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로 호치민 6 - 그 쓰디 쓴 커피 한 잔

호치민을 향해 가면서, 이 아무 목적의식도 없는 여행의 무료함을 예감하는 한 끝에는 그나마 이를 상쇄할 몇 가지 희망이 있었다. 쌀국수, 반미, 그리고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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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안방 해안의 한 까페에서 마셨던 까페농(Ca Phe Nong)

하노이 이래 가끔 G7 인스턴트 커피 마시는 정도로 베트남 커피를 추억하다가 작년에 참으로 오랜만에, 그것도 원 없이 저 까페농을 마실 수 있었다. 아주 미세한 구멍이 무수히 뚫려 있는 저 카페 핀이라고 하는 여과기에 곱게 갈아낸 커피를 눌러 담고 드립해서 마신다. 진하고 진하다. 그 진함에 익숙해지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보통 한국에서 아메리카노나 여타 에스프레소 가한 커피 혹은 드립커피류는 아라비카종을 많이 먹지만 베트남 커피는 주로 로부스타종이 대종을 이룬다고 한다. 최근 들어올 수록 고유품종의 아라비카종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고 하며, 로부스타와 아라비카를 혼합해서 사용하는 비율이 높아진다고 한다. 그런데 호치민을 돌아다니다보니 그것이 꼭 그런 건 아닌 듯하다.

무엇보다도 놀란 건 시내 중심가에는 고급스러운 프렌차이즈 커피숍들이 수도 없이 들어서 있었다. 하이랜드, 쯩응우옌 커피처럼 대형 프렌차이즈도 있고, 우리로 치면 빽다방 급 되는 것으로 보이는 '구타' 같은 저가 프렌차이즈도 많다. 골목 골목을 돌다보면 연남동이나 홍대 뒷골목처럼 프렌차이즈가 아닌 커피숍들이 또 엄청나게 들어서고 있었다. 마치 20년 전쯤부터 한국의 골목골목에 커피숍들이 들어서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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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에 자리잡고 있던 Sigong Specialty Coffee. 매우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커피숍이었다.

문제는 이런 커피숍들에서는 주로 에스프레소머신을 이용한 에스프레소 중심의 커피를 팔고 있었다는 것. 몇몇 대형매장에서는 까페농과 같은 고전틱한 커피를 팔기도 하는데 워낙 아메리카노나 기타 에스프레소를 기반한 커피류가 많이 팔리다보니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저가 프렌차이즈에서는 아예 안 된다는 곳도 있고.

자, 이렇게 되면 호치민에 온 보람 하나를 잃게 되는데 그건 용납할 수가 없다. 제대로 된 까페를 내주는 곳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입맛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고, 베트남 까페의 전통이라는 건 이곳 사람들이 그냥 먼지처럼 털어버릴만한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목한 곳은 아침 일찍부터 몸 쓰는 사람들이 모일만한 장소를 찾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바로 시장. 베트남 사람들은 매우 일찍부터 모이고 일을 한다. 안방에서도 놀랐던 게, 그 동네는 휴양지라 매우 조용한 동네임에도 큰 길가에 있는 노점형 까페는 아침 5시 반에도 사람들이 모여 커피를 마시고 있었더랬다. 호치민이라고 다를까. 어차피 나야 그 신새벽에 커피마시러 나갈 일은 없고, 대낮에 돌아다닐 것이니 시간이야 뭐 문제가 없을 거고.

그래서 시장통을 돌았다. 호치민에는 제법 큰 시장들이 많이 있어서 여기 저기 돌다보면 뭐가 나와도 나오겠거니 하고 돌아다녔는데, 정작 찾은 건 시장통에서 한참 들어간 골목길이었다. 날은 덥고, 하늘을 보니 아무래도 한바탕 스콜이 닥칠 것 같고 해서 어디 눈에 보이는 곳이 있으면 바로 들어가리라 하고 골목들을 돌아나오는데 오토바이 수리 및 세차하는 큰 점포가 하나 있었다. 이건 좋은 조짐이다. 왜냐하면 내가 찾는 그런 커피숍은 바로 이렇게 오토바이들이 여유를 가지고 머물 수 있는 공간에 있을 확률이 높으므로.

아니나다를까, 눈에 바로 들어오는 까페가 있었다.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작은 의자 내놓고 길을 바라보며 앉아서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만들어놓은 그런 까페. 안으로 들어갔더니 그냥 눈 앞에 카페핀을 올려놓은 잔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브라보! 유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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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페농'은 뜨거운 것을 말하고, 차가운 건 '까페다'라고 한다. 이게 기억이 나질 않아서 'hot'이라고 이야기했는데, 발음상의 문젠지 알아듣는 사람이 없어서 몇 차례 실패했더랬다. 워낙 더운 지방이다보니 뜨거운 거 보다는 찬 게 많이 나가니 아무리 'no ice'라고 해도 의례 유리잔에 얼음 띄워 주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커피가 워낙 진하다보니 이곳 사람들도 연유 듬뿍 넣어서 달달하게 먹는 경향이 많다. 이렇게 먹고 싶을 땐 '까페쓰어농'이라고 해야 한다. 달달하면서 차가운 거 먹고 싶으면 '까페쓰어다'라고 하면 되고. 기껏 'hot'은 통했는데 그냥 잔 아래 연유 가득 부어서 내주는 곳도 있다. 커피와 함께 먹는 달달이는 꽤 땡기는 편이지만 커피 자체가 달달한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입장에서 아주 곤욕스런 상황이 벌어진다.

그런데 이 집에서는 내가 원하던 바로 그 까페농,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바로 그 원천의 커피가 나왔다. 게다가 이 집은 뜨거운 커피를 시키니 차도 뜨거운 걸 준다. 오호~! 이런 땡큐가. 한국에서는 스페셜티 커피가 주로 아라비카 종의 남미나 아프리카쪽 원두를 먹다보니 로부스타가 약간 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거나 입맛에 잘 안 맞는다고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현지에서 마시는 까페농 한 잔이 풍기는 맛은 어떤 고급커피를 마시는 것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묵직하면서 입 안에 꽉 들어차는 듯한 압도적인 위력과, 입 안에서보다는 오히려 목을 넘어가면서 그 본연의 묘한 향을 제대로 뿜어내는 독특한 풍미는 이 커피의 자랑이다. 뭐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다. 하지만 베트남에 올 때는 바로 이 커피를 마시기 위해 오는 목적이 거의 3분의 1은 될 터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길거리를 다니면서 보았던 것처럼 커피도 브랜드 달고 있는 프렌차이즈 커피숍들이 대세를 이뤄가고 있고, 전통적니 까페농이나 까페다 같은 커피보다는 아메리카노나 흔하게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커피제품들이 많이 팔린단다. 게다가 이 지역이 워낙 덥다보니 버블티 같은 냉음료시장이 워낙 크고 이게 또 젊은 사람들 취향에도 맞다보니 과거처럼 전통적인 커피를 찾는 사람들이 많이 줄고 있다고 한다. 

이토록 씁쓸한 커피의 맛을 어쩌면 갈수록 더 보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베트남을 찾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커피만큼은 이렇게 언제나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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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5 22:09 2019/10/25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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