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 박스 속에 넣지 말아야 할 것과 넣어야 할 것
홍준표 가라사대,
"군 수송기로 북에 보냈다는 귤상자 속에 귤만 들어 있다고 믿는 국민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1. 고양이는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상자(box)만 보면 제 몸을 육면체로 만들고자하는 노력을 보인다. 연체동물에 가까운 체질을 가진 고양이가 모포 각 잡듯이 제 몸을 상자에 맞추는 걸 인간이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 모습은 희안하다. 하지만 치명적인 것은 그 모습이 지나치게 귀여워 보인다는 것.
2. 홍준표는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상자만 보면 그 상자가 겉에 표시된 물품과는 다른 무엇이 들어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나보다. 거의 파블로프의 개와 유사한 수준의 자동반사가 이루어진다. 자신이 속해있는 집단이 대대손손 자행했던 일이기에 남들도 그러려니 하는 듯하다. 고양이와는 달리 홍준표의 이러한 모습은 매우 역겹다.
3. 그 상자 속에 귤 말고 다른 것이 들어 있다면 아마도 그건 평화에 대한 염원일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귤 200톤을 보낸다고 하여 귤 향기 방방곡곡에 번지며 총칼이 저절로 녹아 보습이 될 일은 만무하다. 그러나 언제나 시작은 미흡하더라도 그 끝이 창대할 것을 기대하는 법이다.
4. 홍준표의 얼척없는 말과는 달리, 시민들은 그 귤상자 속에 귤만 들어 있다고 믿기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한 번 던진 돌이 파문을 일으켜 결국 물가의 반대방향까지 물결을 보내듯, 이 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을 열어 갈 작은 걸음이 되길 기대하기 때문에 그러한 관심을 보인다.
5. 정작 아쉬운 건, 휴전선을 넘어가는 귤내음이 한국의 노동자들에게는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복심은 노동조직이 약자가 아니라고 능청을 떨고, 대통령을 만들어낸 여당의 수장은 노동조합을 조폭으로 둔갑시키고, 급기야 대통령이 노동자와 노동단체는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는 입장이라는 말이 떠돈다. 이 정부는 이재용을 옆에 끼고 평양을 갈 수는 있어도, 노동자에게 또는 노동단체에게 귤 한 조각도 던져줄 생각은 없는듯싶다.
6. 북한에 귤 주는 것에 대해서는 문재인과 홍준표가 입장을 달리하지만, 한국의 노동계급에게 귤 한 조각도 줄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문재인과 홍준표가 그다지 입장을 달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정권이 그랬듯이 노무현 정권을 승계한 이 정권 또한 노동자들을 곤경에 빠트릴 악법들을 고르고 고른다. 그 와중에 북한에 보내는 귤은 노동자들이 처할 고난을 가려버린다. 여기에 홍준표가 가세해 그나마 관심을 그 역겨운 입으로 쏠리게 만듦으로써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더 들리지 않게 된다.
7. 더불어민주당 세력이나 자유한국당 세력이 외피만 다른 한 통속임은 이렇게 드러난다. 더불어, 여전히 한국의 진보는 휴전선 앞에서 멈춰 서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