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구라3. 임시정부의 법통?
현행 헌법 전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계승하는 중대 사건이 무엇이며 그 이념과 배경이 무엇인지는 나중에 시간 날 때 보기로 하자. 논란의 중심에 있는 '법통'만 보자.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는 건 뭔 뜻인가? 먼저 헌법 전문의 구조에 따르면, 임시정부는 3.1운동을 계기로 성립되었다.
여기서 3.1운동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먼저 봐야 한다. 이 운동이 단지 왜정에 항거하여 독립을 부르짖은 만세운동으로 끝난 게 아님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이 운동이 장차 지속될 민족해방운동의 한 기점이 되었으며, 이 운동의 결과 이후 독립투쟁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며 법적/민주적 '정통성'을 갖춘 지휘계통에 의해 진행되었음을 주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장을 들여다볼 때 필요한 첫 번째 작업은 3.1운동의 성격과 그 결과, 특히 국가체계의 형성과 관련된 내용을 분석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임시정부가 정부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가이다. 이게 논란이 많은데, 핵심은 이 임시정부를 근거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당시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느냐이다. 통상 국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국민, 영토, 주권이 있어야 한다는데(국가 3요소설),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고 한들 당시 '대한민국'이라는 어떤 정체성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 세 가지 국가의 요소를 갖추고 있었느냐가 갑론을박 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이 문장을 살피기 위한 두 번째 작업은 임시정부의 성격과 국가성립 여부이다.
이제 '법통'의 문제가 따라온다.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의미는 현 헌정체제가 어느날 하늘로부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말이 나온 그 때로부터 민주적이고 합법적으로 연속된 일련의 연장선상에서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왜 그토록 법통이라는 걸 중요시하는가부터 봐야 한다.
87년 헌법은 앞선 헌법의 구조를 그대로 계승했고, 상당한 내용이 수정없이 이어져 규정되어 있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87년 헌법이 만들어진 과정을 본다면 기실 이 헌법은 직전 헌정체계와는 완전히 절연한 새로운 헌법이어야 했다. 요컨대 내용의 유사성과는 별개로 성격 자체가 완전히 다른, 즉 완전히 다른 국가의 건설을 이야기하는 헌법일 수 있었다는 거다.
그러한 성격을 헌법으로 명문화하는데 실패했고, 혁명으로 이어지지 못한 결과 구체제가 일정하게 이어졌지만, 만일 구체제와의 완전한 단절이 가능했다면, 87년 헌법 전문에 굳이 '법통'을 명기하지 않았어도 무방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했던 사례가 헌정사에 있다. 쿠데타 세력들은 자신들의 헌법에서 3.1운동과 대한민국 건립의 관계를 지워버렸던 것이다. 역대 헌법에서 이 구절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를 한 번 보자.
제헌헌법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박정희 쿠데타 헌법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유신헌법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4·19의거 및 5·16혁명의 이념을 계승하고
전두환 신군부 헌법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현행 헌법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제헌헌법에서는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 계승하여"라고 되어 있다. 이게 이승만이 지 정통성을 강조하려고 박박 우겨서 임정 법통을 주장했다는 썰도 있는데, 어쨌거나 간에 이렇게 제헌헌법에 규정되었던 "대한민국을 건립" 했다는 내용이 박정희와 전두환이 만든 헌법에서는 쏙 빠진다.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만 남겨 놓고.
쿠데타 세력들이 왜 그렇게 했는지, 그리고 현행 헌법에서는 왜 다시 대한민국의 적통을 부각하는 구절이 삽입되었는지는 장차 연구과제다.
아무튼 3.1운동의 역사적 성격, 즉 혁명의 성격 여부와 그 여파, 국가체제의 형성 여부, 임정의 성격, 임정시기 대한민국의 국가의 성격, 법통, 정통성 등등 복잡다단한 연구과제가 이 간단한 구절에 엄청나게 녹아 있다. 이 구절 하나만으로도 책 한 권이 나올 정도다. 언제 할 수 있을지가 문제다만.
이게 문제가 된 건 소위 우파와 좌파가 8월 15일이 건국절이냐 해방절이냐 뭐냐 이런 거 가지고 싸우는 통에 그렇게 된 거긴 하다. 더욱이 지금 상황에서 임정 법통을 따지는 게 오늘날 안착된 대한민국 체제를 좌지우지 할 정도의 실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사실 아, 그래? 하고 넘어가도 아무 문제 없는 구절이긴 하다.
하지만 이건 역사적으로도 법학적으로도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할 말이 많은 주제만큼 좋은 주제는 없다. 그리고 이 주제는 개헌논란 시기에 차기 헌법이 계승해야 할 이념이 뭔지와도 연관된 문제인지라 헌법 연구에서는 상당히 주목할만한 연구주제이기도 하다. 언젠간 꼭 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