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

잡기장
해야할 일을 몰아서 끝낸 후에는 여유가 아닌 공허함과 알 수 없는 불안이 찾아오곤 했더란다.
근데 지금 나에겐, 5%의 공허감과 17%의 불안, 36%의 여유가 있다. 나머지는 뭔지 모르겠다

확실히 무엇에 쫓기고 있는지 아는 것만으로 벌써 관계는 변화되고 역전의 가능성이 보인다.
이러다 큰 실수 저질러 또다시 "죄의식에 사로잡힌" 상태가 될 우려가 역시 있겠지만
그래도 이젠 무기력하게 계속 휘둘리며 무엇때문에 괴로운지 모른채 있지만은 않을 거다. 아마? ㅋ

역시 여유라는게 억지로 크게 심호흡하고, 일을 회피하고, 삶을 최적화시킨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닌 듯하다. 내면의 떨림이 어느 정도 가라 앉자, 감추고 지우고 외면하지 않고 그냥 두기로, 바라보기로 마음 먹자 밖으로 향하는 시선과 마음가짐이 안정되어 감을 느낀다.

이럴때 마침 내가 관계맺은 것을 소개하고, 알리는 글을 두어개 써보는 기회가 있어 그걸 더 확인하고, 바뀌어 가는 패턴이랄까 그런 걸 잡을 수 있어 좋다. 물론 글쓰는 작업은 피곤한 것이다. 내 얘기를 부담없이,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상황과 대상에, 즉각적인 반응에 영향 받을 수 없이 할 수 있는 이런 블로그외에 다른 곳에 쓰는 글은 죄다 피곤하다 ;)

요즘의 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위태위태하면서도 즐거운 무엇이다. 변화가 한번에 와라락 모든 부문에서 이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고, 더구나 약한 인간의 마음이래야. 왔다갔다 하고 떠올랐다 가라앉고 때론 다시 샛길로 빠지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불안한 것이지만, 더디나마 하나씩 내 자신을 발견하고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안타깝고 씁쓸한, 쓸쓸한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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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전체적인 변화의 양상을 잡아 그것에 맞춰가려는 식으로 활동이던 뭐든 해왔다. 진정한 변화는 현실에서 가능한 것을 조그만 것부터 하나씩 꾸준히 해나갈때 이뤄진다, 길게 보고 그런 방향에 맞게 차근차근 해나가야 한다고. 그런 생각에는 변화가 없으나 내가 지나쳤던 것이 있었는데, 그건 전체적인 방향이라는 것은 사실은 여러 사람의 수많은 시도, 성공과 실패,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에너지들이 긴 호흡속에서 모아지고, 정리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이순간 내가 하려는 것, 해야할 것들을 너무 그 방향에 맞추기 위해 골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패한다고 해서 그것이 전혀 쓸모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 어떤 방향이 옳으냐,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뒤에는 어떤 결과가 있을까, 어떻게 대처할까 등을 미리 생각할 수 있다면 좋긴 하지만 그런 것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 지금 이순간을 놓쳐버리는 것에 비하면 모두 작은 문제다.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 잘했다고 소문나느냐, 스스로 뿌듯해 할 수 있는가 하는 건 역시 죄의식이 다그친 탓이 커 지금껏 중요시 했던 것이고, 사실 정말 내가 뭔가 하길 원한다면, 실제로 그게 되게끔 하는 것 외에 다른 건 모두 작은 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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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나는 내면에 갖혀 있고, 외부는 껍데기라고 생각해왔다, 고 믿었다. 허나 문득 떠오르는 것은, 사실은 그동안 내면을 지향한것이 아니라 오히려 밖을 계속 떠다니고 있었다는 생각이다. 두려운 것들, 바깥 세상에서 마주치는 것들로 부터 도망치고, 마치 뭔가 있어보이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보통 그런 경우에 쓰는 분위기와 어휘등을 갖고 말을 해왔지만 실제로는 안과 밖어디에도 확실한 방향성은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지금처럼 되었을때, 안에 있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쫓기지 않고, 편하고 담담하게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을때, 나는 껍데기를 치장하는 것, 예민하게 구는 것을 줄이고 내 속에 떠다니던, 흩어져 있던 생각들과 다시금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금껏 내 주위엔 항상 더 많은 기회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좀 더 둘러보면 보일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주위에 있고, 스쳐가고 만나게 될 거라는 걸 알게 됐다. 물론 대부분은 그저 "가능성"일 뿐이고, 현실로 만들 수 있는 한계, 역량과 패턴화됨에 의한 것은 분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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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수많은 만남이 있고, 할 수 있고 내가 했음직한, 해주길 바래지는 일들이 계속 다가온다. 그런 우연에 몸을 맡기고 수동적으로 살기만 해도 내 달력과 todo 리스트는 가득찬다. 내가 완전히 무기력하다고 생각했던 때에는 그냥 그런걸 열심히 하는 것 외에 다른 걸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살다보니 뭔가 이게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냐 하며 다른 걸 찾아다니기 시작하는데 기본적인 관점의 변화가 없이는 그저 하던일의 강도를 더 높이는 결과로 되기 마련이다. 가만히 있어도 바쁜 사람은 돌아다녀보면 더 바빠진다. 어느 회의에 가서 편하게 막 아이디어를 냈는데 끝나고 돌아올때는 내가 해야할 일이 하나 늘어나는 결과라는 걸 발견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과감하게, 아니 사실은 무심무례하게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어 여유를 확보하려고 하지만 달라지진 않는다. 오히려 죄책감과 자괴감이 쌓여 다른 일까지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그럼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찾음으로써 그걸 외면 혹은 만회하려 한다. 하지만 역시 비슷한 패턴이 반복하다 어느날 비가 오거나, 무슨 사건이 있어 머리속의 안개가 일순간 걷혀 주위를 돌아보면, 사실 나는 그동안 쳇바퀴 안을 계속 달음질쳤을 뿐이라는 걸 발견한다. 여전히 나는 내게 다가오는 우연, 과거에 연결된 끈들에 내맡겨지고, 얽매여 있을 뿐이다. "진정으로 새로운" 무언가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우연이라는 게 쉽게 생각할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계속 내게 다가오는 것을 대응하는 방식으로 살고, 이미 연결된 틀 안에서 뭔가 만들어보려는 시도만 하는 건 내가 정말 원하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하려고만 해도 사실 할 건 많고, 또 그것들 중 대부분은 충분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내가 해 온 "도구적인 정보통신기술활용활동"도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의미가 없냐면 그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작업이 심하게 부족한 편이지. 사람도 없고. 다만 계속 그 안에 머무르는 것을 싫어하는 거고, 또 대접 못받고 일만하고 대화에 소외되는 느낌을 받고 싶지 않으니 뭔가 계속 독립적으로 그럴듯한 걸 해보려는 마음이 있는 거고.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활동하며 알게 된 사람들하고도 자주 만나 얘기해 보면 같이 해볼 것들, 아직 꺼내지지 않은 아이디어, 내디뎌지지 않은 걸음들은 분명 많을 것이다. 이런 것들로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그것도 충분한 하나의 길일 것이다.

그런 걸 거부하는게 역시 죄의식이 몰아간 "도망치는" 삶의 자세의 영향도 있을지 모르지만 온전히 그것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온당한게 아닐테고, 역시 나란 사람은 뭔가 틀에서 죄여오는 것을 정말 못 견뎌하는게 천성이던 익혀진 것이든 지금의 모습이라고 보는게 긍정적인 해석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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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속해 있던 단체를 그만 둘 즈음이 되자, 곧 있을 "해방"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함께 있고, 이제 내가 안에서 책임지지 않으니 지금껏 관리하던 시스템을 더욱 보완하고, 자동화하고, 다른 사람도 알고 운영할 수 있도록 매뉴얼화해야하는 등 당장의 할일이 계속 생겨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더 이상 나를 옭죄지 않는다는, 점점 자유로워진다는 생각에 주위가 다시 보이고, 새삼 애정과, 부질없는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들이 또 생기기도 한다. 이제 생각해보니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았던 것들은 사실 별게 아니었거나 핑계에 불과한 면도 있었고,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시스템이라 생각했던 건 내게 도전의 과제였었고(그걸 바꿔 나가는, 새롭게 만들어가는), 여전히, 앞으로 그래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마음을 돌려, 계속 좀 더 해볼까 하면 지금 느끼고 있는 "가벼워지는" 마음과 고여가는 따뜻한 마음들이 다시 사라져버릴 수 있는 것임을 안다. 하려던 대로 계속 해야지. 이제 내가 만들어가야지. 사람들 다시 만나러 다니고, 내가 먼저 연락하고(일 생길까 두려워 피했지만 ㅎㅎ) 핑계와 껀수 만들어 새로운 만남들을 만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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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9 14:29 2007/03/09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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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탱이 2007/03/10 14:47 URL EDIT REPLY
드디어 둥지를 부수신 건가요^^? 그리고 힘찬 날개짓과 비행^^... 축하드려야 할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디어 자유의 궤도에 오르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지각생 2007/03/12 20:43 URL EDIT REPLY
아.. 과분한 말씀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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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까 말까

잡기장
어스시 전집 3권을 다 읽었다. 얼릉 내일이 와서, 서점이 열고, 마지막 남은 돈을 털어, 4권을 사서 읽고 싶어 미치겄다.

지금 막, 그 악명 높은 "게드전기"를 다운받아놨다.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기에, 이걸 지금 볼까 4권을 보고 볼까, 아니 아예 볼까 말까를 고민 중이다.

볼까?
 그 혹평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장면"과, 테루의 테마 노래는 좋은 평가가 있기에, 심지어 그 노래만큼은 르귄이 "더빙되도 그것만큼은 오리지널로"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기에 그걸 보고 듣고는 싶구나.

말까?
 그럼에도 자칫 4권을 읽는데 상상의 폭을 좁히게 될 것이 걱정이다. 아무리 떨어져서 덤덤히 본다고 해도 지금껏 3권을 읽으면서 아무래도 다른 영화나 만화, 소설들의 묘사가 영향을 주어 장면들을 떠올리게 됐으니까. 익히 알려진, 지브리 애니메이션에는 "검은 피부"가 등장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점들, 그리고 선과 악의 명확한 구분과 그것에 매칭될 이미지들.

여기까지 메모해놓고, 다운받은 걸 살짝 앞부분만 봤는데 역시 듣던대로 당혹스럽다.
그걸 그렇게 바꿔 설정하다니, 정말 핵심적인 부분을 비껴가겠구나...

아무래도 4권을 읽고, 충분히 되새김질 한 후 "외전"을 보는 심정으로 봐야할 듯

요 전전전전 포스팅에서는 르귄의 소설엔 "거슬리는게 없다"고 했지만, 3권은 아주 재밌으면서도 거슬리는 면들이 좀 더 드러났는데, 다시금 4권에 대한 소개글을 찾아보니 기대가 된다. 역시 뒷 이야기는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야지 싶다. 그리고 언뜻 들리는 "The Other Wind" 도 번역이 되면 꼭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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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3 23:13 2007/03/03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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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2007/03/04 01:37 URL EDIT REPLY
(글과관계없이) 내일 번개 못오시남요?(자세한 내용은 제 블로그에)
얼굴본지 너무 오래된것 같아서요~~(흠... 제가 지각생님을 한..번 만났나요? ㅋㅋ)
지각생 2007/03/04 18:28 URL EDIT REPLY
re// ^^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고맙삼.
ScanPlease 2007/03/05 15:58 URL EDIT REPLY
re님과 지각생님은 2006년 10월 28일에 만나셨죠.ㅋ
지각생 2007/03/05 22:31 URL EDIT REPLY
무서운 스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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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웹, 오픈 마인드

IT / FOSS / 웹
(요즘 이 문제가 자칫 기술적인 내용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어, 정리할 겸 써봅니다.)

"오픈 웹(Open Web)"은 현재 특정 OS환경(MS 윈도우)과 프로그램(IE)만 사용해야 하는 한국의 전자정부와 인터넷 뱅킹 서비스를 대상으로 서비스를 국제 표준에 맞도록 개선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이다. 현재 한국의 전자정부와 인터넷 뱅킹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공인인증서"를 발급받아 사용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 특정 환경에서만 작동하는 방법을 썼기 때문에, 리눅스, Mac등 다른 OS와, 모질라 불여우, 사파리, 오페라 등 다른 웹 브라우저로는 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다. 그러나 꼭 그 방법만으로만 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몇가지의 방법으로, 웹 표준을 지켜서 구현할 수 있다. 그럼에도 편의적 발상과 공적 역할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한 가지 방법만을 고수했고, 그래서 특정 OS와 프로그램이 한국에서 과도하게 차지하고 있는 영향력과 그로 인한 모순은 사람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고착화되는데 일조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환경(MS윈도우+IE)을 사용한다는 이유로(90%이상), 충분한 고민과 전망없이 당장 효율적인 방법으로(ActiveX) 구현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던 것인데, 그동안 정부와 은행은 소극적인, 부정적인 자세로 일관해 왔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기술-정책 중립적인 관점과 방법으로 임해야 할 정부가 예산 부족등을 핑계로 사실상 소수자와 다양성을 무시해 온 것이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공인인증서를 관리하는 최상위급의 기관인 금융결제원이다. "오픈 웹"은 사람들을 모아 조직적으로, 적극적으로,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했고, 금융결제원은 2006년 안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해가 넘어가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오픈 웹측은 4억1,500만원의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민사조정을 제기했다.

논란의 핵심인 ActiveX 가, 새로 발매되는 MS의 운영체제에서 기본적으로 지원되지 않게 되면서 이 문제가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시작했다. ActiveX는 이미 그 보안상 취약성으로 인해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고, 통계상 대부분의 바이러스의 감염 경로가 이거라고 할 정도였기에, MS도 새로운 운영체제에 그 기능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그 기술을 반드시 사용하게끔 해 놓은 한국의 대부분 공공/금융 서비스에 문제가 생겼다. 새로 개발하고, 확산하는데는 시간과 비용이 걸리는 것이기에, 정부는 구차하게도 MS측에 새 OS에 그 기능을 지원할 것을 요구하며, 일반 사용자에게는 새 OS 구입을 미룰 것을 요청했다. 공공의 자원을 들이고, 활용하는 서비스를 특정 기술과 환경으로만 사용할 수 있게 고착시켜 놓았기에 생긴 문제였다. 애초부터 혹은 늦게라도 진작 표준 기술을 활용해 어떤 환경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면 이런 난리를 겪고, 과다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되는 상황으로 가진 않았을 것이다.

현재, 기존 방식에 대한 기술적 대안들이 뜨겁게 논의되고 있다. 또한 그런 것을 활용해 개발된 것들도 이미 존재한다. 하지만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깊다. 한국의 IT산업은 이미 대부분 특정 환경에 맞춘 개발 방식이 자리잡고 있다. 많은 개발 프로젝트가 정부로부터, 대기업, 중소기업, 프리랜서에 이르기까지 하도급 구조로 연결되어 있어, 정부의 방침 변경은 지금 한국 IT산업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지금 "IT강국" 한국의 IT산업은 그렇게 왜곡되고, 굳어 있다. 그래서 실제로 변화를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진통을 겪고 있는 중이다. 큰 원칙에서는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더라도 실제로 그것이 이뤄지도록 거듭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 때문인지 점차 그런 기술적 대안들에 대한 첨예한 논쟁이 벌어지는 듯한 분위기다. 이런 상황에서 자칫, 문제의 본질이 흐려질까 걱정된다. 어떤 기술이 좋은가를 판단하는 것은 지금부터 열어놓고 논의해야겠지만, 보안 관련한 기술들은 대체로 까다롭고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특히 이런 것에 생소한 사람들은 처음 이 문제에 접했을때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관심을 돌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보화가 가져오는 밝은 면과 어두운면은  결국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런 상황으로 몰리게 된 이유를 꼽아봤을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의 정보화가 정부주도의 "위로부터의", 기술중심적인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문화 중심적인 정보화가 아니라, "IT강국"의 허상을 위해 다른 부문의 희생을 바탕으로, 산업구조를 왜곡시켜 가며 부풀려 온 결과이다. 그래서 유독 한국에서 특정 OS와 프로그램에 대한 의존도가 심각한 수준인데, 이걸 해결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근시안적 사고로 당장의 외연을 갖추기 위해 그런 환경에 바탕한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래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고, IT 환경과 문화의 획일화, 경직화를 불러왔다. 물론 경직과 획일은 IT만의 문제는 아니다. 문화보다 기술환경 중심의, 물량 위주의 성급한 발전 전략이 가져온 부작용은 한국 사회 구석구석에 가득하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악플" 등 한국 정보화의 어두운 면등은, 바로 이런 왜곡된 성장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도 "위로부터의"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다. 문화적 성숙보다는 "인터넷 실명제"등 실효도 없다는 것이 입증된 방식으로 강제, "관리"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양한 것들을 접할 겨를 없이 대량으로 쏟아져 보급된 환경에 많은 사람들이 익숙해져 있고, 그러니 자본주의적 서비스들이 그런 환경에 맞춰 나오는 것은 뻔한 흐름이다. 그러면 다시 그런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그런 환경을 더 이용할 수 밖에 없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 정부의, 공공 기관의 역할은 이런 현상을 바로 잡는 일이다. 억지로 강제하지는 않더라도 변화를 유도하고, 변화를 위한 움직임들을 지원해야 한다. 적어도 자체적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만이라도, 모든 사람이 제약 없이 이용할 수 있는 공평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성별, 연령, 인종, 능력과 상관 없이 모두가 기본적인 권리를 갖고 보편적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면, 정보화 서비스에 있어도 어떤 정보기기와 프로그램으로도 접근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받아야 한다. 동사무소에 가서 서류를 작성할 때 꼭 어느 회사의 볼펜으로만 써야 한다는 규정을 하는 것이 온당할까? 설령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인기있는 펜이라 해도 말이다.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특정 회사의 볼펜이 갖는 특성을 활용할 때 이점들이 있어 그걸 사용하게끔 했다고. 그럼, 그 특성을 갖는 볼펜이 다른 벤더의, 다른 종류가 있다면? 그럼 당연히 그걸 쓰는 걸 제약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공인인증서가 그런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근본 원인이, 한국 사회 전반에 만연한 근시안적인 사고와 조급증에 의한 성과 중심의 일 처리 방식이라는 것, 사회적 소수자를 배려하는 기본 마인드,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적 풍토가 부족한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된 데 지금껏 정부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인식하는데 있다. 그리고 최소한 그런 문제를 극복하려는 자발적인, 대중적인 움직임에 정부는 적극적으로 열린 마음으로 임해야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을때 엄청난 사회적 위험성(risk)을 안고 살게 되며, 보이지 않는 사회적 비용을 계속 지불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험성과 비용은 구성원 모두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정부와 공공 기관이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인지하고, 정말 공공의 이익을 위한, 열린 마인드를 갖는 것이 이번 오픈웹 운동과 공인인증서-ActiveX대란을 통해 얻어야 할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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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2 23:43 2007/03/02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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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 2007/03/05 06:20 | DEL
이번에 겸사겸사 캐나다에 다녀왔다. 이 일 저일 처리하다가.. 캐나다에서 일했을 당시의 세금을 꽤 짭짤하게 환불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귀찮아서 미루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귀차니...
Tracked from | 2007/04/26 19:10 | DEL
오픈웹 과 금융결제원의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역시 다 드러나는군요. 리눅스용 공인인증SW도, Java애플릿 기반의 SW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니. 디지털 데일리 기사입니다. 비MS환경 공인인증SW 제공 문제 합의 실패…조정위원회 설치
채경★ 2007/03/02 23:48 URL EDIT REPLY
시간나면 사무실 놀러와요 밥이나 먹읍시다 ㅎㅎ
지각생 2007/03/03 00:11 URL EDIT REPLY
그 말을 기다려왔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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