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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무실에서 말많은 사람 1등이다.
내가 혼자 생각한 게 아니라 사무실에서 말없는 사람 2등이 그렇게 말했으니 뭐 대충 맞는 듯.
새해에는 말을 좀 줄이고 묵묵히 일해야지.
산타쇼는 훌륭하게 잘 끝나는 듯.
어제 밤에 자정미사 드리고 집에 늦게 돌아와서 푹 자느라 지금 일어났다.
아이들이 안 깨서 다행이지 늦잠을 잤더라면 하늘은 산타없는 크리스마스를 보낼 뻔했다.
동생들 두 명은 어린이집에 산타가 와서 대신 전해줬는데
하늘은 집 말고는 산타가 선물을 전해줄 공간이 없기때문이다.
히돌은 '&*^% 팽이'라고 알아듣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팽이 이름을 대면서
산타가 집으로 오면 그거 받았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하는데 그건 정말 불가능한 미션이다.
하늘은 닌텐도 짱구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산타가 닌텐도 게임들을 다 알라나"하고
혼잣말처럼 흘리는 내 말을 듣더니 why 사춘기와 성으로 바꿨다.
그 책이 공부방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앵두는 산타가 주신 뽀로로 책을 열심히 보면서 만지지도 못하게 한다.
하돌은 why책 바다를 너무 좋아해서 장난감 서랍에다가 넣어두려는 걸 남편이 말렸다.
책은 책이니 책장에 넣어야한다고 타일러주니 약간 시무룩해하며 책장에 넣어두었고
누나나 동생이 만지면 바짝 긴장해서 살핀다.
그런 모습을 보니 기분이....참 좋다.
앵두는 책을 열심히 들여다보다 내가 같이 좀 보려하면 얼른 돌아앉아서 못 보게 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그 책 산 사람이거든!"하는 말이 저절로 올라오지만
아~ 이건 성공한 쇼의 댓가일 뿐.
나는 아주 오랫동안 산타를 믿었지만 엄마 아빠는 산타가 뭔지 모르셨기에
매년 이 시간이면 텅빈 머리맡을 보며 한숨을 쉬었던 것같다.
어느 해에는 부엌에 선물이 놓여있는 걸 발견하고 팔짝팔짝 뛰었으나
언니 선물이라는 걸 알고 엄청 실망.
우리집은 큰길 가에 있었는데
누군가 길에서 부엌창문을 연 후 찬장 위에다가 선물을 올려두었던 거다.
이름없는 카드와 선물을 보고 엄청 부러워했던 기억이..
어릴 때부터 걘 좋아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는데.
갑자기 언니가 보고 싶다. 러시아에 눈 많이 올텐데.
2주 전쯤 밥먹으면서 "나는 어릴 때 한 번도 산타가 선물을 안 줬어" 하니까
남편이 "그러게 좀 착하게 살지 그랬어?" 하는 거다.
심통이 좀 났지만 참고 넘어갔는데 며칠 후에 하돌이 나에게 다가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엄마, 엄마는 삼촌이랑 많이 싸워서 선물을 못 받은 거야?"
하돌은 며칠 전 밥상의 대화를 그렇게 오랫동안 생각을 했던 거다.
하돌의 솔직함에 내가 당황할 때마다 하늘은 늘 나선다.
"아니야. 엄마가 너무 시골에 살아서 산타할아버지가 모르고 지나간 거야."
그럴 때 뭔가 합리적으로 설명을 해야 하는데...
결국 내가 착한 어린이가 아니었다는 것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내년 산타쇼는 좀더 세심하게 준비되어야할 것같다.
하늘은 공부방 언니들 덕분에 산타에 대한 많은 지식들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의 구체적 지식에 대답을 못하면서 산타의 존재는 신뢰를 잃어가는 듯.
어쨌든 이렇게 그날은 지나갔다.
모두에게 메리크리스마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일상으로 드리는 기도
-필립 그로닝 감독의 <위대한 침묵>
언어가 사라진 뒤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본다. <위대한 침묵>은 영화 안팎으로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예술영화 전용관의 고즈넉한 조조상영을 기대했다가 구름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깜짝 놀랐다. 매진으로 인터넷 예매가 불가능하여 1시간 일찍 극장을 찾긴 했지만 그래도 빈 자리가 있을 거라는 느긋한 예상은 그렇게 쉽게 깨어졌다. 맨 앞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다 문득 돌아보면 객석을 꽉 채운 수많은 사람들이 진지한 눈망울로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날 그 아침의 관객들과 함께 나는 성스러운 의식을 치렀던 것같다. 스님과 수녀님, 그리고 젊은 여성부터 나이 지긋한 중년의 신사가 함께 치렀던 그 의식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침묵의 세계를 향한 경배였다.
영화는 알프스의 하얀 산으로 둘러 싸인 카르투지오 수도원이 배경이다. 금욕생활을 하는 수사들의 일상과 수도원 곳곳의 풍경들, 별빛과 눈빛과 푸른빛들이 어우러진 자연의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162분은 길면서도 아름다운 한 편의 시였다. 그런데 그 시는 세간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고요하지만은 않았다. 제목에 ‘침묵’이라는 말이 들어가있지만 상영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침묵을 맹세한 사람들이 입을 다물어 인간의 언어가 사라진 그 곳에는 들리나 듣지 못했던 소리들이 하나 둘씩 살아난다.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 신입 수사의 옷을 만드느라 가위질 하는 소리, 뒷굽이 닳아버린 신발에 접착제 바르는 소리, 청빈한 식사를 비추는 햇살 만큼이나 나른한 벌새의 웅웅거림. 그 사이 드물게 들려오는 인간의 소리인 그레고리안 성가는 샘물처럼 영혼을 적신다.
별다른 체계 없이, 친절한 설명 없이 교차하는 이미지와 풍경, 소리들의 엇갈림은 언뜻 불친절해보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홀로 의미를 머금고 있다. 나이든 수사가 두터운 눈더미를 치운다. 묵묵한 손놀림에도 어느덧 이마에는 땀이 배어나고 거친 호흡을 몰아쉬다 잠깐 카메라를 보며 미소를 짓는다. 장면이 바뀌면 수사는 창고에서 씨앗들을 꺼낸다. 아주 긴 시간과 많은 장면들이 흐른 후에야 그 씨앗은 푸른 잎으로 바뀌어있다. 주님의 은혜처럼 한결같은 시간의 변화는 눈보라를 따사로운 햇살로 바꾸었고 푸른 잎들은 부드러운 바람에 속삭이듯 흔들린다. 식사를 끝낸 수도사는 감사기도를 드린 후 호흡같은 걸음으로 텃밭을 돌아본다
난방을 위해 나무를 자르는 일에서도 소명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수도원에 머문 날이 오래된 수사는 톱질이 규칙적이고 느릿하다. 새로이 들어온 수사의 호흡은 조금 빠르다. 신입 수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수건으로 땀을 닦을 때 깨달음 하나가 반짝 빛난다. 톱질은 난방을 위한 목적에만 복속되는 일이 아니다. 톱질 한 번 한 번이 기도이고 그렇게 우리들 삶 전체가 주님에게 바치는 예배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인생의 평균 65년을 수도원에서 보내며 하루하루가 흘러도, 계절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수도사들은 그렇게 같은 기도문을 외며 매일 같은 의식 속에서 변함없는 일상을 살아간다. 영화 속 고요의 시간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맡기고 있노라면 매일, 일주일, 한 달, 일 년, 그리고 인생 전체가 그렇게 온전히 주님의 것일 수 있을 것만 같다. 영화는 그렇게 반복되는 수도사들의 행위를 통해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숨은 자유를 찾기를 바라는 듯하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이 영화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그렇게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말미, 폭소가 터지는 장면이 있다. 침묵을 영상 속에 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한 감독이 관객에게 유일하게 허락한 웃음. 그런데 실컷 소리 내어 웃다보면 이런 식의 웃음은 영화 밖 세상, 내가 살아가는 일상 안에서는 무시로 살아 숨쉬고 있음을 알게 된다. 감독은 침묵 속에서 관객들에게 자유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고 관객인 나는 감독이 허용한 자유를 찾다 문득 하느님께서 내게 허락한 무한한 자유를 발견한다. 웃음만큼 말을 아끼던 감독이 영화 말미에 늙은 수도사의 입을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
“햇빛이 만물을 비추듯 성령은 늘 우리 삶 전체에 비추입니다. 날 장님으로 만들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내 영혼에 이롭다고 여기신 배려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집에 돌아와서 서랍 안의 성경을 꺼내고 묵주를 준비한다. 아이 때문에 중단되었던 작업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이 한마디를 읊조리며 일상의 기도를 드린다.
“주께서 저를 부르시어 제가 이 곳에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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