으로 달리다가 충돌 직전에 핸들을 꺾는 사람이 지게 돼 있다.
핸들을 꺾은 사람은 겁쟁이, 즉 치킨으로 몰린다.
양 쪽 모두 핸들을 꺾지 않아서 둘 다 죽는 경우가 많다.
1950~1970년대 미국과 소련 사이의 극심한 군비경쟁을 빗댄 말이기도 하다.
가격이 뚝뚝 떨어져도, 공급을 늘리는 삼성전자의 전략 역시 '치킨게임'의 일종이다.
경쟁업체가 투자를 포기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고, 결국 호황이 닥쳤을 때 막대한 이익을 거두게 된다.
"문제는 시장 점유율…천수답식 경영, 벗어나겠다"
그런데 삼성전자의 궁극적인 야심은 더 원대하다.
지금의 시장 구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은 지난해 말 "메모리 반도체 사업이 천수답식 경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통제할 수 없는 변수인 날씨에 따라 수확량이 좌우되는 농사가 천수답식 경영에 해당한다.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수요 변화에 따라 가격이 널뛰듯 변하는 반도체 시장을 잘 비유한 말이다.
천수답식 경영에서 벗어나겠다는 말은 삼성이 시장 지배자가 되겠다는 뜻이다.
마치 미국의 카길 등이 국제 농산물 시장을 지배하듯 말이다.
독·과점적 지위를 이용하면, 가격을 조절할 수 있고 이익 범위를 조절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반도체 장비를 싹쓸이해서, 해외 경쟁업체는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환경을 만들었는데, 이런 결정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난해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35%대였다.
이 비율을 50%이상으로 높이겠다는 게 삼성의 목표다.
이렇게 해서 시장지배자가 되면, 무리한 '치킨게임'을 하느라 치른 비용을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한 반도체 업체 연구원의 말이다.
"반도체 '치킨게임'은 얼마나 낮은 가격에서 이익을 낼 수 있느냐에서 승부가 갈린다.
삼성전자는 이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다.
다른 업체들은 이익을 낼 수 없지만, 삼성전자는 이익을 낼 수 있는 가격대가 있다.
이런 가격대가 유지되는 것은 삼성에게 전략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다.
설령 삼성전자가 이익을 낼 수 없는 수준으로 가격이 떨어져도, 삼성전자는 충분히 감당할 맷집이 있다.
삼성전자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게 우선이다."
1995년 반도체 대호황, 이건희 북경 발언…2년 뒤, IMF 구제금융
그런데 진짜 문제가 있다.
'삼성=한국'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등식이 성립한다면, 최근의 반도체 가격 하락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삼성은 치킨게임에서 제법 승산이 있다.
그러나 한국 경제와 삼성 재무 상태 사이에는 까마득한 간극이 있다.
반도체에 의존하는 비율이 지나치게 높은 한국 경제는, 반도체 가격이 조금만 떨어져도 크게 흔들린다.
반도체 흑자에 가려져 있던 그늘이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타격을 입는다.
그리고 이런 타격을 감당할 맷집이 없다.
넘치는 현금을 주체하지 못하는 삼성과 부실 재정으로 허덕이는 한국 정부는 처지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선례가 있다.
1996년의 경험이다.
1993년~1994년 PC 운영체제로 윈도95가 도입되면서 반도체 시장은 대 호황을 맞았다.
PC 보급 증가와 기존 PC의 메모리 업그레이드가 맞물렸기 때문이다.
당시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선 4Mb D램에서 16Mb D램으로의 세대교체가 진행됐다.
1995년이 절정이었다.
당시에도 삼성전자 등 반도체 업체는 넘쳐나는 현금을 주체하지 못해서 고민이었다.
이건희 회장이 "기업은 이류, 행정은 삼류, 정치는 사류"라는, 이른바 북경 발언을 내뱉은 것도 이때다.
굳이 청와대가 아니어도 발끈할 만한 말이다.
한국 정치가 삼류도 못 되는 사류라면, 정치권에 뇌물을 뿌리며 공생 관계를 유지한 재벌 역시 비슷한 수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유독 기업만 상류 급이라고 하니, 반발을 산 게 당연하다.
반도체 부문의 천문학적 성공, 삼성의 반도체 사업이 한국을 먹여 살린다는 믿음이 이런 오만방자한 발언을 낳았다.
실제로 반도체 호황은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끌어 올렸다.
1990년대 초 6% 안팎이던 경제성장률은 1995년 들어 8.9%로 치솟았다
.그러나 잔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주력 품목이던 16Mb D램 가격이 1996년 들어 폭락했다.
반도체를 대체할 수출품목이 없었던 한국 경제는 한순간에 침체에 빠졌다.
경제성장률은 1996년 들어 7.2%로, 1997에는 5.8%로 떨어졌다.
상품수지 적자 역시 3, 4배로 늘었다.
그리고 1997년 가을, 한국은 IMF 관리 체제로 떨어졌다.
재벌은 더 영리해지고, 정부는 더 무모해지고
다시 반도체 가격이 떨어지고 있는 지금은 14년 전과 얼마나 다를까.
메모리 반도체 수출에 대한 지나친 의존, 메모리 반도체를 대체할 품목을 못 찾는 상황 등은 그대로 닮았다.
대통령 선거를 2년 앞두고 있다는 점도 닮았다.
물론, 다른 점이 더 많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삼성이 14년 전보다는 영리해졌다는 점이 그 중 하나다.
삼성은 최근 온갖 비난과 망신을 무릅쓰고 용산 개발 사업에서 발을 뺐다.
공식적으로는 삼성물산의 결정이지만, 그룹 차원의 판단이 있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반도체로 번 돈을 무모한 자동차 사업에 쏟아 붓던 1990년대 중반의 모습과는 분명히 달라졌다.
걱정스러운 쪽은 정부다.
재벌은 이렇게 영리해졌는데, 정부는 오히려 더 무모해졌다.
그저 4대강 사업처럼 무모한 사업에 돈을 쏟아 부을 뿐이다.
무역 흑자의 절반을 차지하던 반도체 수출이 줄어드는 날, 그래서 한국 경제의 맨얼굴이 드러나는 날이 두렵게 여겨지는 이유다.
베스트셀러 한두 권 낸 걸로 자만하면 회사 망한다던 출판사 사장의 충고가 지금 가장 절실한 사람은 바로 한국 경제 수장이다.
"반도체 산업, 언제까지 '아오지 탄광' 방식인가?"
[IT 일상다반사]'공룡' 반도체 산업, 빛과 그림자(中)
<프레시안> 2010-09-30 오전 7:43:41
성현석 기자
고(故) 이병철 회장 시절, 삼성이 일본 전자업체인 샤프에 직원들을 보냈다.
반도체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직원들이 돌아온다는 보고를 받던 중 이 회장이 역정을 냈다.
"이 사람들이 정신 나갔구만! 같은 비행기로 귀국하겠다니 무슨 소리야! 한 사람씩 다른 비행기를 타고 와!"
행여 비행기가 추락하기라도 하면, 애써 배운 반도체 기술까지 함께 물에 잠긴다는 이야기다.
<삼성의 스타 CEO>라는 책에 담긴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의 회고인데, 이병철 회장의 꼼꼼한 성격을 드러내는 일화로 소개돼 있다.
물론, 다른 시각도 가능하다.
이윤을 낼 수 있는 사람만 귀하게 여긴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이런 야박함은, 기업인의 숙명일 게다.
재벌 회장이 직원들의 비행기 일정까지 직접 챙기면서 일궈낸 반도체 산업. 거기서 열매를 거두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대신, 열매는 크고 달았다.
'아오지 탄광' 취급 받던 삼성 반도체의 성공삼성이 반도체 산업에 뛰어든 것은 한국반도체 지분 절반을 인수한 1974년이다(지분 전체를 인수하고 회사 이름을 삼성반도체로 바꾼 것은 1978년).
당시 한국에서 반도체 산업이 성공하리라고 본 사람은 극소수였다.
이런 시각은 삼성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광호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삼성반도체 반도체사업부장으로 발령이 나서 갔더니 직원 천여 명이 할 일이 없어 풀을 뽑고 있더군요. 한심하기 짝이 없었지요. 당시 반도체는 삼성 내에서 모두가 가기 싫어하는 회사였습니다. '아오지 탄광'으로 불릴 정도였지요."
실제로 이 회장이 살아있는 내내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이병철 회장이 사망한 직후,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 계열사 사장단이 한목소리로 '반도체 사업 포기'를 건의했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반전은 순식간이었다.
이 회장이 사망한 이듬해인 1988년, 삼성은 반도체 사업에서 첫 흑자를 냈다.
그동안 쌓인 적자를 만회하고도 남는 액수였다.
그 뒤, 반도체는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아오지 탄광' 소리를 듣던 반도체 사업이 한국경제의 스타로 떠오르기까지의 이런 역사는 충분히 흥미롭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성공담이 많은 언론인의 관심을 끌었던 이유다.
두 가지 착시 효과…
"메모리는 넘치는데, 두뇌가 없다"
하지만 여기에도 '착시효과'가 있다.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한국이 반도체 부문에서 거둔 막대한 흑자 때문에 다른 어두운 경제지표들이 가려지는 효과다. (☞관련 기사: 흔들리는 반도체 신화, 한국 경제 '알몸' 드러나나?)
다른 하나는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 거둔 성취에 비메모리 부문의 부진한 상황이 감춰지는 효과다.
이번에 다룰 내용은 두 번째 착시효과다.
이걸 이해하려면, 반도체의 종류를 알아야 한다.
한국 반도체 산업을 대표하는 기업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다.
그리고 이 두 회사가 주로 생산하는 제품은 메모리 반도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워낙 메모리 반도체에 치우쳐 있는 탓에 '반도체=메모리 반도체'라고 여기는 이들을 흔히 본다.
하지만 흔히 시스템 반도체라 불리는 비(非)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더 크다.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메모리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5%에 불과하다.
나머지 75~80%가 비메모리 부문이다.
메모리 반도체의 역할은 정보를 보관하는 것이다.
정보를 처리하는 역할은 비메모리 반도체(시스템 반도체)가 맡는다.
거의 모든 전자제품은 논리회로를 갖고 있다.
예컨대 전기밥솥의 경우, 밥솥 안의 쌀과 물의 양, 그리고 이용자가 어떤 버튼을 눌렀는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밥을 짓는다.
이런 논리적 흐름을 구현하는 게 비메모리 반도체의 역할이다.
한마디로 전자제품의 두뇌 역할을 하는 게 비메모리 반도체다.
컴퓨터 안에 있는 CPU(중앙처리장치), 휴대폰 안에 있는 모뎀 칩 등이 비메모리 반도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인텔, 퀄컴 등이 모두 비메모리 반도체 업체다.
그리고 메모리와 비메모리를 합친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는 업체는 삼성이 아니라 인텔이다.
삼성전자가 메모리 부문에서 거둔 성취가 워낙 압도적이었던 탓에 한국이 비메모리 부문에서 거둔 초라한 성적표는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기업의 점유율은 모두 합쳐도 3%대다.
또 지난해 비메모리 반도체 수출액은 123억 달러, 수입액은 177억 달러로 적자 폭이 크다.
메모리 반도체가 수출액 159억 달러, 수입액 41억 달러로 큰 흑자를 낸 것과 대조적이다.
비메모리 반도체 수출만 부진한 게 아니다.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장비 역시 대부분 수입한다.
주로 일본에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얼마나 기형적인 모양새인지를 알 수 있다.
특정 부문만 고도로 발달하고 나머지는 미숙한 괴물에 가깝다.
메모리 위주 산업 구조, 고용 창출에는 한계
이런 상황에 대해 반성하는 목소리는 정부 안에서도 나온다.
지식경제부가 지난 9일 내놓은 "시스템 반도체 및 장비산업 육성전략"에도 이런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메모리 반도체가 기성복에 가깝다면, 비메모리 반도체는 맞춤옷에 가깝다.
앞서 설명했듯 비메모리 반도체는 거의 모든 전자제품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세탁기에 쓰이는 것과 밥솥에 쓰이는 것, 컴퓨터에 들어가는 게 각각 다르리라는 점은 당연하다.
맞춤옷에 가까운 이런 특징은 두 가지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하나는 다품종 소량생산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중소기업이 진출할 수 있다.
대만의 경우가 좋은 사례다.
대만은 비메모리 반도체 강국으로 꼽히는데, 반도체 관련 중소기업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아시아의 퀄컴'으로 불리는 미디어텍이 대표적이다.
반면, 메모리 반도체처럼 소품종 다량생산이 이뤄지는 분야는 자본 동원 능력이 약한 중소기업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메모리 반도체 강국인 한국에서 삼성전자 외에는 내세울 만한 반도체 기업이 없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다른 하나는 비메모리 사업의 경쟁력은 개발자의 설계 능력에 달려있다는 점이다.
이는 사람에 대한 투자가 늘어날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투자가 늘어도 고용은 늘지 않는 특징이 있다.
투자가 장비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메모리 반도체 신규 투자는 관련 장비를 업데이트 하는 데 쓰일 뿐 신규 고용에 쓰이지는 않는다.
삼성이 반도체 사업으로 떼돈을 벌면서도 신규 채용에는 인색하다는 말이 종종 나오는데, 메모리 반도체에 중점을 두는 구조에서는 당연한 현상이다.
"사람에 대한 투자가 핵심. 그러나…"
정부 역시 이런 특징을 잘 알고 있다.
지식경제부 관계자는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 반도체) 육성 방침은 정부의 중소기업 살리기 정책과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사람에 대한 투자가 핵심이다. 관련 전문가를 키우는 데 정책의 초점이 맞춰질 것"이라고 말했다.
"시스템 반도체는 메모리 반도체에 비해 고용 창출 효과가 압도적으로 높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이 주로 생산하는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곧 물리학적인 한계에 부딪히리라는 점 역시 이런 판단의 배경이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메모리 집적 기술이 발전할 경우, 향후 10년 안에 양자역학적 한계에 부딪힌다.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한계다.
기술 발전 속도를 인위적으로 늦추거나,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메모리 반도체를 만드는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둘 다 쉽지 않은 일이다.
정부 안에서 메모리 반도체에 치우친 산업 구조에 대해 반성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에 '스타 중소기업', '스타 개발자'가 없는 이유
문제는 그 다음이다.
비메모리 산업을 키우려면, 중소기업이 활성화돼야 하고 설계 인력을 키워야 한다는 점을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대만과 달리, 한국에서는 왜 '스타 중소기업'이 나오기 힘든지, 왜 한국에서는 '스타 개발자'가 나오기 어려운지를 알아야 문제를 풀 수 있다.
그리고 정부의 답변은 이 대목에서 막혀 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비메모리 산업의 구조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반도체 설계'라고 하면, 흔히들 종이 위에 자를 대고 줄을 긋는 장면을 떠올린다.
건축 사무소에서 예전에 하던 방식을 떠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반도체 설계' 과정은 사실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작업이다.
반도체 생산의 첫 단계를 '상위 수준 기술(High Level Description)'이라고 부르는데, 주로 C언어 등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로 원하는 반도체의 구조와 기능을 묘사하는 일이다.
그 다음 과정은 'RTL 코딩(Register Transfer Level Coding)'인데, 이 과정도 결국 프로그래밍 작업이다.
VHDL, verilog HDL 등의 프로그래밍 언어가 쓰인다.
비메모리 반도체 사업의 경쟁력은 이런 프로그래밍 과정에서 나온다.
제조 공정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용하는가에서 승부가 갈리는 메모리 사업과 다른 대목이다.
'IT개발자 잔혹사' 보면, 비메모리 반도체 미래 보인다
그렇다면, 정부가 육성 방침을 밝힌 비메모리 반도체 사업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지를 점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업종의 특징이 크게 다르지 않은 기존 소프트웨어 산업이 한국에서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살피면 된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정부는 대대적인 IT 벤처·중소기업 지원 정책을 펼쳤고, 관련 분야 인력 공급도 늘렸다.
그래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인건비 외에는 다른 비용이 들지 않는 특성 때문에 신규 고용 창출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늘도 짙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공정 거래 관행 탓에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공급하는 소프트웨어는 제값을 받을 수 없었다.
이런 구조에서 중소기업 경영자가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직원을 쥐어짜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권위적인 기업 문화까지 곁들여지면서,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극도로 열악한 노동 조건에 놓이게 됐다.
한때 각광받던 소프트웨어 산업은 순식간에 3D업종이 됐다.
'스타 개발자', '스타 중소기업'이 나오기는커녕 '기피 업종'이 된 것이다.
이런 구조를 방치한 채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을 키우겠다는 정부의 계획은 설득력이 약하다.
"인건비부터 쥐어짜는 구조에서 '스타 팹리스'는 없다"
지식경제부는 지난 9일 내놓은 "시스템 반도체 및 장비산업 육성전략"에서 '스타 팹리스'를 키우겠다고 밝혔다.
팹리스란, 공장이 없는 회사라는 뜻인데, 반도체 설계만 담당하는 회사다.
앞서 말한 프로그래밍 작업과 시뮬레이션 작업을 한 뒤, 반도체 생산은 파운드리 업체(반도체 생산만 담당하는 업체)에 맡긴다.
효율적인 파운드리 업체와 다양하고 창의적인 팹리스가 건강한 생태계를 이룰 때, 비메모리 산업은 튼튼해진다.
앞서 소개한 대만의 미디어텍, CDMA칩을 개발해서 한국으로부터 막대한 로열티를 받아간 미국의 퀄컴 등이 대표적인 '스타 팹리스'다.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에서 '스타 팹리스'를 꿈꾸는 이들이 늘어나면, 고용도 늘어나고 중소기업도 활성화되리라는 정부의 판단은 일리가 있다.
이들 업종에서 하는 일은 사실상 프로그래밍 작업이므로, 기존 소프트웨어 산업과 마찬가지로 고용을 늘릴 수 있다.
문제는 뒷감당이다.
외환위기 직후, 소프트웨어 산업을 키울 때처럼 일시적으로 지원한 뒤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는 안정적인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기존 소프트웨어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경험에서 생긴 학습 효과 때문에도 그렇다.
장밋빛 전망으로 젊은이들을 끌어모은 뒤, 적당히 쓰다 버리는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서울시내 한 대학에서 집적회로를 가르치는 교수는 "한국에서 '스타 팹리스'는 나올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대만에서 팹리스가 발달한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설계 작업에 제 값을 쳐주는 문화가 있기 때문인데, 한국에는 이런 문화가 없다"고 설명했다.
설계 작업의 원가는 결국 인건비인데, 인건비는 무한정 깎을 수 있다고 보는 게 한국 기업 경영진의 생각이라는 설명이다.
비메모리 반도체 전문가인 루 후터 동부하이텍 부사장 역시 비슷한 설명을 했다.
지난해 한국에서 열린 국제반도체대전(i-SEDEX)에서 그는 "메모리 반도체 개발은 대체로 최고경영자의 개발 지시에 의존하는 형태로 위계질서가 잡힌 한국 상황에 잘 들어맞는다.
반면 (비메모리 반도체의 일종인) 아날로그 반도체는 자유분방한 개발자가 각자 만드는 방식이다"라고 말했다.
미국 반도체 업체인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 엔지니어 출신인 그의 이런 설명에는 동양 문화에 대한 서구인들의 편견이 녹아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서 잘 통했던 권위적인 문화가 비메모리 분야에서 통하기 어렵다는 지적은 부인할 수 없다.
"삼성전자의 성공방정식은 이제 끝났다. 새로운 모델 찾을 때"
이런 설명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적어도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에서만큼은 과거 삼성전자가 적용했던 성공 방정식이 통하지 않는 점이다.
노동조합조차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권위적인 기업 문화는, 공장에서 정체 모를 병으로 동료들이 죽어나가도 아무런 항의조차 못하게끔 노동자들을 길들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처럼 고분고분하기만 한 문화에서 창의적인 개발자가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반도체 기술을 배운 직원들이 탄 비행기가 추락할까봐 걱정했던 게 고 이병철 회장의 마음가짐이었다.
그리고 반도체 산업이 새로운 변곡점을 맞은 지금, 이런 자세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계승될 필요가 있다.
반도체 산업의 주역인 삼성 직원들의 건강과 기본권까지 챙기는 자세 말이다.
그래야 한국 반도체 산업의 미래가 열린다.(☞관련 기사: 삼성 내부 보고서도 반도체 공장 위험 인정, 한국 의사의 국제상 수상, 언론에 보도 안된 이유는?)
"IBM부터 폭스콘·삼성까지…'죽음의 행진'을 멈춰라"
[IT 일상다반사] '공룡' 반도체 산업, 빛과 그림자(下)
<프레시안> 2010-10-12 오전 9:17:20
김봉규 기자
- 세계 전자산업의 노동권과 환경정의 |
"다치고, 병들고, 죽은 노동자들은, 적어도 법적으로는, 의학적으로는, 기술적으로는, 사회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방도, 치료도, 보상도 받을 수 없다."(울리히 벡)
"이 경우 통계적 유의성이 없습니다. 전문가들 의견이 그렇습니다."(5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삼성반도체노동자의 산업재해 관련 질의에 대한 박재완 고용노동부 장관의 답변)
IT(정보기술)라는 용어가 일상 속에 자리매김한지도 많은 시간이 지났다.
PC(Personal Computer,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부터 스마트폰의 등장까지 IT 산업은 끊임없이 미래에 대한 환상을 현실로 보여줬다.
나날이 발전하는 IT 기술과 쏟아져 나오는 소프트웨어는 IT를 가상의 공간에서 생성되는 서비스 산업의 일종으로 여기게 한다.
하지만 그 제품 안을 뜯고 안을 들여다보면, 전 세계적으로 퍼져있는 IT 산업의 최하층에 자리잡은 반도체 노동자들의 비극이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1980년대 후반 '반도체 신화'를 일구기 시작하면서 글로벌 IT 기업으로 부상한 삼성에 의혹에 제기된 것은 지난 2007년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故 황유미 씨가 숨지면서부터다.
황 씨의 죽음 이후 꾸려진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 지금까지 접수한 피해 제보는 100여 건에 이르고, 이중 32명은 이미 사망한 상태다.
피해 노동자의 수가 늘어나면서 해마다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빠지지 않는 단골 소재가 되었지만, 정작 삼성과 정부가 내놓은 대답은 한결같다.
피해 노동자들의 발병과 노동 환경은 직업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박재완 장관의 말이 이를 잘 웅변한다.
<CTC>, 삼성을 비추는 거울
'통계적으로는 사업장에서 희귀 질환에 걸리지 않은 산재 노동자'가 유독 반도체 사업장에서 도드라지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한 답변을 찾는 건 쉽지 않다.
우선 IT 산업은 그 역사가 짧은 대신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양적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해왔다.
산업 구조가 급격히 변화했고, 세계화 바람을 타면서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성장동력이 됐다.
새로운 제품·기술·소프트웨어의 출현만이 대중의 주목을 받는 상황에서 정작 부품을 만들고 조립하는 생산직 노동자들의 기여도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을 수밖에 없다.
시대의 변화에 제도가 따라오지 못하는 현상은 여기서 나온다.
반도체 산업에서 사용하는 원자재의 안전성과 작업 환경에 대한 대책, 이를 연구하기 위한 학계의 노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면서 반도체 노동자들의 현실은 지금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여기에는 이익을 위해 조사에 필요한 자료 제출을 거부하거나 조사 자체를 방해하려는 업계와 자국 산업의 발전을 위해 노동자들의 현실에 눈을 감는 정부도 한몫했다.
지난 2006년 출간돼 지난해 말 국내에도 번역된 <챌린징 더 칩:세계 전자산업의 노동권과 환경정의(Challenging the Chip, 이하 CTC)>(메이데이)는 이 책의 역자 중 하나인 반올림의 공유정옥 전문의의 말처럼 "세계 반도체·전자 산업의 노동권과 환경정의의 문제를 망라한 최초이자 거의 유일한 단행본"이다.
2002년 '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국제운동(ICRT)'이 주최한 국제 토론회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된 <CTC>는 미국에서부터 시작돼 아시아 개발도상국으로까지 흘러간 반도체 산업의 역사를 노동자의 관점에서 조망했다.
한국에서 반도체 노동자 논란이 2007년부터 일어난 점을 감안하면, <CTC>는 현재 삼성이 봉착한 문제를 비추는 거울인 셈이다.
'법'보다 기업이 빨랐다
반도체 칩 하나를 만드는 데에는 1.7㎏의 화석연료와 화학약품, 32㎏의 물이 필요하다.
데스크톱 PC와 모니터를 만드는데 필요한 원자재는 평균 1.8톤에 이른다.
갖가지 화약제품으로 처리된 반도체를 다루는 노동자가 병에 걸릴 개연성이 상당한 셈이다.
당연히 정부나 기업에서 새롭게 출현한 사업에 대한 안전 평가를 실시하고, 특수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적절한 안전 수칙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초기 반도체 산업을 주도한 미국에서부터 그러한 노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반도체 산업이 독립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서부터다.
당시부터 사업장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이나 작업공정을 기업 기밀로 유지하는 것인 관행이었다.
생산직 노동자들이 작업환경에서 얼마나 많은 화학제품을 다루는지, 노출될 위험을 어느 정도인지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처음부터 반도체 산업의 공정상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인지하고 시작된 게 아니라 작업 중에 사고를 당한 노동자가 생겨나면서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된 셈이다.
미국 국립산업안전보건연구원(NIOSH)이 1980년 처음으로 반도체 산업의 건강유해성 평가를 시작했지만 기업들은 조사에 소극적이었다.
초기 조사에서 반도체 노동자들이 직업과 관련된 심각한 건강문제들이 있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추가 조사는 없었다.
이후 연구를 통해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는 벤젠, 클로로포름, 디클로로메탄 등 발암물질이 있다는 사실과 함께 반도체 노동자 중 상당 비율을 차지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자연유산율이 증가했다는 연구결과가 알려졌다.
대기업들도 자체적인 조사에 나섰다.
하지만 IBM같은 대기업이나 반도체산업협회(SIA) 등이 지원한 연구는 일부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제한적인 결과만을 도출했다.
이후 지원하던 연구 기금을 통제해 추가적인 평가를 불가능하게 했다.
그간의 조사를 토대로 일부 발암물질의 사용을 금지했지만 효과를 분석하기 위한 연구나 자료 제공 역시 거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신 IT기업들은 제한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작업장에서 희귀병을 얻은 노동자들이 소송을 제기해도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2003년 IBM에서 암을 얻은 두 명의 노동자가 소송을 제기했을 때 사측은 "IBM처럼 큰 사업장에서는 우연히 많은 노동자들이 희귀병에 걸릴 수 있다"며 "IBM에서 했던 일 때문에 걸렸다는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IBM의 30년치 '기업사망자료'를 분석해 IBM 노동자들의 사망 패턴이 제조공정에서 사용한 화학제품 노출과 일치한다는 증거도 나왔지만 법원은 이 자료를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 반도체 회사들은 여론의 압박에 자체적인 조사를 시작했지만 명확한 결론을 내지 않았다.
반도체 산업과 암 질환과의 명확한 상관관계를 밝히는 작업도 이뤄지지 않았다.
자사 노동자들의 건강상태를 측정하고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여력이 있었지만, 실제로 노동자들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벌인 적은 없었다.
제한적인 연구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산업 공정과 노동자의 건강권이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은 상당 부분 확인된다.
IBM와 SIA의 조사에서 클린룸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자연유산율이 증가했다는 점이 밝혀졌고, 1980년대 초반 다른 조사에서도 반도체 노동자들이 폐암·방광암·악성 흑색종 등 특정 암에 노출될 위험이 1.22~1.52배 높다는 결과가 도출됐다.
2001년 미국 노동통계사무국 조사에서도 유해물질 사용으로 인해 발생하는 노동손실이 제조업 전체에서 2.4%인데 반해 반도체 산업은 8.5%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지만 반도체 회사들이 적극적인 조사에 나서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노동자 발병과 작업환경 사이의 연관성이 확인되면 산업재해 대상이 되고, 기업도 안전 대책을 세우는 등의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산업의 복잡한 공정과 기업 기밀을 무기로 반도체 노동자의 실상을 가려온 셈이다.
세계화 바람 탄 IT,
아시아로 흘러간 비극노동자들과 지역 사회의 문제제기와는 별도로 IT 산업은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산업구조도 변해갔다.
예전에는 IBM과 같은 대기업들이 자사 제품에 쓰려고 만드는 부품 정도의 위상을 갖던 반도체였지만, 점점 CPU, 메인보드 등 완제품이 아닌 특정 부품만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기업의 주문을 받아 제품을 대신 생산하는 하청기업들도 노동력이 값싼 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들어섰다.
제조 전문기업이 늘면서 반대로 공장이 없이 반도체 설계만 담당하는 '팹리스' 기업도 출현했다.
전 세계에 퍼진 IT 기업들은 각각의 시장접근성과 물류 환경 등 지리적 특성을 살리면서 공급망 사슬을 구축했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 제기됐던 반도체 노동자 논란도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몰린 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다시 반복되기 시작했다.
1990~1991년 태국 테파룩에서 하드디스크를 만들던 노동자 4명이 사망했고 약 200명이 납 중독 진단을 받았다.
1993년에는 람푼 지역에서도 노동자들이 동시에 비슷한 질환을 보이며 연이어 사망했다.
하지만 기업들은 재산권 보호를 이유로 태국 정부가 인정한 조사를 거부했다.
노동자들이 발병과 작업환경을 증명할 증거를 찾을 방법이 없었다.
이러한 일들은 인도·중국·대만 등에서 비슷한 유형으로 반복됐다.
올해 초 생산직 노동자들의 잇단 투신으로 비난을 샀던 대만기업 폭스콘은 중국에서 수십만 명을 고용해 근로계약서도 없이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했다.
윈테크라는 기업의 공장에서는 홀해 초 수백 명의 노동자가 헥산에 중독돼 일부는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지만 사측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파업이 일으키기도 했다.
애초에 대량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들이 아시아로 몰린 이유를 생각하면 이러한 현상은 예고된 결과다.
값싼 노동력 대부분이 저학력 여성으로 노동조합을 만들어 권리를 지키기가 어렵다는 점은 노동집약형 산업에 '최상의 조건'이다.
아시아 개도국 대부분이 노동권을 보호하는 제도의 정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노동자를 해고하는 게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는 장점도 있다.
급변하는 시장 상황에 갖춰 고용량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없는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이 산업이 살아남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라는 로버트 조이스 전 인텔 CEO의 말이 이를 잘 대변한다.
각 정부가 새로운 성장동력인 IT 산업을 자국에 유치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마당에서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에 소극적이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중국은 개별적인 노동조합 결성이 금지되어 있고, 말레이시아는 노동조합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승인이 필요하다.
게다가 특정 산업에서는 노동조합 설립이 제한된다.
삼성과 한국, '노동 후진국' 굴레 벗을까?
삼성의 '반도체 신화'의 이면에서 신화를 떠받치는 노동자들의 실상 역시 <CTC>에서 말하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삼성 공장에서 일하다 병을 얻은 이들 대다수는 10대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공장에 취업한 청년들이었고, 대부분이 가임기의 여성이었다.
피해 노동자들은 재직 당시 몰려드는 작업량을 소화하기 위해 화장실에 갈 틈도 없이 자리를 지켜야 했고, 업무를 빨리 처리하게 위해 안전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고 증언한다.
동료 노동자들이 잇따라 생리불순과 유산 등을 경험했고, "오래 일할 직장이 아니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삼성 백혈병' 비밀?…"밀려드는 작업량에 맨손으로 칩 다뤄")
반도체 노동자 문제가 세상에 나온 이후 공장의 작업환경을 조사한 역학조사 결과는 대부분 공개되지 않았고, 삼성이 자체적으로 학계에 의뢰에 조사한 연구 결과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는 이를 근거로 지금까지 피해 노동자 16명이 신청한 산재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있다.
무노조 경영을 추구하는 삼성 내부에서 노동자의 권리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날 계기는 쉽게 찾을 수 없다.
반올림과 일부 언론에서 지속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지만, 시민사회 차원에서의 관심은 아직 요원한 상태다.
삼성을 중심으로 제기된 반도체 노동자 논란은 세계 IT 산업의 역사와 맥을 함께 한다.
제품 개발과 제조 설비를 모두 갖추고 있는 삼성은 마이크로소프트 등 전통적인 강자와 HTC 등 신흥 기업이 합세한 모바일 시장에서 주도권 다툼을 하는 한편, 수십 년 간 풀리지 않았던 반도체 노동자의 현실에 대한 답을 요구받는 이중의 처지에 놓였다.
이런 상황은 한편 답답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권을 찾아가는 길은, IT를 그저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인식을 부수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수 시민이 IT로 행복을 얻는, 진짜 'IT 강국'에 다가가려면, IT산업의 기반을 이루는 반도체 분야에서부터 '노동 후진국'의 굴레를 벗어던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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