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뻥치지 마셈~!
정부안 형식으로 헌법 개정 시안이 발표되었다. 4년 연임(1회에 한한다고는 하나 중임을 명정하는 것이 아니라 연임이라는 표현에 주목), 대통령과 국회의원 임기의 일치를 핵심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노무현은 왜 이런 헌법개정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그리고 차기 정부에서 책임지고 개헌을 추진한다는 각당의 합의가 있을 때는 이 안을 철회할 수도 있다는 내용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기자회견 모두발언을 보면서 느낀 점, 구라도 좀 정도껏 치라는 거다. 왜냐?
1. 임기의 제한이 모든 문제의 시원이었던가?
노무현은 "5년 단임제는 시대의 변화와 민주주의 성숙에 따라 그 역사적 소명을 다했"다고 주장한다. 근본적으로 문제제기 자체가 잘못되었다. "5년 단임제"는 그 자체가 역사적 소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5년 단임제"의 소명이 "장기독재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면 제5공화국 헌법이 규정하고 있었던 "7년 단임제"역시 마찬가지의 명목을 가지고 있었음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7년은 길고 5년은 짧아서 문제가 되는가?
"장기독재를 막기 위한" 것으로서 단임제가 가지는 역할은 같은 인간이 연거푸 대통령 해먹지 말라는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당정치가 자리잡은 국가에 있어서는 이 단임제 역시 정당에 의한 장기독재를 견제하는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같은 정치지향을 가지고 있는 같은 당 소속의 인물들이 단임제 대통령을 번갈아가며 해먹는다면 어떨까? 즉, 문제의 요체는 단임이냐 연임이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진짜 문제는 노무현이 자신의 발언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국민의 신뢰"다. 신뢰를 받는 정권은 4년 연임을 하던 5년 단임을 하던, 아니면 차베스처럼 3선을 하고 4선도 원하던 얼마든지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그런데 노무현은 그 짧지않은 5년 임기의 지난 4년 동안 어떤 신뢰를 주었나?
미국에 사진찍으로 가지 않겠다고 해놓고 나서 지금까지 벌린 짓은 평택초토화, 한미FTA강행, 전략적유연성에 대한 협조 등이다. 이게 자주적 국가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던 노무현이 대미관계와 관련해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된 계기다.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하고 양극화를 해소하겠다고 해놓고 극단적 신자유주의 체제를 안착시키기 위해 노사관계로드맵, 비정규직노예화법안 등을 추진했다. 신뢰가 갈 수가 있나?
노무현 및 노무현 추종자들이 노무현 임기 중에 가장 혁혁한 공으로 추켜세우는 것이 바로 권위주의의 탈피였다. 이렇게 온갖 사람들이 대통령을 욕할 수 있었던 때가 언제 있었냐는 것이 그들 주장의 근거다. 웃기지 마라. 감히 "물태우 대통령 각하"의 전력 앞에서 어떻게 권위주의 탈피를 운운하나? "이제 막가자는 거죠?"라며 웃통벗어젖히던 노무현의 모습에서 권위주의의 탈피를 보았던가? 웃기는 소리다.
모든 문제의 발단은 헌법에 규정된 "5년 단임" 때문이 아니다. "역대 세 분의 국민직선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중 탈당"했고, 노무현조차도 "그 벽을 넘지" 못한 것은 "5년 단임"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때문이었다. 노무현이 탈당한 것, 그것은 열우당의 사분오열을 막기 위한 골육책이었지 그게 "5년 단임" 때문이었나?
2.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불일치가 문제인가?
여기서 노무현은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합치시킴으로써 "여소야대 정치구조를 극복하여 대통령과 여당이 보다 책임 있게 일하고 다음 선거에서 평가받는 정치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국정의 책임성과 연속성, 안정성과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다는 거다.
이게 이렇게 좋은 것인데, 임기가 일치하지 않다보니 "전국단위 선거가 수시로 치러지면서, 선거때마다 '정권심판론'이 제기되고 정치적 갈등과 혼란이 심화"된단다. "이 과정에서 중대한 국가 과제 추진이 지체되거나 장애에 직면"한단다. 이게 다 국회의원과 대통령의 임기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노무현의 진단이다.
그런데, 이 사이비 정치의사의 진단이 잘못된 것은 너무나도 쉽게 눈에 띈다. 우선, 모든 정치행위는 "갈등과 혼란"에서 연원한다. 그리고 그 "갈등과 혼란"을 극복하고 투쟁과 타협을 병행하면서 대안을 모색하는 행위가 바로 정치다. 지금 이러한 정치행위가 난항을 겪으면서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것은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가 불일치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정략에 따라 '원포인트개헌' 같은 이벤트성 정치행위를 하면서 이에 대한 반대는 모두 반개혁, 반민주로 몰아부치는 덜떨어진 정치인들의 저급한 수준때문이다.
자유, 자주와 같은 전형적 보수의 가치를 전면 부인하면서 자신들을 보수라고 주장하는 한나라당의 띨한 정치인이나, 신자유주의의 노예가 되기를 자초하면서도 자신을 진보라고 주장하는 열우당의 철딱서니 없는 정치인이나, 이런 하류정치판에서 왕초노릇하면서 사사건건 이벤트정치로 문제를 해소하려는 노무현 같은 정치인들이 있는 한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백날 같이하고 임기 같이 맞추어봐야 나오는 거 맨날 거기서 거기다.
"갈등과 혼란"이라는 사회현상 자체를 모면하기 위해 대통령임기와 국회의원임기를 일치시키겠다는 것은 그 저변에 '승자독식'의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계략이 숨어 있다. "all or nothing"의 이 노무현판 승자독식시스템은 당장 눈에 띄는 현상적 측면의 "갈등과 혼란"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안에서 싹터 자라 올라오는 내면의 더 큰 "갈등과 혼란"을 양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동당과 같은 군소정당은 싹을 틔우지 못하게 되고, 더 나가 민주노동당보다 더 왼쪽에 있거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신생정당은 아예 출생신고조차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더구나 선거가 잦아서 나라가 엉망이라면 허구한 날 이런 저런 선거를 치루고 있는 스위스는 벌써 망해도 망했어야 한다. 그러나 스위스의 민주주의가 한국의 그것보다 저열하다는 평가는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자기 주제에 대한 반성은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언론 탓, 한나라당 탓으로 돌리던 노무현은 끝내 헌법탓까지 하면서 임기말을 보내려 한다. "국정을 책임지고 일하는 세력보다 반대하는 세력이 다수를 형성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구조는 아"니라는 이 천박한 인식구조는 노무현의 국정에 관한 개념이 완전 버로우 상태임을 보여준다. 그게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집권정당이 잘못하고 있을 때 이에 대해 가장 강력한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흠결을 치유할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집단은 야당이다. 이런 긍정적인 면은 그대로 간과되어야 하는가?
3. 차기정부개헌을 누가 합의해줘야 하나?
노무현은 자신의 개헌 제안을 각 정당이 차기정부에서 추진하겠다는 약속만 한다면 철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지금 정국은 말 그대로 대선정국이다. 각 정당은 대권주자를 선출하는데 정신이 없고, 각 대권주자마다 나름의 개헌에 대한 인식이 있을 것이다. 이 인식은 대권주자 경선과정에서 표출될 것이고 이에 따른 유권자의 선택에 의해 후보가 정해질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두면 노무현은 어떤 대권주자든지 개헌을 공약으로 내세우라고 요청하는 것이 된다. 왜 각 당 대권주자들이 노무현의 요청에 따라야 하나? 그들이 노무현 정당의 하수인들인가?
정당차원에서 개헌을 받으라는 요구가 될 수도 있다. 일단 열우당을 보자. 완전 사분오열되었다. "백년 가는 정당" 운운하더니 이젠 당명을 바꿔야 산다고 아우성들이다. 열우당 이름으로는 대선 못치르겠단다. 이런 수준의 정당이 노무현의 제안을 받아들여봐야 그게 어디 "신뢰"가 가겠는가?
한나라당? 걔들이야 받겠다고 해도 그만이고 안 받겠다고 해도 그만이다. 받는다고 해놓고 안해버려도 누가 뭐라고 할 수가 없다. 받는다는 약속이 있어도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농후한데 이런 공수표남발을 뻔히 보면서 그런 제안을 하나? 그건 결국 노무현이 자기 빠져나갈 궁리, 즉 모든 책임을 한나라당에 던지려는 꽁수에 불과하다.
민주당은? 역시 한나라당과 마찬가지다. 받아도 그만이고 안 받아도 그만이다. 더구나 민주당에 있어서 노무현은 어떤 존재인가? 당 하나를 완전히 풍비박산낸 불구대천지 원수다. 받아들이면 체면이 구겨질 판이다. 그걸 무릅쓰고 받았다고 해도 안 지켜도 그만이다. 뭔가? 이게?
민주노동당? 받을 수 있나? 물론 내부에서는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으로서는 받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한 상황이다. 적어도 다른 정당들과는 달리 민주노동당은 개헌이라는 행위를 단지 헌법 조문 몇 개 고치는 수준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정치적 지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민에 의한 정치를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개헌 역시 인민의 동의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고, 민주노동당은 그런 측면에서 광범위한 인민의 동의를 묻는 수순을 밟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노무현의 제안은 협박일 뿐이다. 자신의 정당성을 다른 정치집단의 반발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는 가장 저질스런 협박. 마치 길 가던 사람 붙잡고 흠씬 두들겨 팬 다음에 니 눈빛이 이상했다고 이죽거리는 양아치같은 형국이다.
4. 헌법개헌이라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는가?
87년 이전의 헌법이 헌법이었나?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선 헌법이라는 체계가 어떻게 만들어지며 진화하는가를 봐야 한다. 헌법은 최상의 법률로서 그 사회체제를 규정하고 이념을 선언하며 사회의 진행방향을 설정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헌법체계가 형성되는 조건은 사회 제 계급계층간의 끊임없는 투쟁과 합의, 그리고 그 와중에 형성되는 정치적 의제의 완성도에 따르게 된다.
한데, 87년 이전의 헌법들은 그런 과정을 겪지 않았다. 제2공화국 헌법만은 예외로 한다고 치더라도 제2공화국 헌법은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해석되고 평가될 시간조차 가져보지 못한 채 사장되었다. 그 외에 헌법개정과정들을 돌이켜보자. 언제 과연 그 헌법개정의 과정에서 사회 각 계급계층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협상과 합의가 있었나? 죄다 정권의 안녕과 독재체제의 강화를 위해 집권세력의 이해관계만을 반영하여 개헌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국민들은 압제의 고통에 신음해야 했다.
적어도 형식상 절차상으로 헌법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헌법은 역사상 87년 헌법이 유일하다. 군사정권 하의 엄혹한 상황에서 끊임없이 전개되었던 민중들의 투쟁, 그리고 6월 항쟁과 7, 8, 9 대투쟁의 과정을 겪으면서, 비록 그 내용상 많은 문제가 있었고, 합의의 주체에 민중세력이 배제되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87년 헌법은 사회적 역동성과 그 안의 투쟁과 합의 등등을 포섭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예를 들어 "5년 단임"이라는 문제로 인해, 또는 대통령임기와 국회의원 임기의 불일치로 인해 전 사회적인 계급계층간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던가? 상호간의 이해관계로 인하여 이를 중재하고 합의해야할 긴박한 사정이 일어나고 있었던가?
오히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서민들의 생활이 날로 어려워지는 현실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헌법적 장치의 요청이 더욱 절실했다. 그렇다면 기왕에 원포인트 개헌이라도 할라치면 차라리 헌법의 명문 규정으로 주거권을 넣든지 토지국유화를 하자던지 하는 식의 개헌이 더욱 필요하다는 논의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제껴놓고 대통령임기와 대선총선 선거시기 조정만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있다. 개헌이 시행령 하나 고치는 정도의 일처럼 생각되고 있는 이 현상은 정상이 아니다.
이렇게 보자면 노무현의 개헌주장은 적어도 헌법이 만들어지거나 혹은 헌법의 내용에 변화를 가져와야할 어떤 상황의 도래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가 개헌에 대해 공약을 내놨기 때문에 공약을 지키는 차원에서 개헌논의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변하려면, 적어도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 답변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함께 내놨어야 한다. 그러나 없다. 오직 단임문제와 임기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모든 문제해결을 위한 단초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당찮은 이야기만 하고 있다.
지겹다. 4년간 징징거리는 거 봐준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대통령이라는 자가 허구한 날 제 말 들어주지 않는다고 징징거리고, 거기에 대해 뭐라고 하면 조중동이랑 똑같은 놈들이라고 딱지붙이고, 앞에서 했던 말 뒤에 가서 바꾸는 일을 밥먹듯이 하는 것도 지난 4년 동안 겨우 참아왔다. 이젠 좀 그만 봤음 싶다. 법조인 출신이라는 자가 법률이, 헌법이 가지고 있는 함의조차도 왜곡하면서 이를 자신의 투정부림에 소재로 이용하는 거 이거 영 보기 않좋다. 법조인출신의 대통령이 이런 정도의 인식을 가지고 있으니 사법개혁은 무척이나 요원해보인다.
* 개헌안 자체에 대한 평가는 그래서 할 필요가 없다. 이건 사회적 논의를 거치면서 조정되고 합의될 문제다. 그 안 자체가 올바른지 그른 것인지는 본문의 논의와 별도의 논의를 해야한다. 다만, 국회의원 임기와 대통령 임기를 맞추는 것은,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고 싶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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