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쟤들은 이게 다 경력이야"라던 선배의 핀잔
한겨레에 실린 글을 보다 문득 한 선배의 말이 생각난다.
한겨레: [세상읽기] 그 대학생들은 다 어디로 갔나/조형근
복직해서 세제공장 건설 TF로 발령받았다. 출근해보니 뻘창에 H빔만 몇 개 떡 박혀 있는 상태였다. 뺑이가 시작되었다. 공장을 짓고, 시운전을 하고, 제품생산을 하는 과정이 1년 동안 이어졌다. 그 와중에 벌어진 일이야 뭐 벼라별 일이 다 있었고. 예전에 이 블로그에도 그때 있었던 일들을 단편적으로 몇 번 올린 거 같은데 귀찮아서 찾기는 싫다.
공장이 어느 정도 안정화에 접어든 시기였다. 92년 봄 무렵이었다. 이때부터 다른 공장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릴 일이 있었다. 이런 저런 계기로 처음엔 족구시합이나 하던 모임이 술도 한 잔 하는 시간이 만들어지곤 했다. 나중에 보니 이 사람들 중에 속칭 '빨갱이'들이 섞여 있었다. 학출. 구로공단 있을 때, 인천으로 회사를 옮기고 나서 입대 전에 이런 사람들 몇을 알고는 지냈지만, 관계가 오래 가진 않았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새로 만난 사람들이라고 해서 뭐 통성명이나 하고 얼굴 몇 번 본 것 뿐이지 깊이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어차피 같은 공장 다니는 사람들도 아니었고.
그러다가 가을쯤 되었나 싶은데 그 사람들이 있던 공장에서 노사분규가 있었고, 꽤 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되거나 사법처리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런데 난데없이 상사에게 불려갔다. 갔더니 이런저런 회사의 여차저차한 일을 알고 있느냐? 거기 누구누구는 아냐? 뭐 이런 질문을 받았다. 아마도 다 알고 하는 질문인지라 굳이 모르쇠할 일은 아니라 생각했고, 그래서 알고 있는데 뭐 그리 잘 알지는 못한다는 식으로 답했다.
그 이상 질문은 없었고, 회사에 뭐 불만은 없냐, 바라는 게 있냐, 개선사항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라, 뭐 이런 이야기 좀 듣고 자판기 커피 한 잔 마시고 나왔다. 거기까진 뭐 그냥 그랬는데, 조금 지나니까 싱숭생숭 해지는 게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CCROOM으로 돌아와서 망연히 앉아 있는데, 같이 일하던 선배가 그 일때문에 불려갔었냐고 묻는다. 어찌 알았냐니 대충 이야기를 들었단다. 그냥 잊어버리라고 하더라. 그러면서 덧붙였다.
"야, 그 학출들, 걔들은 저러다 빵 다녀오면 그게 경력이야. 지네 선배들이 다 끌어주고 좋은 자리 가고 국회의원 되고 그래. 요샌 대기업에서도 쟤들 높은 자리 데려가. 그런데 우리는 저러다 끌려가면 그걸로 끝이야. 쟤들하고 우린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야."
대충 기억을 조립해보면 이런 얘기였더랬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학출'들이 어찌되었을지 모르겠다. 선배 말처럼 그렇게 끌려간 게 경력이 되어 잘 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그들이 운동권 활동을 경력삼아 높은 자리 올라가려고 현장에 들어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름의 선의와 열정이 있었겠지. 세월이 흐른 후 그 마음들이 변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 마음 잊지 않고 치열하게 살고 있겠지. 링크 건 글에 얼핏 비치는 그런 사람들이야 일부에 불과할 거야.
학출들 따라하다간 가랭이가 찢어진다고 이야기한 그 선배가 회사를 계속 다니고 있다면 아마 정년퇴직할 때가 되었거나 이미 퇴직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선배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여전히 학출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