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거부와 공화국
'명예혁명'이라고도 불리는 영국의 오랜 암투가 있었다. 왕권에 도전한 귀족들이 나름의 기준을 세워 왕과 교섭하면서 마침내 근대 법체계의 기본적 원칙 몇 가지를 세우게 되는 과정을 "명예혁명"이라고 한다. 유혈낭자한 칼부림 없이 정치적 공방과 타협을 거쳐 이루어진 기념비적 결과물이기에 "명예혁명"이라고 한다지만, 그건 다 개구라고, 그 기간이 혁명이라고 하기엔 너무 길었고, 명예를 따지기엔 칼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무튼 이 과정 끝에 만들어지게 된 원칙 중 하나가 '조세법정주의'였다. 세금의 부과 및 징수는 법에 의하여야 한다는 원칙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왕이 쏠리는 대로 삥 뜯어가지 말라는 거였다. 이 조세법정주의 원칙은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다듬어졌고, 여기에는 "조세평등의 원칙"이 포함되었다. 조세평등원칙이란 납세의무는 평등하게 배분되어야 하고, 납세의무자의 부담능력에 따라 공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 조세평등원칙은 조세실질주의원칙 또는 실질과세의 원칙을 포함하게 되는데, 이건 세금을 진짜 내야 할 사람이 세금을 내도록 한다는 원칙이다.
원칙에 원칙에 원칙을 운운하면 골이 빠개질 우려가 있으나, 사실 이 원칙은 아주 간단한 기준에 의해 정해지게 된다. "잃을 것이 많은 자가 더 많이 부담한다"는 것이 그 기준이다. 즉, 어떤 공동체 안에서, 그 공동체의 구성과 유지를 통해 많은 이익을 얻는 자가 그 공동체의 유지발전을 위하여 더 많은 부담을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어차피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공동체가 붕괴된다고 한들 새삼 세상이 달라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어찌 해도 벗어날 길 없는 수렁에 빠진 입장이라면, 차라리 세상이 뒤집어지는 편을 갈망하기가 더 쉽다.
이러한 원칙은 병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민개병제는 전 국민을 폭력의 기제 안으로 몰아넣는다는 부정적인 비판이 가능한 제도이다. 그런데 사회의 안전과 안녕의 유지는 어느 한 개인의 의무와 책임으로 전가시킬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성원들에게 고루 부과되는 의무와 책임이다. 그렇다면 병역 역시도 조세와 마찬가지로, 잃을 것이 많은 자가 더 많이 부담한다”는 원칙이 적용된다. 내우외환으로 인해 그 사회가 무너지면, 가장 크게 곤란할 자들이 그 사회의 안전에 더 많은 공력을 쏟아 부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
이렇게 따지면, 소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건 이 의무의 이행을 미화하는 말에 불과하다. 사회지도층의 도덕성과 모범을 요청하는 말이지만, 이건 도덕성이고 모범이고 따질 일이 아닌 것이다. 애초부터 그 사회에서 지도층씩이나 할 요량이라면 그만큼 더 책임을 져야 하는 거다. 이걸 무슨 노블레스 오블리주니 뭐니 하는 말로 치장하는 것 자체가 궤변이고, 그 알량한 책임마저 지기 싫으면 사회 지도층 따윈 바라서도 안 되는 거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이 사회구조덕분에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 올라갔으면 세금 많이 내고 병역 더 빡시게 오래 해야 한다. 문제는 이 사회가 이런 원칙은 4대강 녹차라떼와 함께 흘려버리고, 있는 자들이 더 악착같이 세금 덜 내려 하고 국방의무는 피해가려 하는 데서 발생한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이념이 있는데, 다름 아닌 공화주의다. 이게 우파들의 입장에서는 북조선의 ‘공화국’을 연상케 해서 빨갱이들의 이데올로기로 비하되었고, 좌파들의 입장에선 쿠데타로 집권해 철권통치를 자행했던 박정희의 ‘공화당’을 생각나게 해서 전체주의와 겹친다는 연상을 하게 만들어온 통에 지금까지 좌우 어느 쪽으로부터도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 개념이 되었다. 재밌게도 한국의 헌법은 제헌때는 물론이려니와 왜정시대 임시정부때부터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해서 공화주의 이념을 헌법의 지도이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헌법의 이념으로 명시되어 있음에도 그동안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던 공화주의를 위로하며...
공화국은 공화국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존재하며, 그 권리의 보장은 공화국 시민의 의무 이행을 통해 가능해진다. 공화국의 시민은 공화국의 유지발전을 위한 의무를 진다. 그리하여 공화국의 시민에게 부과되는 두 가지 의무가 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조세와 병역의 의무다. 공화국을 유지하고 운영하기 위한 재정의 부담과, 공화국의 안전과 안녕을 보장하기 위한 위력의 제공. 이 두 가지 의무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그 공화국의 유지와 번영을 통해 가장 많은 이익을 보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부과된다. 그리하여 그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조차 이 사회가 유지됨으로써 최악의 상황을 면할 수 있다는 안도감을 갖게 하고, 이로서 사회의 유지와 번영이 전체 구성원의 동의와 열의로 진척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된다.
이처럼 가장 간단한 공화주의의 원리가 저변에서부터 무너지면서 갈등과 투쟁이 분출한다.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희생과 노고에 의해 겨우 그 사회가 유지되고, 이들을 착취하면서 사회적 이익을 골수까지 빨아먹으면서도 책임과 의무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 사회의 상층을 이루고 있다면, 그 사회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다. 이러한 사회에서 신뢰는 붕괴된다. 공정함은 개소리가 되고, 평등이라는 말은 환상에 불과하다. 가진 놈은 더 가지고 없는 놈은 그나마도 털린다. 최전방엔 없는 자들의 자식들이 총알받이로 서게 되고, 있는 자들의 자식들은 일단 유사시 언제든 활주로를 벗어나 안전한 곳을 향해 날아갈 수 있다. 주머니가 빈 자들은 악착같이 뜯기지만 곳간이 넘쳐나는 자들은 탈세가 합법인 공간을 찾아 오대양을 넘나든다.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양심적 병역거부’는 이제 이 사회에서 죄가 되지 않음을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 판결의 여파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인데, 그 이유는 바로 이 공화주의의 이념이 앞으로도 제대로 발현할 가능성이 요원하기 때문이다. 얻은 것이 큰 자들이 기꺼이 책임을 감수하는 공화주의적 풍토가 자리잡지 않는 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양심적 병역거부’든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든, 이러한 행위는 사회의 소수가 던지는 그 사회의 건강함에 대한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을 수용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찾아가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이다. 반면 이러한 질문을 범죄로 치부하고 단죄하기에 바쁜 사회는 관용과 유대가 결여된 병약한 사회다.
구성원들이 사회의 유지를 위한 책임을 기꺼이 감내하는 사회에서는 오히려 양심적 병역거부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군대 갔다 온 것에 언제나 본전생각이 나게 만드는 사회, 병역비리가 일종의 관행처럼 만연한 사회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불만은 더 높아진다. 불만의 칼날은 돈 있고 권세 있어 병역을 기피한 자들에게 향하기 보다는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소수자를 향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그게 더 쉽고 덜 위험하기 때문이다. 더 없는 자들, 더 적은 자들을 향한 칼부림은 이렇게 유발되고 심각해진다. 그 와중에 그 사회로부터 언제든 발 뺄 준비를 해놓은 자들은 더 많이 챙기고 더 안전한 곳에서 살아간다. 공화주의? 그런 건 헌법에나 적어놓으면 되는 것일 뿐, 이들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그렇게 공화주의의 이념이 멸실되어야만, 자신들을 향해야 할 칼날이 없는 자들끼리 서로 부딪치고 썰고 쑤시는데 동원될 터이니.
결론은 간단하다. 사회 구성원들이 본전생각 안 할 수 있는 사회가 공화국이다. 서로가 감내해야 할 책임을 기꺼이 지면서, 사회의 소수가 다수에게 던지는 질문을 겸허히 받아 안고 함께 답을 찾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그런 의미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게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가 이 사회의 건강성을 확인하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고, 이 사회가 ‘민주공화국’으로서 일정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계기가 될 터이다. 명운을 지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