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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를 경이라 부른 건
2009년 교육 때부터였다.
우리는 홈리스야학 미디어교사였고
야학의 홈리스들은 다 별명으로 불리웠다.
고요, 대장, 오공, 구부정, 걸림돌......
그래서 나도, 그도 교육용 이름을 지어야했다.
나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하루,
그리고 그의 이름은 경.
그 때 간경화판정을 받아서
술 먹지 말라고,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경각심을 가지라고
'경화'라고 이름을 붙이겠다,
라고 하니 속없이 좋아하더니.
하늘은 맑고 햇살은 따가운데
진짜 속없이 웃고만 있더라...
7월 28일에 이 세상에서 마지막 숨을 쉬었고
그리고 49일이 지났으니
형은 오늘부터 저 세상에 있는 거겠네.
<티벳 사자의 서>에 따르면
사람이 죽기 전, 빛과 통로가 보인대.
마지막 숨을 멈추고
눈 앞에 보이는 통로를 통과할 때
업을 많이 지은 사람은
아무리 그 통로가 밝더라도 불안에 떨고
선업을 많이 지은 사람은
행복감을 느끼며
그 환한 빛 속으로 난 통로를 통해
다음 세상의 느낌을 감지한대.
형은 그 빛 안에서 편안했겠지.
그래서 지금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그래? 맞지?
나는 오늘 두 개의 수업이 있었는데
한 개의 수업은 휴강을 했다.
아침 수업을 마치고
교장으로 퇴직했다는 나의 교육생이
점심을 사주어서 함께 밥을 먹었다.
늘 바쁘게 다음 교육장으로 이동했는데
오늘은 시간이 있다 하니 왜 그러냐고 물어서
"선배 49재에 가야합니다" 대답하면서
2개월만에 너무나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했다.
교장선생님은 말해주기를
간암은 아플만큼 다 아프고도 결국 세상을 떠나니
본인에게는 그게 더 나을 수 있다 한다.
이 얘기를 여러번 듣는다.
어떤 모습이라도 조금 더 이 세상에 머물기를 바랬던 내 마음은
그래서 번번히 서운해진다.
49일은 시차적응같은 거라 한다.
밤에 추모영화제에 갔어야했는데
엄두가 안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 검단 수업이 12시에 끝나서 광화문 출발 버스를 탈 시간이 안되었고
차를 가지고 모란공원에 갔다가 다시 서울로, 그리고 강화로 돌아오는 일을
내 몸이 감당하지 못할 것같았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마당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마자
모름이가 반갑게 뛰어왔다.
형이 강릉에서 투병하고 있을 때
무의도한방병원 주차장에서 죽어가고 있던 모름이.
이제 건강하게 살아나서 뛰어다니고 부비부비 애정을 표한다.
뛰어오는 모름이를 안다
왈칵 눈물이 났다.
이 눈물은 언제쯤 멈출까.
돌아오며 차 안에서 들었던 노래.
장례기간 중에 추모영상의 배경음악으로
미디어위는
평소 경이 즐겨듣던 노래를 골랐다.
이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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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시간의 기억들
며칠 전,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이하 미디어위) 4기 첫 모임이 있었다. 모임 후 뒷풀이 가는 길, 안창규 감독에게 “생각할수록 너무 아깝죠. 빈 자리가 너무 커요” 했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문득 눈을 떠보니 박종필 감독이 이 세상에 없다. 그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남편은 어느 날 박종필이 너무 보고 싶어서 밀가루(송윤혁 감독 별칭)에게 전화를 했다고, 그래도 보고 싶은 마음이 채워지지 않아서 종필이 아플 때 가고 싶어 했던 식당에나 가자고 했다. 남편과 종필은 친구였다. 나를 알기 전부터.
작년에 종필과 인터뷰 할 기회가 있었다. <워커스>의 고정 지면을 의뢰받고 내가 처음으로 섭외한 사람이 종필이다. 인터뷰를 준비하느라 이력을 정리하다가 1996년에 만든 <빈민청소년의 해방구-공부방>이라는 영화를 발견했다. 종필을 만나 “올해가 데뷔 20년이네. 축하해” 했더니 종필은 그 영화는 습작이고 1997년에 만든 <IMF 한국, 그 1년의 기록-실직노숙자>를 공식적인 첫 작품으로 여기고 있으니 데뷔 20년은 내년이라 했다. 그러고 보니 종필은 데뷔 20년이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났구나.
나는 한겨레문화센터 비디오제작학교를 졸업했다. 그 곳 졸업생들은 ‘비디오로 만드는 세상’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종필을 처음 만났다. 남편이 종필을 만난 건 그 전이었는데 빈곤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종필이 ‘대한성공회 봉천동 나눔의 집’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종필의 습작 중 일부는 봉천동에서 이루어졌다. 2000년의 어느 밤, 남편은 종필에게 “나 결혼해. 결혼할 사람 이름이 미례야”라고 말했다 한다. 종필의 “미례? 내가 아는 류미례?”라며 깜짝 놀라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남편은 푸른영상에 있는 내게 전화를 했고 셋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봉천동 국회단지 입구에는 날이 어둑해지면 숭어를 파는 트럭이 오곤 했는데 우리는 거기서 회를 떠다가 장애인센터에서 술을 마시며 놀곤 했다. 종필은 ‘봉천동 나눔의 집 10주년 기념 영상물’과 ‘나눔의 집 15주년 기념 영상물’을 만들었다. 20주년 영상물은 2006년에 내가 만들었는데 그 때 종필은 “너가 가지고 있는 게 낫겠다”라며 그동안의 나눔의 집 촬영본들을 몽땅 내게 맡겼다.
‘촬영본’이라는 단어를 쓰다 보니 마지막 기억이 떠오른다. 화천에서 투병을 하고 있을 때 종필을 만나러 갔었다. 많이 야윈 종필에게 “빨리 나아서 희망일터 영상물 만들어줘” 했더니 아픈 와중에도 종필은 깜짝 놀라며 “내가 그걸 만들어준다고 약속했었니?” 물었다. 희망일터는 남편의 새 직장이다. 2013년에 남편은 다니던 직장에서 나와야했고 몇 년간의 고군분투 끝에 2016년에 ‘희망일터’라는 장애인 직업재활센터를 만들었다. 개소식 촬영은 종필이 했는데 행사가 끝난 후 밥을 먹으며 남편은 종필에게 “나중에 후원의 밤 하면 영상물 만들어 줘”라는 부탁을 했고 그 때 종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후원의 밤 행사는 단체가 자리를 잡으면 하는 거니 아직은 때가 아니다. “희망일터 영상물 만들어줘”라는 나의 말은 빨리 나으라는 의미였는데 종필은 자기가 못다한 일이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란 거다. 남편의 실직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고 그래서 남편의 새출발을 누구보다 기뻐했으니 희망일터의 형편이 나아져서 후원의 밤 행사를 한다면 종필은 기뻐하며 영상을 만들었을 텐데.
종필이 떠난 후, 아니 떠나기 직전, 조심스럽게 미디어위에서 종필의 사진이나 인터뷰 영상들을 모으자는 말이 나왔다. 나는 2016년의 워커스 인터뷰 녹음파일을 받고 싶었다. 20년이 넘는 인연이었지만 그 날처럼 종필의 삶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녹음파일은 삭제했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글 기자들은 영상기자들과 다른 것같았다. 그날의 그 대화가 날아가버린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안한 줄 알면서도 내 휴대전화를 뒤져보았는데 역시나 없었다. 대신 다른 것이 있었다. 2015년 11월 미디어위 MT의 밤샘토론 녹음파일. 사실 밤샘토론이라고 하지만 녹음한 분량은 50분 남짓이다. 그 때 우리는 <망각과 기억1>을 기획 중이었고 작업에 대한 고민이 담긴 그 대화들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아까워 나는 녹음을 했었다. 거기 종필의 목소리가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무거워지고 느려지던 종필의 목소리. 그리운, 하지만 이제 기계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종필의 목소리.
종필을 미디어위로 이끈 것은 나였다. 당시 나는 미디어위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제작지원을 받아서 마감 안에 마쳐야 하는 영상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솔직히 말을 해야겠다. 나는 세월호 작업을 감당하지 못했다. 2014년 9월, 일란의 제안으로 미디어위 활동을 시작한 후 초반 얼마 동안은 열심히 했다. 하지만 나는 본 궤도에 진입하지 못했다. 나는 그 계기가 됐던 날을 기억한다. 봄이 오고 있었고 세월호 참사 관련 영상물을 제작해야 해서 김재영 감독과 나는 세월호 분향소 앞에 있는 가족대기실에서 어떤 부모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긴 시간이 지나도 약속한 부모님은 오지 않았고 너무 오래 기다리는 우리들이 안돼 보였는지 공방의 어머님 중 한 분이 즉석에서 어떤 분을 섭외해주었다. 희생된 단원고 학생의 어머니였다. 그 분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엄청나게 많이 울었는데 눈물 섞인 인터뷰를 하던 그 분이 갑자기 말씀을 그치고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니, 저보다 더 많이 울면 어떻게 해요?”
압도적인 슬픔. 나는 그 슬픔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 때부터 나는 주변부를 맴돌았다. 주변부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촬영본 녹취를 풀거나 가끔의 회의에 나가는 일밖에 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영광스러웠지만 역할도 못하면서 이름표만 다는 일이 비겁한 것같았다. 매번 그만 두겠다는 말을 준비해서 나갔지만 말하지 못한 채 돌아오곤 했다. 다들 나처럼 진행 중인 작업이 있었지만 산더미같은 부담감을 안고서도 묵묵히 할 일을 해나갔다. 그러다가 김일란 감독이 <공동정범> 작업을 끝내고 돌아오겠다고 휴직을 했다. 그동안 그렇게 떠난 감독들 중에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 일란은 4·16연대 미디어위원회를 만든 사람이었고 나에게는 기둥같은 사람이었기에 일란의 휴직 소식에 크게 놀랐다. 일란이 돌아오겠지? 일란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걱정하는 내게 종필은 말했었다.
“나는 끝까지 남을께”
종필은 첫 영화 <IMF 한국, 그 1년의 기록 – 실직노숙자> 이후 노숙인 형들에 대한 부채감과 빈곤 문제에 대한 책임감을 평생동안 등짐처럼 지고 다녔다.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활동을 하면서도 “<빚> 만들어야 하는데”하며 걱정하곤 했다. <빚>은 당시 진행중이던 금융채무자에 대한 작업이었다. 그렇게 늘 걱정하던 종필은 일란의 휴직 이후,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일란이 휴직 소식을 알리던 회의에서 나는 일란이 사전에 종필에게 상의를 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종필이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쯤 전에 종필과 일란이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7월 23일, 일란과 연분홍치마 식구들을 만난 후, 종필은 투병 사실을 공식적으로 알리고 더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내가 종필을 만났던 7월 15일 까지만 해도 종필은 말했다.
“말하지 마라. 때가 되면 내가 말할 테니 너는 말하지 마라”
종필은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고 나 또한 그 희망에 절대적으로 의지했다. 쉼 없이 기도했고 좋은 일만 생각했다. 종필이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버린 후, 나는 가끔 그 선택을 후회한다. 7월 15일, 화천의 황토집에 같이 있었던 박경석 노들야학 교장과 김일권 시네마달 대표는 종필을 만나고 돌아온 후, 주변에 종필의 상황을 알리자는 의견을 조심스레 타진했다. 하지만 나는 종필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묵직한 비밀을 안고 지냈던 그 시간들은 두렵고 또 괴로웠다. 나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그런 시간을 견뎌야했던 밀가루와 안창규 감독은 더 두렵고 더 괴로웠을 것이다.
종필과의 만남을 떠올리면 수많은 후회들이, 되돌리고 싶은 선택의 순간들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후회는 7월 15일 이후에 종필을 만나는 일을 남편에게만 맡긴 거다. 나의 딸이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했고 사고의 충격 때문에 누군가 늘 곁에 있어야만 했다. 그 역할을 내가 했다. 내가 엄마여서가 아니다. 현대의학이 치료를 포기한 종필이 좋아지는 데에는 기적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기적에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 시간을 버는 데에는 심리적 안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편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남편과 나, 둘 중에 한 사람만 종필 곁에 머물러야 한다면 그 사람은 남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친구면서 사제인 상태로 남편은 여러 번 종필을 만났다.
종필이 그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날 줄 몰랐다. 수술을 하루 앞둔 일란이 전화를 해서 종필 만난 얘기를 들려주었을 때, 종필이 그 만남을 기뻐했고 너무 반가워하며 눈물을 흘렸고 그리고…… “나중에 종필과 따로 2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는 일란의 말을 들었을 때, 나도 곧 종필을 만나러가야겠다, 그래서 종필과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강릉가는 버스표를 끊다가 종필의 부고를 들었다. 그 때도, 지금도, 여전히 꿈 속을 헤매는 것같다.
올해 정동진의 해변에서 남편은 김동원 감독, 김태일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다 “내 친구 종필이 죽어가는데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라며 울었다. 남편도 사실 나처럼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뒤늦게 나는 후회한다. 어쩔 수도 없으면서 후회를 한다. 내가 갔어야 했다고. 투병사실을 공식화한 후 너무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에 지친 종필이 혼자 있고 싶다고 했을 때 종필과 같은 도시에 있으려고 속초의 모텔에서 전화를 기다리며 기도하던 사람은, 그래서 꼬박 하루를 기다린 끝에 허락을 얻어 병실 문을 열고 “참 정성이다”라며 힘없이 웃던 종필을 보던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나였어야 했다고, 나는 아프게 후회한다. 내게로 향하는 단 한마디의 단어도 얻지 못한 채 나는 더 이상 종필을 보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초승달이 뜬 어느 밤, 집 앞 농로를 걷다가 “종필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영혼이라도 잠시 우리 곁에 머물러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하니 함께 걷던 남편이 아무 말을 안했다. 정신나간 소리는 그만 하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종필이 여러 병원에서 치료를 거부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내 정신은 반쯤 나가 있었던 것같다. 병원장 친구도, 내가 다니고 있던 한의원 선생님도, “편안한 곳에서 이별을 준비하게 하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어서 기도를 했다. 무엇이든 해야만 했으니까.
지금도 여전히 종필의 부재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슬퍼도 힘들어도 할 일은 해야 한다. 의사로부터 3개월 밖에 못 산다는 말을 듣고서 종필은 “5년만 더 살고 싶다”고 밀가루에게 말했다 한다. 그가 살고 싶어했던 5년 동안만이라도 종필이 이루려고 했던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종필이 위원장을 맡은 후, 종필은 가끔 내게 일거리를 주었다. 종필의 장례식장에서 미디어위 동료들과 함께 일하며 알았다. 종필이 내게 일을 맡긴 것은 내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내가 멀어져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새로이 결합한 미디어위 회원에게 적절한 일을 맡기며 그의 발전을 도왔던 것처럼 종필은 내가 그렇게 미디어위 회원으로 남아있을 수 있도록 속깊은 배려를 했던 것이다. 1997년에 처음 종필을 만난 후 종필에게 몇 번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었다. 성공회 나눔의 집 작업을 함께 할 때에도,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짜는 일을 도와달라고 했을 때에도, 홈리스행동의 미디어교육을 부탁했을 때에도, 늘 나는 내가 필요해서, 내게 그 일을 할 능력이 있어서 나를 부르는 걸로만 알았다. 하지만 종필이 미디어위에 새로 결합한 신입회원들을 챙기는 것을 보면서 사실 나 또한 그의 챙김을 받으며 이렇게 성장해왔다는 것을 알았다. 다큐인 후배들도 그렇게 챙겼을 것이다.
“이번에 진짜 대단한 작품이 나올 것같아”
팔레스타인을 다룬 반다의 작업을 설명할 때에, 밀가루의 <사람이 산다>를 보내줄 때, 종필은 자기의 성취처럼 기뻐하며 자랑했다. 그래서 7월 15일, 화천 황토집에서의 어떤 장면이 슬프다. 그 날 김일권 피디는 <망각과 기억2: 돌아 봄>이 DMZ다큐멘터리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고, <사람이 산다>가 야마가타영화제에 간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종필에게 빨리 나으라고 했다. 그 격려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던 종필이 말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가 제일 슬펐어. 가지 못할 것같아서”
후배들의 성장과 성취를 자기 일처럼 자랑하고 기뻐하던 종필이, 아마 평소라면 너무 기쁘다고 좋아했을 종필이 슬프다고 말해서 나는 그날 정말 못견디게 슬펐다.
나는 종필처럼 누군가를 그토록 깊고 넓게 챙기지 못한다. 5년을 더 살고 싶었던 종필의 시간을 나는 결코 채우지 못할 것이다. 다만 종필이 마지막 순간까지 “잘하겠지?”라고 말하며 믿었던 후배들, 그 변화와 성장을 지켜보지 못해서 안타까워했던 후배들에 대한 마음을 어떻게든 잇고 싶다.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4주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나의 할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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