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을 넘는다
살아 꿈틀거리는 아나키 2011/05/16 20:24돕님의 [우리가 살 곳을 되찾자, 스쿼팅!] 에 관련된 글.
2011년 5월 16일, 오늘 우연히 건물 외벽에 커다랗게 붙은 아파트 광고를 봤는데, '25/35/45평형 7백만원부터' 라고 씌여 있었다.
집 한 채에 7백만이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1년만 죽어라 일하면 집 한 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글쎄 그건 한 평에 그렇다는 것이었다ㅠㅠ
그러면 내가 50년, 백 년을 죽어라 일해야 집을 한 채 구할 수 있다는 소리인데, 이건 뭔가 크게 잘못됐다 싶었다. 그래서 집을 공짜로 구하기로 했다.
담을 넘었다.
담을 넘는 행동은 많은 은유를 내포한다.
우선 이것은 불복종이다.
자본주의가 가장 강하게 지키려고 하는 소유권을 부정하는 행동이다.
담은 경계를 상징한다.
지배계급이 만들어 놓은 경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부수겠다는 것이다.
훌쩍 넘어버림으로써 저들의 경계선을 무력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상력의 해방을 가져온다.
그럼으로써 나의 영역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무엇을 하고(국민의 의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형법)는 게임의 규칙은 지배계급이 만들어 놓은 것인데, 담을 넘는다는 것은 그런 게임의 규칙을 무시하고, 계속 이탈해가겠다는 것, 새로운 길을 찾아 탈주하겠다는 것이다.
담을 넘는 것은 금기를 부정하는 모반의 행동이다.
그 자체로 짜릿하며, 커다란 재미를 느끼게 된다.
어느 순간 '나는 왜 허락받은 행동들만 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을 품어본 사람이라면 언제든 금지의 담벼락을 넘어볼 만하다.
재개발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1-2년씩 사용하지 않고 버려진 집들이 세상에는 부지기수로 널려 있다.
집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이 이곳을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스쾃을 하기 위해 비어 있는 집들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담을 넘어 누군가 살다 떠나간 공간을 둘러본다.
나는 소유주의 허락을 받지 않고 어떤 공간을 점유해 사는 스쾃의 경험을 많이 해봤고, 특히 이에 필요한 잡다한 지식들도 여기저기에서 추려 모았다.
오늘은 지난 몇 달동안 관심을 갖고 사전조사를 해온 한 지역에 들어가 실제로 스쾃을 시작하기 위한 행동에 돌입했다. 그곳엔 빈집들이 많다. 그중 5-6군데의 집을 답사하고, 여러 가지 사항들을 꼼꼼하게 확인해보았다.
무릇 모반의 행동을 성공리에 펼치기 위해서는 철저한 사전 조사와 치밀한 답사, 그리고 과감한 실천이 필요하다.
1. 전기계량기는 달려 있는지
2. 수도와 가스관은 연결되어 있는지
3. 관리처분 인가는 언제쯤 나는지
4. 주변에 철거용역들이 돌아다니는지
5. 창문유리와 샤시 그리고 대문과 현관문 상태는 좋은지, 자물쇠 등 시건장치는 제대로 작동하는지
6. 내부는 얼마나 깨끗한지
7. 기본적인 집기들이 갖춰져 있는지
8. 가까운 곳에서 물과 전기 등을 끌어다 쓸 수 있는지
9.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노출이 되어 있는지
10. 채광은 잘 되는지 (실제로 스쾃에 살다보면 전깃불을 밝히기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에 채광이 잘 되는지의 여부는 매우 중요하다)
11. 주변 상황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
12. 출입문의 위치가 주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지
등등을 확인해보았다.
그 결과, 괜찮은 집이 한 두 군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실제로 이 가운데 적당한 곳을 골라서 스쾃으로 사용하려고 한다.
그곳을 스프레이 페인트나 물감, 페인드 등으로 꾸미는 작업을 할 수도 있다. 예술스쾃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예 철거 직전의 집 하나를 통째로 골라서 그 집 자체를 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도시재생작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개발로 무너지는 동네 자체를 하나씩 스쾃해서 사람들과 공동으로 거주하면서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이곳을 음악 연습 공간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소음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주변에 가까이 사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곳으로 정해야 한다.
본격적인 주거 공간으로 삼을 수도 있다. 지금 내 주변에는 살 공간이 필요한 사람들이 엄청 많다. 아예 이들과 함께 몇몇 집을 골라 함께 스쾃을 하고, 고쳐서 주거 공간으로 탈바꿈시킬 수도 있다.
무엇이든 앞으로 몇 달 동안 장기 프로젝트로 진행시킬만 하다.
담을 넘는 것은 재미있다.
허락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은 짜릿하다.
금지된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