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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4

2. Shulamith Firestone : 성 변증법

 

 

1970년에 출판된 자신의 책 『성 변증법』에서, Shulamith Firestone은 급진 페미니즘을 모범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녀가 말하는, 여성들이 경험하는 특별한 억압은 여성들의 유일한 생물학적 생태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 여성의 재생산 기능은 본래 여성의 억압의 중심에 있다. 따라서 생물학적 가족도 그러하다. Firestone에 따르면, “권력의 성적 불균형은 생물학적인 기초이다.” 여성과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다르며, 따라서 평등한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른 그룹에 의한 한 그룹의 지배는 이러한 남자/여자의 생물학적 구별로부터 나타난다. (Robin Morgan의 새 책 Going Too Far에서 볼 수 있다시피, 1970년 이래로 급진 페미니즘이 어느 정도 변화하고 발전하였지만, 급진 페미니즘을 단일화시켜 주는 끈은 권력 관계를 이해하는 데 우선해야 할 것으로서 성 계급 개념이다.)

 

Firestone이 성 계급이라는 관념을 제시한 것은 생산수단의 소유 유무를 둘러싼 관계를 의미하는 경제적 범주로서의 고전 맑스주의의 계급 의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성으로서 여성은 하나의 계급이며, 남성은 이 계급에 대립하는 다른 계급이다. 이러한 새로운 관념은 성 권력이라는 역학을 정교화하기 위해 길고도 중요한 과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경제적 이론에 답하면서도 그 이론을 거부하려는 과정에서, 맑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억압 체계로서 자본주의를 가부장제로 대체하면서 인위적으로 성 영역과 경제 영역을 분리시킨다. 그녀는 풍부하고 종합적인 관점을 가지고서 좀 더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녀가 억압을 좀 더 복잡한 현실로 바라보기보다는 현대 시대의 주요 억압으로서 성을 다루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Firestone이 경제적 억압을 여성에 대해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바라보지만, 그 경제적 억압을 억압의 주요 근원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19쪽)여성의 상황에 관한 이러한 양자택일 식의 정식화가 분석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그녀는 여성 현실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는 것을 제대로 다룰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맑스주의 분석이 여성 억압의 특수성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처럼, Firestone의 급진 페미니즘 관점도 우리의 경제적 현실의 실재 또는 역사적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가부장제는 보편적인 초역사적 권력 구조로 남아 있게 된다.

 

이러한 논의 체계에서 페미니즘 혁명은 성별 분업 자체의 제거와 생물학적 가족의 해체를 통한 남성의 특권의 배제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면 여성은 그녀의 억압적 생물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여성과 아이들의 경제적 독립을 이룩할 수 있으며, 여전히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는 성적 자유가 전개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성의 몸이 그녀의 현실 척도를 규정한다는 점이다. 또한 그 문제는 그녀의 몸이 그녀의 재생산 생물학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관점에 중심을 둔다. 이것은 자유가, 즉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인류 발전의 긍정적 모델이 되는 곳의 자유가, 다시 말해 몸과 마음을 통합시켜 갈 수 있는 자유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 단계의(변증법의 단계에서 볼 때의 부정적 단계의-옮긴이) 함의이다. 섹슈얼리티(성성)가 명백히 여성의 유일한 억압이지만, 이것이 다음과 같은 점, 즉 섹슈얼리티가 여성의 총체적인 상황을 포괄하고 있다거나 또는 섹슈얼리티가 모든 차원의 인간 잠재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섹슈얼리티는 여성이 어떤 차이를 가지는지를 말해 주지만, 여성을 권력의 일반적 구조와 연결시켜 주지 못한다. 섹슈얼리티는 우리 사회 권력 관계 구조의 복잡성을 설명할 수 없다.

 

게다가 여러 문제들이 있다. Firestone은 맑스와 프로이트를 종합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맑스의 사회적 역사적 구조를 부정함으로써, 여성의 생물학을 시간을 초월한 불변적인 상태로 취급함으로써 그렇게 하려고 한다. Firestone이 불평등을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불평등은 사회적 문맥에서만 불평등이다.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은 생물학적으로 다르지만, 이것을 불평등으로 부르는 것은 생물학적 차이에다 강제로 사회적인 (불평등-옮긴이) 의미를 부과하는 것이다. 그녀는 어느 누구도 결코 불평등한 성 계급 체계를 그 기원을 통해 정당하게 밝힐 수 없지만, 그렇다고 둘(생물학적 차이와 사회적 불평등-옮긴이) 중 하나로 그 체계를 설명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Firestone은 (20쪽)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역사를 통해 어떻게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는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게 될 때, 우리 고유한 문화 속에 내재해 있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사실상 받아들인다.

 

예를 들면, 봉건 사회에서 성 역할이 존재했다고 할지라도, 경제적이고 성적인 물질적 삶이 다르기 때문에 봉건제에서의 성 역할은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의 성 역할과 상당히 다르게 경험된다. 핵 가족이 전자본주의적이면서도 자본주의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서로 다른 사회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현실화된다. 여성 억압에 보편적인 요소가 있음을 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지만, 현재 우리 존재의 특수성이 그 보편성에 속할 때로 그 의미가 한정된다. 모든 역사가 가부장적일 수 있지만, 이것이 각 역사적 시대들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부장제 존재의 일반적 의미를 명료하게 밝히는 것이 이러한 특수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부장제는 단순히 생물학적 체계로서만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를 지닌 정치적 체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Firestone의 비사회적이고 비역사적 틀은 특히 그녀가 기술을 논의할 때로 그 의미가 한정된다. 피임과 자궁 외 재생산(extrauterine reproduction)을 통해, 기술이 여성을 그녀의 몸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라는 것이 Firestone의 관점이다. 따라서 기술은 여성 해방의 열쇠가 된다. 그러나 피임이 여성을 자유롭게 만들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지만, 출산 통제, 낙태 권리 등등이 재생산로서 여성의 역할을 그녀의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만들 정도로 발전돼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기술이 사회 권력 구조의 고유한 차원이라고 우리가 이해하게 될 때 Firestone의 분석의 타당해 보이는 측면은 사라지게 된다. 남성 지배 계급의 욕구들은 기술적 발전을 규정한다. 권력에서의 남성 지배 계급의 변화 없이 (그리고 기술의 목적을 규정하는 그 계급의 변화 없이), 기술은 해방의 요소라고 보기 어렵다.

 

Firestone이 경제적 고통이 적어도 여성의 다른 질병들만큼이나 여성 억압에 기여한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그녀의 분석 요점은 성 억압을 경제적 계급 사회 조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녀는 여성이 잘 교육 받았을 때조차도 남성만큼 돈을 벌지 못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성은 (21) 자녀들을 돌보려고 결심할 때 이러한 돈의 부족에 시달린다. 이러한 점은 그 자체 가족 내에서 요구되는 혁명의 기반이 되는 생물학적 주장 전반을 쓸모없게 만든다. Firestone은 경제적 계급 체계 구조와 성 계급 체계 내에서의 그 기원을 연결시키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비록 우리가 경제적 억압이 역사적으로 성적 억압을 기본적으로 대변해 왔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오늘날 이 두 체계는 서로가 서로를 떠받친다. 이 둘은 상호 의존적이다. 이러한 관계맺음은 누군가가 이 관계맺음을 인과적이고 이분법적인 관점에서 규정하려고 할 때만 왜곡된다. 이러한 이분법의 효과는 성적 억압이 근본적인 억압이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단정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실업과 인플레이션이라는 일반적인 문맥 속에서 여성이 초과 착취 당하는 사회의 이러한 여성 지위를 통해 정치적으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성적 억압이 근본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상적인 삶의 현실적 관계들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맑스가 근본 모순으로서 계급 착취에 초점을 두었던 것과 다른 것인가? 사회적 실재는(현실은) 이러한 이론적 추상들을 복잡하게 만든다. 처음으로 급진적 페미니즘이 나타났던 것은 바로 “근본 모순” 신드롬이 가지고 있는 불완전함을 의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똑같은 불충분함으로 다시 곤경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Shulamith Firestone과 가장 최근의 Robin Morgan 이 두 사람은 정치적 현실(실재)에 대한 맑스주의의 과도한 단순화를 거부해 왔다. 우리는 급진적 페미니즘의 일면성을 그러한 단순화로 대체시킬 필요가 없다. 성과 계급 현실을 재구조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둘을 통합할 수 있는 이론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성 계급 체계와 경제적 계급 체계 사이의 관계와 연결은 급진적 페미니즘의 저작 속에서는 규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권력은 이분법의 한 쪽 측면에서 다루어진다. 권력은 성적인 것에 기초해 있다. 자본주의는 권력에 대한 여성의 접근을 규정하는 이론적 분석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비슷하게, 권력 체계로서의 가부장제와 여성의 생물학 사이의 상호작용들은 분리된 채로 있다. 여성의 억압을 역사적으로 정식화시키는 대신에, 우리에게 생물학적 결정론이 나타난다. 이러한 이분법의 마지막 산출물은 이러한 모순들과 그 모순들을 지지하는 이데올로기들 사이의 관계맺음을 분리시킨다. (22) 결론적으로, 맑스주의나 급진적 페미니즘 둘 다 관념과 현실 조건 사이의 상호 관계맺음을 충분히 다루지 못하고 있다. 만일 현실이 단편적인 것이 된다면, 그러한 현실의 이데올로기적인 표상이 현실로부터 분리된다는 것 또한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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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졸릴까...

봄도 아닌데,

무척 졸린다.

특히 이젠 낮에(어떤 때는 아침, 저녁으로도) 조금씩 책상에 엎드려 있지 않으면

컨디션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는다...

(네가 운동 선수냐! 컨디션 어쩌구 저쩌구 하게! ㅋㅋ)

 

지난 학기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이번 학기 들어와서는 정말 심해졌다...

운동을 새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다...

할 일은 많은 것 같은데, 그래서 마음이 조급해지는데,

자꾸 졸음이 쏟아지니 짜증이 살살 난다.

 

마음을 조급하게 먹어서 그런가?^^

고삐를 조금 죄는 것도 마음을 조급하게 먹는다고 자기 핑계를 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날 좋은 가을날에 건물 안에 처박혀 있으려니,

살짝 부아가 난다...

이 좋은 날 훌훌 털고서 떠나지 못하고 건물 안에 처박혀 있는 것일까!^^

가까운 산에라도 가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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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3

안티 테제 : 성(Sex)으로서의 여성

 

 

1. 가부장제와 급진 페미니즘

 

 

급진 페미니즘의 시작이 보통 최근 여성해방 운동(대략 1969~1970년경)과 일치한다고 보더라도, 급진 페미니즘은 사실상 역사적으로 Kate Millett 이전에 성 정치학을 이야기하였던 여성들인 Mary Wollstonecraft, Elizabeth Cady Stanton, 그리고 Harriet Kate Mill의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여성들은 그들이 가진 일면적인 방식으로 “성적 영역들”로 조직된 사회에서 남성들이 남성으로서 권력을 가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회적 지위(caste)와 연관해 권력을 말했지만, 그들은 그들이 노동 분업과 사회를 통해 단지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페미니즘의 주장은 개혁적인 것으로 남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적 억압, 성별 노동 분업과 경제적 계급 구조 사이의 필연적 연관성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급진적 페미니즘은 성 권력에 관해 이전의 페미니즘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이해하고 있어서, 투표나 법적 개혁 투쟁을 가부장제를 해체시킬 수 있는 혁명적 요구로 대체시킬 수 있었다. 생물학적 가족, 사회의 위계적인 성별 분업, 그리고 성 역할 자체는 근본적으로 재조직화되어야 한다. 노동과 사회의 성별 분업은 우리사회에서 남성과 여성 역할 사이의 가장 근본적인 위계적 분업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가부장제 문화를 위한 근본적인 통제 기구이다. 그것은 역할들, 목적들, 활동, 어느 누구의 노동이 성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것은 남자/여자(male/female)라는 생물학적 구분이 사회적 기능들과 개인 권력을 구별해 주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 바로 그러한 의미를 나타낸다.

 

급진 페미니즘은 Wollstonecraft, Stanton, 그리고 Taylor의 분석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또한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오늘날 좌파의 정치 이론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현존하는 급진적 사회 분석 역시도 경제적 계급 체계 구조를 성적 계급 체계 안에 내재해 있는 그 구조의 기원과 관련시키지 못하고 있다. 경제적인 것이 아닌 성적인 분석은 어떤 좀 더 넓고 의미 있는 혁명적 분석에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나타났다. 이러한 여성들은 권력에 관한 맑스주의의 정의를 만족시키지 못하였거나, 또는 여성의 억압과 착취의 동등함을 만족스럽게 밝히지 못했다. 경제적 계급은 그녀들의 삶의 중심에 있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역사는 가부장적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가부장제적인 것에 대한 투쟁은 성 사이의 투쟁이 되었다. 그 투쟁 전선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그어지기보다는 오히려 여성과 남성 사이에 그어지고, 그 결정 관계들은 생산이 아니라 재생산관계들이다.

 

급진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를 남자들이 경제적 특권과 상위의 권력을 가지는 성적 권력 체계로 규정한다. 가부장제는 사회를 남성 위계 체계로 만든다. 가부장제의 법적-제도적 기초가 좀 더 뚜렷하였지만, 그 기초적 권력 관계들은 오늘날 변하지 않고 있다. 가부장제는 결혼과 가족을 통해서, 노동과 사회의 성 분업을 통해서 보존되고 있다. 가부장제는 경제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기보다는 생물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남성의 힘과 통제를 통해 나타났던 가부장제의 뿌리들은 여성들의 자기 재생산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권력 위계 안에서 여성의 지위는 경제적 계급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적 사회 조직화를 통해 규정된다.

 

이런 분석을 통하여, 급진 페미니즘은 사적인 것과 공공적인 것 사이의 이분법에 다리를 놓는다. 사적인 것으로의 성은 또한 정치적인 것이 되며, 바로 사회의 성 정치학으로 인하여 여성들은 그들의 억압 지위를 공유한다. 성 분업을 통한 사회 구조화는 여성들의 행동, 일, 욕망과 열망을 제한한다. “성은 정치적 함의를 지닌 사회적 지위 범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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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2

(12쪽) 2. 역사 속에 나타난 여성들의 착취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초기 전(前)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분업을 가족의 관점에서 논의하고 있다. 첫 번째 노동 분업은 성별 활동을 통한 가족 내에서의 “자연스러운” 노동 분업이다. 아이들을 양육하는 활동이 노동 분업의 시작이다. 바로 이러한 활동이 가족 내에서의 소유를 처음 나타나게 했다. 맑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이것은 부인과 아이들이 남편의 노예가 될 때 나타난다.

 

 

가족 내에서의 이러한 잠재적 상태의 노예 상태는 여전히 거의 세련되지 못한 상태이지만, 첫 번째 소유 상태이다. 그러나 이 초기 단계에서조차 그 상태는 타인의 노동력을 처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부르는 근대 경제학자의 정의와 완전히 일치한다. 게다가 노동 분업과 사적 소유는 동일한 표현이 된다. ……

 

 

여기에는 성별 노동 분업 자체에 대한 논의가 없다고 할지라도, 거의 세련되지 못했지만 성별 노동 분업에 대한 초기 통찰의 싹이 있다. 맑스와 엥겔스에게 있어서, 이러한 통찰을 약화시키고 결국에는 그 통찰을 제한하는 것은 성별 활동으로부터 나타난 이러한 노동 분업이 사적 소유와 일치하고 동일시된다는 점이며, 게다가 “노동 분업과 사적 소유가 동일한 표현”이라는 점이다. 노동 분업은 그 자체 어떤 특성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한 출산 행위로 인한 노동 분업을 통해 나타난 소유는 자본 관계로부터 나타난 노동 분업과 구별되지 않는다. 재생산과 생산은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마치 이 둘이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분업 관계 속에서 나온 것처럼 말이다. 불평등이 성별 활동으로부터 나올 수도 있다는 사실은 여기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재생산이 노동 분업의 첫 번째 근원지라고 알려지더라도, 결코 어떤 특별한 검토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그것이 물질적 조건에 따라 변한다는 것과 같은 여성의 조건에 관한 개략적인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노동 분업은 이 단계에서 여전히 아주 기본적인 것이고 또한 가족에 의해 나타날 수밖에 없던 자연발생적인 노동 분업이 좀더 확장된 것에 머무른다. 따라서 사회 구조는 가족의 확장에 머무른다. 가부장제 종족 우두머리들이 있고 그 아래에 그 종족 구성원들이 있으며 마지막엔 노예들이 있다. 가족 안에 잠재되어 있는 노예제만이 점차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13쪽) “가족에 의해 나타날 수밖에 없던” 노동 분업은 여기서 자연발생적인 것이라고 이야기되고, 또한 이것이 “필연적” 또는 “선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분업은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수용되었던 분업이다. 여기서, 따라서 가족 내에서의 노동 분업은 가족을 둘러싸고 규정하는 경제적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이러한 것은 이후 『공산당 선언』에서 나타난다). 오히려 이러한 역사적 초창기에 맑스와 엥겔스는 가족을 사회와 그 사회의 노동 분업을 구조화시키는 것으로 본다. 맑스와 엥겔스의 가족에 대한 분석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성별 활동 내에서 노동 분업이 발전돼 나오지만, 그 다음에 이 노동 분업은 자연적인 소질(예를 들면 체력), 욕구, 우연 등에 의하여 저절로 또는 ‘자연발생적으로’ 발전해 나간다.”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에서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발전해 나온 이 주제를 다음과 같이 되풀이하고 있다. “첫 번째 노동 분업은 자녀 양육을 위한 여성과 남성 사이의 노동 분업이다.” 따라서 첫 번째 계급 적대는 일부일처제에서 여남 사이의 적대와 동시에 나타나는데, 이러한 적대가 어디에 기초하는지는 결코 분명하지 않다. 엥겔스의 주장은 첫 번째 계급 적대가 여남 사이의 적대와 동시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여남 사이의 적대가 계급 적대와 관련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결국엔 그도 여남 사이의 갈등에 관해서 계급 갈등으로 말하였다. 가족 내에서 남성은 부르주아지를 대표하고, 부인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대표한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는 경제적 생산수단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힘(권력)의 위치를 표현하는 것이지, 재생산이라는 성별 활동과 관련한 것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을 범주화함으로써, 재생산관계는 생산관계 아래로 포섭된다. 엥겔스가 가족 안에서의 여-남(male-female) 관계들을 사회의 노동 분업을 규정하는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관계들을 재생산과 관련된 분석 범주 아래로 완전히 종속시킨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는 이런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딜레마가 그의 분석 영역 밖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동 분업이 가족으로부터 사회로 퍼져 나간다는 점을 엥겔스가 인정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런데도 가족 내에서 여성이 노예화되는 것을 설명하는 분석 범주들이 전적으로 생산관계로부터 도출되고 있다. 가족은 (14쪽) 역사적인 경제 양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가족은 그 자체 경제를 규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회를 규정하지 못한다. 그리고 가족은 경제적 관계와 일치하는 노동 분업의 근원으로서 더 이상 이야기되지 못한다. 경제적인 생존 양식이 가족을 결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엥겔스는 “첫 번째 노동 분업”에 관한 자신의 고유한 분석 형태를 잊어버리고서는, 가족이 그 자체 어떻게 경제 양식을 떠받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 대신에 가족이 자본주의의 붕괴와 더불어 해체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가 (사회적 생산에 대립하며 그 바깥에 있는) 사적인 가사 영역에서 여성의 생존 문제를 인정하고 있지만, 그는 이 문제를 사적 소유에 기초해 있는 생산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녀의 생산 활동을 제한하는) 여성의 재생산 활동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엥겔스에게서 가족은 정치 경제의 축소판이 되었다. “가족은 이후에 사회와 국가로 확산될 모든 모순을 축소판으로 가지고 있다.” 남성은 부르주아지이고, 여성은 프롤레타리아트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엥겔스가 남자(male)의 범주를 가족 바깥에 있는 부르주아지로, 그리고 여자(female)의 범주를 프롤레타리아트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그들의 성이 아니라 생산수단과의 관계에 따라 계급 위치를 정한다. 엥겔스는 계급 안에서의 구성원의 지위를 규정하기 위하여 가족 안과 바깥에서 서로 다른 규준(criteria)을 사용한다. 이런 범주가 권력과 같은 것에 기초해 있었다면, 동일한 분석 단위가 가족 안팎 둘 다에서 적용되었을 것이다. 또한 누군가가 애초부터 엥겔스가 가족 안에서 프롤레타리아트/부르주아지 개념을 사용한다는 점이 경제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때, 거기에는 여전히 명백하게 고려해야 할 다른 것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그는 (1) 가족에서의 계급 구별을 부르주아니-남자/프롤레타리아트-여자로 할 수 없으며, 또한 (2) 사회에서의 계급 구별을 생산수단의 유무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러한 것들이 처음부터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들은 가족과 자본주의의 관계에 관해서 애초부터 무엇을 반영하고 있는가? 이러한 것은 재생산 관계 내에서의 여성과 남성의 성적 차이들로부터 벗어난 권력 개념과 관계 있어 보인다. 그러나 엥겔스는 이러한 것을 파악하지 못했다.

 

(15쪽) 그 시기에 대부분 엥겔스는 억압과 착취를 동등하게 보는 단순한 방정식을 가지고 연구에 임한다. 엥겔스가 가족이 가사 노예제를 은폐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가사 노예제나 남편의 임금-노예제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점을 믿고 있었다. 이 두 노예제는 자본주의로부터 도출되었다. “여성해방은 오로지 여성이 거대한 사회적 규모로 생산에 참여할 수 있고 가사노동이 하찮은 일이 될 때에만 가능할 수 있다.” 여성의 현실적인 평등은 자본의 착취가 소멸되고 사적인 가사노동이 공적인 산업으로 바뀜으로써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엥겔스가 성별 노동 분업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엥겔스에게는 공적인 가사노동조차 아마도 거의 여성의 일로 남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윤곽이 드러나고, 그리하여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에서 엥겔스에 의해 발전된 이러한 분석은 가족이 적어도 역사적으로 사회의 노동 분업을 구조화시키며 이러한 노동 분업이 성별 활동에서의 노동 분업을 반영한다는 그들의 믿음을 드러낸다.

 

“유물론적인 개념에 따르면, 역사에서 결정적 요소는 최종 심급에서 직접적인 삶의 생산과 재생산이다. 이것은 또 다시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 한편으로 생존수단의 생산, 즉 식량, 옷, 그리고 생산에 필요한 도구들, 다른 한편으로 인간 존재 자체의 생산, 즉 인간 종의 번식. 특정한 역사적 시대와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의 사회 조직은 이 두 종류의 생산에 의해, 즉 한편으로 노동 발전 상태와 다른 한편으로 가족의 발전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가족에 관해 논의할 때 사라지는데, 왜냐하면 계급 사회를 총체적으로 반영하는 가족이 여기서는 단지 상부구조의 다른 한 부분으로 나타나며, 또한 재생산 관계가 생산 관계 아래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요점은 가족이 사회를 반영한다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가부장제적 (16쪽)구조와 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 둘 다를 통해서 가족과 재생산의 욕구가 사회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가족과 사회,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이러한 상호 관계는 여성의 삶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단순히 경제적 착취를 이해하기보다 억압을 이해하려고 할 때, 여성 억압에 관한 연구는 성적이고 경제적인 물질적 조건 둘 다를 다루어야만 한다. 역사 유물론 방법은 생산자와 재생산자로서 여성이 성별 노동 분업과 사회와 맺는 관계뿐만 아니라 이러한 관계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식화하는 방향으로 통합, 확장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여성 생존의 복합성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유적 삶을 여성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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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1.

아래의 글은 질라 아이젠슈타인이 편집한 논문 모음집 <<자본주의 가부장제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입장>>(Monthly Review Press, New York and London, 1979) 중에서 질라 아이젠슈타인의 논문 [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해석한 것이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와의 상관관계를 공부하는 중인데, 이러한 상관관계를 내 나름대로 명쾌하게 밝혀보고자 하는 욕심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잘 될라나 모르겠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정리한 글을 이 해가 가기 전에 써 보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

욕심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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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 가부장제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입장 #

 

 

- Zillah R. Eisenstein -

 

 

@ 1장 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

 

 

** 들어가며

 

급진 페미니스트들과 남자 좌파들은 사회주의자 여성들과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을 혼동하면서 여성으로 됨과 페미니스트로 됨 사이의 정치적 구별을 잘 하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 급진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사회주의자 여성들과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차이 또한 연결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자 여성들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반면에,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 가부장제로부터 나타난 권력 시스템을 이해하고자 한다. 나는 자본주의 계급 구조와 위계적인 성적 구조 사이의 관계가 서로 강제하는 변증법적 관계임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가부장제라는 말을 선택했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상호의존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정치적 분석의 본질에 해당한다. (남성 지배권으로서의) 가부장제가 자본주의 이전에 존재했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속된다고 할지라도, 자본주의 사회의 현재 관계는 억압 구조가 바뀌려고 할 때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단일적인 맑스주의 분석이나 고립된 급진적 페미니즘 이론을 넘어서게 된다.

 

권력은 사회주의자 여성들과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이분법적인 방식으로 취급된다. 권력은 경제적 계급 지위 또는 성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생물학적 남성/여성 구별에 기초한 권력 비판은 대부분 가부장제에 초점을 맞춘다. 부르주아지/프롤레타리아트 구별에 기초한 권력 비판은 자본주의에 초점을 맞춘다. 사람들은 사회적 생산관계를 억압적인 것으로 또는 사회적 재생산관계를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가사노동을 억압적인 것으로 또는 임금 노동을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사적 영역을 억압적인 것으로 또는 공적 영역을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가족을 억압적인 것으로 또는 경제를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이데올로기를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또는 물질적 조건을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성적인 노동 분업을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또는 자본주의 계급관계를 억압적인 것으로 본다. 그런데 대부분의 여성들의 상황이 이러한 이분법의 양 측면에 다 속해 있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취급된다. 여성을 이런 식으로 취급하면서 개념화하는 것은 여성 억압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분법이 현실을 이기고 있다. 나는 여기서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서 변증법적 사고로 접근하고자 한다.

 

급진적 페미니즘과 맑스주의 분석을 종합하는 것은 일관된 사회주의 페미니즘 정치 이론을 정식화하는 첫 단계로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정치이론은 단순히 권력에 대한 이 두 가지 이론을 서로 더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이론이 성별 노동 분업을 통하여 서로 관계를 맺는 것으로 본다.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이러한 문제의 근원으로 정의하는 것은 동시에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답이라는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나는 맑스주의 계급 분석을 테제로 사용하고, 급진적 페미니즘의 가부장제적 분석을 안티테제로 사용하여 논의를 전개해 나가면서, 이 둘로부터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종합으로 이끌어낼 것이다.

 

 

테제 : 계급으로서의 여성

 

 

1. 맑스 : 혁명적 존재론과 여성 해방

 

 

여성 억압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맑스주의 분석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맑스주의 분석은 권력 연구를 위한 필수적인 것으로 계급 분석을 내놓는다. 둘째, 맑스주의 분석은 역사적이며 변증법적인 분석 방법을 제공한다. (방법으로서) 변증법은 거의 대체로 계급과 계급투쟁을 연구하는 맑스주의에 의해 사용되고 있지만, 또한 여성의 현존을 지배하는 가부장제적 관계들과 이로부터 나타나는 여성의 혁명적 잠재력을 분석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맑스주의 분석이 모든 권력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렇게 할 수 있다. 역사적이고 변증법적인 방법은 계급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나는 계급투쟁에 관한 맑스의 분석을 사용할 것이지만, 또한 그의 분석 방법을 끌어내서 그가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몇몇 권력관계 차원에 적용시킬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맑스의 방법을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적 관계에 대한 오늘날 우리의 이해를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물질적 관계들로 확장시켜 사용하고자 한다.

 

이런 관계들은 맑스의 착취와 소외 이론을 통해 해명된다. 여성 억압을 이해하기 위해 착취 이론이 중요하다는 것이 사회주의자 여성들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사이에서 이미 많이 논의돼 왔기 때문에, 나는 아주 짤막하게 언급하려고 한다. 나는 맑스의 소외 이론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그의 변증법적이고 혁명적인 존재론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소외에 관한 그의 논의가 노동력을 가진 여성 노동자들에게 적용되고, 전혀 다르게 가정주부와 같은 비임금 가사노동자에게도 적용되지만, 이와는 별개로 나는 그의 분석 방법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분석을 착취 이론 속에 나타난 것으로서 계급과 계급투쟁으로 환원시키지 않음으로써, 소외 이론 속에 나타난 변증법적 방법을 여성의 특별한 혁명적 잠재 능력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소외 이론이 착취 이론에 포함된다고 할지라도 결코 착취 이론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외이론과 그 이론으로부터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유적 삶”으로 넘기는 일은 인간 존재의 혁명적 능력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유적 존재”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인간 잠재성을 창조적 노동, 사회적 의식,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투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적 삶의 과정에 도달시키기 위해 애쓰는 존재이다. 또한 이러한 능력들을 공산주의 사회에서 완전히 내면화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존재론적 구조는 그 존재의 본질과 현존을 규정한다. 맑스에게서 현실은 따라서 단순한 현존을 넘어서는 것이다. 현존재는 현실 속에서 인간 본질을 향한 운동을 구체화시킨다. 이것은 완전히 추상적인 인간 본질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역사적 문맥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본질이다. “유적 존재”는 소외되지 않는 사회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개념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로지 본질로서만 존재한다.

 

만일 이러한 개념이 없다면, 인간 존재는 자본주의 관계들 속에서 착취 당하는 자로서 나타나게 될 것이고, 필연적으로 자신의 잠재적인 혁명적 능력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소외 이론에서 착취 개념이 포함돼 있지 않다면, 우리는 착취 당하는 사람으로 방치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별 노동자의 유적 삶의 잠재적 능력 때문에, 바로 착취 당하는 노동자는 잠재적인 혁명적 존재가 된다. 유적 삶의 잠재적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맑스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한 노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잠재적 능력은 계급 구조 또는 착취 관계 내에서의 지위와 상관없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존재한다. 이러한 잠재적 능력의 실현은, 그러나 계급 별로 차이가 난다.

 

자신의 소외 이론에 따라 맑스는 자본주의의 본성을 비판적으로 규명해 간다. 자본주의에 관해서, 맑스와 엥겔스는 상품생산의 전 과정을 언급하였다. 이 과정 안에 내재해 있는 착취를 고찰하면서, 맑스는 자신의 권력 이론을 발전시켰다. 권력 또는 권력 없음은 한 개인의 계급 위치로부터 도출된다. 따라서 억압은 자본주의 조직의 결과물이며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이 없다는 사실에 기초해 있다. 생산적 노동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는 부르주아지를 위해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자를 착취한다. 이윤 속에 내재해 있는 잉여 노동은 노동자의 실질적인 노동시간과 필요 노동시간 사이의 차이로부터 나타난다.

 

 

자본주의 생산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생산적 노동은 가변 자본 부분(임금의 형태로 소비되는 자본 부분)과 교환되는 임금노동인데, 이러한 가변 자본 부분(또는 노동력의 가치)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이에 덧붙여서 자본가를 위한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 그러한 임금노동만이 자본을 생산하는 생산일 뿐이다.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형태로 나타나는 계급 구조는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것이다. 사회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로 양분된다. 이 둘 사이의 분리와 갈등의 기초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서 서로가 맺고 있는 관계이다. 잉여가치가 자신의 생산적 노동으로부터 뽑히면서 당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당하는 억압이다.

 

자본주의 관계에 대한 맑스주의의 이러한 비난은 사회적인 인간 현존재의 혁명적 존재론으로 포괄된다. 혁명적 존재론은 사회에서 혁명적 의식으로 나타나는 본질과 현존재 사이의 변증법이 각 개인들 내에 있음을 단정한다. 소외 당하고 착취 당하는 계급 현존재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이런 계급 현존재에 관한 이론 내의 혁명적 존재론 둘 다 맑스주의 분석으로 하여금 계급의식 이론을 추가하면서도 그 이론을 넘어서 나아가는 페미니즘 이론이 발전해 나가는 데 비판적인 역할을 하도록 한다.

 

여성으로 확장되었을 때, 이 혁명적 존재론은 자유의 가능성이 착취와 억압과 나란히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는 여성이 현재의 그녀 모습보다 더 잠재적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오늘날 그녀의 모습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고, 이는 내일의 실제적 가능성을 규정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녀의 모습이 그녀의 능력 또는 잠재성의 객관적 한계를 결정하지 못한다. 물론 이것은 소외된 노동자에 대해서는 참이다. 어떤 노동자가 그의/그녀의(자신의-옮긴이) 창조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녀/그는 여전히 잠재적으로 창조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본질과 현존 사이의 이러한 모순은 혁명적 여성뿐만 아니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저변에 깔려 있다. 맑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의 계급적 위치는 의식을 규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혁명적 존재론을 사용한다면, 이러한 것(계급적 위치-옮긴이)에 제한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우리가 어떤 여성이 그녀의 성과 관련하여 규정된다고 말하고 싶을 때, 가부장적 관계들은 그녀의 의식을 규정하고 결과적으로 그녀의 혁명적 잠재력을 함축하게 된다. 사람들의 현실적 조건들(현존)과 가능성들(본질)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혁명적 잠재력을 위치시킴으로써, 우리는 가부장제적 관계들이 어떻게 인간 본질의 발전을 막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유적 삶이라는 개념은 남성과 여성의 혁명적 잠재력을 지시하고 있다. 여성의 혁명적 의식의 잠재력을 규정하는 이러한 사회적 관계들은 맑스가 이해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맑스는 결코 성적인 사회 위계 질서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훨씬 더 복잡해진 일련의 관계들이 여성으로 하여금 유적 삶을 살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따라서 유적 삶의 현실화가 계급 체계 하나만을 해체시킨다고 해서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여성에 관한 그의 저작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가 유적 삶과 남녀 모두의 사회적 경험의 자본주의적 소외 형태들 사이의 긴장들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경제학-철학 수고』, 『공산당 선언』, 『독일 이데올로기』, 『자본』에는 가족과 여성의 착취에 대해 특별히 언급한 것들이 있다. 맑스는 가족 관계를 단순한 화폐관계로 환원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 가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부르주아는 자신의 아내를 단순한 생산도구로 여기고 있다. 현대 가족, 즉 부르주아 가족의 기초는 무엇인가? 자본, 즉 사적 이익이다. …… 가족과 교육에 관한 부르주아의 허풍, 부모와 자식 간의 상호관계에 관한 부르주의 허풍은 모두 근대 산업 활동으로 인해 점점 더 정나미 떨어지는 것으로 변하며,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가족 관계는 산산이 부서져서 아이들은 단순한 상업 물품으로 그리고 노동도구로 변하게 된다.

 

 

사적 소유의 관계는 교환양식이 된다. 이러한 부르주아 우위의 확장은 사회적 관계를 가족 내로 한정시킨다. 그리고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아주 진정한 사회적 관계로만 보이는 가족은 부차적인 욕구가 된다. 사유재산과 사적 소유라는 이해관계는 여성-남성 관계에 침투해 들어간다.

 

「유대인의 문제에 관하여」에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유적 관계 자체, 즉 여성과 남성 사이의 관계 등은 상업의 대상이 된다. 여성은 구매되기도 하고 판매되기도 한다.” “가진다”라는 성향은 유적 관계를 소유와 지배의 관계로 탈바꿈시키고, 결혼을 매춘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래서 맑스는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끝으로, 사적 소유를 보편적인 사적 소유에 대립시키는 이러한 운동은 (확실히 배타적인 사적 소유 형태의 하나인) 결혼을 여성이 공동체의 공동 소유가 되는 여성들의 공동체에 대립시키는 동물적인 형태로 표현된다. …… 여성이 (11쪽)결혼으로부터 보편적인 매춘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부의 전체 세계(즉, 남성이 지배하는 자산의 전체 세계)는 사적 소유주와의 배타적 결혼 관계로부터 공동체와의 보편적 매춘 상태로 나아간다.

 

 

맑스는 여성의 문제를 단순한 재생산 도구로서 취급되는 그녀들의 지위로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봄으로써, 사회주의 혁명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선언』에서 그는 “현재 생산 체계의 폐지는 이 체계로부터 나타난 여성들의 공동체, 즉 공적이고 사적인 매춘 모두를 포함하는 매춘의 공동체 폐지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라고 썼다. 맑스의 저작에서 부르주아 가족은 그 자체 특별한 의미도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한 도구로서 나타난다. 여성의 억압은 결혼과 가족을 통해서 나타나는 계급 사회에서의 억압이다. 여성은 프롤레타리아트 일반과 구별되지 않는 희생자, 즉 유해한 계급(프롤레타리아트-옮긴이)의 노동 분업의 단순한 또 다른 희생자로 인지된다. 성별 역할, 목적, 활동 등등과 마찬가지로 성별 노동 분업은 맑스에게 독자적인 존재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는 여성의 생물학적 재생산 또는 가족 내에서 노동 분업을 만들어 내는 결정적인 것으로서 모성 역할에 거의 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결론적으로 맑스는 여성과 남성의 착취를 똑같은 근원지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았으며, 그들의 억압이 동일한 구조적 용어들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가정하였다. 혁명적 의식은 착취에 대한 계급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만 한정되고 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유적 삶을 살아가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삶은 여전히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삶을 선택하도록 하는 성별 노동 분업에 의해 구조화될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성 역할은 끊임없이 소외와 고립을 피할 길 없는 일을 여성에게 미리 부과할 것이다. 본질과 현존은 여전히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고 있다. 맑스는 사회에서의 성별 노동 분업이 비창조적이고 고립되는 노동을 특히 여성들이 담당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착취의 해체는 그 자체 현실적인 유적 삶, 즉 여성의 창조적 노동, 사회 공동체, 그리고 비판적 의식을 보장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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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1. 개강이구나...

근데 아무 생각이 없구나...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無心)이거나 무념무상(無念無想)이랑은

쫌 거리가 먼 것 같고...

대체 뭘까...

이 마음의 상태는...

도대체 넌 누구냐!

 

2. 그리고 한 달 이상 입었던 반바지며, 샌들과는 이제 헤어질 시간이구나...

반바지야 안녕!

샌들아 안녕!

무엇인가를 보내고 무엇인가를 맞이한다는 건

아주 소소한 일상인데도,

뭔가 짠한 느낌이 드는구나...

 

3. 어제로 여름방학 과학사 스터디가 끝났다...

마지막까지 참여한 사람은 나까지 3명...

마지막 기념이라고 소주 한잔 하렸더니,

다들 바쁘다고 밥만 먹고 갔다...

밥 안 먹고 간다는 걸 억지로 우겨서

밥 같이 먹고 보냈다...

뭔가 허전한 느낌...

 

4. 아...

그러고 보니 생활도서관도 오늘 내일 부로 못 나오겠구나...

그리고 중앙 도서관으로 옮겨가야 하는구나.

 

5. 오늘 울 엄니께서 시집오실 때 십자수를 놓았던 작품(?!)을

핸펀으로 찍어와서 소개하려고 했는데,

핸펀과 컴을 연결해 주는 선이 없어서 올리지 못하고 있다.

울 엄니 솜씨 하나는 정말 끝내주더라...

너무 예쁘더라...

고건 내 보물로 아무도 못 가져가게 해야지^^...

울 엄니의 시집올 당시의 솜씨를 오늘 처음 보았다...

시집 오시기 전에는 온 동네 제문(고등학교 때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조침문 같은)을 다 쓰셨다더라...

제일 큰 외숙모께서 마음이 헛헛하시면 그 제문을 꺼내 읽으시면서 눈물을 흘리신다더라...

그 제문도 찾아와서 내 보물로 만들어야 하는데...

울 엄니께서 요즘 태어나셨더라면 아마도 작가가 되셨으리라... 

나를 낳고서 나를 글 쓰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고 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도 당신이 못 이루신 꿈을 나를 통해 이루려고 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근데 나는 글 쓰는 사람이 되지 못했으니... 

울 엄니의 꿈은 물 건너 간 것이리라... 

참으로 불효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재주가 없는 걸 어쩌랴...^^... 

어무이! 용서하시소! ^^ 

 

6. 내 정신아! 

너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모든 것을 용서할(?) 터이니, 

그리고 아무 것도 묻지 않을 터이니 

제발 돌아오거라... 

 

** 누구든지 나의 정신을 봤다고 제보하거나, 

찾아 주는 분께 후사하겠습니다!!!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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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아이들이 아프다던데 2...

곰탱이님의 [쌍용차 아이들이 아프다던데... ] 에 관련된 글.

 

 

3.

 

우리가 생산해야 할 진지의 거점은 현실적으로 일단 대학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로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겠다.

첫째, 생산 장소로서의 지역적인 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90년대 초까지 대학은 모든 운동의 거점 역할을 하였으며, 모든 운동 인자들을 생산하던 생산기지 역할을 하였다. 현재도 미약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활동가들의 생산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도 그러한 이점을 충분히 살릴 수 있고 또한 살려야 한다. 총연맹이나 산별 연맹 등의 노조 중심적인 체계는 새로운 생산력으로서의 노동계급 생산 기지 역할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 체계는 자본과 직접적으로 격돌하여 싸우는 전장이기 때문이다.

노조 중심의 노동운동이 행정 단위 구역으로 거의 조직되어 있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설령 조직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새로운 세대의 노동력을 생산할 수 있는 장소, 즉 예를 들면 노동회관 같은 자치의 장소가 확보되어 있지 못함으로써 새로운 생산력을 생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학은 대체로 행정 구역 단위로 분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행정구역상 가까운 지역의 대학으로 아이들을 보낼 수 있다. 그리하여 이 대학에서 같은 지역에 사는 아이들이 서로 모여서 대학생 언니, 형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들의 자치조직을 꾸려 가면서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예를 들어 쌍용차 아이들이 우울증을 겪거나 학교에서 이른바 왕따를 당하는 것 등에 의해서 고통과 아픔을 잘 극복하고 치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노동계급으로서의 부모님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또한 이에 따라서 노동자들이 단사의 노조를 통해서 조직되기도 하지만 지역을 통해 서로 다른 노동현장의 노동자들이 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문제와 관련하여 다른 노동자들과, 대학생들 사이의 협의와 연대를 통해 모든 문제를 개인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사회적으로 풀어가는 지혜를 배우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부모들도 새로운 노동력을 생산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고립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역운동을 지역의 노조 중심으로 풀어나가려는 움직임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다.

 

둘째, 대학 학생 운동 방향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대학 학생 운동 방향은 대체로 노동운동과 직접 결합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에 있을 때 노동자 계급투쟁에 대한 소양을 넓히고, 노동자 집회에 참가하며, 노동자들의 투쟁 일정에 따라 학생운동의 사업 방향을 정하고 집행한다. 그런 과정을 다 거치고 난 후 졸업하게 되면 노조의 상근자, 또는 활동가로 진출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학생 운동 활동가들의 기본적인 진로 경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학생운동을 하겠다는 학생도 소수이지만, 졸업이 다가오면 대다수는 이 운동과정에서 이탈하여 개인의 생존을 위해 취업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현상은 학생운동을 고립화시키는 것이며, 대학생 대중의 힘을 극도로 약화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대학생 대중들로 하여금 노동계급의 투쟁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도록 한다.

대학을 거점으로 하는 새로운 생산력의 생산은 학생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열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대학생 도우미(대학학생운동 활동가)들을 일단 봉사 동아리 형태로 활동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아이들과 대학생 도우미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동아리 형태로 확보한다. 그 공간 속에서 아이들의 교육과 학습, 취미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함께 펼쳐 나간다. 이후에 각 단과대 학생회와 총학생회 안에 대회 협력부를 만들고 그 대외 협력부가 총괄적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아울러 아이들과 관련된 여러 층위의 계급운동, 그리고 진보 운동과 연관한 사업을 공공연맹의 각 지부 또는 각 노조와 연대하는 사업을 진행함으로써 좀더 힘 있는 활동을 펼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학생운동이 노동운동에 종속된 하위 운동이 아니라 지역의 코뮌 건설을 함께 만들어 나가는 중요한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대학은 대학생들과 새로운 세대의 연대와 소통, 그리고 이러한 연대와 소통을 바탕으로 하는 각 코뮌 단위들의 연대와 소통의 광장 역할을 할 수 있다. 노동자 계급의 아이들은 자신들의 코뮌을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다. 나이별, 학습별, 취미별의 여러 자치 활동 등으로 코뮌을 형성할 수 있으며, 어느 한 코뮌에만 속하지 않고 여러 코뮌에 속하게 된다. 이 코뮌은 그 어떤 누구에게도 간섭받거나 억압 받을 수 없다. 대학생 언니, 형 들의 코뮌은 노동계급 아이들 코뮌에 대한 대화 상대자이자 도우미 역할을 한다. 서로가 각자의 코뮌을 구성하고 운영해 나가되, 각각의 코뮌이 어떤 방식으로 자유로이 결합하고 연대할 것인가에 대해 서로 각자의 의견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단지 대학생과 아이들의 코뮌뿐만 아니라 이들을 지원해야 하는 아이들의 부모와 지역 노조 등이 모인 대회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렇게 모이고 가르는 광장의 관계를 통해서 노동계급 아이들은 분업적인 인간이 아니라 총체적이면서도 다양한 차이를 이해하는 비판적 인간으로 자신을 매순간 새롭게 생산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대학은 일상적으로 대학의 ‘유기적 지식인’으로서의 강사와 교수들 그리고 노동계급 활동가들 사이의 관계를 원활하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동계급 아이들의 교육과 관련하여 교육 프로그램의 방향과 구체적인 실천 방안들에 대해서 서로 논의하고 협의해 나갈 수 있는 연대의 장을 마련할 수 있다. 이러한 연대의 장을 통해 노동계급 아이들은 이론과 실천 사이의 통일을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기존 노동계급(아이들의 부모들) 또한 자신의 생산력을 새롭게 증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을 새롭게 변모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4. 

 

새로운 생산력의 증대는 노동자 계급인 우리의 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개별적 개인으로서 각 노동자의 단순한 임금 인상으로는 절대로 새로운 생산력을 생산, 증대시킬 수 없다. 그러한 임금 인상분은 자본에 적합한 인간을 재생산하는 비용으로 소비되어서 결국은 자본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제 노동계급의 임금투쟁은 새로운 생산력 생산을 위한 진지 건설을 위한 것이어야 하겠다. 그럴 때 노동자는 고립적으로 투쟁하다 패배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아이들이 아프지 않을 것이며, ‘노동자’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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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아이들이 아프다던데...

앙겔부처님의 [쌍용 자동차 아이들이 아프다] 에 관련된 글.

얼마 전에 파업을 했던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아이들이 많이 아프단다.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학교에서도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한다.

비단 이번 파업 때뿐이겠는가!

이전에 많은 파업이 있었고, 그 파업한 노동자의 아이들이 비슷하게 많이 아팠을 것이다.

그 아이들 중에 이미 성인이 된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미 성인이 된 아이들과 아직 많이 아픈 아이들은 노동자의 파업을 어떻게 생각하며, 파업을 하였던 부모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모진 학대를 당하고 있는 또는 이미 당했던 아이들은 노동자인 부모의 파업을 기피해야 할 공포의 대상, 반드시 없애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이들의 정신적인 상처뿐만 아니라 그 상처로 인하여 세상을 자본가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 자신의 인권을 포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만일 이런 일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면 새로운 세상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생산력의 증대, 다시 말해서 새로운 인간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일이 필요하고 아주 시급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1.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의 갈등과 모순이 눈에 띄게 드러날 때, 노동계급은 투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파업투쟁을 택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노동계급 전체의 총파업 투쟁을 선언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파업투쟁을 선언하고 투쟁에 돌입하더라도 자본계급은 거의 눈 하나 깜빡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파업투쟁의 수위가 높아갈수록 불안해 하는 것은 자본계급이 아니라 노동계급이다. 그리고 옥쇄투쟁을 벌이고는 그 투쟁의 보람과 성과도 없이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형태로 패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본계급은 자신의 도구인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그 투쟁을 고립시키는 것으로 싸움을 결말짓는다. 그러면서 노동계급인 우리는 늘 패배한 싸움을 안타까워하고 자본계급을 비난해 보지만 대체로 허탈해 한다. 이것이 우리가 늘 보아온 싸움의 과정과 결말이다.

우리의 노동계급 투쟁은 늘 패배한다. 물론 하나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경우(이것도 거의 가뭄에 콩 나듯이 한다)도 있지만 전체적인 전선에서는 늘 밀리면서 패배를 하게 된다. 어떤 우리 노동계급 자신의 혁명적 변화 없이는 우리는 늘 패배할 것이다, 아니 패배한다. 우리 노동계급은 십중팔구 패배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 현실적인 조건들은 무엇일까? 이 현실적인 조건들을 따지기 전에 먼저 도대체 무엇이 패배이고 승리의 의미인지를 따져봄으로써 이 현실적인 조건들을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자본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경우는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경우는 대단히 어려워 보인다. 순수하게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한 경우는 아주 드물며,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경우를 막는 것만으로도 승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현상유지를 하는 경우를 승리라고 대부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승리도 아주 쉽지 않은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의 전환이 현재의 상황에서 최대 승리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전술적 의미에서 승리이다. 다시 말하자면 전체 계급투쟁 전선에서 보자면 정규직 쟁취 투쟁은 하나의 회전(전투)에 불과하다. 계급투쟁의 최종 목적은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대체할 수 있는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새로운 사회, 즉 공산주의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최종 목적이 현실화되어 갈 때 비로소 우리 노동계급은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죄종 목적의 현실화라는 승리와 연관되지 않는, 연관될 수 없는, 또는 연관시키지 못하는 전술적 승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패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승리를 유지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힘’이 거의 없기 때문인데, 이는 그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모든 힘을 소진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이 계급투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조건은 바로 전술적 승리를 유지하여 계급투쟁의 최종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힘(투쟁력)을 끊임없이 새로이 생산해 낼 수 있는 진지가 없다는 것이다. 한 기업의 노동조합, 즉 개별자본과 대항하는 노동조합 또는 그 연맹은 진지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투를 수행하는 돌격대 또는 선봉대이기 때문이다. 이 돌격대 또는 선봉대가 계급투쟁 전 전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도록 전방위적 지원사격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생산력을 생산하고 보급 조달하며 교체할 수 있는 진지가 필요하다.

이러한 진지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자본주의 외부를 건설할 때 만들어질 수 있다. 이 진지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자본주의에 저항하면서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을 창조할 수 있는 생산력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새로운 생산력이 기존의 생산력을 대체할 수 있고 대체함으로써 자본을 전방위적으로 뒤흔들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 기존의 생산력은 자본에 그 수를 이미 읽히고 있다. 예를 들어 기존의 투수가 타자들에게 볼 배합을 읽혀서 두들겨 맞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새로운 생산력은 자본에게 그 수를 쉽게 읽히지 않는다. 좋은 새로운 투수가 타자를 요리할 수 있듯이 새로운 생산력은 자본을 자기 맘대로 요리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렇다면 새로운 생산력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맑스가 “생산력은 곧 인간 자신”이라고 말했듯이, 이는 새로운 인간 생산을 통한 생산력이다. 이 새로운 인간은 여성주의에 입각한 노동자 계급이다. 맑스가 “노동자 계급은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다고 말했지만, 현재의 노동자들은 잃어버릴 것이 있다. 맑스가 ‘잃어버릴 것’을 착취적 관계를 의미하고 있듯이, 현재의 노동자, 특히 남성으로 대표되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소비재를 소비하는 ‘타인’, 즉 ‘여성’의 노동을 착취하는 구조와 관계가 ‘잃어버릴’ 것으로 남는다.

새로운 인간은 바로 ‘잃어버릴 것’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여성주의적 노동자 계급이다. 새로운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더 이상 착취 관계와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이다. 그런데 이런 착취구조와 관계는 가족 이데올로기로 포장되어 있다. 이 가족 이데올로기의 포장을 벗겨내고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착취구조와 관계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그 물질적 토대를 해체해야 한다.

그 물질적 토대는 한 개별 노동자의 임금으로 한 개별 가족이 고립적으로 생활해 나가는 방식이다. 이 생활 방식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 하에서의 기본적인 생활 방식 단위이다. 이 단위 속에서 노동력의 재생산은 가사노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데, 이 가사노동은 자본주의적 성별 분업 형태에 의하여 대체로 여성들에게 강요된다. 그리고 그 재생산에 들어가는 재생산 생산노동은 거의 아무런 대가 없이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임금은 노동력 재생산에 최소한으로 꼭 필요한 소비재의 구매 비용이지, 그 소비재를 가지고 자신의 욕구에 맞게 변형시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생산’노동 비용은 그 임금에서 제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신자유주의에 의해서 가사노동을 거의 전담하였던 여성들은 임금노동을 해야 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당한다. 그리하여 이제 여성은 이중적 착취와 억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성의 강요된 임금노동의 대가인 임금은 여성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편의 노동력 재생산과 자식들의 다음 세대 노동력 생산에 거의 투입되도록 암묵적으로 강요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중적 착취의 구조와 관계가 해체되지 않고서는 새로운 세계를 차출해 낼 주체를 생산해 낼 수 없다. 오히려 자본주의 생활 방식 구조와 관계를 그대로 유지시키는 인간만이 재생산될 수 있을 뿐이다. 일상적으로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데 익숙해져 버린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경제를 파탄시키는 행위이고, 교통체증을 일으키는 주범이며 가족을 내팽개치는 파렴치한 행위라는 이데올로기가 ‘상식’으로 돼 버린다.

그러므로 새로운 인간은 이러한 착취와 억압이 익숙한 것이 아니라 아주 낯선 것이며 해체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이다. 이 새로운 인간은 개별적 생활 방식을 깨뜨리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만 노동자 계급 안에 내재해 있는 착취와 억압 구조와 관계를 해체할 수 있는 필요조건이 갖춰진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이전에 개별적으로 해결해야 할 생활 전반의 문제들을 조직적이고 사회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본의 내부에 자본의 외부인 노동자 계급의 코뮌을 건설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 속에 내재해 있는 억압과 착취의 관계와 구조를 깨뜨려 나가기 위해서, 이 새로운 인간은 ‘자기 비판적’이어야 한다. ‘자기 비판적’이라는 측면에서 이 새로운 인간은 ‘과학적’인 인간이다. 그런데 이 ‘자기 비판’은 끊임없는 상호소통과 협력‧연대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과정 속에서 각 개인은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 있으며, ‘자유로운 각 개인이 연대하는 사회’인 ‘코뮌’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의 내부에 있는 자본의 외부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상호소통, 협력과 연대 과정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 방식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 방식의 물적 토대를 형성해야 한다. 이 형성을 위해 대자본 투쟁의 기초인 임금‧단체협상 투쟁이 이루어져야 한다. 개별적인 개인과 가족의 생활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공동으로 살아갈 수 있는 코뮌의 물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인간의 생산은 새로운 세대의 생산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이며, 또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산은 그들 스스로가 수행하도록 해야 하며, 그 생산을 도와야 한다. 이 생산은 ‘자기 비판’ 능력을 생산하는 것인데, 그들 스스로가 상호소통하며 협력과 연대를 할 수 있는 코뮌을 통해 이루어진다(이러한 비판 능력을 키우는 것이 ‘대중화’의 진정한 의미이며 노동자 계급의 교육 목표라고 생각한다. 이 대중화와 교육 목표는 ‘자본의 공교육’ 체제 아래에서는 현실화될 수 없고, ‘노동자 계급의 공교육 체계’(이는 자본의 공교육에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이른바 ‘사교육’을 지양하고 해체하는 체계이다)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대중화와 노동자 계급의 공교육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를 빌어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새로운 세대의 자기 생산과 코뮌의 싹에 관한 예로 영화 <우리학교>와 <더 사이더 하우스 룰즈>를 들겠다. 우리학교는 조총련계 조선인 학교의 아이들과 그 지역사회와의 관계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이고, 더 사이더 하우스 룰즈는 부모에게 버려지거나 부모가 없는 고아원 아이들의 삶의 모습을 담은 영화이다. 이 영화들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생활 규칙을 자신들이 만들어 나가며,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일에 아주 익숙해져 있다. 특히 <우리학교>에서는 학교(이 학교는 일본 공교육 체계 밖에 있는 조선인 공교육 체계로서의 학교이다)라는,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코뮌들 사이의 연대, 그리고 그 학교를 통해 지역 조선인들의 코뮌과 그 코뮌과의 연대가 나름대로 잘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을 통해 새로운 세대의 자기 생산과 코뮌은 기성세대 노동자들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고, 그리하여 기성세대 노동자들을 그들 스스로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본다(맑스가 “교육하는 자도 교육 받아야 한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바로 이 토대가 노동자 계급의 진지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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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별로 느낌 없다...

그가 오늘 가셨단다...

근데 별로 감흥이 없다...

사람이, 그것도 전직 대통령씩이나 한 사람이 죽었다는데

별 감흥이 없다고 핀잔을 줄지도 모른다...

 

잘 가시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그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후배들이 조직 사건으로 엮여 달려갔고,

그가 재임하고 있을 때에

천하의 악법 중 하나인 비정규직 법이 통과되었다.

그 때문에 노동자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그가 짐작이라도 했을까...

돌아가실 때 노동자의 삶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셨을까...

 

뭐 돌아가신 양반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하고 싶지 않다.

다만 잘 가시라는 말밖엔...

 

민주주의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은 하지 말자...

그러면서 추모를 해야 한다느니 하는 말도 하지 말자...

 

그저 편히 가시라는 말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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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상태...

계절학기 끝난 다음부터 거의 머리가 공황상태에 이르고 있다.

정말 시쳇말로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냥 멍한 상태...

맨날 술이나 생각나는...

이러다가 정말 뭔일 내는 거 아닌가 하는 느낌이...

 

하여간 정신이 돌아와야 책을 읽던, 글을 쓰던 뭔가 비전을 가지고

뭘 할 텐데...

정말 걱정이다...

혹시 이런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없을까...

지금은 머리가 백지 상태라,

예전에 내가 어떻게 했는지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정신이 안드로메다에 가 있는 것 같다...ㅠ...

 

제발 정신이 빨리 돌아오라고 광고라도 내야 하지 않을까...

근데 어떻게 광고를 내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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