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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당신은 일중독자인가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해외 이민자들의 성공담을 보여주는 TV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의문이 들지 않는가. 나라의 이름을 드높인 사람들의 일상 말이다. 이들은 자신의 여가와 가족의 행복을 버리고 밤낮으로 일을 한다. 하루에 서너 시간씩 자면서 미친 듯이 일한 대가로 놀라운 매출액을 달성한다. 그 정도 ‘일중독’이면 한국 사회에서도 성공할 만하다. 그들을 볼 때마다 뒤통수를 근질거리며 올라오는 의문. 대체 왜 이민을 갔을까?
<일중독 벗어나기>(강수돌 지음, 메이데이 펴냄, 1만2천원)는 일중독에 관대한 한국인의 심성을 공격한다. 일중독에 대한 ‘교과서’라는 평가가 딱 맞는 책인데, 여기에는 양면이 있다. 일중독의 정의와 다양한 배경, 문제와 해법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해놓았다. 그러나 독창적이지는 않다.
‘일중독’이라는 말은 한국에서 음험하다. 비난하듯 쓰지만, 실은 그의 성취에 대한 은근한 부러움을 담고 있다. 지은이는 일중독은 병일 뿐이라고 못을 박는다. 그것은 개인과 가정을 넘어서 조직과 사회를 오염시키는 자본주의적 질환이다. 이런 병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정신의학적 처방은 이렇다. 일중독이 무엇인지 바로 알고, 자신이 일중독임을 인정하는 것.
지은이가 말하는 일중독의 핵심은 이것이다. “노동의 외적 압박(경쟁, 구조조정, 평가, 눈치, 분위기)을 노동자가 스스로 내면화하고 다른 저항이나 대안을 모색하지 않은 채 수용함으로써 마침내 내적 강제가 작동하게 된 사태.” 여기에는 일종의 두려움이 작동하고 있다. 자신이 사회에서 추방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일을 그만두면 자신의 정체성이 없어진다는 두려움. 그래서 일중독자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못하고 오직 일 속으로만 도피하게 된다. 처음엔 유능하다는 소리를 들을지 모르나, 이들은 주위 사람들과 조직 전체를 일중독에 전염시켜서 조직에 역효과를 가져온다.
일중독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프리랜서형. 전문 직종에서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가지고 노동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성취감을 더 높이 채워줄 일거리를 찾아다닌다. 그리고 자신의 완벽주의를 다른 사람에게도 강제한다. 둘째는 블루칼라형. 이들은 임금인상이나 승진과 같은 성취를 이루는 데에서 뿌듯함을 느끼며 자기 강제를 한다. 셋째는 햄릿형. 이들은 산더미같이 일을 쌓아놓고도 어떻게 시작할지 몰라 전전긍긍한다. 자신이 무능력하다는 평가를 받을까봐 감당하지 못할 일도 거절하지 않고 자꾸 쌓아둔다. 그러다 최종 기한이 다 돼서야 벼락치기식으로 일을 처리한다. 자신이 어떤 유형인지 국민투표를 하면 햄릿형이 가장 많지 않을까?
일중독은 운명적으로 자본주의와 손을 잡는 질환이다. 산업혁명 초기부터 부르주아들은 노동을 찬양하며 목가적 일상을 깨부수기 시작한다. 한국으로 시선을 돌리면 이런 노동 강제는 더욱 악취를 풍긴다. 한국전쟁으로 황폐화된 시민들의 일상은 반공주의와 산업화로 채워졌다. 멸망에 대한 두려움은 ‘강자와의 동일시’로 이어진다. 자본주의 산업화 체제야말로 강자가 되는 길이었다. ‘산업전사’라는 말은 노동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 시민들의 일중독은 가정과 학교, 군대의 훈육을 통해 더욱 굳건히 뿌리를 박는다. 지은이는 ‘황우석 사태’야말로 이런 ‘일중독 사회’가 낳은 재난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일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를 그대로 놔두고 일중독으로부터의 해방을 이룰 수 있을까. 답은 “불가능에 가깝다”일 것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어떻게든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현재의 시스템에서 발을 하나씩 빼면서 대안적 실험을 하나씩 더해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개인적, 조직적, 사회적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 중에서 가능한 실천들을 상상해보자. 자신이 일중독임을 인정하고 그것이 가정과 자녀들에게 끼친 악영향을 반성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중독의 부작용에 대해 토론할 수 있지 않을까. 아주 작고 미약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2007년02월15일 제6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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