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스쳐가는 얼굴들나의 화분 2005/11/08 01:3011월 6일 일요일 저녁 달거리대 배달을 위해 늦은 시각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11월 공개워크샵을 마치고 네팔음식점에서 '음식 오르가즘'을 느낄 정도로 맛있는 저녁 뒷풀이를 하고 아랫집에 돌아온 시각이 늦은 9시 무렵.
월요일부터는 발송 작업을 해야 했기에 일요일 밤 배달을 늦출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잠시, 배달은 꼭 내가 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루종일 워크샵 뒤치닥거리를 하고는 다시 서대문 아랫집에서 의정부까지 가야한다니.
하지만 난 배달부다.
그것이 내 일이니까, 난 유쾌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모든 일이 그렇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불쾌하고 기분 나쁜 일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법이다.
워크샵 장소가 바뀌어서 황당했던 그 전날 토요일 워크샵에서도 난 장소가 갑자기 바뀌는 덕분에 매닉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30분 이상 편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아마 장소가 급작스럽게 바뀌지 않았다면 매닉과 그런 이야기를 끄집어낼 시간적 여유는 없었으리라.
비가 온 뒤 기온은 무섭도록 내려가 있었다.
북쪽으로 굴러가면서 날씨는 더욱 차갑게 느껴졌고, 몸 속을 파고드는 바람에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미리 두툼한 잠바와 장갑을 끼고 나갔지만 귓볼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추웠지만, 가을밤 차들이 별로 없는 한적한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쌔앵 달려갈 때 바람이 불어오면서 수많은 낙엽들이 시야를 가리며 앞길에 뿌려질 때 기분은, 상쾌하다.
어떤 아름다운 영화도 이렇게 서정적이지는 않으리.
서대문에서 의정부역까지 보통 지하철을 타고 달리면 1시간 정도가 걸린다.
자전거로 가면 대략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릴 것이라 예상했고, 그에 따라 해로와 배달 시간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아랫집을 나오려는데, 계속 전화가 걸려왔고, 또 배달할 달거리대들을 검사해야 했기에 출발이 늦어지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1시간 10분 남짓.
전속력으로 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바퀴를 돌리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곧 몸이 더워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물리적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일요일 밤 11시에 밖에서 나를 만나러 나온 친구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
교통신호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밤 9시 50분에 아랫집을 나섰다.
안국동, 대학로, 삼선교를 지나 30분이 흐른 뒤 나와 한몸이 되어 구르던 자전거는 미아리 부근을 통과했고, 수유리와 쌍문동을 지나 도봉산을 거쳐 정확히 1시간이 지난 뒤 의정부시에 진입했다.
만나기로 한 의정부역에 도착한 것은 출발 후 정확히 1시간 10분이 지나서였다.
다행히 내가 먼저 왔다.
기다리는 것이 기다림을 받는 것보다 낫다.
사랑하는 것이 사랑받는 것보다 나은 것처럼 말이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을 때도 있다.
어떤 날은 수만가지 생각들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이날은 친구들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상용이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남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제법 많지만 왠지 풀어내기가 힘들다.
그남도 나처럼 늦은 밤 자전거를 질주하면서 고통을 달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묘한 심정이 들었다.
자전거와 지 육신이 하나라는, 그래서 술을 마시면 자기도 비틀거리고 자전거도 비틀거리는구나!는 깨달을음 얻은 친구.
내가 자전거에 달고 다니는 조그만 pace 깃발을 유럽에서 사온 친구가 바로 상용이다.
그남과 나와의 인연은 이렇게 깊다.
보라돌이 얼굴도 스쳐 지나간다.
주로 밝게 웃는 모습.
그에 대해 하고 싶은 말 역시 제법 많은 편이다.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가 시간이 늦은 것 같아 그냥 달리기로 한다.
빠쳄웃다가 다음이다.
난 그와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친구.
앞으로 그의 삶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를 듣고 싶다.
별이아빠도 떠오른다.
난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여는 성격이 아닌데,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남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직감이 스쳐갔다.
자주 만나게 될 사람이라는 생각도.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어서 곤, 초희, 매닉, 옹줴, 느림 그리고 함께 성찬을 나누던 피자매들의 얼굴이 차례차례 바람에 실려온다.
아, 각각에게 이메일이라도 한 통씩 써야겠다, 는 생각이 든다.
아랫집 식구들, 새만금에 열정적인 사람들, 오랜 기간 길바닥평화행동과 천성산 살리기 등 캠페인을 함께 해온 활동가 친구들.
모두에게 일일이 정성을 담아 선물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목이 말라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의정부역을 출발한다.
39번 국도를 따라 송추로 오다가 구파발 쪽으로 방향을 틀고는 은평 뉴타운 공사로 파헤쳐진 북한산 자락을 보며 서울에 들어선다.
밤이라 서늘한데, 불도저와 포크레인이 무수히 할퀴고 간 생채기들이 밤 동안만이라도 아픔을 느끼지 않기를 바래본다.
피흘리며 잠이 들고
굉음에 놀라 잠이 깨는
우리의 산하. tag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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