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거부 전시회를 다녀와서평화가 무엇이냐 2005/06/01 21:33 이땅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감옥에 처한 병역거부자들이 입었던 주황색 수의며, 재판기록이며, 언론기사 등이 전시되어 있어 그들이 받아온 지독한 차별과 탄압이 생생히 느껴진다.
내가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일제시대에도 병역거부자들이 투옥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일제시대에 병역거부는 불경죄였다.
위대하신 천황폐하의 명령을 거부하고, 위대한 황군에 징집되기를 거부한 죄는 중벌로 다스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제시대에는 병역거부뿐만 아니라 신사참배를 거부한 사람들도 불경죄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감옥에 갇혀 모진 고문도 당해야 했다.
그런데 일제시대에 불경죄를 저지르고 투옥된 사람들은 해방되고 나서는 자연스레 독립운동투사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경죄란 일본 제국주의 입장에서 볼 때는 괘씸한 죄였겠지만 해방 이후의 관점에서 볼 때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거부한 견결한 직접행동으로 훌륭한 비협조운동이자 독립운동이었겠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일제 시대의 불경죄가 해방 후에 반드시 독립운동으로 여겨지지 않았다는데 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거나 이밖에 일제에 반항한 사람들은 자연스레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병역거부자들은 새로운 국가에서 다시 투옥의 대상이 된 것이다.
변한 것은 지배계급이었지 이들 병역거부자들이 아니었다.
국가의 이름이 일본(치하의 조선)에서 한국으로 바뀌었을 뿐 병역거부자들은 일제시대나 지금이나 똑같이 신념에 따라 총을 들지 않고 있다.
변한 것은 권력을 쥔 자들이었고, 권력자들은 입맛에 맞게 누구는 독립운동가로 포장해 상장을 내리고, 누구는 병역거부자 즉 파렴치한 겁쟁이로 매도해 감옥에 처넣었다.
국가의 체제가 그대로 존속하면서 국가권력을 쥔 자들만이 교체된다는 것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탄압받는 자들은 여전히 같은 죄로 감옥에 갇힌다.
일제시대에도 그리고 지금 기나긴 군사정권을 지나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그리고 지금 이 참여정부 시절에도 병역거부자들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니라 천 명이 넘는 병역거부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푸른 수의를 입고 쇠창살 너머에 갇혀있다.
일제시대에는 병역거부자들에게 불경스럽다면서 돌팔매를 가했다.
그리고 해방 후 남한에서는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군사안보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에게 내면화되면서 더욱 심한 비웃음과 조롱을 병역거부자들에게 가하고 있다.
국가라는 본질적으로 억압적인 체제가 시민들의 불평 없이 작동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있다.
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반드시 외부에서 적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을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호출해 하나로 묶어 세울 수 있다. 미국 같은 국가 중의 국가, 그래서 가장 야만적인 국가는 끊임없이 새로운 적을 찾아 전쟁을 일으키고, 군비를 늘린다.
동시에 국가는 내부에서도 적을 만든다. 단지 국가라는 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해 '의무'라는 것을 강제하고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벌을 내린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애국자가 되어 병역거부자들에게 '배신자' '겁쟁이'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져버린 비국민'의 딱지를 붙인다.
국가는 언제나 적을 만들고 그 적을 치기 위해 사람들에게 군복을 입히려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병역거부자들에게 손가락질을 하기 이전에 먼저 내가 마음 속에 군복을 입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병역거부는 본질적으로는 아예 적이라는 존재 자체를 만들어내지 않고자 함이다. 내가 아는 한 병역거부는 적이라는 개념 자체를 마음 속에서 지워버리겠다는 결의에 다름 아니다. 내가 총을 쥐는 순간, 내가 군복을 입는 순간 적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지금 감옥을 삥 둘러싸고 있는 높은 하얀색 담장 안에 투옥되어있는 천 여명의 병역거부자들을 생각해보자.
이들은 일제시대였더라면 항일독립운동가들로 추앙을 받았을 사람들이다.
같은 신념을 가진 똑같은 사람들을 우리는 어떤 국가가 들어서 있느냐에 따라 떠받들기도 하고, 욕하기도 한다.
대저 국가란 것은 얼마나 제멋대로 인간을 나누고 판단해버리는가?
진실은 가장 억압받는 사람의 입장에 설 때 비로소 보인다고 했는데, 병역거부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의 국가체제가 이식되어 있던 일제시대나 참여정부가 들어서 있는 2000년대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남한에서 조건 없이 병역거부권이 인정될 때 비로소 우리는 조그만 역사적 진보를 이뤄냈다고 자축할 수 있지 않을까. 일제 잔재 청산과 분단 상황의 극복이 우리 시대의 과제라면 마음 속의 총부터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우리는 비로소 일제 시대의 병역거부자들을 독립운동가로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며, 지금의 병역거부자들 역시 가장 적극적인 평화 지킴이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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