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로 호치민 11 - 신성한 땅들
견진성사까지 받았지만 냉담만 30년째인 나이롱 천주교신자다. 유물론자로 전향한 후 미사를 드리러 성당엘 가지는 않지만, 동네 고갯길에 있는 성당을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성호를 긋곤 한다. 어릴 적에는 뭣도 모르고 예배당을 다니기도 했는데, 나는 꽤나 신심이 있어 예배당을 다닐 때나 성당을 다닐 때나 열성신도였다. 유물론자가 된 후엔 열성 좌빨이 되려고 마음먹었으나 마음대로 되진 않은 것 같다.
프랑스 식민지배 과정에서 전파가 되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되, 호치민 곳곳에 성당이 상당히 많이 있다. 다 돌아보진 못했고 시내 한 복판에 있다보니 의도치 않더라도 지나치게 되는 유명한 성당도 있지만, 골목길을 돌다보면 만나게 되는 성당도 있다. 물론 골목골목을 다 돌아다닌 건 아니다보니 성당 투어를 할 수는 없었지만.
길을 잘못들어 골목을 헤매다 발견한 몽 트리우(Mong Trieu) 성당. 발음이 맞는 건지 어쩐지 모르겠다. 문이 닫혀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웅장하다. 골목길 안에 있는 성당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장엄하다. 뭔가 설명이라든가 그런 게 좀 있으면 좋겠다만 그런 건 없다. 혹시라도 문이 열렸을 때 한 번 와봤으면 싶었는데 그만 까먹고 말았다.
잘 알려진 떤딘(Tan Dinh) 성당. 스펠링이 맞진 않는데, 암튼 걍 넘어가기로. 바깥도 핑크색이지만 내부도 핑크라고 하는데 안으로는 들어가보질 않았다. 골목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성당 앞으로 왔을 때는 12시 정각이었는데, 마침 그 때부터 종을 치더라. 꽤나 오랫동안 종을 치는데 종소리가 매우 크고 경쾌하다. 주변 일대가 상가인데다가 조금만 가면 큰 시장이 나온다. 성당 바로 옆에는 학교가 있는데, 학교 앞에 노점상들이 있고, 애들 데리러 온 오토바이가 줄지어 서있다. 시끌벅적한 곳에 위치한 성당인데다가 색깔도 핑크이다보니 어째 막 저절로 성호가 그어진다거나 하진 않는 그런 느낌.
노트르담 대성당. 대규모 공사중이다. 공사가 다 끝난 후 단장 깔끔하게 된 상태를 다시 보고 싶다. 전면에는 성모상이 서 있다. 관광객들이 장사진을 치고 사진을 찍고 있다. 바로 옆에는 중앙우체국이 있다. 정면을 바라보고 서면 여기서만큼은 절로 손이 가슴으로 올라가고 스스럼없이 성호가 그어진다. 왠지 그렇게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핑크성당과는 달리 뭔가 정서적으로 사람을 겸허하게 만든다고나 할까, 그런 분위기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선 이상하게 절을 제대로 못 봤다. 불교가 왕성했던 곳이라서 하노이를 가든 다낭이나 호이안을 가든 절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코스를 잘못잡아서 그런가 호치민에서는 절을 제대로 못봤네. 아쉽다. 어쨌든 골목을 돌다가 게스트하우스가 많이 들어선 골목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발견한 절이다. 보은사. 이름이 참 정감이 있다. 난 성당 앞에선 성호를 긋지만 절에 가면 합장배례 한다. 절에 가면 으레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앞에서도 합장배례. 지나가던 사람들이 희안하다는 듯 쳐다본다. 허, 뭘 그게 그렇게 신기하신지.
54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인데다가 프랑스, 중국, 미국과 각축을 벌였고, 그 와중에 다양한 종교가 유입되기도 했기에 성당이나 예배당이나 법당이나 회당이 많은 곳이 베트남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종교가 혼재되어 있지만 아시아 국가 중에서 종교분쟁이 가장 없는 곳이라고. 서로의 종교를 존중하고 배려하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다. 한국의 기독교 분파가 난장판을 벌이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부러운 문화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종교와는 관계 없이 베트남이라는 곳 자체가 어떤 신성함을 가진 곳이 아니가 싶다. 누구에게도 자유와 자존을 짓밟히지 않겠다는 의지가 서린 곳. 그런 의지를 가진 주체들이 오랜 세월을 싸우면서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킨 곳. 그 사실만으로도 이 땅은 어딜 가든 신성성을 인정받을만 하다.
내 자신이 뭘 지향하고 있는지, 뭘 하려고 했는지, 뭘 할 건지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입장에서 이 땅의 신성함에 약간은 부끄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