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간강사법 폐기와 법정교원 100% 충원 및 이주호 장관 퇴진 촉구 농성 돌입 기자회견]  

 

정규 교원 수 감축하고 비정규노동자 기만하며 초,중등교육 현장과 대학을 파괴하는 이주호는 즉각 퇴진하라!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 도구로서 대화의 힘을 믿어 왔다. 만나고 대화하며 더 나은 학교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과부)는 우리를 만날 때마다 개선을 약속하며 여러 대책을 쏟아 놓았다. ‘시간강사 처우개선과 신분안정을 위한 강사법’(이하 시간강사법)과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과 고용안정을 위한 방안’(이하 학비대책)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교과부의 이 두 가지 정책은 대 국민 사기극임이 곧바로 판명되었다. 

시간강사법은 당사자 대부분이 반대하는 악법이다. 비정규교수에 대한 처우개선은 거의 없고, 시간강사를 1만 명 이상 대량해고하며, 정규교수로 뽑혀야 할 사람을 1년짜리 비정규직으로 뽑아 쓰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대규모 정리해고와 강의몰아주기라는 잔혹한 의자놀이가 횡행하면서 대학원은 파괴되고 교육,연구 환경도 황폐해 진다. 학비대책 역시 이미 하고 있거나 하기로 되어 있는 것을 거창하게 포장하였을 뿐, 실질적 개선을 위한 핵심 사항은 빠져 있다. 교육감 직접고용, 호봉제, 교육감 및 교과부 장관과의 교섭이 보장되지 않은 것이다. 교과부는 학비 문제 해결의 첩경인 ‘교육공무직원의 채용과 처우에 관한 법률’ 제정도 가로막고 있다. 이렇게 초,중등학교와 대학에 근무하는 비정규교원과 직원의 처우를 개선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존재는 다름 아닌 교과부이다. 

현 정권 말기로 오면서 교과부는 작심한 듯 각종 개악 정책을 쏟아 내고 있다. 농,산,어촌의 작은 학교를 폐교하려는 교과부의 위협은 계속되고 있다. 2013년 초중등학교 교원 정원은 동결이 아니라 사실상 감축이다. 학교에서 어떤 문제가 터지면 당사자에게만 책임 폭탄을 전가하는 반교육적 행태도 반복되고 있다. 교과부는 수많은 교육 주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학 시간강사법(2011년 12월 30일 일부 개정된 고등교육법) 시행령 제정을 계속 강행하고 있다. 8월 31일 입법예고된 시간강사법 시행령 개정안은 10월 9일까지의 입법예고 기간을 거쳤는데, 국정감사가 끝난 직후 열리는 10월말의 국무회의에서 의결,확정,공포될 예정이다. 교과부는 9월 26일에 「초중등교육법시행령」 개정안도 입법예고하였는데 이것 역시 심각한 개악적 요소를 담고 있다. 

「초중등교육법시행령」개정안의 가장 큰 문제는 법정 정원을 포기하는 것에 있다. 교과부는 교육의 질을 담보하기 위한 합리적 교원정원 산출 기준 자체를 없애버리고, 예산을 기준으로 하여 매년 행정안전부에서 교과부에 배정한 교원 수를 각 학교에 나누어주는 방식을 채택하려 한다. 이런 교과부의 행태는 자신의 책무를 방기하는 것으로서, 교육 현장이 기획재정부와 행정안전부의 경제논리에 의해 구조조정 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이번 시행령이 강행되면 학령인구가 적은 농,산,어촌의 학교가 먼저 큰 피해를 입는다. 학급당 교사 배정 기준이 삭제되었기 때문에 1명의 교사가 2~3 학급을 맡게 되거나 학교 폐교가 이루어질 것이다. 설령 특정 교육감이 의지를 갖고 학급당 학생 수가 적은 농어촌 학교를 유지시킨다하더라도, 그 부담이 다른 학교로 전가되어 큰 도시 학교에서 과밀학급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재원이 더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한 쪽의 문제가 다른 쪽으로 이전되는 ‘풍선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번 시행령 개정안에는 초등교과전담교사, 보건교사, 전문상담교사, 사서교사에 대한 정원 기준 삭제도 포함되어 있어 정규교사들의 수업시수 확대 및 순회교사,상치교사,계약제 교사의 증가가 불가피해진다. 결국 이번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안은 공교육 강화는커녕 더 열악한 처지에 내몰리는 비정규교사의 수만 증가시키는 개악안이다. 그렇기에 11월 5일까지의 의견수렴기간 동안 반대 입장을 최대한 결집하고 시행되지 않도록 막아야 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주호 장관은 오랫동안 일관되게 ‘교육공공성 파괴’와 ‘정규교원 수 축소’의 기조를 유지해 왔다. 대학은 이미 시장을 섬기는 신전이고 수 십 가지 영리사업을 하고 있는 지식공장이 되었다. 살인적 등록금도 수익의 일환이 되어 버렸다. 초중등학교도 비정규노동자 고용, 외주업체 계약, 일제고사 재정 지원 등의 방식에 익숙해지면서 마치 수익 창출에 혈안이 된 기업처럼 운영되고 있다. 공교육 현장이 파괴되고 입시제도가 복잡해지니 사교육이 판을 치고 학부모들은 교육비 마련에 등골이 휜다. 학교 간 그리고 학내 구성원 간 빈익빈부익부 현상은 학벌, 점수, 정규직-비정규직, 직접고용-간접고용 등의 장벽에 의해 더욱 심해지고 있다.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원리가 교육현장을 지배하고 있다. 

「초중등교육법시행령개정안」과 시간강사법시행령안은 정규교원 수를 대폭 줄이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시간강사법은 한 마디로 정규교원을 비정규교원으로 대체하는 법이기 때문에 악법에서 선한 시행령을 만들 수 없으므로 어떤 시행령을 만들더라도 편법이 판칠 가능성이 높다. 과거에 정규직이던 전임강사가 될 사람이 ‘비정규직’ 강사가 되고, 전업강사가 비전업강사로 대체되며, 강사로 되어야 할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나쁜 조건에서 일하게 될 겸임교수나 초빙교수로 둔갑하게 된다. 개정된 초중등교육법은 법적 기준을 두어 확보하게 되어 있던 교원의 수를 돈의 논리를 들이대어 줄일 수 있도록 하는 악법이다. 고등교육법의 일부인 시간강사법과 초중등교육법이 초래할 결과는 같다. 정규교원의 수는 줄어들고 살아남은 비정규교원은 고용불안과 생활고에 시달리며 소외된 노동을 하게 될 것이다. 

학교는 교육하는 곳이고 교원은 교육하는 사람이다. 교원을 이렇게 홀대하는 학교에서 직원, 특히 비정규노동자들을 제대로 대할 리 없다. 불평등과 빈곤이 구조화된 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건 지식만이 아니다. 차별을 당연시하고 승자독식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기에 왕따와 물리적 폭력은 도처에서 발생한다. 대학에서 지식생태계의 활성화나 학문적 천착도 기대하기 어렵다. 행복한 학교를 건설하거나 평등하고 성숙한 학문 탐구의 장을 구현하는 것은 현 정권과 이주호 장관 체제 하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은 단결에서 나온다. 교육주체들의 단결과 공동투쟁은 이제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 되고 있다. 말을 증명하는 것은 행동이다. 저항하라! 이 한마디에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세상을 향한 모든 정치학이 담겨 있다. 우리는 또 다시 풍찬노숙(風餐露宿)을 감행한다. 비바람과 추위도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 찬 우리를 막을 수 없다. 교육노조협의회 구성원들 중 학교비정규직노동자들은 국회 앞에서 단식을 병행한 농성투쟁을 전개하며 교육공무직 쟁취를 위해 싸울 것이다. 전교조와 비정규교수노조의 조합원들은 교과부 인근에서 삭발을 병행한 철야농성을 하며 법정교원 100% 확보와 개악된 시행령 저지 및 시간강사법 폐기를 위한 투쟁을 할 것이다. 교수노조와 대학노조도 교육노조협의회의 투쟁에 함께 할 것이다. 우리는 더 나은 학교와 세상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인생은 아름답다. 농성장 주변의 공원이 우리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 줄 것이다. 농성장 위로 펼쳐진 맑은 가을 하늘이 우리의 이상을 드높여줄 것이다. 햇빛이 우리의 영혼을 감싸 안아 줄 것이다. 다음 세대가 악(惡)과 압제와 폭력 없이 이 세상을 온전히 즐길 수 있도록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투쟁하자. 투쟁!

[우리의 요구] 

법정정원 포기하는 시행령 개악 철회하라! 
법정정원 확보하고 교원충원특별법 제정하라! 
시행령 개악 중단하고 농어촌교육특별법 제정하라! 
시간강사 대량해고 강사법시행 중단하라! 
비정규교수 문제해법 연구강의교수제 도입하라! 
학교비정규직 노동자 교육공무직 전환하라! 
잘못된 방식의 대학구조조정 중단하라! 
학교기업화 조장하는 이주호 장관 퇴진하라! 
교육현장 파괴하는 이주호 장관 퇴진하라! 
법정정원 폐기 공교육 포기 주범 이주호장관 퇴진하라! 



민주노총 전국교육노동조합협의회 전국교수노동조합/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국대학노동조합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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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0 15:48 2012/11/10 15:48

제목을 보고 한 단락을 읽었을 때는 단순한 K9 자동차에 대한 평인줄 알았다. 지주회사의 이익을 위해 발악을 하는 것도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바로 자본의 속성이 아닌가. 그러나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등짝을 후려치고 손가락이 잘리고 손목이 잘려도 이윤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그 추악한 본성 이면에는 더 사악한 자본가가 도사리고 있지 않은가. 맑스가 자본가는 단지 자본의 담지자라고 말했을 때 나는 맑스가 대단한 낙천가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자본가가 단지 자본 운동의 기계적 대리인에 불과한가? 자본은 하나의 실체이고 상이한 자본가들이 있을 뿐인가? 

K9이 잘 안 팔리는 이유 /경향신문, 2012. 11. 2.

K9은 기아자동차의 플래그십 모델이다. 벤츠 S클래스, BMW 7시리즈에 해당한다. 회사의 자존심을 걸고 모든 기술과 역량을 투입해 만든 차인 셈이다. 이런 K9이 지난 5월 출시된 뒤 고작 6600여대밖에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판매 부진의 원인으로 여러 가지 문제점이 거론되는 모양이다. 세계적인 불황에 시장이 얼어붙어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는다는 분석, 회사 측의 포지셔닝 실패로 에쿠스급임에도 제네시스급으로 인식됐다거나 출시 초기에 물량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왔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얼마 전 차를 좀 안다는 지인들에게 K9이 안 팔리는 이유를 물어봤다. 건축설계사 ㄱ씨는 이렇게 답했다. “기아차는 K9을 프리미엄 대형 세단이라고 소개한다. 고급차라는 얘기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K9은 ‘대형차’이긴 해도 ‘고급차’는 아니다.” 일러스트레이터 ㄴ씨의 평이 이어진다. “차는 주택과 같다. 차에 타면 화려한 겉모습은 운전자의 시선에서 사라진다. 페라리 250GTO나 람보르기니 미우라도 실내에서 보면 보닛만 덩그러니 보일 뿐이다. 고급차로 평가받으려면 외양 못지않게 실내 설계가 중요하다.”

자동차 평론가로 활동하는 ㄷ씨의 지적도 비슷했다. “고급 가죽과 정성들인 바느질로 완성된 시트, 은은한 조명과 오감을 자극하는 각종 조작 버튼이 탑승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플래그십 모델 자격이 있다.” 다음은 K9을 몰아봤다는 수입차 업체 임원 ㄹ씨의 평가다. “K9 외양은 외제차 부럽지 않다. 잘 빠졌다. 주행성능도 만족한다. 3.8ℓ 엔진은 밟는 대로 나가더라. 탄탄한 서스펜션도 매력적이다. 하지만 실내가 아니더라. 운전대에 감긴 가죽은 너무 싼 티가 났다. 부드럽고 탄력있는 양가죽 운전대를 잡아본 사람들이라면 실망할 것이다.”

개인적인 호불호가 가미된 평가여서 아주 객관적이라 할 순 없겠지만 이들의 지적에는 공통점이 있다. 요약하면 K9이 겉은 미끈하지만 차에 타면 고급차인지 대중차인지 구분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들과 통화한 이틀 뒤 다시 한번 K9 안팎을 훑어봤다. 좀 거칠지는 몰라도 그들의 지적이 과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운전대 중앙에 박힌 기아차 로고는 벤츠나 BMW, 볼보처럼 세련되지 못했다. 광택 나는 운전대 플라스틱 커버에는 자잘한 조작 스위치와 초록색, 붉은색, 흰색 글씨가 시선을 분산시켰다. 센터페시아 쪽으로 시선을 옮겨도 고급스러움은 찾아보기 힘들다. 플라스틱 소재의 실내 공기조절 버튼과 시계는 블랙톤이지만 가볍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비슷한 가격대의 볼보 S80의 인테리어는 그런 면에서 좋은 교재가 될 수 있겠다. 계기판과 각종 스위치의 조명, 대시보드에 붙은 시계, 스테인리스 스틸제의 재떨이를 K9의 그것과 비교해 보시라.

실내를 고급스럽게 만들면 차값이 크게 올라가 소비자가 더 외면할 것이라고 반박할지 모르겠다. 대안이 있다. K9에는 헤드업 디스플레이, 어라운드 뷰 모니터링 시스템, 후측방 경보 시스템, 시트진동경보시스템 같은 첨단장치들이 가득하다. 이들 대부분이 많은 돈 들인 만큼 제값을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이들을 떼내면 수백만원이 빠진다.

문제는 기아차가 이런 부품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주행 안전성 때문만은 아니다. 지주회사인 현대모비스의 매출 및 영업이익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디테일이나 감성이 부족하다는 K9의 시계, 재떨이, 운전대 같은 제품은 대부분 협력업체가 만든다. 가죽 공급도 마찬가지다.

순간 자동차 평론가 ㄷ씨가 한 말이 떠올랐다. “협력업체들이 기아차가 요구하는 납품 단가를 맞추려면 세 겹 칠하던 크롬 도금도 두 겹으로 줄여야 할 판인데 감성이니 디테일 따위를 신경쓸 정신이 있겠어? 김 차장, 기아차 디자이너들을 너무 무시하지 마시게. 그들은 K9이 잘 안 팔리는 이유를 더 잘 알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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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2 18:54 2012/11/02 18:54

왜소한 정치, 상상력의 빈곤[김종철의 수하한화]

/경향신문

 

대선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포부와 이상, 그리고 그 실현 방안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발언을 아직 들을 수 없다. 참으로 답답하다. 물론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신기하게도 여야 가릴 것 없이 경제민주화를 말하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복지국가를 들먹이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이러한 원론 수준의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누구든 듣기 좋아할 만한 언설일 뿐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공허한 이야기이다.

하기는 찰나적인 대중적 인기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극장정치’의 시대에 시대상황을 정확히 읽고 그것을 설득력 있는 정치적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식견과 능력을 갖춘 정치지도자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 모른다. 지금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것은 매스미디어의 주의를 끌기 위한 갖가지 수준 낮은 쇼와 이벤트, 저열한 정치적 책략일 뿐이다. 엄청난 비용과 사회적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왜 선거를 해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나라 안팎은 전대미문의 심각한 복합적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지만, 이 위기는 결국 정치의 열화(劣化) 현상에 연결돼 있음이 분명하다. 생각해보면, 폐부를 찌르는 뛰어난 정치연설을 들어본 지도 까마득하다. 물론 정치가 늘 진지하고 엄숙한 것일 필요는 없다. 엄숙주의는 권위주의의 소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가 대중에게 보다 친근한 것이 된다는 것과 정치의 천박화가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대중과의 친밀한 ‘소통’을 위한답시고 실제로 행해지는 정치적 행태는 대부분 대중을 즉자적인 욕망 충족에만 매달린 근시안적인 존재, 즉 유아나 백치처럼 취급하기 일쑤이다. 이런 식으로는 나라의 장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대중의 정치적 교양이 질적으로 고양되는 것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간단히 답할 수 없는 문제지만, 나는 지금과 같은 정치의 열화 현상이 초래된 원인은 일차적으로 이 나라 ‘엘리트들’--좌우를 불문하고--의 상상력의 빈곤, 혹은 정신적 왜소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지금 한창 얘기되고 있는 ‘경제민주화’라는 것만 해도 그렇다. 경제민주화란 시대상황으로 볼 때 결코 더는 미룰 수 없는 절박한 명제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지금 그 어떤 진영으로부터도 경제민주화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명쾌한 설명과 실현 방안이 나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간단히 말하면, 경제민주화란 극단적인 부의 양극화 현상 때문에 생긴 개념이다. 지금과 같은 극심한 부의 편중이 더 계속된다면 사회적 안정성이 파괴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결국은 특권 계층 자신의 존립기반도 허물어질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러므로 경제민주화란 무엇보다 경제적 평등화를 뜻하는 개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경제적 평등화를 실질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부분적인 땜질이나 미온적인 대책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적어도 해방 공간에서 행해진 토지개혁과 유사한 수준의 과감한 개혁이 아니면 안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토지개혁보다도 더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동안 우리의 삶을 지탱해온 온갖 시스템의 근본적 전제였던 ‘경제성장’이 더 이상--항구적으로--계속될 수 없는 시대가 바야흐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성장시대의 종언’이 뜻하는 궁극적인 의미를 조금이라도 깊이 생각한다면, 중앙집중적 거대 금융 및 산업시스템의 끊임없는 확대로써만 유지될 수 있는 생활방식, 그리고 그 방식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부추기는 정치, 경제, 문화, 군사, 교육 등 온갖 제도와 관행이 근본적으로 탈바꿈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극히 자연스럽게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사회가 문명의 존립방식 자체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중대한 과제에 대응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결국은 이 전환이라는 과제도 정치적 합의와 결정을 거쳐야 할 것인데, 지금처럼 질 낮은 정치로써 어떻게 이 사활적인 문제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사회에 지금 경제민주화의 필요성을 말하는 이코노미스트들이 적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그들 가운데 ‘성장 없는 시대’를 고려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 중 진보적이라는 이들도 결국은 성장 논리에 고착되어, 새로운 성장정책으로 가령 우주항공, 신소재, 첨단 제약의료 분야 등 혁신기술 개발에 투자해야 할 필요성을 논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혁신기술 개발에 드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라도 재벌을 ‘활용’해야 한다는 논리도 나오고 있다. 

이 시대착오적인 성장 논리로부터의 탈각을 위해서도 지금 절실한 것은 과감한 상상력이다. 오늘날 우리의 상상력이나 정신력의 빈약함은 멀리 갈 것도 없이 제헌헌법의 ‘이익균점권’ 조항을 돌아보면 금방 느낄 수 있다. 제헌헌법이 외국의 헌법을 졸속으로 베낀 것일지 모른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적어도 자본과 노동간의 공평한 관계를 규정한 ‘이익균점권’이라는 조항은 국회에서 장시간에 걸친 격론을 통해서 성립된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제헌헌법 제18조 제2항의 이 조항은 초대 사회부 장관을 지낸 전진한(錢鎭漢) 등에 의해 발의되었다. 전진한에 의하면, 노동자는 ‘노력’을 출자한 자본가이기도 하기 때문에 ‘돈’을 출자한 자본가와 이윤을 균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권리였다. 전진한은 “노동을 상품시하여 자본에 예속시키는 것은 고루한 사상”임을 역설했다. 그러니까 이익균점권의 논리는 오늘날 재벌과의 협력을 운위하면서 결국은 재벌의 눈치를 보는 왜소한 자세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정신적 강인함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익균점권’ 조항이 현실에서 실천되었는지 여부는 일단 별개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60년 전 선인들의 당당한 정신과 자세에 비해서 우리들이 지금 한없이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사문화된 것이었음에도, ‘이익균점권’ 조항은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헌법에서 삭제되었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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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1 09:55 2012/11/01 0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