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구라1. 기왕 개헌 이야기도 나오고 하니, 시작...주체의 문제부터
문재인 개헌안 들여다보기를 다시 해보자고 생각했던 게 꽤 된 거 같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 제헌절이 되었고, 너도 나도 개헌하자는 이야기를 쏟아놓고 있더라. 그래서 생각이 났고, 그래서 이제 틈틈이 뭔가 생각 날 때마다 한 줄이라도 적어놓기로 해본다. 뭐 이것도 워낙 뜸하게 갈 거 같아 좀 그렇긴 한데.
처음 할 건 주체의 문제. 사실 이건 다른데서 많이 이야기한 거지만, 상세히 이야기하려면 한도 없고. 어차피 학술논문을 쓰려는 게 아니라 구라를 칠라고 하는 거니까 수준을 딱 거기 맞춰 진행해보자. 다른 주제도 마찬가지긴 하다만.
헌법 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그리고 헌법 전문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헌법의 제정과 개정은 "대한국민"이 한다는 선언이다. 중간에는 여러 가치와 지향이 있는데 그건 하나하나 차차 살펴보기로 하자. 헌법 전문은 문장이 통으로 한 문장인지라 뭐 이렇게 만연체가 있냐는 비판도 있고, 오래된 글이다보니 문법도 오늘날과 차이가 있어서 얼핏 비문으로 보이는 문장도 제법 있다만, 아유, 그래도 꽤나 훌륭한 문장이여. 뜻이 중요하지, 뜻이. 특히 이 "대한국민"이 헌법을 만든다는 이 구성, 뭔가 가슴 뛰지 않나?
몇해 전 정년퇴직한 한 원로 헌법학자가, 퇴직 직전에 헌법관련 책을 두 권 냈더랬다. 하나는 통상 볼 수 있는 개론서 수준의 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헌법 전문에 대한 책이었다. 그런데 이분이 어느 자리에선가,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이 헌법을 강의해왔는데, 헌법 전문에 헌법의 주체로 "대한국민"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다는 걸 전문관련 책을 쓰면서 알게되었다고 한다.
예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그 가치를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만, 만일 그게 아니고 진짜 "대한국민"이라는 단어를 처음 봤다면 그건 놀라 자빠질 일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헌법학자가 그랬다는 건 충격이다. 난 충격을 받기 싫고, 老 헌법학자께서 그정도로 허술한 분은 아니라고 믿고 싶고, 그러므로 내가 받아들인 해석이 맞다고 생각하고 살려고 한다.
아무튼, 헌법을 처음 공부할 때 가슴 깊이 울림이 있었던 건, 바로 이 헌법을 만든 사람, 고친 사람이 "대한국민"이라고 명확하게 선언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헌법의 주인은 누구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최초의 화두였다. 헌법을 만들고 고치고 한 건 "대한국민"인데, 왜 대한국민은 요모양 요꼴로 살고 있는가? 도대체 이 헌법을 만들고 고친 대한국민과, 나를 비롯해 내 주변에 살고 있는 대한국민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단 말인가?
독립운동가이자 '삼균주의'('정치의 균등: 균정권', '경제의 균등: 균리권', '교육의 균등: 균학권')로 잘 알려진 조소앙은, 1917년 기초한 '대동단결선언'에서 주권에 대하여 이렇게 정립하였다.
"황제권이 소멸한 때가 곧 민권이 발생하는 때요, 구한국 최후의 하루는 곧 신한국 최초의 하루다. ... 융희 황제의 주권 포기는 곧 우리 국민 동지들에 대한 묵시적 선위이니 우리 동지들은 당연히 주권을 계승하여 통치할 특권이 있고, 또 대통을 상속할 의무가 있도다."
군주제에서 민주제로 전환하는 과정을 이렇게 극적으로 그려냈던 것도 대단하지만, 동시에 주권자의 변동을 '선위'로 해석하고 '대통을 상속'하는 과정으로 수용하는 발상도 흥미롭다. 이 논리가 1919년 4월 임시정부 헌장으로 이어진다면, 당시 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는 선언은 혁명의 성격이라기보다는 양위의 성격으로 봐야 하나 어쩌나. ^^;;;
헌법은 헌법제정권자이자 헌법개정권자가 국민임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진짜 국민들이 스스로를 헌법제정권자이자 개정권자라고 자각하고 있는가이다. 다시 말해 이 헌법의 주인이 나라고 국민들이 자부하고 있느냐의 문제다.
헌법이 말하는 '국민'은 단지 국민의 총체적 의사를 의제한 것일 뿐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그건 곤란한 생각이다. 물론 어떤 헌법이든 모든 국민이 모두 완전히 동의하는 내용의 헌법으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헌법은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공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치인데, 따라서 당연히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지배계급의 이해관계가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이 헌법일 수밖에 없고, 피지배계급의 이해관계가 배제, 배척되거나 심지어는 억압되고 있는 내용이 헌법에는 담겨 있다.
따라서, "우리 헌법은 소중한 것이여"라고 무작정 현행 헌법을 숭앙하면서, '헌법주의'를 주장하는 건 매우 위험하다. 오히려 저 "대한국민"이 과연 누군가를 명확하게 분석하고, (i) 이 헌법이 내 헌법인지, 내가 지키고 가꿔야 하는 헌법인지, (ii) 아니면 매우 어렵지만, 이 헌법 안에 나의 가치관과 이해관계가 담보될 수 있도록 할 여지가 존재하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과정을 만들어 나갈 것인지, (iii) 그것도 아니라면 이 헌법을 뒤집어 엎고 나의 헌법을 만들기 위한 투쟁을 시작할 것인지 등을 판단해야 한다.
아마 최후의 수단으로 현행 헌법질서를 전복하고 새로운 헌법질서, 즉 '나' 또는 '우리'의 헌법질서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헌법제정권력이자 헌법개정권력인 "대한국민"은 그대로 저 위치에 있게 될 것이다. 군주제로 퇴행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헌법을 들여다볼 때에는 반드시 그 전제로서, 저 "대한국민"은 누구인가, 내가 포함되는가 배제되는가 등을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 현행 헌정질서에 무조건적으로 복속하게 되는 오류를 피할 수 있다.
아무튼 가장 중요한 건, 이 헌법은 누구의 것인가이다. 더 나가 내것으로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다. 내가 지킬 가치가 있는 헌법은 바로 나에게 가장 필요하고 소중한 헌법일 것이다. 이 문제는 이 공동체가 내가 지켜야만 할 가치를 가진 공동체인가의 문제와 동일한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