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발의 추억
2004년에, 탄돌이들이 대거 여의도에 입성을 하고, 반대로 강고하던 한나라당 세력이 위축되어 있을 무렵, 일군의 세력들이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에 몰빵할 것을 주장하며 끝장투쟁을 벌이자고 나섰다. 원래 저 '끝장'은 우리가 국가보안법 철폐투쟁하려고 만든 조직의 이름이었는데 암튼 이렇게 어영부영 저쪽으로 넘어가고.
당시 민주노동당은 당직자들에게 수시로 필참 때려가며 몰빵투쟁에 나섰고, 남한 최대의 통일운동단체인 민주노총도 조합원을 여의도로 끌어모으느라 바빴다. 하다못해 이주노동자들 집회를 여의도로 유치한 다음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이 단상에 올라가 이주노동자 인권이나 노동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국가보안법 철폐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는 일도 벌어지고. 하필 그날 허벌나게 추워서 대부분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노동자들 거의 동태가 될 지경이었는데...
암튼 이 와중에 무슨 집단 삭발식이 거행되었다. 난 도대체 이 난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행렬 맨 뒤에 앉아 있었다. 날도 서늘했던 것 같고, 암튼 시간은 지나는데 무대차 위로 올라간 사람들이 계속 머리를 밀고 있었다. 원래 예정되었던 사람들 숫자를 다 채웠는데, 그 자리에서 자발적으로 삭발을 하겠다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줄지어 섰다. 솔직히 말해 이 대목에서 약간 찡했다. 냉소적이었던 관점이 살짝 바뀔 뻔 했고, 순간 자세를 바로 취하여야겠다는 생각도 들 정도였으니.
그런데 그 순간, 사회를 보고 있던, 호가 "위원장"이며 자가 "의장"인 어떤 중년의 활동가가 몹시도 감동한 나머지 자신도 머리를 깎겠다고 나섰다. 이게 정상적이라면 감동 두 배의 사건이 되었어야 하는데, 그만 코미디가 되어버렸다. 그는 기실 이마의 면적이 두피의 면적보다 갑절 이상 넓은 상태였으며, 평상시에 거의 삭발에 가까운 헤어스타일을 유지하는 사람이었고, 당일날에도 그닥 깎을만한 모발이 거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순간, 나와 거의 같은 감동을 막 느낄 뻔 했던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피식거리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고, 경건해야 할 삭발식은 그냥 코미디로 막을 내렸다. 그래서 그랬는지 몰라도, 결국 국가보안법은 살아남았고 아직도 건재하다.
황교안이 삭발을 하는 꼴을 보니 갑자기 그날 생각이 난다. 뭐 그건 그렇고, 황교안의 두상은 매우 잘 생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학창시절에 교수들로부터 신언서판이 훌륭한 학생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던데 두상도 잘 생겼구나. 허, 참 저런 훌륭한 두상을 가진 사람이 왜 두상 값을 못하고 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