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가서 영어하라고?
행인은 방위출신이다. "잘 키운 방위 하나 열공수 안부럽다"는 신조를 가지고 영내에서 생활하던 방위병 행인, 처음 자대배치받은 곳은 인천부둣가에 위치한 쬐끄만 부대였는데 현역병과 방위병의 숫자가 비슷비슷한 부대였다. 방위병과 현역병이 허구한 날 치고 박고 하는 분위기다보니 툭하면 주어 터지고 오바이트 쏠릴 때까지 얼차려받는 게 일이었다. 예를 들어 축구를 한다. 지면 방위병 고참들에게 쌍코피 터지게 주어 터진다. 이기면 현역병들이 와서 주어팬다. 방위 쫄따구들은 이래도 맞고 저래도 맞았다.
신병초짜가 완전히 얼어붙어서 내무반 침상에 무릎팍 가지런히 모으고 눈도 못돌린 채 앉아 있을 때, 교육단계라는 고참이 행인 및 동기생들에게 무려 A4지 80매 짜리 뭉텅이를 던져주면서 일주일 안에 완전 암기하라고 명령한다. 군인의 길부터 시작해서 무슨 경례, 차려, 쉬어 어쩌구 하는 내용들의 설명이 쭉하니 적혀 있었고, 거기에다가 각 초소 근무수칙에 증가초소 근무수칙에 10대 군가에 신군가에 부대 특성이 어쩌구... 하는 것들이 8포인트 정도의 글씨로 빽빽하니 타이핑되어 있었다. 천만다행히도 양면인쇄는 아니더라...
암튼 이거 외우느라 거의 기절할 뻔 했는데, 교육단계는 물론이고 주변에 걸리적 거리는 고참이라는 고참은 한 놈도 빠짐없이 심심할 때마다 갑자기 하나씩 외워보라고 하는데 어쩌다 한 번 새는 일도 없이 번번히 두드려 맞거나 얼차려를 받았다. 속으로 이걸 왜 외워야 하나라는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외우지 않으면 제 명에 못산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지라 밥먹으면서 외우고 걸어가면서 외우고 하여튼 시간이 날 때마다 외우고 또 외웠더랬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무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 때 외웠던 거 솔직히 하나도 기억나질 않는다. 아무리 굴러봐야 방위출신이라서 그런가? 그래서 왜 그런 말도 있잖냐? "방위가 군인이면 파리가 새다..." 아니면 기억력에는 워낙 잼병인 행인의 개인적 능력때문일까? 하여튼 원인은 알 수 없다만 그 당시 그 두껍던 페이퍼에 잔뜩 타이핑되어 있던 내용들은 기억이 나질 않고 그거 건수잡아서 뻑하면 드럼통에 깔아 뭉개거나 주먹질을 해대거나 몽둥이를 날렸던 고참들의 이름은 어째 이리 기억이 잘 나는 거냐...
갑자기 기억에서 삭제해버리고 싶었던 그 때의 일들이 생각나는 것은 순전히 웹서핑을 하다가 만난 골때리는 칼럼 하나 때문이다. "군대 가면 영어 잘하게"라는 제목이 있길래 뭔가 싶어 들어갔다가 혼자 배꼽을 잡았다. 이 칼럼을 쓴 필자는 "국방부의 공식 언어를 영어로 지정하고 지식중심의 군대로 재편할 것을 제안했다. 군 복무기간 동안 모든 군인은 영어만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즉 국방부의 시계를 영어로 돌리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처음엔 혹시 이 칼럼을 허본좌가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더랬다. 경향닷컴의 해당 기사에는 필자가 누군지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기사 덧글에 '이강백'이라는 사람이 언급되어 있길래 허본좌의 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 상상력, 이건 허본좌급이다. 도대체 지구상의 인간이 가진 상식으로는 이런 제안이 나올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혹시 이 필자는 이메가와 리퀴융수크의 영어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글을 꼬아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도 했다. 그러나... 아니었던 것이다. 이분은 정녕 2년 군복무기간 동안 전국 군바리들에게 영어만 쓰도록 하는 방안을 심사숙고한 끝에 내놓은 거다.
이분의 제안이 채택되어 군대에서 영어만 쓰게 할 때 발생하는 문제점은 뭘까? 불현듯 스치는 하나의 사례. 처음으로 자대배치를 받은 행인, 각 계급이 영어로 어떻게 되는지를 이해못한 채 말똥 두 개 단 군바리를 향해 "헤이~ 미스터 킴"이라고 어메리칸 스타일로 불러제꼈다. 그 말똥 두 개, 갑자기 눈까뤼가 확 뒤집어 지면서 "왓? 아유 크레이지? 디스 싸가지 이스 왓 싸가지?" 이러면서 쫓아오면 우짤까?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목뒤 경추를 건드리며 꼬리뼈 끝까지 흘러가고, 행인, 걍 튀는 것이 남는 것이라 생각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다가 그만 철조망을 넘고 말았다. 졸지에 탈영병이 된 거다. 소총까지 손에 든 채.
자, 이 때부터 '본 얼터메이텀'을 능가하는 박진감넘치는 추격전 전개. 헌병대는 무사히 따돌리고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셔~! 암튼 어딘지 모르게 달려왔는데 아뿔사 이번엔 경찰들이 뒤를 쫓는다. "서라, 움직이면 쏜다" 뭐 이런 씬도 괜찮긴 하겠는데, 암튼 궁지에 몰린 행인, 아 쒸바 이럴 때 영어로 뭐라 해야 하는 겨? 난 방윈데, 아 쒸바 진작 영어공부 좀 할 걸, 이러다가 걍 되는 대로 쏼라 쏼라, "돈 슛! 돈 슛! 아임 낫 쏠져, 아임 어 방위~~!! 아, 방위라고 쒸발..." 이럴까?
뭐 꼭 이런 극단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말이지... 사병식당에서 짬밥 타서 먹을 때, 허구한 날 식판을 채우는 그 "똥국"은 뭐라고 번역해야 할까? 아, 미군애들처럼 레이션 줄라나? 관물대는 캐비닛으로 바꾸고? 그나저나 남한 병력이 물경 60만이라는데, 이 군바리들 영어 2년간 교육시키려면 간부들은 죄다 영어 할 줄 알아야 하겠는데, 지금 군대 간부들, 영어 할 줄 아나? 하사관들은 우째야 하나? 다 영어학교 보내거나 외국 유학시켜서 영어 하게 만든 다음 원대복귀 시킬라나?
사실 이런 맹구같은 주장이 유력 언론 사이트에 버젓이 실린다는 건 어이없는 일이기도 하다. 백보 양보해서 조선일보나 중앙, 동아에 이런 기사가 실린다면 그나마 이해라도 하겠으나 경향신문이라면 좀 가려서 글을 게재해야하는 거 아닌가? 암튼 그렇다 치고. 이런 주장은 몽골기병 조갑제라면 모를까 반전주의자 행인에게는 아예 쓰레기 같은 글이 될 수밖에 없다.
군대를 아예 없애는 것이 당장은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사실 지금 현역 복무기간 2년도 쓰잘데기 없이 긴 게 사실이다. 기초군사훈련 정도면 충분히 해결될 일이고 정 병력유지가 필요하다면 가고 싶은 사람 가게 보장하면 된다. 아무리 길어도 3개월이면 군대에서 필요한 거 대충은 다 배운다. 모든 군인을 공수특전단이나 해병대처럼 특수한 병력으로 만들 셈이 아니라면 3개월도 길다.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군 복무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병력의 수도 확 줄이는 방안을 제안해야할 것이다. 그게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의 본색이다. 생판 젊은 넘들을 그래 군대라는 곳으로 끌고 가서 또라이들을 만들어 내버리는 지금의 시스템을 언제까지 유지할려고 하나? 그거 유지하는 것도 기가 막힌 판에 뭐? 2년 간 군대에서 영어만 쓰게 하자고? 이거 아무래도 허본좌가 텔레파시로 조종하는 거 아녀??
암튼 설날 덕담이나 할라고 들어왔다가 왠 넋나간 분의 안드로메다 관광기에 빠지는 바람에 혼자 킬킬대긴 넘 아까워 포스팅을 한다. 세상엔 여러 가지로 남 웃기는 재주를 가진 분들이 많이 있다. 이런 분들도 빠짐 없이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지난 대선에서 다수 노동자, 서민들이 민주노동당에 대해 내린 냉혹한 평가에 대해 ‘그 정도에 기죽지 말자’는 오만으로 화답했습니다. 노동자, 서민의 상식에 입각해 당을 운영하라는 소박한 요구는 ‘동지에 대한 의리’보다 우선할 수 없다며 묵살되었습니다.” — 노회찬 2008-02-08 03:31:04 “당사자들은 지금 분당을 향해가는데, 덮어놓고 ‘대동단결’을 하라고 훈수한다.” 2008-02-08 03:41:55 “언어의 사멸에 대한 저자의 관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