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리반 텃밭에 씨를 뿌렸습니다
꼬뮨 현장에서 2010/09/15 04:29오늘은 두리반 텃밭에 씨앗을 뿌렸습니다.
원래 파종을 좀더 일찍 하려고 했는데 지난 주 내내 비가 오는 바람에 작업이 약간 늦어졌습니다.
때아닌 9월 초에 마치 장마철이 다시 찾아온 듯 비가 일주일 동안 내리는 바람에 배추 모종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주 초 비가 개고 날씨가 맑아지자마자 조금 큰 화원부터 동네 조그만 꽃집까지 돌아다니면서 배추 모종을 구해보려고 했는데, 다들 철이 지났다면서 모종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자기네들도 배추 모종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구하고싶은데, 도매상에서 아예 배추 모종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유인즉슨 한창 배추 모종을 낼 시기에 일주일 동안 비가 쏟아지다보니 배추들이 다 녹아버렸답니다.
원래 9월이 되면 날씨가 선선해지고 비가 그쳐야 열매도 맺고 작물도 잘 자라고 배추 같은 식물은 싹이 잘 크는데 올해는 정말 기후가 이상하게 변해버린 모양입니다.
시기는 약간 늦었지만, 그래도 배추 씨앗을 뿌려도 괜찮다는 화원 주인들의 말에 힘을 얻어서 오늘은 드디어 배추 씨앗을 뿌리게 됐습니다.
비가 내리기 전에 미리 땅을 고르고, 그 자리에 흙살림에서 구한 천연 밑거름을 뿌려 두었습니다.
파종하기 일주일 전쯤에 땅에 뿌려두면 땅심이 살아나 좋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궁금합니다.
비가 많이 내리고 난 두리반 텃밭은 처참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원래 건물이 서있던 자리에 건물이 파괴되고 방치된 땅이기 때문에 사실 흙이 좋을리 없습니다.
땅을 조금만 파봐도 돌멩이가 오글오글 합니다.
지난 주에는 그 돌멩이들을 들어내고 땅을 갈고 뒤집어 엎어서 제법 텃밭처럼 만들어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비가 일주일 가량 내리고 나니 흙들은 씻겨 내려가버리고 다시 돌덩이들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다시 괭이와 쇠갈퀴를 들고 나가 최대한 돌을 골라냈습니다.
그런 뒤 어느 정도 보드라워진 흙에 본격적으로 씨앗을 뿌렸습니다.
텃밭일을 하다보면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러니까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기 힘든 서울 같은 도시에서는 특히 더 그러한데, 장기를 두고 있는 판에 마을 아저씨들이 하나둘 모여들어서 훈수를 두듯, 텃밭을 갈고 있으면 아주머니들이 모여들어서 이 얘기 저 얘기들을 합니다.
텃밭이 이웃과 이야기를 나눌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저렇게 해야 한다 뭐 이런 얘기들을 한가득 쏟아내고는 또 곧 사라집니다.
용산참사 현장에서도 그랬습니다.
23명의 용산4구역 철거민들과 다섯 분의 유가족들 그리고 용산범대위 식구들까지 지나가면서 감 심어라 배 심어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사람들이 하라는대로 모두 다 하면 안 되는구나 하는 걸 깨쳤습니다.
즉 자기 중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사람들이 하는 말이 대부분 경험에서 나온 것들이라 새겨 들을 것이 많지만, 그 경험이라는 것이 제각각이어서 흙의 성질에 따라서, 또 기후와 지역에 따라서 농사 짓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들의 경험에 근거해 두는 훈수를 모두 받아들이고 말았다가는 텃밭이 산으로 가버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두리반 텃밭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두리반 옆 인쇄소 아주머니가 오셔서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가십니다.
하나같이 소중한 조언이긴 한데, 어쩌면 좋죠, 제가 염두에 둔 텃밭과는 그리는 상이 약간 다른 것 같습니다.
하여간 겉으로는 고맙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을 하고는 그냥 내 방식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다른 분들의 조언도 최대한 받아들이면서 내 중심을 잃지 않기로 합니다.
그런 고민의 결과 금방금방 솎아내면서 조금 자라면 바로 뜯어 먹을 수 있는 얼갈이와 상추를 뿌리고, 동시에 쑥갓과 시금치도 잘 자란다고 하여 뿌리기로 했습니다.
배추는 아무래도 김장김치도 담궈야 하고 또 상징성도 있으므로 반드시 뿌려야 할 것 같고, 뿌리는 김에 열무 씨앗도 좀 남은게 있어서 같이 뿌리기로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총 여섯 가지 작물을 키우게 되는데, 조그만 텃밭에 이렇게 많은 종류를 기르는 것이 맞나 싶기도 합니다.
유채림 선생이 추석 기간에 젊은 친구들이 두리반에 와서 텃밭을 더 넓히는 일을 도울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에 자신감을 얻어서, 텃밭을 넓히면 여섯 가지 작물들을 좀 옮겨 심어도 좋고, 또 새로 씨를 뿌려도 좋을 것 같아서 일단 힘이 납니다.
홍콩에서 온 패트릭과 밴쿠버에서 온 매트도 일을 거들었습니다.
이 친구들은 홍콩의 초윤 마을과 밴쿠버의 도심 게릴라 텃밭 운동에 참여해본 경험이 있는 친구들이라서 철거촌에서 이렇게 텃밭을 만들어 가꾸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단박에 알아채더군요.
이건 일단 대외적인 선언입니다.
이곳은 우리 땅이라는 것.
그리고 나가지 않겠다는 것.
마치 야밤에 건물 벽면에 그래피티를 그려넣음으로써 자신의 영역을 증명하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방치된 땅을 일구고 가꿔서 차츰 우리의 영역을 넓혀 갑니다.
그리고 이건 파괴와 상실, 죽음의 이미지로 점철되는 철거촌에 생명의 싹이 자란다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동네의 이미지를 바꾸고 철거운동의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 시작이기도 합니다.
조그만 새싹들이 자라나는 것을 보며 나는 그 어떤 예술작품이 전달하기 힘든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빼앗기고 쫓겨나 잔뜩이나 쪼그라든 마음을, 활기차게 자라나는 조그만 새싹들이 어루만져 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대추리에서, 용산에서 보았습니다.
두리반에서 텃밭을 가꾸는 것은 정치적인 구호로 점철된 대외적인 선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짓밟힌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달랠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개발이라는 괴물에 맞서 생명의 가치를 옹호하는 운동이 복잡다단한 현실 체제의 모순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좀 동떨어진 경향으로 흐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 다짐으로 두리반 텃밭을 잘 가꿔나가려고 합니다.
사진들 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