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노동해방을 고민하며
엊그제가 전노협 창립 30주년이었는데, 그러고보니 30년이 지나는 동안 과연 우리가 그토록 노래했던 '노동해방'은 어느만큼 가까워졌을까?
어떤 글을 보니까 현재 노동운동이 면한 딜레마들을 열거하면서 조직노동운동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더라. 기분 나쁘다. 적어도 그 글을 쓴 사람에게 그따위 모욕을 받을 정도로 이 땅의 노동자들이 허툴게 산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하지만 입장을 떠나 그 글이 제시하는 문제제기는 나부터도 어찌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일종의 화두같은 문제들이었다. 그래서 더 떨떠름한 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면 그 글은 대공장 조직노동잗들의 현재 행태를 이렇게 꼬집는다. "자기 사업장의 임금과 근로조건을 극대화시키면서 전체 노동자의 임금불평등의 확대를 조장하는 노선"
그렇지. 이걸 우리는 조합주의라고 칭하면서 비판했었다. 이 문장의 전반부가 임금노예로서의 지위를 강화하면서 노동계급의 이해와 단절되는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결과의 분산물로서 이 문장의 후반부, 즉 전체 노동자의 임금불평등의 확대가 벌어졌으니까. 그러나 전투적 조합주의의 목적 자체가 임금불평등의 확대를 조장하는 것이 아님은 먼저 말해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못한, 아니 자기 주머니가 불러오는 것에 만족하면서 이런 결과를 외면한 한계는 인정해야겠지만.
그 글은 총파업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착각'이라고 하면서 이걸 '생디칼리즘적 노선'이라고 평한다. 왜? 그 결과 영세중소기업의 저임금노동자들과 비정규직들은 정치적 희망을 박탈당하니까. 그 글이 던진 문제의식의 일단에 대해선 주목하지만 그 글이 가지고 있는 논리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인과관계를 혼동하거나 왜곡한다는 거. 총파업이 "영세중소기업의 저임금노동자들과 비정규직들의 정치적 희망"과 결합하지 못한 것은 문제겠지만, 총파업이 "영세중소기업의 저임금노동자들과 비정규직들의 정치적 희망"을 묵살하기 위한 방편으로 기획되는 적은 없다. 게다가 지금의 노동운동이 생디칼리즘적 성향을 띠고 있는지도 의문이고. 차라리 그렇기나 하면 좋겠다만.
여전히 여러 영역에서 '노동해방'의 길을 어떻게 만들어나가야 할지가 숙제로 부상한다. 임노동의 구조 자체가 변화하는 시대다. 고전적 형태의 임노동체제가 파괴되거나 위축되면서 이를 근간으로 하던 역시 고전적인 노동조직이 사라지거나 약화된다. 노동시장은 한층 더 유연화되면서 노동형태의 다양화가 마치 노동계급 자체가 분화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문제들에 더해 계급성이 약화되는 현상을 심화시키는 건 정체성의 정치와 계급정치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는 점이다. 민족주의의 강화, 민주주의의 쇠퇴, 포퓰리즘의 득세, 경제적 양분화가 인식의 양분화로 이어지는 상황,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의 경계퇴색과 상호불신,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은닉한 채 제기되는 공정성의 요구 등등 불과 30년 전에 '노동해방'을 외칠 때의 노동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시간여행자에게 완전히 다른 세계에 적응하길 요구하는 것과 비슷할지 모르겠다.
머리속이 복잡해지는 시간인데, 어쩔 수 없다. 감당할 일이고 감당해야만 한다. 뭐 어찌되었든 간에 일단은 기능사 시험이나 제대로 보고 나서 생각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