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젠슈테인은 변증법에 온전히 영화적 의미를 부여하고, ... 유기체를 본질적으로 변증법적인 개념으로 만들었다."(운동-이미지,  tr. 74)
들뢰즈는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를 이렇게 평가한다. <변증법에 온전히 영화적 의미를 부여했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 들뢰즈는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방법이 변증법적 방법과 상응한다고 말하는  모양이다.  물론 여기서 <변증법>은 엥겔스가  [자연변증법]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한 변증법의 세 가지 법칙을 말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체계화된 엥겔스의 변증법은  째 양질전화의 법칙 , 둘째 대립물의 통일, 셋째 부정의 부정 법칙이다. 에이센슈테인 이 중에서 양질전화의 법칙과 대립물의 투쟁과 통일이라는 변증법의 원리를 자신의 몽타주 이론에 도입했다. 
에이젠슈테인은 독립적인 쇼트들의 충돌이 이념을 발생시킨다고 주장했는데, 개별 쇼트들의 연결은 양적 축척을 통해 질적 비약을 발생시킨다. 쇼트들의 충돌은 어떤 이행을 나타낸다. 몽타주는 이러한 양적 단위에서 질적 단위로의 이행을 표현한다. 몽타주의 이념은 곧 질적 비약을 통해 발생하는 어떤 이질적인 것의 출현을 의미한다. 
몽타주를  통해 표현되는  이념은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다. 말하자면 연결되는 쇼트들로 환원될 수 없는, 각각의 독립적인 쇼트 내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연결을 통해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는 쇼트들을 잠재적인 것으로 만든다. 개별적인 쇼트들의 연결은 이러한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시킨다. 그래서 에이젠슈테인은 몽타주를 이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이론은 쇼트들의 연결을 통해 발생하는 이념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수직과 수평, 바다와 육지, 하나와 다수 등  대립의 몽타주와 견인의 몽타주는 "하나의 질에서 다른 질로의 이행과 새로운 질의 돌연한 출현"이라는 양질전화의 법칙을 구현하기 위한 방법론인 셈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질의 돌연한 출현"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처럼 이행을 통해 발생하는 새로운 질은 무엇인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9/05/26 21:17 2019/05/26 21:17

다음과 같은 흄의 인용,
정의의 규칙은 그 보편성과 절대적 불변성으로 인해 자연(본성)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으며, 자연적 경향이나 동기로부터 직접 창조될 수 없다.(62)
도덕적인 것이 우리의 본성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 속에 있는 것이 우리의 도덕이라(57)는 말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선을 상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단지 공감능력을 통해 세계와 관계한다는 것이다. 공감은 우리의 본성에 의해 제한을 받을 뿐만 아니라 편파적이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 전체가 아니라 나의 가족, 나의 친지, 동료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관대함이 본성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56)면 이런 한정된 범위를 어떻게 세계 전체로 확장하는 것이 가능한가? 흄은 <우리에게 생생한 충격을 주는 현재의 어떤 정황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미디어의 이미지가 우리를 자극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자연과 문화는 하나의 전체나 복합체를 형성한다. 흄 역시 정의를 포함해 모든 것을 자연에 부여하는 주장, 의미와 덕을 포함하는 모든 것을 정치와 교육에 부여하는 주장을 모두 거부한다. 전자는 문화를 잊은 채 자연의 일그러진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시하며, 후자는 자연을 잊고 문화를 왜곡한다.(72)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9/05/26 21:15 2019/05/26 21:15

훌륭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어떤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그 사람의 성품이나 소질, 어떤 행동이 대단히 좋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훌륭하다고 말한다. 그 사람의 여러 면모를 잘 모르더라도 그 사람의 행동이 대단히 좋은 경우에도 그를 훌륭하다고 한다. 
 
나는 생각해 본다. 나는 누군가를 훌륭하다고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생각해 본적이 있던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그 사람의 인품이, 그 사람의 언행이, 그 사람의 어떤 면이 훌륭하다고 평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있는가? 
 
나 자신은 어떤가? 나는 어떤 면에서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면을 가지고 있는가? 나의 성품과 언행과 다른 어떤 면이 사람들에게 훌륭하다고 평가될만 한가? 나는 누군가에게 '참 훌륭합니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던가?
 
물론 나는 누군가를 드러내 놓고 훌륭하다고 말하거나 하지 않더라도 분명 그런 사람을 보았으며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마 누군가도 나를 보고 나의 어떤 언행을 훌륭하다고 평가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나는 참 다른 사람들에게 인색하게 군 모양이다. 칭찬 한 마디 하는 게 큰 일도 아닌데 말이다. 항상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대해야 하는데 나는 그러질 못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9/05/26 21:12 2019/05/26 2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