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의 '살인 진압'과 무분별한 재개발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용산의 사건 현장에는 아직도 많은 이들이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매일 농성장에서 하루를 보내며, '촛불 방송국'의 라디오 DJ로 활동하고 있는 조약골 씨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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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막을 빼앗으려는 경찰과 천막을 지키려는 농성단이 대치하고 있다. 천막은 이미 경찰에 의해 망가져, 천은 떨어지고 골조는 휘어버린 상태이다. ⓒ 김희선 |
용산은 오늘도 시끄러웠다. 오후라고만 약속을 잡아 두고 점심 께가 좀 지나 사건 현장 앞에 도착했는데, 농성을 하는 이들과 경찰들이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오전에 어버이날 행사를 열었는데, 그러는 동안 연세가 많으신 몇 분이 뜨거운 햇볕 때문에 어지럼증을 느낀 모양이다. 어르신들 좀 편히 쉬시라고 잠시만 천막을 치겠다는데 경찰은 도로에 천막을 치는 건 불법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말다툼이 벌어지는 인도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흉물스런 건물 안에 차려진 분향소가, 또 한쪽에는 매연을 뿜어 대며 에어컨을 돌리고 있는 전경 버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한쪽에서 말다툼이 계속되는 동안 바지런한 사람들은 천막을 꺼내 주섬주섬 펼치기 시작했다. 다른날도 아닌 어버이날, 어르신들을 뙤악볕 아래 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다. 어느새 버스 문이 열리더니 한 무리의 경찰 대원들이 쏟아져 나온다. 천막을 빼앗으려는 경찰과 천막을 지키려는 농성단의 사이에서 천막의 골조는 조금씩 휘어지더니 곳곳이 꺾이고 끊어지기 시작했다. 몇몇은 찌그러진 골조 안에서 상처까지를 입어가며 연좌하고, 그 주위를 둘러 싼 여럿은 각자 앞에 보이는 경관들에게 거칠게 항의한다.
어떻게 어버이날 이 어르신들한테 이럴 수 있느냐, 어쩔수 없다 이게 경찰의 할 일이다 쉽게 수긍하기조차 힘든 말다툼이 오가는 가운데 검은 상복 저고리 옷섶에, 남색 투쟁 조끼 앞주머니에 달렸던 카네이션이 찌그러지고 또 떨어진다. 그렇게 곳곳에서 벌어지는 다툼들을 쫓아다니며 녹음기를 들이대 현장을 기록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 노여워하는 경관들을 더 화난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그는 바로 조약골 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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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성단의 한 사람이 경찰에게 항의하는 과정을 녹음하고 있는 조약골 씨(가운데) ⓒ 프로메테우스 박종주 |
천막을 문제삼은 경찰들의 ‘난동’은 한 시간 여가 지나서야 겨우 끝이 났다. 경찰들은 다 망가뜨린 천막을 처음에는 골목 안에 있는 농성단들의 돗자리 위에, 그 다음에는 그 길건너에 있는 농성단의 창고에 던졌다가 사람들이 계속 항의하자 결국 구석쪽 전봇대 밑에다 던져버렸다. 젊은 대원들을 부려 천막 골조를 이리저리 옮기는 경관에게 농성단 사람들은 웃으며 외쳤다. “박봉에 시달릴 텐데 그거 거기다 버리지말고 엿이나 바꿔 드셔요”라고.
소동이 진정되자 조약골 씨는 얼른 자리로 돌아가 컴퓨터로 녹음한 파일들을 옮겼다. 다가가 말을 건네자 지금은 바쁘다며 잠시만 기다려 달란다. 얼마간을 기다리자 조약골 씨가 웃으며 다가온다. 하루종일 현장에 상주하고 있지만 워낙에 이런 일들이 많아서 현장 기록이며 인터뷰며 정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라 정신이 없다며 조약골 씨는 웃었다.
조약골 씨는 스스로를 ‘촛불 방송국 라디오 DJ 조약골’이라 소개한다. 평소에는 피자매연대의 활동가로, 투쟁현장을 찾아다니며 기타치고 노래하는 음악인으로 살아 왔음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 텐데도 그런 이야기는 전혀 않는다. 하루종일 DJ 일밖에 안 하기때문이란다. 조약골 씨는 4월 초부터 용산의 농성장으로 출퇴근하고 있다. 사건이 터지고부터 일주일에 두어번 씩 농성장을 찾다가, 미디어센터 ‘레아’가 개소한 뒤로 피자매연대의 사무실을 그곳으로 옮기고 아예 상주를 시작한 것이다.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 것은 현장으로 사무실을 옮기고 일주일이 지난 즈음부터. 처음에 올 때엔 “현장에 있으면 무엇이든 할 일이 있을 것이고, 사람이 있는 것 자체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특별한 계획도 없이 무작정 농성장을 찾았단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를 보내면서, 철거민들의 사연을 본인들의 목소리로 알리고 싶다는 생각에 라디오 방송을 준비해 4월 20일부터는 매일 현장에서 방송을 이어오고 있다.
“글이나 책이 많이 나오긴 했지만, 철거민들이 직접 글을 쓰기는 어렵잖아요. 하지만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면 훨씬 더 쉽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또 다양한 목소리들이 갖고 있는 생생한 힘이 있다고 생각했어요”라고 조약골 씨는 촛불 라디오의 시작을 설명한다.
라디오는 매일 다른 DJ들이 다른 주제로 방송을 꾸리지만, 아무래도 참사의 유가족을 비롯한 철거민들, 혹은 현장을 찾은 방문자들의 인터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유가족이 마이크를 잡고 기성 언론들이 대변해주지 않은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고, 농성장을 찾은 다양한 이들이 응원의 메세지를 전하기도 한다.
“농성장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잖아요. 그런데 정작 서로 소개를 하거나 길게 이야기를 하거나 그러기는 좀 어렵죠. 물론 비슷한 뜻과 마음으로 여기에 모여 있지만 사실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인데,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하고 그냥 왔다 가기만 하는 거예요.”
현장에서 하는 라디오 방송의 가장 큰 장점으로 조약골 씨는, 그런 아쉬움이 해소된다는 점을 꼽는다. 한편으로는 침울하고 한편으로는 위태로운 농성장의 분위기 속에서 쉽사리 하지 못했던 여러 이야기들을 라디오 마이크 앞에서 풀어냄으로써 서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누가 어떤 생각으로 다녀갔는지를 서로가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사건에 대해 알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역할로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지난 4월 29일에는 용산참사 100일 추모제를 맞아, ‘용산참사 100일, 100인의 목소리’라는 제목의 특집방송을 진행했다. 추모제를 찾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녹음기를 들이대며 그들의 사연을 담은 것이다. 대학교수나 일제고사 거부로 파면당한 교사부터 사회단체 활동가나 딱히 내세울 명함 없이도 현장을 찾아 농성단과 함께 하고 있는 이들까지 다양한 목소리들을 담은 특집 방송을 많은 이들이 참 좋아했단다.
조약골 씨가 투쟁 현장을 자신의 생활 공간으로 삼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평택에 미군기지를 짓겠다며 정부에서 주민들을 내쫓았던 대추리에서는 아예 살림을 차리고 살기까지 했었다. 그곳에서 조약골 씨는 노래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노래를 친구들이나 마을 주민들과 함께 불러 음반을 만들기까지 했었다. 용산에서도 그렇게 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지 않은지를 물었더니 “음반이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라고 답한다.
사실 이미 용산에 관한 노래를 몇 곡인가 만들었단다. “사실 듣는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라디오 방송할 때 배경 음악으로 깔기도 하고 그래요”라며 웃음을 짓더니 “음악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농성장에서 지내면서 많은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음악을 못한다고 해서 아쉽지는 않아요”라고 덧붙인다.
말을 들어보면 정말로 지금의 생활이 좋은 모양이다. 현장에서 생활해서 좋은 점이 무어냐고 물으니 농성장의 다른 이들이 정말로 잘 대해준다는 점을 가장 먼저 꼽는다. “현장에서 방송을 하고 또 인터넷에도 올리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또 이 곳에 찾아 오기도 하는 걸 아세요. 그래서 정말 좋아하시면서 저한테 되게 잘 해주시죠”라며, 먹을 게 생기면 꼭 자신에게 찾아와 권한다고 은근한 자랑을 늘어 놓는다.
행동하는 라디오 ‘언론재개발’. 조약골 씨가 DJ로 활동하고 있는 촛불 라디오의 공식적인 이름이다. 사실 이름은 라디오지만 전파를 타는 것은 아니다. 하루에 한 시간씩 현장에서 앰프로 방송하고, 인터넷을 통해서야 겨우 현장 밖의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렇게 열악한 조건 속에서 매일 방송을 함으로써 농성장에 생기를 더해 온 촛불 라디오는 사실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인터뷰를 진행한 5월 8일은 촛불 방송국과 피자매 연대 사무실 등이 자리잡고 있는 갤러리 ‘레아’의 명도가 예정된 날이었다.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고 이상림 씨 가족이 운영하던 호프 공간을 갤러리 겸 미디어센터로 이용해 왔는데 그마저 빼앗길 위기에 놓인 것이다. 다행히 명도가 행해지지는 않았지만 언제 어디서 용역 업체 직원들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다. 게다가 건물 위층에는 고인의 가족들이 아직도 살림집을 꾸리고 있다.
“유가족 분들 뿐 아니라 다른 분들 역시 명도를 당하거나 건물이 철거되면 길거리에서라도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씀하세요. 그렇다면 저희(촛불 라디오 DJ들)도 길거리에서라도 계속 방송을 해야죠”라면서도, 어떻게든 쫓겨나지 않도록 명도를 막겠다고 힘주어 말하는 조약골 씨.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를 물으니 “자주 와달라는 부탁밖에 없죠”라며 잠깐의 틈도 없이 말을 받는다. 용역 업체 직원들이 수시로 나타나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경찰조차도 천막을 부수는 농성 현장의 기록들을 정리하기 위해 조약골 씨는,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금세 자리로 돌아가 작업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