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심사라...

남의 글을 평가한다는 건 고역이다. 나도 글로써 제대로 뭔가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는 일이 많은데 감히 남의 글을 심사하다니. 그런데 이게 또 때에 따라 안 하면 안 되는 그런 일이라서 어쩔 수 없이 하곤 하는데.

스스로 세운 몇 가지 기준이 있긴 한데, 우선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

문장의 구성에 대해서는 최대한 건드리지 않는다. 만연체로 쓰건 단문으로 쓰건, 옛날 말투를 내건 조금은 아방가르드한 문체를 구사하건, 여성적(?)이건 남성적(?)이건, 뭐 기타 등등 필자의 문체에 대해서는 웬만하면 거의 함구한다.

나는 문체라는 건 지문이나 홍체처럼 개인의 고유한 식별체계라고 생각할 정도인지라, 그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 어떤 문체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어떤 기준을 들이밀면서 거기에 맞추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문체 자체가 완전 개판이거나 말도 안 되는 비문으로 점철되거나 학술적 논문에 욕설을 남발하거나 가벼운 칼럼에 각주를 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중후장대한 경우 등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문체는 건드리지 않는다.

다음으로,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저자의 가치관이나 견해와 다른 주장을 강제하지 않는다. 저자가 가지고 있는 일단의 논리체계가 나의 그것과 다르다고 해서 심사를 빙자하여 내 주장을 관철한다면 그건 심사가 아니라 폭력이다. 만일 내가 저자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를 반박하는 글을 쓰면 될 일이고, 심사의 과정에서는 심사자의 가치관을 피심사자에게 관철시키고자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모르는 분야는 심사하지 않는다. 내가 알지만 잘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공부하면서 판단한다. 심사를 한다는 건 실은 심사대상이 된 주제에 관해 공부를 할 수 있는 아주 귀한 기회다. 평소에 그런 기회 만들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간혹 심사자라는 위치에 심취한 나머지 지도 잘 모르면서 쓸데없이 아는척 하는 자들이 왕왕 보인다. 대부분의 경우 그러다가 무식이 뽀록나기도 하는데 정작 당사자는 지가 무식한 짓을 했다는 걸 잘 모르고, 당하는 피심사자는 이런 삐리한테 심사를 받아야 하는가라는 자괴감으로 마빡의 털을 쥐어 뜯게 된다.

그러므로 심사를 하게 되었을 때는 오히려 겸허한 마음으로 공부의 기회를 잡았음을 기뻐하며 심사에 임해야 한다. 대상 논문이 참조한 문헌을 찾아보고, 대상 논문에서 인용된 부분에 대하여 검토도 하고, 이를 넘어서 혹시 다른 뭔가가 더 있는지도 찾고, 하다못해 대상 논문이 어디 걸 베끼지 않았나 하는 의심까지 해가며 공부를 해야 한 마디라도 대상자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해줄 수 있다. 결국 심사평이라는 건 심사대상이 된 논문의 저자가 나중에라도 써먹을 수 있는 뭔가를 제공하는 역할까지 하여야 한다.

논리적인지 여부는 철저하게 뜯어본다. 모름지기 글은 앞뒤가 맞아야 한다. 특히 논문은 더하다. 서론에서 한 말과 결론에서 한 말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거나, 논리의 일관성이 없다거나, 중간에 쓸데 없는 내용을 집어 넣는다거나 하는 건 용납하지 않는다. 나도 이놈의 글이 늘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글 길다고 해서 좋은 글이 아니고 짧다고 해서 시덥잖은 글이 아니다. 다만, 체계가 있고 선후가 있어야 한다는 거다, 글이라는 건.

이 외에도 하지 말아야 할 기준이라는 게 몇 가지 있는데, 어쨌든 이런 저런 기준을 동원하더라도 그동안 나는 내게 맡겨진 논문에 대해서는 아주 후한 점수를 줘왔다. 지금까지 논문 게재 불가 판정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을 뿐만 아니라, 수정후 게재 판정조차 거의 없었다. 에... 이건 실은 내가 우유부단하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만...

연휴기간에 논문 하나를 심사하게 되었는데, 아... 이건 그동안 내가 세운 기준들을 적용할 수준의 것이 아니다... 이런 수준의 글을 '논문'이라고 작성해서 학회지에 투고한 사람이 누군지 정말 궁금하다. 내 원칙 중 하나가 심사대상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관심을 1도 두지 말자는 건데, 이번 건에 한해서는 정말 궁금하다. 그 간이 얼마나 부었길래 이런 간뎅이 큰 짓을 하는지. ㅎㅎ

아무튼 그 용기는 가상하나 점수는 못 주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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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4 16:56 2019/02/04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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