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섭, 불출마 선언이라...
난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교수들과 꽤나 자주 논쟁을 했는데, 아마도 가장 많이 논쟁을 했던 수업이 헌법이었을 거다. 헌법 수업 교수가 정종섭 교수였는데, 당시 교수도 젊었고 나도 젊었고, 교수는 나름대로 학자로서의 풍모가 있었고, 나는 늦게 학업을 시작한 터라 궁금증도 많았지만 어느 정도 나름의 가치관이 있다보니 교수의 해석과 설명이 마땅치 않으면 바로 의견대립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아마도 진도 좍좍 빼고 수업 빨리 끝내야 할 판에 저 인간이 쓸데 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난 지금도 그 시간들이 즐겁고 고맙다. 날 키워준 여러 바람 중 하나였으니까.
아무튼 정종섭 교수 수업시간은 은근히 기대가 되는 시간이었다. 서로 입장을 이야기하고 특히 정 교수는 헌법이론적인 측면에서 이야길 하고, 난 나대로 내가 겪은 삶을 근거로 이야길 하고. 다행스러운 것은 정 교수가 보기에는 매우 깐깐한 듯해도 상대방이 논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그것을 끊지 않고 같이 대응해준다는 점이었다. 대표적으로 논쟁이 벌어졌던 주제는 노동조합의 정치자금 기부행위를 합헌으로 봐야 하는가, 마광수 교수를 형사처벌 한 것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인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데에는 어떤 자격조건이 필요한 것인가 등등.
그런데 여러 논쟁 중 오직 하나만큼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 주제가 있었는데, 민주주의를 주제로 선거에 대하여 논쟁하던 중 뜻밖에 이 분이 매우 강력한 인텔리주의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당시 정 교수는 선거연령 하한을 설명하면서 선거연령기준이라는 건 전적으로 우연일 뿐이며, 어쩌다보니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여건과 역사와 교육수준 등등이 종합되어 나라별로 달리 나타나는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전적으로 동의. 그런데 난데없이 선거연령 하한을 규정하고 있는만큼 선거연령 상한도 규정해야 한다는 논리가 튀어나왔다. 쉽게 이야기하면 일정연령 이상의 노인들에게는 투표권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
난데없는 뜬금포에 논쟁이 시작되었다. 선거연령 하한이 문제라면 이 부분을 충분히 검토해서 선거연령을 더 낮추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지, 선거연령 하한이 제도적으로 정해져 있으니 선거연령 상한도 제도적으로 정해야 한다는 논리는 비약이 아닌가라는 게 내 주장이었다. 그런데 정 교수는 현란한 여러 이론을 이야기하면서 하한이 있으면 상한도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했다. 난 그 논리가 과연 어떤 정합성이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둘 사이의 논쟁은 접점이 없이 계속 겉돌게 되었다.
학부 1학년에 불과한 학생과 성심껏 논쟁을 해준 점에 대해선 지금도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이후 그분이 보여준 행태는 자신이 했던 말들과 상당히 모순된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썩 개운칠 않다. 선거연령 상한제를 수업시간에 주장했던 때가 1995년이었는데, 그 이후 정동영이나 유시민 등이 노인들 폄하했대가 본인은 물론 소속 정치조직(정당)까지 쑥대밭을 만들고 말았던 일이 연이어 벌어졌다. 그 와중에 정 교수는 각종 헌법 관련 서적을 내고 '선비의 붓 명인의 칼' 같은 인문서도 내고 바삐 활동했다. 학교도 서울대로 옮겼고.
그러던 분이 어느날 장관 한 자리 하겠다고 나왔는데, 난 그나마 합리적 보수요 나름 붓질 하는 '선비' 정도는 된 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웬걸, 뭐 보통 보수정치인들이나 별반 다를바 없는 삶을 사셨더랬다. 그 계급의 실태가 그런 거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 중에서도 남다른 면이 있어 놀랐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되도 않는 정권에 입각해 장관자리 하더니만 분연히 들고 일어나 국회의원에 출마하셨는데, 여기서 벌어진 개코미디는 바로 이 분이 수구의 아성 대구에 출마해 당신이 선거연령 상한을 둬서 선거판으로부터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노인들의 표에 힘입어 당선이 되셨다는 거.
난 이 대목만 생각하면 그냥 헛웃음이 나오는데, 만일 이 분이 학교 수업시간에 그런 이야기 하지 않으시고 어디 대중강연에서 그런 이야기 했더라면 그 표를 받을 수 있었을지 심히 의심스럽다. 게다가 원래 이분이 정치에 관심이 많아서 자기 고향인 경주에다가 뭔 연구소까지 만들어 십 수년 공력을 들였는데, 정작 출마는 진박감별사노릇하면서 진박의 근원인 대구에서 했다는 거. 뭔 선비의 붓이 이렇게 X칠 하는데 씌이는지.
아, 그러고보니 이분은 수업시간에 교과서 쓰는 교수들을 신랄하게 욕하면서, 교과서는 공부하기는 싫고 용돈은 벌어야 겠고 하는 사람들이 쓰는 거라며 진짜 연구하는 사람들은 교과서 쓸 시간에 논문을 한 편 더 내는 법이고, 자신은 교과서따위는 쓰지 않겠다고 하더니 서울대 가자마자 교과서 출간. ㅎ. 뭐 그 외에도 참 많은 에피소드가 있으나 그냥 여기까지만 하고. 그래도 난 이분이 출마할 때까지도 내 나름의 예의를 지키려고 했는데, 갈 수록 그게 안 되네.
간만에 옛날 추억 다 들춰가면서 남 뒷다마를 신나게 깠더니 아, 배고프다. 밥 먹어가며 해야지. 갑자기 옛 생각 나게 만들고 뒷다마 까게 만든 계기는 이분이 이번 총선에서 출마를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는 거. 이야, 이젠 학교로 돌아가 총장하실려고 그러나보다. 그래 그 기사를 봤더니 갑자기 옛 생각이 줄줄 나오는구나. ㅎ
아, 그러고보니 이거 조국하고 같은 케이슨데, 정종섭은 이렇게 뭐 영웅이나 된 듯 현실정치를 비판하며 학교로 돌아가고, 조국은 온갖 비리범죄의 주범 내지 종범 취급을 받으며 학교로 돌아가니 둘이 완전 다른 길을 걸은 것처럼 보인다만, 내막을 들여다보니 그 분이 그 분일세. 거 참 뭐 둘이 한참을 다른 길로 달려나가 서로 겹칠 일이 없을 것처럼 보이더니만 사실을 들여다보니 정종섭이 조국이고 조국이 정종섭이었어. 세상 참 묘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