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퇴화하고 있습니다살아 꿈틀거리는 아나키 2005/02/14 00:52
나는 퇴화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진보하고 있는데 나는 자꾸 그 흐름과 멀어져가는 것 같습니다.
세상은 출세하라고 가르칩니다.
명문고에 입학하고 명문대에 입학하고 고시에 합격하든 무엇에 합격하든 출세가 장땡이라고 합니다.
입신하여 이름을 날리라고 합니다.
중요한 인물이 되라고 합니다.
전문가가, 엘리트가 되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위치에 서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게 그건 남의 아픔에 무감각해지며 자신만 잘나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진보라면 나는 퇴화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돈을 벌라고 가르칩니다.
돈이 권력이라며 욕심을 내라고 가르칩니다.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며 그것을 위해 매정해지라고 합니다.
맘대로 사고, 맘대로 쓰고, 맘대로 버리라고 합니다.
욕심껏 벌라고, 결코 멈추지 말라고, 하루종일 광고를 틀어대면서 끊임 없이 소비하라고 속삭입니다.
하지만 제게 그건 남의 땀을 빼앗으라는 것입니다.
수십 억년의 세월 동안 형성된 이 땅의 피와 진을 모조리 빨아먹으라는 것입니다.
아직 빼앗지 못한 땀방울을, 아직 채 빨아먹지 못한 핏방울을 남김 없이 빨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진보라면 나는 차라리 퇴화하겠습니다.
세상은 힘센 자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힘센 것이 자유라고 합니다.
하고싶은 것을 맘대로 하려면 힘을 키우라고 합니다.
이 세상을 맘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미국이 되라고, 세상의 경찰이 되라고, 세상의 군대가 되라고, 사나이가 되라고 부추깁니다.
하지만 제게 그건 남을 밟고 올라서라는 말입니다.
무고한 이라크인의 죽음에 미국이 신경을 쓰지 않듯, 천성산과 새만금의 뭇생명들의 죽음에 신경을 쓰지 않는 인간이 되라는 말입니다.
그런 것이 진보이기에 나는 퇴화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높은 말씀을 들으라고 가르칩니다.
어르신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법이 세상의 진리이므로 고민할 필요가 없이 따라야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감옥에 가고 싶지 않다면 무엇이 잘못인지 알려주는 법에 나의 가치를 맞춰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게 법이란 높은 자리에 앉은 자들이, 출세한 자들이, 돈을 번 자들이, 힘센 자들이 일삼는 협박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주먹이 법이고, 돈이 법이고, 권력이 법이 됩니다.
그런 것이 법이기에 나는 그것을 사뿐히 무시하고자 합니다.
나에게는 나만의 법이 있습니다.
나만의 법에 감옥은 없지만 나는 그것을 어기지 않지요.
그것은 바로 나의 상식입니다.
세상은 더 빨리 움직이라고 재촉합니다.
세상은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라고 우리를 몰아갑니다.
편리한 일회용품을 쓰고, 잠을 덜 자라고 종용합니다.
그런 것이 진보이기에 나는 차츰 퇴화하고 있습니다.
높다란 아파트를 멀리하고
자동차와 아스팔트를 멀리하고
컴퓨터와 텔레비전을 멀리하고
예쁘게 포장된 상품들을 멀리한 채
하루 10시간씩 자면서
나는 천천히 퇴화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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