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플러 심을 보며

스테이플러-흔히 '호치키스'라고 하는 것을 사용해보지 않은 사람이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워낙 흔히 보고 쓰던 거라 마치 공기처럼 그 존재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 스테이플러가 가끔 새삼스러워보일 때가 있다.

 

스테이플러 심의 박스를 열면 스테이플러 심들이 자기들끼리 나란히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심이 나란히 붙어 있는 한 줄을 뽑아 스테이플러에 넣고 나면 이 심들은 그동안 정들어 붙어 있던 동료들과 다른 길을 걸어야 한다. 운이 좋아 한 문서에 짝을 지어 찍힐 수도 있지만, 요즘 성능 좋은 스테이플러들은 단 한 개의 심만으로 웬만한 문서들을 한 뭉텅이로 만들어낼 수 있다.

 

애초엔 한 몸이었으나 낱개로 분리된 스테이플러 심들은, 이제는 애초엔 낱장이었으나 여러 장의 문서들을 한 몸으로 묶어준다. 문서들의 내용이 무엇이던, 각각의 종이들은 이제 홀몸이 아니라 다른 종이들과 합쳐져 새로운 글이 되고 말의 씨앗이 된다.

 

문서를 정리하다 말고 스테이플러의 심에 눈길이 가는 이유가 여기 있다. 지금 당에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바닥인 줄 알았는데 급기야 땅을 파고 있는 이 현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말이 쉽지 현실은 개차반이다. 다양한 원인이 제시되고 그만큼 다양한 대안이 논의되지만, 어찌된 일인지 계속 겉돌고 뾰족한 뭔가가 나오질 않는다.

 

무수한 이야기 중에서도 특히 하나 꼽자면, 일종의 리더십이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짚고 싶다. 당 내에 여러 의견그룹이 있고 그들마다 다채로운 개성을 자랑하고 있다. 각 그룹만을 보자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스테이플러 박스 안에 일사불란하게 자리하고 있는 심처럼 보인다. 꼭 그렇지도 않을 수 있지만 외부에서 보기에는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정작 스테이플러 심의 역할은 낱장의 문서들을 흐트러지지 않게 하나로 찍어내는 일이다. 스테이플러 심이 박스 안에 그대로 있는 한 그것은 그냥 일종의 쇠붙이일 뿐이다. 한낱 쇠붙이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원래 부여되었던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선 박스를 떠나야 하고 붙어있던 똑같이 생긴 동류와 떨어져 나와야 한다. 약한 접착력에 의존하여 그 상태로 계속 머물기를 고집하는 한 최종적으로는 녹이 슬고 말 뿐이다.

 

리더십이 드러나지 않는 정당은 대중에게 판단의 근거를 주지 못한다. 정책이 아무리 훌륭하고 구성원들이 누구보다 뛰어나도 그것을 하나로 묶어주고 외부로 드러내 줄 수 있는 리더십이 없이는 별무소용이다. 어느 무엇보다도 당은 지금 확연한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

 

그 리더십의 성격은 스테이플러 심 같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다 망한 당을 끝내 부여잡고 앉아 상황을 헤쳐나가고자 노력하는 당원들이 대단하다고 평가하지만, 이들을 하나로 묶어낼 리더십이 절실하다. 영웅이 되고자 하는 자는 경계해야 하겠지만, 각각이 스테이플러 심 박스 안에 자리잡고만 있어서야 그것도 곤란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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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9 12:35 2013/12/09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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