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에게도 이데올로기는 있다
살아 꿈틀거리는 아나키 2005/10/26 10:102001년 7월 18일에 제가 이런 깜찍한 글을 썼더군요.
원문 출처: http://cultizen.co.kr/content/?cid=91
* 초희의 목욕잡담에 관련된 글
한국말 중에는 목욕재계(沐浴齋戒)라는 말이 있다. 제사를 드리기 전, 또는 결혼식을 하는 날 아침 등 뭔가 중요한 일을 앞두고 흔히 사람들은 정성껏 몸을 닦아 내고, 부정을 씻어 낸다. 마치 태고의 원초적 깨끗함이라도 원상 복귀 시키려는 것일까? 보다 종교적인 의식 중에 세례(洗禮)라는 것도 있다. 간단히 몸을 씻음으로써 죄악까지 씻어내려는 것이다. 이렇듯 동서양을 막론하고 몸을 씻는 행위를 통해 신과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생각엔 큰 차이가 없는 듯 하다.
요새는 The Body Shop이라는 화장품과 목욕용품 매장이 전국에 들어서 있어 육체를 인공적으로 가꾸고 다듬으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또 언제부터인가 땀냄새 제거제, 체취 방지 옷 등이 시장에 선보이며 마치 인간의 몸에서 나는 자연스런 냄새는 불쾌한 것이니 상품을 소비하여 그것을 없애고 아름다움을 유지하라는 무언의 명령이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 잡혀가고 있기도 하다.
이 글에서 다룰 크러스티(crusty)는 보통 서양의 영어권 나라에서 오랫동안 씻지 않아 몸이 더럽고 냄새가 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래서 영어 화자들은 예를 들어 '어렸을 때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크러스티였다' 또는 '어떤 파티에 갔는데, 갑자기 크러스티 펑크들이 몰려와서 분위기를 망쳤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곤 한다.
이렇듯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크러스티(또는 크러스티족)라는 단어를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뚜렷한 생활양식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한다. 즉 스스로 자랑스레 '그래, 난 크러스티족이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건 마치 불량배들이 '사회가 우리들을 받아주지 않는다'며 스스로를 불량배라고 부르며 주류와 격리시키고 자랑스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크러스티들은 과연 어떤 생활을 하며,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필자는 우연히 한국에 와있는 백인들 중 과거 크러스티족의 생활을 오랫동안 경험한 바 있었던 사람들과 알게 되었다. 이들과의 대화를 종합해보면 크러스티들은 먼저 오랫동안 목욕을 하거나 씻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백인이나 흑인들의 경우 겨드랑이 냄새를 비롯한 체취가 동양인들에 비해 훨씬 강하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자주 샤워를 하며 땀을 흘린 후에는 대부분 겨드랑이에 체취 제거제를 바른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인들이 몸에 직접 바르는 체취 제거제를 전혀 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워하기도 한다.
많은 크러스티들은 또한 머리를 감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드레드락이 형성되기도 한다. 밥 말리도 자신의 노래에서 "다듬지 말고 머리를 길러 드레드락을 만들어라"고 외치기도 했지만 이것은 대부분 흑인의 경우에 해당된다. 그래서 백인 크러스티들은 크러스티의 상징이기도한 드레드락을 하기 위해 일부러 미용실에 가는 경우도 있다.
크러스티들은 보통 구걸을 통해 음식을 조달하거나 또는 '푸드 낫 밤' 같은 프로그램 등을 찾아 음식을 얻어 먹는다. 이 프로그램은 길거리 노숙자들이나 음식이 필요한 배고픈 사람들에게 주로 채식 위주의 요리를 만들어 무료로 공급해주는 사회 복지 활동으로서 서양의 대도시마다 지부가 형성되어 있다.
크러스티들은 또한 음식과 옷 그밖에 필요한 생활용품들을 얻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지기도한다(이런 행위를 크러스티들은 'dumpster diving'이라고 표현한다). 한국도 일 년에 음식물로 낭비되는 돈이 8조원이라는 광고를 하는데, 서양의 소위 선진국들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쓰레기통 뒤지기를 통해 생각보다 많은 음식을 구할 수 있다고 한다. 이밖에 이들은 자동차를 닦거나 각종 불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푼돈을 모으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크러스티족들은 대량 소비와 과잉 소비가 일상화되어 있는 서양의 여러 나라들에 살면서 돈 한 푼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해주는 셈이다.
사회의 가장 아래층에 위치한 이들은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지하철 역 등에 포진하고 있는 노숙자들인 셈이다. 하지만 많은 크러스티들은 길거리에 사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거나 버려진 건물에 들어가 무단 점거 생활을 한다. 바로 '스쿼팅'을 주로 담당하는 이들이 바로 크러스티들이다. 이들은 버려진 빌딩에서 집단 생활을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지나가는 열차에 무임승차(train hopping)하여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도 하는 등 체질적으로 방랑생활을 즐긴다. 이렇게 보면 대도시의 노마드(nomad)족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많은 크러스티들이 백인인 것을 감안해 보면 '벽안의 집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노숙자들이 경제 위기와 불황으로 어쩔 수없이 거리로 몰려 나앉게 되면서 밑바닥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면 서양의 많은 백인 크러스티족들은 숨막히는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물질적 풍요를 박차고 나와 지하 공동체를 이룬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중상류 계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최하층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크러스티 족의 생활이 맘에 들지 않을 경우 언제든 다시 나와 사회로 복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문화적 자본(예를 들면 영어가 모국어인 크러스티 족의 경우 한국이나 중국 또는 일본으로 건너가 영어 선생이 되면 갑자기 상류층으로 도약할 수도 있다)을 소유하고 있는 크러스티들도 많다.
많은 사람들이 크러스티족은 60년대의 히피족과 70년대의 펑크족이 결합된 형태라고 말한다. 즉 히피즘의 평화로운 공동체 형성을 통한 사랑의 실천 정신과 펑크족의 정신인 주류 시스템에 반기(Fucking Shit Up), 자생적 자발적 질서의 옹호(Do It Yourself)를 공히 물려 받아 태어난 것이 바로 크러스티의 생활 양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크러스티들을 크러스티 펑크 또는 히피 펑크라고 부르기도 한다.
크러스티 족들의 생활이 잘 반영된 음악도 있는데, 크러스트 펑크(crust punk)라는 불리는 펑크의 하위 장르 음악이 그것이다. 이 음악은 짧고 굵은 정통 펑크에 비해 곡이 약간 길고, 사운드가 특히 지저분하며 곡의 시작과 끝이 일정하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크러스티 족들의 '무정부적'인 태도 덕분에 이들은 현 질서의 파수꾼인 경찰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크러스티 펑크 밴드인 MDC가 'Millions of Dead Cops(수백만의 죽은 경찰들)'의 약자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크러스티 족들은 이렇게 더러움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서구 중심의 '표백 사회'가 사실은 자연스런 인간성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 드러내 보인다. 우리가 믿는 위생용품은 사실 또 다른 더러움에 불과하고 깨끗함이라는 개념은 기업가들이 돈을 더 벌기 위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많은 크러스티 족들의 믿음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금지하는 것들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쁘다고 말하는 각종 정보와 사실들이 실제로는 쉬지 않고 굴러가는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미국의 반사회집단 CrimethInc에서 펴낸 책 [Days of War, Nights of Love]에 극명하게 실려 있다. 이 책 124페이지를 보면 '자본주의자들이 체취 제거제를 만들어 파는 8가지 이유들'이라는 부분이 있다. 짧게 인용해보자.
자본주의자들이 체취 제거제를 만들어 파는 8가지 이유들
1. 체취는 에로틱하고 섹슈얼한 자극을 불러 일으킨다. 자본주의자들은 이 체취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엄격하고 반(反)섹스적인 시스템에 잠재적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