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디에건 봄은 오고 있다
#1.
탄광촌활동에서 했던 행사 중의 하나는 영화상영이었다. 강원도 태백 일대 깊숙한 산골에는 변변한 영화관 하나 없다. 그런 곳에서 동네 어느 학교 건물 벽에다 스크린을 덮고 영사기로 영화를 쏜다. 엄청나게 큰 화면으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하나의 즐거움이 된다.
한참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당연히 18금 이상 영화는 상영할 수가 없고, 약간은 가볍고 즐거운, 따라서 어른 취향에는 별로 맞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영화였다. 그런데 그 여름 밤 학교에 모여 앉은 사람들 중에 한 분이었던 그 할머니, 얼핏 봐도 칠순은 족히 넘겼을 것으로 보이는 그 할머니가 좋아서 하신 말씀이 가슴에 깊숙히 와서 박혔다.
"어이구, 이렇게 크게 영화를 본 건 생전 처음이여~!"
#2.
시골 조그만 마을에서 지역운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굳혔던 것은 그런 계기였다. 특히 문화운동. 이놈의 "대~한민국!"에서는 문화조차 서울만의 리그가 된다. 산골오지벽촌은 문화를 향유할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접근할 방법이 없어 소외된다. 마치 우리 고향에서,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간이역에 서질 않아 KTX를 탈 수 없는 것처럼.
꿈은 아주 단순하고 소박했다. 책을 왕창 모아 가는 거다. 애들이고 어른이고 언제든지 들어와서 보고 싶은 책을 보고 갈 수 있도록 한다. 가끔 태백에서 했던 것처럼 영화도 틀고. 끼리끼리 모이는 또래집단이 흥미를 가진다면 독립영화를 정기적으로 상영하는 것도 괜찮으리라.
때로 여유가 생기면 연극도 유치해서 공연하고, 음악이며 뭐 이런 것들도 공연해보자. 그림전시회나 시화전 같은 것을 해도 좋으리라. 아니면 아예 동네 아이들로 연극반을 만들 수도 있고 그림그리기 모임을 꾸릴 수도 있겠다. 여성축구단도 만들어 보고, 때마다 가을이면 걸진 굿판을 벌려보기도 해야겠다. 뭐 이런 생각들을 했더랬다.
#3.
태백 어느 구석 할머니가 기껏 영화 한 편을 보시며 한껏 웃으시던 일이 있던 바로 그해, 국민승리 21은 대통령 선거를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권영길은 온 천지를 돌아다니며 강연회를 했다. 권영길을 처음 보았을 때 했던 질문은 그동안 진보인사가 대통령 후보가 될 때마다 등 뒤에 칼을 꽂았던 그 세력과 결별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게 된다면 같이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권영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해, 대선후보전술이 옳은 것이냐 아니냐를 놓고 갑론을박을 했다. 숱한 논의의 결과 권영길 후보를 미는 것이 맞다는 판단을 했고 소극적이나마 대선에 참여했다. 동부지역 좌파학생연합이라는 조직이 구성되었고, 그 조직에 후배들이 참여했다.
어느 안개자욱했던 날 아침, 골목길을 빠져나오다가 대선후보 포스터가 줄줄이 붙어있는 담벼락 앞을 지나갔다. 왜 권영길 후보 꺼는 없지? 이러고 있는데 저쪽 끝에 "일어나라 코리아"가 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선관위에서 제작한 선거참여홍보포스터인줄 알았다. 그러나 그 안에 쬐끄맣게 권영길의 모습이 있었다.
선거를 며칠 앞둔 어느날, 후배들이 격앙된 표정으로 찾아왔다. 이번에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했던 연합의 선거운동원들이 짐 싸서 DJ 앞으로 들고 날랐단다. 맥이 빠졌지만 어쩌랴, 기왕 들어선 물인데. 하는데 까지 해보자고 했다. 그렇게 1997년이 갔다.
#4.
대학원이라는 곳엘 갔다. 팔자에 없게 가방끈을 늘어트리게 된 덕에 지금 생각해도 대견할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 그러다가 조금 여유가 생겼을 때, 장래 지역운동을 하기 위한 연습이라 생각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지문날인 반대연대는 그렇게 해서 뛰게 되었다. 많은 분들이 많은 도움을 주셨는데, 아직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너무 죄송할 뿐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활동이던 간에 조직적인 힘, 그리고 그것을 받쳐줄만한 조직, 더 나가 제도적인 대안의 창출과 제시가 매우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회단체를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가고자 하는 곳에는 사회단체라는 것이 큰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안은 정당이었다. 어느 지역이든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종합적인 의제를 갖고 활동할 수 있었으며 지역의 이슈를 제도로 전환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식을 가지고 있는 곳은 뭐니뭐니해도 정당이었다. 사실 이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정당활동에 대한 고민은 있었다. 몇 차례 뛰어들까를 고민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가 결국 민주노동당의 당원이 되었다. 월드컵 열기가 후끈 닳아 오르던 2002년이었다.
#5.
지역위 활동을 잘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되질 않았다. 지역위의 분위기가 정말 적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만해도 초창기 지역위다보니 생기가 있었고 분회도 이래 저래 다양하게 조직되기 시작한 때였다. 그런데, 분회원들은 그렇지 않은데 지역위의 활동가들은 내 생각이나 행동과 많이 겉돌았다. 그닥 오래 걸리지 않은 시간 동안 그 겉도는 현상의 원인이 바로 그들이 NL이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이데올로기는 사실 크게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당면투쟁에 대한 실질적 활동에서는 사상논쟁을 할 여유가 없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입당한 후 얼마 안 되서 있었던 815 행사에서 난 저들의 사고방식과 나의 사고방식이 도저히 같이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행사장에서 그들과 크게 다투게 되었다.
그들은 축제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마치 장성공사 동원되었다가 돌아온 식구를 맞는 듯한 그들의 언행에서 그들의 조국이 어디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이 신봉하는 신념의 체계가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이며, 그들이 얼마나 그것을 뼈에 사무치게 가슴에 묻어두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들과 논쟁이 벌어졌다. 난 당신들의 통일운동방식에 찬성하지 않는다. 당신들의 실존이 어디에 발을 딛고 있는지를 먼저 보라.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 마음은 이미 통일이 되었어요"
"당신은 이러한 통일운동방식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왜 민주노동당원이 되었어요?"
어이가 없었다. 지들 마음이야 진작에 통일되고 말고 내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강령 어디에 수령님과 국방위원장님을 영도자로 받드는 것이 우리의 통일운동이라고 되어 있던가? 경직된 북한식 사회주의를 극복한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6.
중앙당에 밀려 들어간 것은 순전히 얼떨결에 일어난 일이다. 애초 중앙당 정책연구원을 모집할 때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인권운동을 하던 사람들, 그중 특히 프라이버시보호 운동을 하던 사람들에 의해 영화 친구버전으로 "니가 가라, 중앙당" 뭐 이런 식으로 밀려서 중앙당으로 가게 되었다.
처음엔 끝까지 거부하는 것이 적절한 것이 아닌가 고민도 많이 했는데, 지역활동을 위한 예비작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정말 잘 되서 민주노동당의 세력이 커지면 장차 지역에서 활동하는 것도 조금은 더 수월해지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생겼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진보정당은 하루라도 빨리 크고 튼실하게 성장해야 한다는 일종의 목적의식도 있었다.
중앙당에 들어올 때, 2012년에는 국회의원 50명을 만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2008년에는 20명 이상의 국회의원을 만들고. 2012년에 50명 정도 국회의원을 가지게 된다면, 국정전반에 힘을 쓸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더 왼쪽의 정당이 출현하더라도 민주노동당이 적절한 방패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더랬다.
#7.
민주노동당 중앙당에서 활동하는 동안, 이 당이 가진 한계를 절실히 느꼈다. 그 한계를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토록 공부도 많이 하고 활동도 많이 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이곳이 이렇게 엉성할 수 있는지, 그것이 내내 의문이었다.
정세를 읽지 못하는, 그래서 택도 아닌 곳에 몰빵을 해대는 이 이상한 구조. 소통의 단절. 그래, 가장 큰 것이 그거였다. 닥치고 대동단결을 요구하고 자신들의 위치가 어딘지도 모르는 채 여당에 묻혀서 호가호위하려는 작태들. 이건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구조였다. 이걸 정치라고 하고 있다니... 이들은 내가 살아오면서 보아왔던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아마추어였다. 적어도 정치에 대해서만큼은 그렇다.
가장 몰상식한 것은 바로 쪽수의 정치였다. 지금이 무슨 황건적 봉기 일으키던 때도 아니고, 어떻게 쪽수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할까? 그러면서 항시 남을 가르치려 하고, 자기만 아는 듯이 떠들고, 동지를 동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부하로 치부하고. 이게 중앙당 안에서 봤던 모습이었다. 사람을 이토록 쉽게 아는 조직이 또 있을까.
#8.
패자는 말이 없다. 어쨌건 지난 4년 동안, 아니 창당이래 8년 동안, 당은 잘라야할 것을 자르지 못했고, 던져야할 것을 던지지 못했다. 그게 바로 오늘날 당을 만들고 지켜왔던 사람들이 쫓겨나는 어이없는 일의 발단이었다.
패자는 말이 없다. 그래, 이건 분명 패배다. 문제는 내 자신에게 오늘의 패배는 단순히 승부 하나가 나의 패배로 종결되었다는 것으로 정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패배는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분명히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정치인들의 노회한 수작질을 너무 빨리 배워버린 민주노동당의 의원들과 지도부는 자신들의 위치에 자부심을 가진 나머지 정리해야할 시간을 다 보내버리고 말았다.
패자는 말이 없다. 어찌되었건, 나름 그동안 캔디 노릇 하느라 힘들었다.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너무너무 졸렵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잠이 오질 않았는데, 이젠 자야겠다. 패자가 할 일이 뭐겠나, 그저 잠이나 잘 밖에...
#9.
그러나 봄은 오고 있다. 천지사방 어디에건 봄은 오고 있다. 찬 바람 불어 아직은 추운 엄동이다. 계절도 그렇고 당도 그렇다. 그러나 어김없이 봄은 온다. 지금 이 허전함은 아마도 봄이 몰고 올 따스한 기운을 더 많이 담기 위한 자리비움인지도 모른다. 그래 까이꺼 봄이 온다잖냐, 봄이...
짧게라도 기록해야 할 것 같아서 쓴다. 펄님 블로그에 갔다가 소식을 들었다. 펄, 드디어.. 최초 종북정당 탄생!방금 전 민노당 당 대회가 끝났다.주사파들이 단결하여 결국 일심회 사건(한마디로 간첩 사건) 제명안을 부결시켰다.(중략) 다른 사람 모두가 자기 자신의 안위와 돈벌이 재테크에 혈안이 돼 있는 때마저도 헌신해 왔던 그 열정이 모두 사그러지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 뿐이다.나는 '민노씨'다. 처음에 이 필명을 쓴 건, 그저 우연이지만, 막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