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조정치와 상조경제
작년 초에 올린 글에서 2012년 양대 선거판이 상조회 정치가 될 것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죽은 자의 유훈이 미래를 결정해버리는 판이 비단 북한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여전히 정치판은 상조회 정치가 판을 치고 있다.
상황을 좀 보자면, 적어도 남한 사회에서 '본사상조회'는 이제 거덜이 난 상태라고 하겠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과 통진당 위헌정당 해산 청구는 더 이상 남한에서 본사상조회가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이 남한 NL의 고사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노통상조회는 자기연속성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속절없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상조정치가 가진 한계에 의한 것이지만, 박통상조가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과 비교할 때 속이 쓰릴 수도 있을 것이다. 작금 그들의 양상을 보면 앞으로도 노통상조 자체의 힘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반면 박통상조는 몰지각하면서도 노골적인 상조정치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박통상조의 문제점이 계속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그 지지기반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 물론 이것은 전직 박통의 뒤를 이은 현직 박통의 아우라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고, 당연하게도 현직 박통의 거취에 따라 노통상조와 마찬가지의 수위로 전락하겠지만, 아직은 박통상조가 파죽지세로 진격하고 있는 양상이다.
상조정치가 가지고 있는 폐해를 굳이 열거하진 않겠지만, 최근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상조정치가 또다른 형태의 상조체계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박통상조회의 상조정치가 가능하기 위해선 다른 형태의 죽음들이 필요하다는 거다. 노동자들의 죽음과 밀양의 죽음 등...
철도노조가 파업에 들어가자마자 사측(정부)은 기다렸다는 듯이 초대규모의 직위해제와 고소고발을 진행하고 있다. "회초리를 든 어머니의 심정"으로 8천 명에 육박하는 노동자들의 직위해제를 단행하는 철도 사장의 얼굴은 마치 장성택을 끌어내는 자리에서 보여줬던 김정은의 표정처럼 근엄하고 단호하다.
박근혜 정권이 이야기했던 '창조경제'는 이렇게 '상조경제'로 이어진다. 노동자 민중의 목숨이 사라지고 그들의 피눈물이 땅을 적시게 될 때 박근혜 정권의 상조정치는 빛을 발하며, 전직 박통이 못다했다고 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 완수된다.
다만, 상조정치는 어떤 죽음을 신화화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상조경제는 어떤 죽음들을 사회악의 제거로 만들어버리는 것에 차이가 있다. 죽음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그러나 상조정치와 상조경제는 반드시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는 숙명적 관계이다. 상조경제는 저 상조정치가 성공하기 위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상조정치와 상조경제의 이러한 관계를 고려할 때, 박근혜 정권의 남은 4년은 결코 노동자 민중의 삶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 없다. 정통성을 상실한 정권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그 기술, 노동자 민중의 죽음을 밟고 정권의 안위를 도모하는 전래의 방식이 계속될 것이다.
며칠 사이 어떤 대자보의 한 구절이 유행이다. "안녕들 하신가?"
안녕할 수 없는 사회, 안녕이 예측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대응의 방식이 판단되어야 할 시기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이 있지만, 이 사회는 단순히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절간이 아니다. 결국 마땅하게 남는 대안은 절을 뒤집어 엎는 것 밖에. 언제까지 죽음이 있어야 존재가 가능한 상조정치와 상조경제에 발목을 잡혀 살아야 하는가?
어차피 우리는 살기 위해 이렇게 살아간다. 우리가 좀비가 될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