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과 소리를 인위적으로 분리했음에도 끌어안고 싶은 <워낭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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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보신각의 타종식 현장을 중계한 KBS 방송이 왜곡보도 논란에 휩싸인 건 모두 아는 일이 되었다. 현장에 있지 않았으므로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데, 카메라의 앵글은 촛불을 들고 목소리를 높이던 군중을 교묘히 피해 찍었고 조작하지 않고서는 막는 것이 불가능한 현장음은 조작되었다고 한다. 그날의 현장에 있었던 문화평론가 진중권은 진보신당 게시판에 이에 관한 글을 남겼다. 그의 글의 요지는 “그것은 중계방송이 아니라 하나의 판타지물”이라는 표현으로 요약된다. 이것이 <워낭소리>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우리의 현실 경험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워낭소리>를 이 왜곡보도와 동일시하여 비판하려는 뜻을 갖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영상과 소리의 합일성이 실은 얼마나 쉽게 분리되고 이용될 수 있는지 동시에 그것이 분리되어 재결합했을 때 어떤 왜곡이나 충만한 정감 그 어느 것이라도 불현듯 일으킬 수 있는지를 예시하고 싶다. 새해 벽두의 이 사건은 <워낭소리>를 생각할 때 무관하지 않으며 나의 관심은 진중권이 아니라 그가 말한 판타지에 있다.
워낭 울리지 않아도 워낭소리가 나네?
사운드의 영화학자 미셀 시옹은 그의 저서 <영화와 소리>(민음사 펴냄)의 첫장을 우연히도 소와 음매 사이에 관해 설명하는 것으로 연다. 자크 타티의 영화 <트래픽>에서 트럭을 몰고 가던 한 남자가 초원에서 저 멀리 있는 희미한 물체를 얼핏 보았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은 그의 정확하지 않은 시야가 아니라 원근법을 깨고 귀에 가깝게 들려오는 음매라는 소리라는 것이다. 이때 소라는 기의는, 그러니까 저것이 소라는 것은 음매라는 소리의 기표로서 확실하게 지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영상과 소리의 조정에 관한 예이며 한편으로는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는지에 관한 예이기도 하다. 이것 역시 <워낭소리>를 말하는 데 무관하지 않다. 아니 무관하기는커녕 미셀 시옹은 다른 저서 <오디오-비전>(한나래 펴냄)에서 “영화는 영상예술. 환영(幻影)이라고? 물론. 그것 말고 뭐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 책에서 얘기하려고 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시-청각 환영”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나의 관심은 미셀 시옹이 아니라 그가 말한 시-청각 환영에 있다.
경상북도 봉화에 사는 한 노부부와 그들과 함께 세월을 살아온 마흔살 먹은 늙은 소를 주인공으로 한 이충렬의 영화 <워낭소리>는 이들 촌부의 일상적 모습을 특히 그들이 소와 함께 얽혀 사는 모습을 일종의 운명적 공동체로 보여주는 영화다. 이때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소가 등장하지만 할머니는 다소 다른 자리에 있고 할아버지와 소가 주된 주인공이다. 할아버지의 느리고 무너질 것 같은 걸음과 마흔살 먹은 소의 비틀거리는 걸음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줄 때, 얇게 휘어서 성치 않은 왼쪽 다리를 이끌고 논밭을 매는 할아버지와 숨쉬기도 곤란한 소가 함께 농사일을 할 때 그들은 흡사 하나가 된다. 결국 이 영화는 소멸하기 직전에 놓인 두 육신 중 하나가 먼저 떠나고 머지않아 또 하나가 곧 따를 것이라는 비정한 삶의 퇴장 순서에 대한 아름다운 마지막 기록이다. 이 점을 성실하게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워낭소리>에 배인 정감을 설명하는 길이 되겠지만 여기에는 사실 좀더 말해야 할 다른 문제들이 있다.
보신각 타종식의 왜곡방송과 미셀 시옹의 소와 음매 사이의 지적을 떠올릴 때 <워낭소리>가 정감을 일으키는 진원지는 단순한 이 서정적 묘사를 넘어서 다른 영역에 있다고 나는 느낀다. 전적으로 공감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지와 사운드에 가해진 이 영화의 인위성을 주목해야만 한다. 진중권이 말한 판타지와 미셀 시옹이 말한 시-청각 환영의 문제가 여기 있다. <워낭소리>는 판타지이며 환영의 영역에 있다.
이 점이 <워낭소리>의 전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된다. 예컨대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올드 파트너’(Old Partner)이지만 한글 제목은 <워낭소리>다. 영어 제목은 영화의 내용적 면모를 따라 지어졌지만 한글 제목은 정감의 작동방식에 따라 지어졌다. 그 방울의 소리가 그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워낭은 소의 목에 걸려 있는 방울이고 할아버지의 소는 워낭을 차고 있으며 소리를 낸다. 그러니까 워낭이 울리면 워낭소리가 날 것이다. 혹은 워낭이 울려야 워낭소리가 날 것이다. 하지만 워낭이 울리지 않아도 워낭소리가 들린다는 것이 이 영화의 역전된 착상이다.
힘들어서 더는 농사일을 못하겠다며 이제 우리도 다른 이들처럼 농약을 치자고 할머니는 잔소리를 늘어놓고 할아버지는 소의 건강에 치명적이니 그럴 수 없다는 말로 둘러댄다. 밭에서 시작한 이 대화는 그들이 서로 갈라진 길로 나뉘어서 갈 때조차 이어진다. 그때 그들은 침묵하고 말하고 있지 않은데 대화는 외화면에서 이어진다. 그때 그 자리에서 말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자리에서 녹음된 소리가 지금 그들의 모습 위로 들어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노부부가 소를 타고 논밭과 집을 오갈 때, 허름한 대청마루에 앉아 있을 때, 그들의 입은 조용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늘 화면 위를 흐른다. 혹은 다른 대화를 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우리가 듣는 내용은 늘 소에 관한 것이다. 만약 한 두 장면에서 이 방식이 고수될 때 그건 기능적인 선택이며 특기할 만한 사항도 아니지만 이 영화는 시종일관 집요할 정도로 그러하다. 그러니까 소리는 그때 그 자리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인식하는 것이 이 영화를 보는 첫 번째 방법일 정도다.
여기에 두 번째 종류의 출처없는 소리가 등장한다. 비판받을 만한 구석이 있지만 너무 노골적이어서 심지어 순박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 인공적 소리는 농촌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거의 매 장면에서 들려온다. 후시녹음으로 들어갔을 것이 분명한 지저귀는 산새 소리, 구슬픈 뻐꾸기 소리, 온갖 종류의 벌레소리, 개구리 소리, 우리가 농촌이라는 곳에 관해 상상할 때 떠올릴 수 있는 거의 모든 소리가 들려오지만 그건 지금을 가리키고 있지 않으며 화면 안에 그 소리의 진원지는 없다. 그중에서도 워낭소리는 소가 움직이지 않아도 마치 환청처럼 지속적으로 들려온다.
영화 전체가 일종의 더빙판 같은 느낌
이렇게나 끈질기게 영상과 소리를 분리시켜 완성한 다큐멘터리가 또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영화 전체가 일종의 더빙판이라는 느낌까지 든다. 만약 이 영화를 볼 때 소리를 끄고 영상만 본다면 혹은 영상을 지우고 소리만 듣는다면 우리는 그때 서로 다른 두 버전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니 이때 영상이 행사하지 않는데도 이미 행사되는 소리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미셀 시옹은 SF영화 <스타워즈>에서 그 유명한 자동문의 문소리를 지적한다. 관객에게 열려 있는 문과 닫힌 문 두숏을 보여주고 그 사이에 문이 열릴 때 나는 푸쉿 소리만 들려주어도 관객은 스스로 문이 열렸다 닫히는 장면을 보았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말하는 “추가된 환영”일 것이다. <워낭소리>는 이 노부부가 오로지 소에 관해서만 말하고, 소와 함께 살고 있으며, 소와 함께 인생을 마감할 것 같다는 환영을 추가하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두 가지 비판의 입장이 있을 수 있다. 만약 다이렉트 사운드(영상과 소리의 활용은 유물론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 주의자들이라면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기극이다. 혹은 다큐멘터리의 진실성이 현실의 내밀한 포착, 즉 구성이 아니라 포착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라면 또한 <워낭소리>는 심각할 정도로 리얼리티가 어그러져 있어서 비판의 도마에 오를 것이다. 그것은 진실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맥락이다.
나는 <워낭소리>가 일반적인 다큐멘터리가 추구하는 진실을 포착하고자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실이 있다 해도 그건 우리가 생각하는 촌부의 세밀한 삶의 리얼리티- 이미 말한 대로 영상과 소리의 불일치로 리얼리티는 거의 소멸한다- 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의 구축만이 이 영화의 진실이다. 이 말의 절반은 비판이지만 절반은 옹호일 것이다. <워낭소리>의 목적은 자기 환영성의 완성에 있다.
환영성을 강력하게 만드는 몇 가지 것들이 있다. 말하자면 우선 관객이 이 영화를 기승전결로 이해하도록 유도하려는 내러티브의 고정점이 있다. 영화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누는 대화의 전부가 소에 관한 이야기로만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농사를 짓고 딸린 가족이 없는 노부부의 삶이 단조롭다고는 하나 그들의 삶의 대화가 전부 소에 관한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건 현실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거의 늙은 소에 대해서만 말한다.
대화가 전부는 아니다. 카메라가 인물을 담는 방식에서도 주체와 대상을 나누어서 한곳으로 집중하게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소를 보여주는 카메라의 시선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감독은 할머니가 영화를 좀 알고 할아버지는 사진을 찍는 줄로 알 만큼 몰랐다고 표현했다. 이때 영화에서 할머니는 늘 보는 사람이며 할아버지와 소는 늘 보이는 대상이다. 할아버지가 무언가를 본다면 그건 소를 보는 것이며 소에 대한 반응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 오가는 시선의 교환보다 할아버지와 소 사이의 시선의 교환이 훨씬 많으며 그리고 건너에는 그 둘을 보는 할머니의 시선이 있다.
또한 할머니는 카메라를 의식하며 말하지만 할아버지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못하고 잡힌다. 말하자면 할머니가 카메라에 대고 액션을 하는 것이라면 할아버지는 대부분 카메라가 잡아내는 리액션의 상태다. 할아버지와 소가 눈과 눈, 발과 발이라는 육체적 환유의 관계로 묶이고 있을 때, 또한 할아버지의 갈라 터지고 굳은살 박인 워낭을 쥔 손,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 그것은 소의 늙은 몸과 머리로 자연스럽게 연관된다. 심지어는 그렇게 교차편집된다. 그러나 할머니의 육신은 그 어디에서도 그만한 클로즈업을 부여받지 않는다. 할머니를 영화 안에 화자로 심어두고 나머지 대상인 할아버지와 소를 보도록 하는 카메라의 방식이다. 그게 이 영화에서 할머니가 객관적 화자가 되고 할아버지와 소가 주관적 오브제가 되는 이유다.
리얼리티 강조한 <송환>과는 대척점에
이미 말한 것처럼 <워낭소리>의 환영에의 유지는 강박적으로 이미지와 사운드를 분리시킨다. 그리고 인물들을 주체와 오브제의 층위로 갈라놓는다. 그것들을 따라 이야기 안에 이야기를 진전시킨다. 이때 문득 궁금해지는 것은 그렇다면 왜 이 영화는 이런 방식을 동원하여 환영을 이토록 추구하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그것이 한편으로는 재현적 실패에 기인하며 또 한편으로는 극화에의 욕구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충렬은 물리적으로 충분한 재현을 하는 데 실패했을 수도 있다. 즉 사운드를 쓸 만한 장면과 이미지를 쓸 만한 장면을 서로 나누어 인위적으로 재결합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야기를 진전시킬 수 없을 만큼, 유용한 촬영분을 충분히 찍어두는 데 실패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중요한 건 거기에 보완심리가 작용했다는 거다. 나는 이 기술적인 실패를 보완하려는 욕구가 우선 이 영화의 환영성을 끌어낸 한 가지 계기라고 추론한다. 나머지는 한번 그렇게 들어선 환영을 끝까지 고수하려는 태도다. 그건 거의 극영화의 환영을 유지하려는 태도에 가깝게 다가가며 감독 자신에게 몇 가지 철칙을 안겨주는 것 같다. 이 점에 관해 비판이나 비난이 아닌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 김동원의 <송환>과 변영주의 <낮은 목소리2>의 한 장면을 말해도 좋을 것이다.
김동원의 <송환>에는 이 다큐를 유명하게 만든 대표적인 장면이 있다. 비전향 장기수 조창손 할아버지와 박영석 할아버지가 오랜만에 만났을 때 김동원은 그 둘의 대화에 마이크를 갖다 대는 것이 죄송스러워 끝내 그 둘이 대화하는 장면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그 순간의 리얼리티를 놓친 것이다.
김동원은 찍을 수 있는 것과 찍지 못할 것이 있으며 찍지 못한 것은 메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는 왜 메울 수 없는지 설명하는 것 자체를 영화의 형식으로 변환하여 넣은 다음 역설적으로 그 장면을 복원하였다. 어찌됐든 그는 여기에 어떤 환영을 도입하는 대신 찍지 못한 장면(즉 듣지 못한 장면)의 실패의 기록을 남기기로 한 것이다. 그게 위대한 과정으로서의 다큐멘터리, 태도로서의 윤리적 다큐멘터리를 완성한다. 거기에서 환영의 개입은 자연스럽게 제거된다.
김동원의 <송환>이 얼마나 환영을 경계하는지는 비전향 장기수들을 다룬 다른 다큐에 비해 <송환>에서 그들을 영웅시하는 면모가 단 한 장면도 없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충렬의 경우는 그 반대일 것이다. 그는 말 한대로 아마 꼭 찍고 싶었던 장면을 김동원처럼 놓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김동원과 또한 다르다. 그는 보완의 과정을 거치기로 하였을 것이며 그걸 복원하기 위해 들여온 방편 중 하나가 바로 소리와 영상을 적절하게 분리, 재결합하는 것이다. 이 점이 자연스럽게 환영의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김동원이 조정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충렬은 조정의 가능성을 시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 “송아지가 날뛰어서 할아버지가 쓰러지는 장면을 느리게 잡은 이유는 뭔가”(<씨네21> 684호 ‘노인과 소가 있는 풍경 <워낭소리>’)라고 물었을 때 이충렬은 “그 상황이 벌어졌을 때 ‘어’ 하고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한테 뛰어들었다. 그냥 쓰면 내가 드러나서 하는 수 없이 슬로와 스틸로 편집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한다. 늙은 소 대신 들여온 젊은 소가 새끼를 낳고 그 송아지를 길들이다가 할아버지가 송아지에 채여 넘어지는 장면에 대한 물음과 답이다. 그런데 이 답은 당연한 말 같지만 경우에 따라 이상할 수도 있다. 나는 이충렬의 답을 듣고 변영주의 영화를 떠올린다. 만약 변영주라면 이 장면에 대한 이충렬의 대답에 공감할 것인가.
비전문 배우 동원한 극영화인 셈
변영주의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2>에는 유명한 한 장면이 있다. 고랑에서 호박을 캐오던 할머니가 어쩌다 호박을 놓치자 갑자기 카메라 뒤에 있던 감독이 뛰어들어 그걸 주워 함께 걸어오는 장면이다. 감독이 이때 “할머니는 우리 영화에 어떻게 나왔으면 좋겠냐”고 물으면 “소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두고두고 이 다큐의 본질을 말할 때마다 말해져왔다.
이렇게 물어보자. 이충렬은 안된다고 생각하는 걸 변영주는 왜 된다고 생각한 것인가. 이충렬은 할아버지가 달려드는 송아지에게 넘어질 때 왜 자기가 그 안으로 뛰어들어간 것을 보여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반대로 변영주는 왜 프레임 안으로 갑자기 뛰어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한 것인가. 여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 두 장면은 연출에 대한 지론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변영주는 잘 알려진 것처럼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에 맺어진 관계를 중요시하는 다큐를 찍었다. 변영주는 그러므로 카메라가 돌아가더라도 시급한 일이 있으면 그 안에 자기가 등장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환영을 깨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반면 이충렬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드러난 프레임을 잘라내는 한이 있어도 극화된 환영성을 깨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환영을 깨고 관계를 인정할 것인가, 환영을 유지하기 위해 그 관계가 드러나더라도 배제할 것인가. 이충렬의 선택은 후자다.
<씨네21>의 질문에 대한 이충렬의 앞선 대답은 이 영화에 할머니를 제외한 그 누구의 인터뷰도 없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한다. 집에 가족이 찾아왔을 때 나는 이충렬이 자식들을 인터뷰하지 않았다고 믿기 어렵다. 단지 인터뷰는 진행되었겠지만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걸 넣는 건 다큐멘터리의 오래된 방식인데도 하지 않았다. 이유는 자기 자신이 화면에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물론 인터뷰를 넣지 않고 완성된 수많은 다큐멘터리가 있음에도 <워낭소리>의 경우는 누구의 인터뷰라도 극의 흐름을 깬다면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인상이 강하다. 극적인 구성을 깨기 싫은 것이다.
극적인 구성이라는 면에서 여기 한 가지를 추가할 수 있다. 이른바 극화된 시점숏이다. 영화에는 소가 음매하거나 푸르륵거릴 때 그걸 보는 할아버지의 시점숏이 있고, 그를 보는 듯한 할머니의 시점숏이 있다. 그러나 시선이 잘 맞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같은 자리에서 계획적으로 설계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말해준다. 전체 구성에 입각해서 편집상 시점숏을 만들어낸 것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시점숏이란 시선의 연속성에 헌신하며, 시선의 연속성이란 극영화가 환영적 완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방법인데 이 영화는 그걸 따르려고 한다. 다큐멘터리에서도 할 수는 있겠지만 미리 계산된 카메라의 약속이 아니면 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그것이 등장할 때 거기에는 극화함으로써 환영을 강화하겠다는 욕구가 있는 셈이다. 일반의 다큐멘터리에서 창작자가 대상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가 대두된다면 일반의 극영화는 대상이 대상과 어떻게 환영적으로 결합하는가에 축을 두는데, <워낭소리>는 후자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나는 이 영화를 비전문 배우들을 동원한 극영화라고까지 말하고 싶어진다.
사멸의 회한을 보았다면 제대로 본 것
“애초 떠올렸던 이미지들을 염두에 두고 집중적으로 재구성했다. 현실을 도려내서 보여주는 액티비즘의 관점에서는 비난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방식이 심성적으로 끌린다.”(이충렬, <씨네21> 앞의 인터뷰) 나는 이충렬이‘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진실한 삶의 현장을 낱낱이 포착하려 했다’라고 말하는 대신 위와 같이 말하는 태도가 솔직하고 현명해 보인다. 우리는 결코 <워낭소리>를 보고 노부부의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그리고 통일된 삶을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건 거짓이 될 것이다.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의 진실성이라는 연장선에 놓고 혹은 그 위반을 놓고 페이크다큐라고 비판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으며 더군다나 간편한 일이다. 하지만 내게 이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는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 하는 원론적인 질문이 아니라 우리는 당도한 환영을 매 순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인 것처럼 보인다. 이 문제는 좀더 심사숙고해야 하겠지만 나는 어색하지만 집요하게 도입된 환영의 선들을 따라 사멸 직전의 육신에 닿아본 이 영화를 일단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다. 여전히 몇 가지 방식에는 공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죽음의 그림자와 사멸에 대한 회한이 여기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그걸 보았다고 말해야 이 영화를 정말 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늙은 두 노인과 한 마리의 늙은 소라는 배우들을 출연시킨 농촌 판타지를 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2009년 벽두에 두개의 환영을 맞이하게 됐다. 하나는 새해 첫날 현실의 시간 속에서 공공연히 일어났으며 또 하나는 얼마 뒤 창작물로서 애매하게 찾아왔다. 이 두개의 환영 중 나는 전자에 분노하지만, 나머지 하나에는 잠시 망설인 다음 끌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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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지 않았지만독립영화란,예술의 형식 기법을 멀리 할수없을 것이다.다큐란 개념을 모르 겠지만 현실과 현장의 사실적 있는 그대로 구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워낭소리는 미학의 관점에서 우리의 삶의 생활사적 서정의 유가와 도가적 삶을 떠나서는 워낭소리의 소와 사람의 관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편적일수 있겠다.워낭소리는 표현이지만 말이 아니고 그냥 삶속에서 소와 사람의 관계가 마음이 소통되는 것이라고 보며 이러함 속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삶의 존재적 내용은 도가적이면서 유가적이라고 할수 있다.작자의 입장에서 여성에 대한 시각이 예술적 사회적으로 주체적으로 미흡하다는 점은 또다른 측면에서 도가와 유가의 소통으로써 사회적 시대적 어떤 문제를 돌아볼수 있다면 이것을 여성의 문제만으로 편린화 시킨다거나 영화란 예술적 형식을 말하기보다 무엇을 전달하고 고발하는가?
이것이 더 중요한 것 아닐까?
환영은 환영을 위함이 아니라 소와 사람의 관계로써 추상이라고 보다면......현실과 거리감 있는 농촌의 반영일까 구성일가?그러므로 더욱 "거리감 있는 농촌의 영상"의 비판보다 더 거리감 있는 농촌은 역설적이다.
이 역설이 지금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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