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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외된 노동/소외되지 않는 노동
▶(나의 생각) 앞에서 말했던 생산적/비생산적 노동과 마찬가지로 소외된 노동/소외되지 않는 노동은 상품화된 노동/상품화되지 않는 노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1) 소외되지 않는 노동(상품화되지 않는 노동)
① 리스 보겔(Lises Vogel, “지상가족 The Earthly Family”(1973))
가사노동이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외되지 않는다고 주장. “그것은 일차적으로 유용한 노동이기 때문에 모은 노동이 일차적으로 유용한 것이 되는 미래사회를 제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가정주부는 “소외되지 않는 생산 활동의 삶에 대한 비전을 가질 수 있다.”
② 안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 “노예사회에서의 흑인 여성의 역할에 관한 성찰 Reflection on the black Women`s Role in the Community of Slaves”, 1973)
흑인 여성의 비판적 의식과 노예 저항운동의 중심으로 만든 것은 흑인 여성의 이중적 인식이었으며, 그 이중적 인식은 소외된 생산노동의 공적인 세계와 상대적으로 소외되지 않은 노동의 개인적 세계 양쪽에 다 관여한다는 사실.
▶(나의 생각) ①의 리스 보겔 견해보다는 ②의 안젤라 데이비스의 견해가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가사노동은 단순히 사용가치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소비될 (남성)사용가치인 노동자계급의 노동력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노동력이라는 사용가치는 전혀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가치를 생산하는 과정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③ 엘리 자렛츠키(Eli Zaretsky, “자본주의, 가족과 개인의 삶 Capitalism, the Family and Personal life”, 1976)
소외되지 않은 개인적 영역과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좀더 광범위한 논의. “어떤 개인도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거친 세계”로부터의 일종의 “유토피아적인 피난처”가 되고, “가족 내에 있는 여성에게 노동과 삶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통합되었다.”
▶(나의 생각) 이 의견은 여성의 성분업적인 역할을 신성하고 위대한 것으로 미화시켜 여성을 끊임없이 가사노동에 얽매이게 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위험이 크다고 볼 수 있다.
2) 소외된 노동
질라 아이젠스타인은 어떤 특정한 집단에 미리 할당되는 임무들은 그것들이 자유롭게 선택되는 것이 아니므로 소외되고 있다고 주장. “사회 안에서의 노동의 성적인 분할은 특히 여성에게는 비창조적이고 고립적인 일을 떠맡게 된다.”
▶(나의 생각) 위에서 ‘소외되지 않는 노동’에서 ‘소외되지 않는’다는 것은 가치를 직접적으로 생산하지 않고 노동생산물의 사용가치만을 생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외’는 ‘상품화’, 즉 ‘상품 가치의 생산’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소외’는 ‘자신의 행위의 주체가 되지 못함’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1)과 2)에서 쓰이는 소외의 의미는 스펙트럼이 다르다(물론 이 둘 사이에 연관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 둘 사이에 둘셋 정도의 매개를 거쳐야 한다). 동일한 소외의 의미가 기준이 되어야 할 것 같다.
곰탱이님의 [벌레들과 동거 중... ] 에 관련된 글.
작년에 살던 곳에서 벌레와 더위 때문에 무쟈게 고생을 했다.
그러다 늦가을에 난방비가 20만 원 정도 예상이 돼서 아예 이사를 해 버렸다.
1층 월세에서 반지하 전세로!
겨울엔 개미들 때문에 초반에 고생을 했지만,
개미를 없애는 약을 치고 나서는 개미가 없어졌다.
(혹시 개미 때문에 고생하시는 분은 제게 말하시라.
어떤 약을 써야 하는지 단박에 가르쳐 드리겠슴다.
일주일만에 완죠니 사라지더만요^^.)
그런데 올해 5월 중순이 시작되면서 날아다니는 벌레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다.
날파리들과 지네, 쥐며느리, 모기(여기까지는 지난 번 집 하고 비슷하다),
7월 중순부터는 때 아닌 귀뚜라미가 방에서 펄떡펄떡 뛰어다니는 거다,
그것도 사알 잠 드려고 할 때!!!
작년에 어느 정도 단련이 돼 있어서 그러려니 한다.
(바퀴벌레는 없다. 그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다^^ㄲㄲㄲ...)
그리고 벌레 잡으면 웬만해서는 한 50%는 살려 준다.
귀뚜라미는 백프로 살려 준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본격적으로 늦봄이 시작되고 보일러를 틀지 않을 때부터
비가 오고 나서 벽에 곰팡이가 피기 시작해서 방바닥의 두 쪽 하단의 벽에 곰팡이가 피기 지작했다.
그래서 보일러를 틀고 팡이제로를 뿌리고 난리를 쳐 봤지만,
곰팡이는 사라지지 않고 곰팡이 냄새 때문에 어떤 때는 숨을 쉬기 함들 정도이다.
밤에 집에 들어서면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래서 하루 종일 선풍기를 틀어 놓고 산다.
반지하는 기본적으로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아이들이 있는 집은 법으로 반지하에서 못살게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차라리 옥탑 방이 더 낫지 싶다.)
현관문은 결코 열어 놓을 수가 없다.
오만 벌레들과 귀뚜라미들이 무단으로 동거하려고 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또 선선한 가을이 와야, 그리고 보일러를 때야 곰팡이도 없어지고, 벌레도
없어지지 않을까 싶다.
아 C~~~!
호랑이를 피하려고 했더니만 그게 여우 굴일 줄이야...ㅠ...
하여간 담에 이사할 때는 일단 환기 잘 되는 집으로 이사해야겠다...
근데 환기 잘 되는 집은 돈이 비싸다!!
글고 난 돈이 없다는 게 문제다...
뭔가 조치를 취하긴 해야 할 텐데,
내 머리로는 답이 안 나온다...
누가 해결 방법 좀 아시는 분 계시면 지혜를 쬠만 나눠 주삼!!!
사례하게씀!!!
(맛좋은 생맥주로^^!)
2. 생산적 노동으로서의 가사노동
▶(나의 생각) 제목과 관련해서, 위의 제목을 고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밑에 나올 내용들과 또한 위에서의 큰 틀과 연관해서 볼 때, <비생산적 노동/생산적 노동으로서의 가사노동>으로 고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강사 선생님께서 급하게 강의안 만드시느라 살짝 빼먹으신 것 같다^^.
* 가사노동을 보는 두 가지 시각
- 그 자체가 소비되는 일련의 서비스(비물질 생산)와 즉각적 소비를 위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보는 것(비생산적 노동).
- 자본주의 생산관계 하에서 노동력이라는 명백한 생산물을 만드는 활동으로 보는 것(생산적 노동).
▶(나의 생각) 이 두 시각이 내가 볼 때에 가부장제에 의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착취와 억압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은 가사노동을 비생산적 노동의 측면에서 보고자 하는 것 같고, 자본주의 구조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은 가사노동을 생산적 노동(임금노동)의 측면에서 보고자 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양손에 자본주의라는 칼과 가부장제라는 칼을 들고 있는 페미니즘이 어떤 칼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서 이러한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나오지 않나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강사 선생님께서 요즘은 가부장제도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다. 임옥희 선생 같은 분은 가부장제 대신에 ‘가부장 시스템(구조)’으로 쓰자고 하셨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못 들었는지, 아니 이해를 잘 못 했던 것 같다. 지금에야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 생산 체제와 가부장제도의 관계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자본주의 생산체제는 역사적인 시간에 제약을 받는 역사적 산물이다. 가부장제도 역시도 역사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도라는 것은 시대적인 지배 권력 형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역사적인 자본주의와 역사적인 가부장제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이다. 이 문제는 페미니즘 내에서 사실상 철학에서의 근본문제 중의 하나인 물질-정신과의 문제만큼이나 근본적인 문제이지 않을까 싶다. 가부장 제도라고 하면 자본주의 생산 체제로 환원되어 설명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생산체제는 자본주의 권력 체제를 설명할 수 있는 상위 개념이고, 가부장제는 자본주의 권력 체제에서 파생되는 하나의 제도로서 이 권력 체제보다 하위의 개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증적으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착취와 억압은 인간의 거의 모든 역사에서 나타나는 초역사적인 어떤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제도’라는 개념을 해체하고 ‘시스템’이라는 개념을 쓰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 시스템이라는 개념은 어떤 변화도 겪지 않는 구조 틀로서 이해되는데, 이는 바티유와 알튀세의 구조주의로부터 차용한 개념이지 않을까 싶다.)
1) 가사노동의 사회화 - 비생산적 노동의 측면
* 벤스톤(Margaret Benston, "The Political Economy of Women`s Liberation", Monthly Review 21, no.4(September, 1969)
- ① 여성은 본래 생산자이고 부차적으로 소비자일 뿐. “가정과 가족과 관련된 그런 행위들 속에서 단순한 사용가치품의 생산을 책임 맡고 있는” 하나의 계급을 구성.
- ② 가사의 사회화. 그것이 반드시 여성을 가사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일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 하는 것을 인식하게 만든다는 것.
- ③ 가사노동 임금화 반대. 다른 일을 할 기회 박탈, 상품화 경향에 일조, 노동의 성적 분업의 유지.
▶(나의 생각) ① - ㉠ 여기서 벤스톤은 생산과 소비를 처음부터 분리된 것으로 전제하고 논의를 시작하는 데에 한계점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왜냐하면 자본이 생산과 소비를 분리시켜 놓고 (자본의) 생산을 주도적인 것으로 보고, 소비를 하찮은 것으로 보는 자본의 시각이 ‘여성은 본래 생산적이고 부차적으로 소비자일 뿐’이라는 말 속에 녹아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생산을 여전히 자본의 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보게 되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으로서의 노동자 생산을 늘 (생산의 영역과 동떨어진) 소비의 영역으로, 즉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하찮은 것으로 볼 위험성이 크게 된다. 생산을 이제 현실적인 인간의 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만, 소비와 생산의 분리를 전제로 삼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인간의 생산은 곧 사용가치의 소비를, 즉 현실적인 욕구 충족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가사노동을 ‘단순한’ 사용가치의 생산과 연관시키고 있는데, 도대체 ‘단순한’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만일 ‘단순한’을 그야말로 말 그대로 ‘단순한’, 즉 예를 들어 시장에 가서 비누 등과 같은 상품들(사용가치)을 구매해서 그 사용가치들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집에서 폐식용유를 이용해서 비누를 만들고 그 비누의 사용가치를 소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자본처럼 가사노동을 정말로 하찮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단순한’ 사용가치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가 잘 드러나고 있지 못하다. 다른 한편, 복잡한 사용가치란 누가 어떻게 생산하는 것인지도 설명해 주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단순’과 ‘복잡’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인가도 설명되었더라면 좋겠다.
㉢ ‘하나의 계급’을 구성한다고 했는데, 이 계급은 자본과 적대적으로 대립해 있는 노동자 계급과는 별개의 노동자인 것처럼 보인다. 즉 제3계급처럼 보인다. 공적인 영역에서의 자본-노동의 두 계급과 사적인 영역에서의 또 하나의 계급을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 있는 이 ‘하나의 계급’은 자본계급 그리고 노동계급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가 모호하다.
② 그렇기 때문에 가사노동의 ‘사회화’라는 것에 대한 정의가 애매모호하게 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먼저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여성을 가사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아마도 내 생각엔 여성의 가사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곧 ‘하나의 계급’으로부터의 해방이고 따라서 그 ‘계급’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것은 자본주의로부터의 해방일 터인데, 이러한 과정의 구체적인 물질적 관계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관념적이고 의식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여성의 가사노동의 중요성을 인식하자’라는 것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한다.
③ 다른 한편으로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여성의 가사노동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화를 사람들이 상품화, 자본화와 등치시켜 생각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주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적 영역’에 있는 가사노동을 사회화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사회화를 ‘공적 영역’인 ‘상품화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관념적인 수준에서만 언급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 가사노동 임금화
* 달라코스타/제임스(Mariarosa Dalla Costa, Selma James, “The Power of Women and the Subversion of Community”, Falling Wall Press, 1972)
- ① “여성의 힘과 공동체의 붕괴”(1972) : 가사노동도 노동력 상품의 교환가치에 관여하고 따라서 잉여가치를 창출한다는 관점에서 가사노동이 생산적임을 주장.
- ② “the double day” - 여성의 이중 노동의 상황
- ③ 개별적인 남성들이 아니라 정부와 고용주가 가정주부들에게 임금을 지불할 것을 제안.
- ④ 자본주의는 남성들과 어린이들의 노동력을 창조하려면 여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성들의 그러한 반란은 혁명적인 잠재력을 지닌다.
- ⑤ 가사노동이 ‘간접적’으로 생산적이면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논리를 토대로 하여, 여성이 가사노동이라는 특수한 관계를 둘러싸고 보편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계급으로서 효과적으로 조직될 수 있다고 주장.
- ⑥ 여성이 의식화된 상태에서는 그들의 종속 원인이 물적 기반을 소유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고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요구하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 전통적 맑스주의의 입장에 대한 비판
- 여성을 사회적 노동에 참여하도록 하는 주장을 약화.
- 여성들이 맑스주의적 ‘계급’을 구성한다는 주장의 오류.
- 자본이 여성의 노동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간과.
▶(나의 생각) ① 여기에서 제기되고 있는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일면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여성의 가사노동을 임노동으로 편입시킬 때,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를 설명하고 맑혀 낼 수 있지만, 동일한 임노동이라는 차원에서 보게 될 때 노동자 계급의 노동력 재생산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착취 부분은 은폐될 위험성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의 ‘생산적’ 측면을 ‘자본의 생산’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의 생산, 즉 반자본주의적이면서 질적으로 새로운 인간의 생산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②, ③, ⑥ “the double day”는 여성이 밖에서 하는 임금노동과 임금노동으로 편입되지 못한 가사노동의 이중적 노동의 담당자라는 현실을 표현하기 위한 말인 것 같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 아래에서 여성이 자신의 물적 조건을 확보함으로써 남성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이러한 여성의 이중 노동의 상황을 단일한 임금노동으로 환원함으로써 임금이라는 (남성) 노동자 계급과 동일한 물적 토대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④ 타당한 말이다. 그런데 이것도 애매모호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남성과 어린이들의 노동력 창조’라는 것이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본을 위한’ 노동력 창조의 의미로 읽힐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즉 ‘생산력’을 ‘자본의 생산력’으로 환원시켜 볼 위험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는 맑스주의에서 생산력-생산관계 사이의 관계 문제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력’을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인간’에서 찾아야 하며, 그럼으로써 여성이 ‘혁명적 잠재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⑤ 위의 ‘가사노동의 사회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하나의 계급’이란 자본-노동계급 이외의 제3의 계급을 의미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여성이 자본-노동의 관계와는 다른 가사노동이라는 특수한 관계 속에서 억압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생산양식 하에서 임노동자로서 여성이 제3의 계급으로 조직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라 생각한다. 먼저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본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남성)노동자계급의 임노동이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본은 어쨌거나 지금의 이 상태를 유지하려 할 것이며 언제나 노동자계급을 분리시키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연관해서 두 번째로 임노동자의 계급이 둘로 분리된다는 것은 어쨌거나 자본에게 유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둘로 분리된 이 두 계급은 자본의 이데올로기 경쟁 속에서 무한 경쟁을 하게 되는 위험성에 늘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 작은 틀 ★
1. 가사노동의 성격과 위상
-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의해 규정되는 자본주의 사회 구성체 내에서 가사노동에 관한 논쟁은 주로 노동력 상품 생산에 있어서의 가사노동의 역할, 즉 가사노동이 노동력의 가치에 기여하는가 하는 물음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 가사노동은 생산적 노동인가 아니면 비생산적 노동인가?
- 가사노동은 소외된 노동인가 아니면 소외되지 않은 노동인가?
▶(나의 생각) 가사노동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재생산에만 주목해서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의 노동은 임노동의 측면, 즉 자본에게 노동력이라는 이름으로 팔리면서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것으로 완결되는 자본의 운동 시스템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노동의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노동자의 노동을 임노동의 측면에서만 바라보게 된다면, 노동자 계급에 대한 자본의 착취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노동 = 임금노동>이라고 놓고 보면 <노동자의 노동의 대가 = 임금>이라는 도식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는 맑스가 ‘노동’과 ‘노동력’을 그토록 구분하고자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노동자의 노동은 모순적인 이중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첫째가 바로 위에서 말한 임금노동의 측면, 즉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하는 운명적 측면, 둘째, 자신의 노동력을 판 대가로 얻게 되는 임금을 가지고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고자 하는 측면, 즉 ‘인간’으로서 자신을 생산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물론 주도적인 것은 둘째 측면이다. 이 둘째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맑스가 주목한 것도 이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맑스는 『자본론』에서 이 측면을 미처 다루지 못하였다. 아마도 다루었다면 3권 <계급투쟁> 장에서 다루었을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장의 내용을 심화시켜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와 관련해서는 마이클 리보위츠의 『자본론을 넘어서』(백의)를 참조하면 좋겠다).
바로 이 둘째 측면 때문에 정치경제학적으로 <착취>에 대한 설명이 가능할 수 있다. 자본은 항상 생물학적으로 겨우 연명할 수 있을 정도의 임금을 주지만, 창조력과 상상력을 훨씬 풍부하게 갖춘 인간으로서 ‘공장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라며, 또한 그렇게 강제한다. 이것이 바로 <착취>이다(맑스는 이것을 두고 “죽은 자가 산 자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고 말했다).
가사노동에 대한 논쟁도 단순하게 노동력이라는 상품 재생산의 측면에만 주목하게 되면 안 될 것으로 보인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재생산은 임금으로 환원되고, 즉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재생산 = (남성) 노동자의 임금>이라는 도식으로 나타나게 되고, 따라서 <가사노동 = (남성) 노동자의 임금>이라는 도식으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가사노동에 대한 착취, 나아가서 여성노동의 착취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의 논쟁에 대해서는 노동자의 노동의 둘째 측면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래의 내용들은 어제 배웠던 가사노동과 관련된 논쟁들의 일부를 강사 선생님의 말씀과 강의록, 그리고 그 말씀과 강의록을 제가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을 일부 정리한 것입니다. 앞으로 계속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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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문화이론연구소-08여름강좌>
# 유물론적 페미니즘 #
(강사 : 문은미 tothemoon00@naver.com)
@ 2강. 가사노동 논쟁 @
** 가사노동과 관련된 논쟁들은 나의 졸고들에서 이야기되었던 것과 아주 유사하다. 그렇지만 결이 다르다. 가사노동과 관련된 논쟁들은 벌써 3,40년 전에 했던 논쟁들이다. 60년대 말서부터 70년대 말까지 이루어졌던 논쟁들이다. 그 이후엔 가사노동과 관련된 논쟁들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요즘 들어 다시 가사노동과 관련된 논의들이 살살 고개를 들고 있단다.
여기에 나와 있는 가사노동 논쟁들은 가사노동을 협소하게 기능적 측면(예를 들면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이 기르고 등등)에만 한정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논쟁 지점이 결과적으로 가사노동이 자본을 생산하는 데 직접적으로 관련된 ‘가치 있는’ 노동인가 아닌가 또는 이 두 논의들을 부정하면서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양식 ‘외부’에 존재하는 노동(이 논의에서는 사회화된 무엇이라고 하는데 사회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지 못함으로써 신비화된 무엇으로 남게 된다)으로 봐야 한다는 데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사노동과 관련된 논의의 지점을 이런 기능적 측면으로부터 ‘구체적으로 인간을 생산’한다는 총체적인 측면으로 옮겨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사노동은 자본주의형 인간을 만들어 내는 물적 토대이다. 이는 자본이 가정, 가족을 얼마나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고 있는지, 그리고 사람들에게서 가족 이데올로기가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엄마가 뿔났다]라는 주말 연속극을 보라. 엄마(정한자)가 안식년 휴가 1년을 달라고 했을 때 가족 구성원 대다수가 엄청 반대했다).
그런데 자본은 이 구체적인 자본주의형 인간을 만들어 내는 물적 토대인 가사노동의 비용을 전혀 감당하지 않는다. 만일 자본이 이 비용을 떠안게 되면 그 즉시 자본은 자본이 아니게 된다. 자본은 그 비용을 개별 남성 노동자에게 떠넘기게 되었고, 그 개별 남성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생산노동을 여성들에게 떠넘기게 된다. 만일 이렇게 여성 노동자에게 노동력 재생산 노동을 떠넘기지 않게 되면, 자본은 남성 노동자에게 그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따로 계산해야 되고, 그러면 현재 임금의 몇 배를 남성 노동자에게 지불해야 한다. 또한 새로운 세대의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한 비용도 자본이 모두 대야 한다. 한 아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들어가는 총비용을 1억 정도라고 치고, 그 아이들을 500만으로만 잡는다 하면 과연 얼마인가! 아마도 천문학적인 숫자일 것이다. 자본이 이 비용들을 댄다면 자본은 또한 더 이상 자본이 아닐 것이다.
자본이 자본이기 위해서는 <자본 = 남성 노동자 임금 = 여성 가사노동>이라는 먹이사슬 구조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맑스의 상품교환관계 형태로 바꾸게 되면 <여성 가사노동 = 남성 노동자 임금 = 자본>이 된다. 여기서 자본은 ‘등가 형태’인데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신과 같은 절대적인 보편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남성 노동자 임금은 자본에 대해서는 ‘상대적 가치형태’인데 자본에 의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단순한 개별자이지만, 여성 가사노동에 대해서는 자본과 마찬가지로 ‘등가형태’로서 보편자가 된다. 자본은 이러한 먹이사슬 형태를 끊임없이 유지해야 자신의 몸집을 끊임없이 불려나가게 되고, 그리하여 자신을 자본으로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것을 계급 문제와 연관시켜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은 이러한 먹이사슬 관계 속에서 생산된다. 그러므로 노동자 계급은 자신 속에 이러한 가사노동의 착취와 억압을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 계급이 노동해방을 이루려면 먼저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이러한 착취와 억압 관계 방식을 철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철폐는 자본 생산의 물적 토대인 <여성 가사노동(상대적 가치형태, 개별자) = 남성 노동자 임금(등가형태, 보편자)>라는 관계 구조 방식을 완전히 뒤바꾸어야 한다. 뒤바꾼다는 것은 이 둘 사이의 위치를 단순히 바꾸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단순히 바꾸는 것에만 머무르게 된다면 착취, 억압의 구조는 그대로인 채 얼굴마담만 바꾸는 격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뒤바꾼다는 것은 보편자가 되는 형식을 바꾼다는 것이다. 즉 등가형태의 자리를 차지하여 영원히 그 자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방식이 아니라 등가형태의 자리를 여성과 소수자에게 넘겨주어 그들을 통해 자신의 삶의 문제를 표현하고 해결하려는 관계 맺음 방식을 창출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최근의 촛불집회에서 볼 수 있다. 누구든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고, 그 의견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좀더 깊이 있고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통일시킴으로써) 자신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광장문화라고 할 수 있으며, 가타리는 이 광장문화 만들기를 <여성 되기>, <소수자 되기>로 표현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렇게 생산되는 인간을 맑스는 공산주의 인간, 즉 각기 자유로운 개인이 연대하는 사회의 사회적 인간이라고 하였다.
이제 나의 얘기는 일단 접고, 나의 얘기가 여기에 나와 있는 페미니즘에서의 가사노동 논쟁과 어떻게 결이 다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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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틀 ★
1. 여성 노동
- 이것과 관련해서 크게 3가지의 논쟁 흐름이 있다고 한다.
- ① 노동 X ---> “노동” ② 가치 절하(미숙련) ---> 제대로 된 “가치평가”(숙련) ③ 노동의 성별 분업
- 이 3가지의 논쟁 흐름의 문제의식은 <왜, 여성의 노동이 저임금, 불안정, 미숙련 노동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이다.
- ①과 관련해서 이전에는 여성노동이 노동으로 취급되지 않았는데, 현재 와서는 노동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나의 생각) 여기에서 노동이라는 것을 자본주의 시대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노동으로 봐야 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노동’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상품(가치)을 만들어 내는 노동’, 즉 직접적으로 ‘자본을 생산하는 노동’이라고 해야 이해하기가 훨씬 쉽고, 논의의 맥락을 잘 따라갈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②나 ③의 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 ②와 관련해서 이전에는 여성노동이 가치 절하되었는데 현재 와서는 이 여성 노동이 제대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가사노동 중에서도 특히 감정노동이 임금노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 마트 판매직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의 웃으며 친절하게 손님을 맞아 물건을 판매하는 것은 미숙련 노동처럼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 정도의 기간을 거쳐 아주 숙련된 노동에 속한다는 것이다.
▶(나의 생각) 여기서 가치 절하라는 것은 가치 즉 자본을 생산하는 데 있어 쓸모없다거나 아주 부차적인 것이라는 것으로 봐야 하고, 제대로 된 가치평가는 여성노동이 충분히 상품화되어 자본을 직접적으로 창출할 수 있다는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위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③과 관련해서 노동의 성별 분업은 바로 이전의 여성노동에 대한 편견에서 시작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되었던 것 같다.
▶(나의 생각) ①과 ②의 논쟁의 결과로서 ③이 나타났다고 보여진다. 다시 말하자면 여성 노동이 자본을 직접적으로 생산하는 가치 있는 노동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의 성별 분업의 철폐는 여성 노동을 모두 임금노동, 즉 자본을 직접적으로 생산하는 노동으로 만들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현실은 그러하지 못한 것 같다. 이러한 성별 분업의 철폐는 자본이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자본은 상품화가 가능하다면 무엇이든지 상품화시키려고 한다. 이 논의는 자본의 상품화의 흐름에 따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
2. 가사노동
- 가사노동과 관련해서 크게 2가지의 논쟁 흐름이 있다고 한다.
- ① 생산노동/비생산노동 ② 자본주의 생산양식 외부에 존재하는 노동
- ①과 관련된 논쟁 틀은 맑스주의 문제의식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생산노동과 관련하여서는 다시 이 생산노동이 ㉠ 소외된 노동 ㉡ 소외되지 않은 노동 2가지로 나뉘게 된다고 한다.
▶(나의 생각) ①에서 생산노동/비생산노동이라고 할 때 ‘생산’이라는 말은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자본의 생산’으로 이해해야 할 듯하다.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서 설명 가능한 것이 되려면, 어쨌든 가사노동이 자본의 이익을 생산하는 노동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②와 관련된 논쟁 틀은 ①의 논쟁 틀이 가사노동을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즉 가사노동을 사적인 영역의 노동으로 봄으로써 자본주의 생산체제 안에서 가사노동을 설명하고자 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편승하게 되는 꼴이 됨으로써 가사노동을 통한 여성의 억압과 착취를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가사노동을 자본주의 생산양식 바깥에 있는 그 무엇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나의 생각) ②의 견해는 어찌 보면 ①의 비생산노동의 견해와 매우 유사해 보인다. 그렇지만 후자는 어쨌거나 ‘자본주의 생산양식 안’에서 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지만, 전자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바깥’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서 볼 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바깥에 있는 가사노동이 어떻게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아무런 관계도 맺지 말아야 할 것들이 현실에서는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촉발되었던 ‘신 존재 증명’ 논쟁에서의 딜레마를 그대로 옮겨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절대적으로 완전한 신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세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하는 것과 똑같은 딜레마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얘기가 없다. 또한 이것은 바로 다음에 ‘여성노동’과 관련하여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외부에 있는 가부장제의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저께인가 스포츠 채널에서 당구 게임(김경률 대 김형곤)을 보다가
김경률이 이대호와 무쟈게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교해 보시라.
ㅋㅋㅋ...
(김경률 사진)
(이대호 사진)
좀 닮지 않았나?^^
김경률은 서울 당구 연맹 소속이지만,
깅상도 보리 문디이 출신이다^^.
아님 말구^^...
여이연에서 하는 강좌(페미니즘 유물론)가 오늘 저녁 7시부터
시작인데, 가지 못했다.
오늘 우연찮게 울 애를 만나 진로상담(?,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무엇을 하며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모 이런 것들)을 하느라 시간을 놓쳐 버렸다^^(글타고 그애 핑계를 대려는 것은 아니다, 얘야 미안해^^).
지금 막 여이연에서 전화가 왔다.
왜 못 왔냐고, 내일부터는 꼭 오실 수 있냐고...
아... 놔... 챙피해...^^...
좀 있다가는 9시에 다른 애들을 또 만나야 한다.
강좌 가면 8시가 되고, 다시 애들을 9시에 만나려면
8시 10에 나와야 한다...
가서 많이 배워야 하는데...
낼부터는 오늘 몫까지 열심히 배워서
배운 만큼 포스팅하리라!!!
아자, 아자, 아자!!!
화이륑!!!
오늘 선발을 허준혁으로 하셨는데, 도대체 왜 그러셨나요?...
이 친구 방어율이 무려 20.25더만요!
그리고 지난 번 임경완 마지막으로 나와서 완전히 죽 쑤는 경기할 때,
임경완 전에 허준혁을 마무리로 내보내셨다던데...
2군에서 막 올라와서 아직 뭘 잘 모르는 데 말이죠...
그리고 거의 공이 밋밋하게 들어가서 타자들이 위압감을 가지지 않고
맘 놓고 칠 수 있는 그런 부류의 투수라고 하던데요...
아 지금 미련 곰팅이랑 2회초인데,
1회초 갈매기들이 3점 뽑았더만,
허준혁이 3점을 쉽게 내 주어서 3대3인데요...
오늘 경기가 올림필 브레이크 전에 벌어지는 마지막 경기인 걸로 알고 있는데...
꼭 허준혁을, 그것도 선발로 내보내셔야 했는지요?
아~! 오늘 경기장 잘 안 갔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제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잠실 야구장에 갔다.
미련 곰팅이와 갈매기들 간의 한판 경기가 있었다.
혼자 가라면 못 가는 완소남(완전 소심한 남자? 맞나?)이라
은하철도 님의 힘을 빌어 잠실 구장에 갔다.
가서 은하철도님, 할멈 님, 그리고 선전부장 님 세 분을 만나는 과정에서 엄청 해맸다.
절 기다리셨던 세 분께 참으로 미안했다.
그렇게 길치는 아닌데 말이얌^^.
8시 다 돼서는 산오리 님과 어떤 여성 분이 오셨다.
노래 부르고 소리 지르고 하면서 응원했는데,
너무너무 좋더마요!
탁 트인 운동장에서 선수들을 보니 뭐랄까 테레비로 보는 거랑 완전히 달랐다.
투수가 던지는 공과 타자가 치는 공이 공간을 가르며 날라가는 모습은 과히 장관이었다.
파란 잔디도 너무 좋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야구장에 오는거구나 싶었다.
어쨌든 일단 갔더니 엄청 좋더라.
(오늘도 하는데 또 가고 싶다^^...히히...)
어제 갈매기들의 경기는 대체로 깔끔했다.
마무리 없이 장원준이 완투를 했다.
(오늘이 장원준이 생일이라고 갈매기들이 생일축하 노래도 불러 주었다.)
나름대로 깔끔한 투구였다.
1회에 2점을 주었지만, 3점을 줄 찰라에 이인구가 홈에 송구해서 아웃을 시켜 2점에 머물렀다.
타격으로 치자면, 오늘 맹안타를 날리며 수훈을 세운 선수는 조반장(조성환)이라고 본다.
출루율 100%!
갈매기들이 점수를 내는 이정표 역할을 한 것이 조반장이었다.
거기다가 적절하게 김주찬, 이인구, 이대호, 가르시아가 안타를 만들어 점수를 착실히 벌었다.
9회엔 정보명(지명타자)이 마지막에 1안타를 치면서 1점을 더 보탰다.
그런데 박기혁은 아주 죽을 쑤었다.
무안타에다가 더블 아웃까지 당했던 걸로 안다.
점수가 날 기회에 점수가 못 나고 무산된 데에는 박기혁의 공이 실로 크다.
그래도 오늘은 실수 없이 수비를 아주 깔끔하게 잘 해 내었다.
갈매기들 어제 너무 수고 많았다.
오늘 엉아가 못 간다고 해서 너무 실망하거나 서운해 하지 말고,
엉아가 왔다 생각하고 오늘도 승리를 챙기시길!!!
맘이 콩밭에 가 있다더니, 맘이 잠실벌에 가 있다...
ㅋㅋㅋ...
가을엔 모두 다 함께 갈매기들 응원하러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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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해결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름에 생기는 벌레나 날파리는 음식물이나 개수대 쪽이 깨끗하지 않으면 생기는것 같아요. 특히 여름에는 더욱 그렇죠. 음식물 쓰레기가 남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를 하시고...곰팡이는 비 때문에 습해거 그런거니까 습기 제거제를 한번 써보심이 어떨지..(이 정도면 될런지 모르겠지만, 가사 노동자로 일해본 경험담이니 실효성이 없지는 않을겁니다..맥주 얻어 먹을 수 있을래나??)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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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기면 다행인데, 조금이라도 물이 세는 곳이 있다면 쥐쥐.물먹는녀석 다량 배치 외엔 달리 해결방법이 없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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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멒> 음식물 쓰레기는 거의 남기지 않아요^^. 생기자마자 바깥에 있는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가져 가니까요^^. 벌레들은 거의 밖에서 들어와요^^ 습기 제거제 쓰고 있는데 별로 효과가 없더라고요. 환기가 거의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런 거 같으니까...^^ 저도 가사노동자입니다^^ㅎㅎㅎ... 하여간 고맙습니다^^.노트> 물이 셀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해요. 방 옆에 바로 욕실겸 화장실이 붙어 있는데, 거기도 환기가 잘 안 돼서요. 물 먹는 녀석 배치했습니다만 별 실효성이 없네요. 고맙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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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반지하 4년 살다가 물 속에 풍당 잠긴 뒤 이사했답니다..한여름이라도 한번씩 외출할 때 보일러를 이빠이 때줘야 함다..쩝.. 저녁에 집에 들어가서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지요.
한겨레21 723호에 '곰팡이 핀 주거권, 지상에서 살고싶다' 기사가 실렸던데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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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날> 오늘 초딩 친구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제습기를 사서 틀어주면 곰팡이도 없어진다고 하더라고요. 제습기 가격은 2~30만원대라고 하던데, 함 저지를까 생각 중예요^^. 제 생각엔 반지하에 에어컨으로 되나 모르겠지만 최소한 에어컨 달아 주지 않으면(그렇지만 어린이가 있는 세대에겐 무조건 방 주지 않기) 반지하를 방으로 내 주면 안 되는 법이라도 만들었으면 했어요.. 한계레 21 723호 찾아봐야겠네요.담주 중에 세 분 다 어린이 대공원 역 쪽으로 오셔요^^. 맛있는 생맥주 사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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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날> 지금 한겨레21 723호 기사 보고 왔는데, 기가 막히네요! 그나마 제가 있는 지하방은 사정이 훨씬 나은 편이더라고요. 안 살아보면 정말 모르는 곳이 지하방인 것 같아요. 저두 돈 3천만 원 생기면 지상으로 이사부터 할 거예요. 휴우~~~. 한숨만 나오네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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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주 언제 몇시에 가면 되는지를 정확히 공지하셔야 가죠! 히히~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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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죄송^^... 담주 목요일 7시에 어린이 대공원역 3번 출구 앞에서 뵈면 좋겠습니다.^^ 다른 블로거 분들도 같이 하실 분들은 오셔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