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후'가 필요한 사람들은 누구?
2008년 촛불정국의 파고가 몰아치던 당시, 정권에서 나온 한 마디가 사람들을 웃겼다.
"촛불의 배후를 밝혀라!"
집단적인 움직임을 경험할 때, 흔히들 묻는 질문 중 하나는 "누가 이거 시작한 거야?"이다. 또는 어디서 기획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종종 제기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개인의 발화가 집단적 화두로 변화되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몰이해는 관성에서 비롯된다. 자신들이 해보지 못한 경험, 즉 자신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재현되어보지 못한 경험. 혹은 정 반대의 경험에서도 비롯된다. 집단과 조직의 논리를 자신의 논리로 이해해왔던 경험, 즉 정련된 기획과 조직화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았던 경험. 이러한 경험들의 축적은 집단적 행위로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판단을 관성적으로 이끌어낸다.
이명박 정부가 촛불을 보면서 "배후"를 추궁했던 것은 이런 관성의 현존을 증명한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중고등학생들이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어떤 조직들은 마치 자신들이 이 광장의 물결을 조직하거나 지휘하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바로 그러한 태도로 인해 주변으로 밀려났다.
집단적 결과를 기획하지 않은 개인의 행위가 종국에 집단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이미 낯선 일이 아니다. 그 발화의 가치와 감수성이 공감과 동질화를 만들어내면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다. 사실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 대한 설명은 벌써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해왔다. 예컨대 울리히 벡은 '성찰적 근대화'라는 개념을 통해 이처럼 개인의 활동이 공동체를 운동하게 하는 현상이 실제로 '근대'라는 시공간을 특징짓는 현상임을 설명한 바 있다.
따라서 어떤 현상이 조직적 및 집단적으로 나타날 때,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물결 안에 동참한 사람들이 어떤 가치에 공감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이를 살피지 않고 특정한 개인이나 조직이 현상을 기획하고 지도하는 것이 아닌지를 의심하는 것은 사안의 본질은 물론이려니와 그 현상이 만들어낼 미래를 오판하게 만든다.
어떤 대학생이 자신의 학내에 붙인 대자보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반향 정도가 아니라 조직화 내지 집단화된 모습으로 파급되고 있다. 대자보를 붙인지 며칠 되지 않아 이제는 고등학교에까지 대자보가 나붙고 있다. 대자보뿐만이 아니다. 글을 써서 붙이는데 그치지 않고 일군의 무리를 이루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현상에 대한 분석은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질 것이지만, 왜 한 사람의 말이 여러 사람의 반응을 연쇄적으로 일으키고 있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동참한 사람들이 느낄 수밖에 없었던 공감이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 왜 그 짧은 글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를 보아야 한다. 적어도 이 경우, 죠지 레이코프가 이야기했던 '심층적 프레임'이라는 것이 그들 가운데에서 작동되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도 유의미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관성에 의해 '배후'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트위터를 비롯한 온라인 공간에서는 벌써 그 배후와 진실성에 대한 의문과 비난이 횡행하고 있다. '순수한 학생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노동당"이라는 조직의 일원이 이념적 배경을 전제하고 기획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온라인의 잡설 속에서만 이렇게 배후에 대한 논의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조선일보라는 찌라시는 은근슬쩍 노동당이라는 어떤 정치조직이 이 사건의 배후인 것같은 뉘앙스를 풍겨대며 사태를 왜곡하고 있다.(이에 관해서는 미디어 오늘이 상당히 꼼꼼하게 정리한 기사를 참조하면 좋겠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조선일보가 보이는 복잡미묘한 태도다. 조선일보가 포털사이트 검색어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보다도 조선일보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도 조선일보는 '노동당 당원(기사에는 진보신당 당원으로 되어 있지만)'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감성적 차원의 선동을 하고 있다는 취지로 기사를 썼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은 조선일보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정치관련 여론조사에 항목으로조차 올라가지 못하고 있는 노동당이 조직적으로 이런 기획은 했다고 한들, 그것이 이런 반향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배후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아무리 봐도 배후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데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조선일보의 종특이라고 할만한 종북스킬을 시전하고 싶지만, '노동당'이라는 정당이 종북하고는 아예 대립적 관계인데, 이걸 종북 프레임으로 꿸 수도 없고. 더구나 여론 자체가 조선일보의 "안녕"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배후'로 엮어서 '종북'으로 싸잡아 팰 수 없는 상황의 발생. 배후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어떻게든 종북과 엮여야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던 자들의 당황스러움.
아마도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그 대자보가 가지고 있는 가치는 이렇게 냉전적 사고방식과 화술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자들을 적지않게 당황하도록 만든 것에 있지 않을까? 물론 그 당황스러움을 저들은 만회하겠지만, 저들의 가치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황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이번 대자보 투쟁이 보여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