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과 인간을 구분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기준은 무엇일까?

 

학생들과 영화 <더 기버>를 보고 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난데없이 불쑥 던진 질문은 아니고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어이 학생은 어떻게 생각해?” 이렇게 지목된 학생 몇몇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어 "사람은 태어나는 것일가? 아니면 만들어지는 것일까?” 당연히 대답은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생명은 태어난다. 멸종한 하와이안 나무달팽이조차 자웅동체임에도 수컷이 없이는 새끼를 밸 수 없다고 한다. 만들어지는 인간이란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만들어진 인간은 인조인간이거나 복제인간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어떤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셈이다. 

 

<더 기버>의 도입부에 공동체의 세러머니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영화의 핵심인데, <더 기버> 공동체의 정체를 제시하는 시퀀스라고 할 수 있다. 세러머니 전날 주인공 조너스는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이렇게 말한다. “Tomorrow  we'd be assigned our jobs, our purpose.”

 

<더 기버>의 공동체에서 학생들은 졸업을 하면 미리 결정된 직업을 각자에게 부여한다. 이미 그들의 목적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에서 아이들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유전학자들의 가공으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이 공동체에는 ‘출산모’라는 직업이 있다.

 

학생들은 그제야 상품과 인간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 얼핏 이해한 듯하다. 이 공동체에서는 누구든지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이런 대체를 ‘임무해제’(Release to Elsewhere)라고 부른다. 

 

다음 시간에는 학생들과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학생들에 대해 잠깐 언급할 건데, 당시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에 대한 일부 사람들이 내뱉은 ‘시체장사’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학생들과 이야기를 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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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1:34 2019/05/26 21:34

사회가 개인들의 삶을 생존의 문제로 내몰면 개인들은 원자화된 파편처럼 부서지고 고립된다. 가장 척박한 곳에서 악이 자라고, 부서지고 쪼개진 개인들의 삶에는 연대와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 

지식인은 지성을 생산하지만 대중은 지성을 믿지 않는다. 심지어 지성과 반지성을 구분하지 않거나 구분하지 못한다. 그저 잘난 놈들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반지성주의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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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1:33 2019/05/26 21:33

자본주의 체제를 바꾸는 운동과 결부되지 않는 탈핵은 시간과 돈 낭비에 불과하다. 그냥 무의미한 짓거리일 뿐이다.
 
<환경운동연합>이나 <녹색당>, 그리고 “탈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단체들의 그 탈핵이 왜 공허한지 저 단체들과 녹색당은 모르는 듯하다. 
 
탈핵이 공허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진실을 외면하거나 부정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왜 핵발전이 요구되는가? 핵마피아들 때문인가? 정치가들이 소위 원전 산업의 이해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인가? 
 
핵마피아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핵산업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윤이 되는 것은 모든 자본가들의 먹이감이 된다. 그래서 핵마피아 운운하는 것은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진실을 회피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지속되는 한 성장의 논리, 성장이라는 요구를 벗어 던질 수 없다. 사실 이 요구는 시민들의 요구다. 시민들은 성장의 콩고물로 살아간다. 성장이 멈추면 어떻게 되는가? 불황의 긴 터널이 바로 저성장, 또는 마이너스 성장이다. 기업의 구조조정이 본격화되고 실업자 수가 증가하고 소비는 위축되며 삶의 질은 하락의 수준이 아니라 타락한다. 
 
그래도 소수의 자본가들과 부자들은 살아남는다. 저성장의 불황으로 고통받는 것은 다수의 시민들, 곧 노동자와 민중들이다. 그래서 성장은 시민적 요구가 된다.
 
성장이 불가피하고, 아니 성장이 필수적이라면, 에너지는 더 많이 더 많이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요구된다. 성장률과 에너지 소비율은 비례한다. 이런 판국에 탈핵이 말이 되는가?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갈아엎지 않는 한 탈핵은 요원하다. 
 
뭐 유럽의 경우 반드시 그렇지 않다고? 웃기는 소리다. 한국은 서유럽이 아니다.
 
대체 에너지? 청정 에너지? 그런 게 있었던가? 풍력과 태양광으로 얻는 에너지는 청정한가? 산과 들과 연근해를 파헤치고 얻는 에너지는 과연 청정한가? 백보 양보해도 풍력과 태양광으로 일정한 규모의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자본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  
 
녹색당과 환경운동연합 등 단체들이 내세우는 탈핵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저런 헛소리를 대단한 것처럼 내세우는 걸 보면 저들은 모른다. 저들 또한 자본과 권력의 한 축으로서 이 체제를 유지 강화 발전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왜 알면 저런 짓을 운동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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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6 21:31 2019/05/26 2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