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고 있는 일들
아직도 온통 뜨거운 열기로 닳아 오르고 있다. 황박사 건이다. 이거 당분간 열기가 가라앉을 거 같지가 않다. 검증 이야기가 또 솟구치고 있는데, 검증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논란은 계속 될 것 같이 보인다. 건 그렇구...
돌이켜보면 2005년 한 해, 말 그대로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아직 며칠 남기는 했다만 제발덕분에 요 며칠만 별일 없이 지나가길 바란다. 행인의 바램과는 상관없이 그새를 못 참고 또 큰 건 몇 개 터질 것처럼 보인다만 어찌되었든 세상사 바람잘 날 없다는 말 실감하는 한 해다.
그나저나 황박사 건 때문에 노난 사람들은 따로 있다. 황박사 덕분에 주가 폭등한 바이오 관련 주식들 건사한 사람들? 뭐 그 사람들이야 주식투자해서 돈 벌었다는데 떨어질 때가 있으면 올라갈 때도 있는 거고, 주식하고는 별무 상관인 입장에서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고. 여기서 이야기하는 노난 사람들 따로 있다.
올 한 해 말 그대로 이 사회를 난장판을 만들었던 사건들 중 대표적인 것은 뭐니뭐니해도 안기부 X-File에 연루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노동자에게 돌아가야할 이윤을 뒷주머니로 챙겼다가 정관계, 검경에게 두루두루 뿌렸던 삼성 일가, 그 삼성 일가의 돈 알뜰이 받아먹었던 관료 검찰 '영감님들', 그걸 쫓아다니면서 불법으로 도청한 안기부 직원들, 그 도청테이프 받아가서 정치에 활용했던 노회한 정치인들, 그 정치인들에게 손 벌려 가면서 부정부패를 조장했던 기업인들...
어째 홍석현 전 주미대사는 검찰에서 밥이나 잘 챙겨드시고 있나? 이건희는 미국 간 후 꿩궈먹은 소식이고, 형님의 배달사고에 길길이 뛰었던 홍 전 대사님의 동생이신 홍모 검사님은 여전히 현직에서 뛰고 계시나? 아버지랑 손발맞춰 불법증여에다 세금포탈하고 삼성재벌 상속하려던 이재용 이친구는 여전히 사업 잘 하고 있는 건가?
한겨울에 시위대열에 물대포를 쏴제끼고 멀쩡한 사람 머리를 터뜨려 죽이는 이 정부가 어떻게 된 것이 이런 인간들에게는 한없는 자비와 용서를 베푸실까? 어영부영 사람들의 이목이 황박사에게 집중되어 있는 틈을 타서 대충 덮어버리고 또 그렇게 한 세월 보낼 작정인가? 아, 꼭 그런 거 같지는 않다. X-File의 당사자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정부지만 이걸 터뜨린 이상호기자는 사법처리하겠다는 것을 만방에 선포한다.
항상 보면 모든 것이 이렇게 가려져서는 안 될 것이 가려져버리고 잊혀져서는 안 될 것이 잊혀져 간다. 중앙일보 기자들이 "사장님 힘내세요"의 뒤를 이어 "대사님 힘내세요"하고 응원가를 부르며 부업으로 보디가드를 하는 현상이 그냥 웃음거리로 넘어간다. 그런데 이건 그냥 웃음거리로 넘길 일이 아니다. 사회의 공기로서 진실을 이야기해야할 기자들이 사회의 공기보다는 사인(私人)의 수족이 되기를 갈망하는 세상은 이미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중앙일보 기자들, 이 사회가 비정상이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일부 네티즌들, 애국 앞에서는 진실이고 사실이고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우기고 있다. 덕분에 의문을 세상에 알리고 그것에 대해 논의해보자고 입을 열었던 일부 방송관계자들, 몰매 주어 터지고 입 다문채 근신 중이다. 문제가 있는 것을 문제가 있다고 하지 못하는 사회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홍길동이 괜히 집을 떠난 것이 아니다. "아비를 아비라 하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하지 못하고..." 그 한이 맺혀 집을 떠났고, 결국 도적의 수괴가 되어 세상을 울리게 된다.
이 연말에 자꾸 뭔가 잊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될 때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으로 가보자. 거기에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무엇인가가 아직도 피를 철철 흘리면서 치열하게 잊혀지지 않기 위해 싸우고 있다. 비정규직철폐, 장애인 차별금지, 자이툰 철군... 그들이 그렇게 싸우고 있는 동안, 황박사의 초췌한 얼굴이 언론을 도배하고 노동자의 파업은 "귀족노조"의 반사회적 행동으로 포장되어 규탄의 대상이 된다. 뭘까, 이 가치관의 전도현상은...
이 신새벽에, 영하 10도라는 이 새벽에 잊혀지지 않기 위해 싸우고 있는 자들의 숨결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날 것이다. 그들을 잊어버리고 있는 이 세상은 점점 더 차가워져 갈 것이고...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