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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전이(2011년)

 

  언제나 그렇듯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새로운 이슈가 등장하였다. 오만한 MB정권의 쇼맨쉽과 개드립이 또 하나의 이슈를 만들었다. 무상급식이 보편적 복지의 한 정책으로 대중들에게 인정받자. 한나라당은 다시 반값등록금 운운하면서 대학생들의 아픔을 자극하였다. 그러나. 이제 대학생들은 이전의 대학생들이 아니었다. MB정권은 그 싹이 피어나기도 전에 짓밟고자 무던히도 애썼다. 2009년도 용산시위에서도 집회 끝나자마자 돌아가는 학생들을 무조건 3-40명씩 무더기로 연행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의 급성장을 막지는 못하였다. 이제는 대학생들 스스로 가투를 하고 택을 짤 정도가 되었다. 이제. 거리시위와 가투는 대학생들로 그 주도권이 넘어간 셈이다.

 

 우리가 대학을 나온 이후. 한총련 이후에 대학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상아탑은 죽어버렸고. 집회와 시위. 결사의 자유마저 억압당했다. 2009년 4월30일 건대에서 노동절 전야제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학교측은 집회를 불허하였고 자동차로 교문을 막는 행패를 부렸다. 학교측에 동조하는 보수측 학생들이 총학생회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학내의 비민주적이고 구시대적인 작태에도 굴함이 없이 스스로 일어선 것이다. 70여명의 학생이 청와대 행진을 하면서 자진연행 당하였고. 드디어 6월20일 5만의 학생이 청계광장에 모여들었다. 이제 삭발하면서 동정을 호소하던 이전의 대학생들이 아니었다. 이미 많은 투쟁을 통해서 자신감을 회복한 당당한 대학생들 이었다.

 

 지난. 2011년 9월29일 도로에 300여명의 대학생이 어깨동무하고 누웠다. 그들은 물대포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전혀 요동조차 하지 않았다. 당황한 경찰은 여론을 의식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 기세에 눌려서 학생들을 전원 연행하지 못하고. 마치 쥐새끼처럼야금야금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경찰은 조금씩 쉬었다가 물대포를 뿌리고 체포하는 방법을 계속하다가. 그날의 할당량인 마일리지 를 다 확보했는 지 50여명의 대학생들을 체포하고 경찰은 자진해산 하였다.

 

 

 

500여명의 연좌시위대

 

 

 

 

 

 그위로 계속 쏟아지는 물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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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쟁과 운동과 혁명은 종교가 아니다. 누누이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일파만파 확산되고 전이되는 것이다. 촛불의 산화가 있었고. 그 산화후에 투쟁은 학생들에게. 노동자들에게 민중들에게 일파만파로 전이되고 마침내 들불로 타오르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제3막

 

 

 대학생들의 등록금 투쟁이 2011년 6월17일에 시청에서 있었고. 그 다음날엔 1차 희망버스가 출발하였고. 충남 아산에서는 유성기업 투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또한. 명동과 포이동에서는 강제철거에 맞선 투쟁이 이어졌다. 우리들은 다시 분주해지기 시작하였다. 바야흐로 촛불 시즌3가 시작된 것이다. 주말저녁이 되면. 우리들의 갈등은 시작된다. 마리를 지킬것인가? 한진을 지킬것인가? 지구의 민중을 구하고자 하는 독수리5형제가 되어버린 우리들의 고민은 오랜만에 바뻐져서 대략난감 하기까지 하다. (결국. 세명은 한진행 부산기차에 몸을 싣고 남은 두명은 명동마리를 지키기로 하였다.)

 

 하지만. 이 분주함이 그리 즐겁지만은 않다. 우리는 아직도 평화적인 투쟁인데 비해. 우리의 적들은 항상 폭력적 이었고 폭력경찰도 모자라 항상 용역을 대동하였다. 용역깡패 시정잡배 양아치가 거리를 활보하다 못해 이젠 아예 대낮에 대놓고 폭력을 행사하였다. 재벌부에 속해 경찰과 기자와 법보다 위에 있는 인면수심의 용역은 이제 악덕기업들에겐 대세가 되었다.


 6월25일 유성기업행 아산버스에 몸을 실었다. 오랜만에 보는 송경동 시인은 다리를 절었다. 기륭투쟁에서 기륭을 지키다가 사고로 인해 한동안 병원에 누워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륭에서 한쪽 눈을 잃은 유한림(윤활유. 이 분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형처럼 누구도 못말리는 송경동 시인.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세시경에 아산에 도착해서. 시장기가 역력해서 우리는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기거하는 비닐하우스에서 점심을 먹었다. 반찬이라곤 오이냉국에 김치가 전부였다. 나중에 전철연 동지들은 음식이 맛이 없다고 하였는데. 시장기가 역력해서 그런지. 투쟁의 현장이라 그런지 밥맛이 꿀맛 같았다. 허기를 다 채우기도 전에 비상이 걸렸다. 용역놈들이 급습해 노동자들 몇 명을 방패로 찍었다는 것이다. 밥 먹고 부랴부랴 올라가니. 벌써 상황은 끝이났고 엠블런스에 몇 명이 실려갔다. 집회 중간중간에도 용역들한테서 소화기가 날라오고. 돌이 날라오는 여기는 흡사 전쟁터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악에 받힌 사람들이라 결코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굴함이 없었다.

 

 같이 갔던 후배녀석이 나한테 묻는다. 고향에 온 기분이 들지 않느냐고? 밥맛도 꿀맛같고 여기오니까 피도 펄펄 끓는 것 같고 마치 고향에 온 기분이다. 언제부터 인가 나는 다시 희망을 얻었고 내 기력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그래. 투쟁의 현장은 언제나 나에겐 고향같은 곳이었다. 투쟁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때 나는 오히려 고향에 온 것 같은 평온함을 느낀다. 김남주 시인의 시처럼. 투쟁하고 있을때 그 치열한 긴장감 속에서 내 자신의 자유를 찾고 느끼는 것 같다. 두건과 모자를 깊게 눌러 쓴 노동자들의 모습엔 결연하고 비장한 의지와 각오가 보였다.

 

(야간노동이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신체리듬이 바뀌고 쉬는 날 조차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며. 평균적인 다른 사람들보다 세배는 더 늙는다. 야간노동은 자본의 이윤추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노동자들의 건강엔 최악이다. 자본가들의 대변인 이메가는 직접 앞장서서 메가폰을 잡고. 유성기업 극히 일부의 연봉을 마치 전체의 연봉인양 호도하였다.)

 

 

그들은 연대하러온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갈까봐. 회사정문을 일부러 뚫지 않았다. 후문에서. 회사가 설치해놓은 철조망을 뜯어버리는 퍼포먼스와 불꽃놀이로 늦은 밤 집회를 마무리 하였다. 동지! 내 가슴에도 그들과 같은 뜨거운 피가 들끓고 있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부상당한 노동자의 손을 부여잡으며 제발 건강히 몸조심 하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돌아오는 내내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아니나다를까. 수요일에 노동자들은 용역들과 한판붙었다.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오전  사측이 고용한 CJ 시큐리티 용역 깡패들과 충돌해 노동자 18명과 용역 6명이  부상 당해 병원에 이송 되었다. 부상당한 조합원들 중에 8명은 중상이며 한명은 두개골 함몰. 또 한명은 광대뼈 함몰이라는 중상을 입었다. 경찰은 두시간째 이를 수수 방관하였다. 오후 저녁에 접어들어, 건설노조의 집회가 있었는 데 광견들의 무차별 진압과 폭행. 물대포. 최루액 살포로 유성 공장은 아비규환이고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고 긴급지원 요청이 트윗에 올라왔다. 피를 철철 흐르는 조합원이 부지기수이고 병원 응급실은 조합원 가족들로 넘쳐난다고, 기자도 없고 방송도 없어서 누구도 이 사실을 전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갔다온 사람들의 얘기로는 오전에는 용역들이 정문입구를 좁게 막아놓고 그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타격하는 용역놈들의 훈련된 팀플레이어에 노동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후에는. 노동자들이 악에 받쳐 죽기살기로 덤벼들자. 용역들은 5분도 채 안되서 꼬리를 내리고 죄다 도망갔다는 것이다. 역시 위대한 노동자계급 이었고 조직된 노동자들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쾌거였다. 하지만. 용역들이 무너지자 경찰들이 노동자들을 개패듯이 패면서 다시 용역들과 합세해서 그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고 전쟁터가 되었고 양측의 피해가 서로 극심했다고 전한다.

 

 유성기업의 직장폐쇄는 위법이기에 그것을 법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자체가 잘못 되었다. 법도 경찰도 정부도 모두 자본가의 편이니. 여기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자본가의 나라. 자본가의 천국일지니. CJ시큐리티는 허가취소만 나고. 노동자들은 구속되고 106명이 징계를 받았다. 희망버스에서 평화적인 투쟁이 있었다면.(물론. 김진숙 동지는 목숨을 건 투쟁이지만. 희망버스 탑승자들의 투쟁은 평화적인 투쟁이었다.) 정말로 피 튀기는 전쟁같은 투쟁은 유성에서 있었다. 그들은 값비싼 용역을 내세워 민주노조를 말살하고 있었다. 한진도 중요했지만. 정작으로 연대가 절실히 필요했던 곳은 유성이었다.

 

 

 

 

죽창용역

 

 

부상당한 조합원들

 

 

사경을 혜메는 유성 노동자

 

 

 

광견(찰)한테 몽둥이로 맞은 유성노동자

 

 

 

희망버스 2-1: 오깽기 데스까?

 

 

 트위터에서 언제 경찰이 칠지도 모른다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SOS를 보고. 희망버스 2-1에 탑승하여 한진에 도착했다. 아침이 되자. 사수대 동지가 보여서 손을 흔들었다. 사수대 동지는 우리에게 반갑게 손동작으로 인사를 건넨다. 밤새 잠은 잘 주무셨나요? 모기한테 물리지는 않으셨나요? 식사는 하셨나요? 대충 이런 인사같다. 마치 일본영화 <러브레터>의 한 장면 같다. “오껭기 데스까? 오뎅열사는 잘 있습니까? 오뎅열사는 2차 희망버스때 적들의 침탈로 인해 장렬히 싸우다 전사 하였습니다. 흑흑. 오뎅열사의 죽음을 원통하게 여긴 떡볶이 동지들과 순대동지들이 기꺼이 연대하러 오셨습니다. 한편. 지하벙커에서 모든상황을 지켜보면서 진두지휘하던 쥐박이는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음식을 차단 시키는 것도 진압의 한 방식이라며. 세계 최초로 오뎅을 체포하는 강경 진압방식을 선보였으며. 오뎅체포작전을 성공시킨 지휘관을 일계급 특진 시켰다고 합니다.

 

 

 2차때는 사람이 많아서 보지 못했던. 김진숙 동지의 하트를 보았다. 작은 힘이라도 보태주고자 갔던 우리는. 반대로 당당한 그녀에게 희망을 보고, 또 살아가는 희망을 느꼈다. 하트는 사람들한테 일파만파로 전염되는 것 같다. 이 맛에 사람들이 희망버스를 타고 내려오는 것 같았다. 죽음 앞에서도 초월한 우리들의 끈끈한 동지애.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승리를 위해 당신에게 그리고. 동지들에게 무한의 하트를 보낸다.

 

 

 3차 희망버스때는 사람들이 확실하게 영도의 경제를 살려주고 돌아왔다. 희망버스가 영도경제를 파탄 낸다느니 하는 조중동과 정부의 왜곡을 일시에 불식시켜준 셈이다. 일만 오천의 대오가 가서 1박2일동안 냅다 술을 들이 부었으니 말이다. 가는 길목 곳곳마다 경찰이 배치 되어있을 뿐만이 아니라. 똥강아지처럼 사람들을 졸래졸래 쫓아온다. 그중 일부 상인은 마치 우리를 간첩 보듯이 쳐다본다.

 

“신고하세요. 신고해 보았자. 우린 포상금이 없어요”

 “ 그래? 잠시만 기다려봐......" "지미. 역시나 돈은 안주는 구만”

“ 대신 우리가 많이 팔아드리죠.ㅋㅋ”

 

 

 2차때는 막히면 뚫으려는 시도가 있었고. 선두에선 대학생들이 계속 전경들과 실랑이를 벌였고. 경찰은 물대포와 최루액을 퍼부었다. 새벽에는 색소포와 최루포를 섞어서 뿌리기도 하였다. 오랜만에. 그래도 제대로 싸운다는 소식에 2차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만오천여명의사람들이 모였는데. 밤이 되자 1박2일 동안 지치지 않고 문화제만 한다. 뚫고자 하는 어떠한 시도 조차 없이. 알고본즉. 주최측이 민주노총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그렇지 뭐...... . 사람들은 지루한 문화제를 지켜보느니 영도경제를 살려주기로 작심한 것 같았다. 여기저기 술판이 아침까지 벌어졌고 사람들은 고주망태가 다 될 정도로 마시고 또 마셨다.

 

 

 버스를 타고 올라오면서. 실망스런 3차 희망버스 지도부를 성토하면서 아쉬움과 김진숙 동지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또 들이 붓는다. 술잔을 돌리고 또 돌린다. 3차 희망버스 출발하기전날. 국정원은 간첩사건을 발표하였다. 어떤이는 희망버스가 평화적으로 끝나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충돌이 있었다면 조중동에서 간첩사건 폭력용공조작으로 몰아부쳤을 텐데 다행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평화적으로 끝난 3차 희망버스 조차도 조중동은 폭력으로 얼룩졌다며 호도 하였다. 우리가 평화적이든 폭력적이든간에 조중동은 무조건 나쁜쪽으로 호도한다. 이것은 마치 전쟁과 같다. 전선이다! 물러나면 패배하고 지는 것이다. 어떻게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뚫었어야 했다. 4차에는 민주노총이 야당 인사에게 장시간 마이크를 할애하면서 야당 들러리나 서고. 5차에는 실망한 사람들이 가느니 마느니 말이 많았다. 그래서. 2.3차 보다 적은 5천의 사람이 다녀왔다. 평화적으로 저항을 해도 원천봉쇄하고 물대포를 쏘고 강경진압을 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부산 국제영화제를 위해 원천봉쇄 하며 길을 막았는데 그 막았다는 자체가 국제적 망신이 되었다.

 

 

 김 진숙 동지와 한진의 문제는 이제 단지 한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체 민중이 공감하는 아이콘이 되어버린 것이고. 정리해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다. 또한. 이전까지 투쟁에 대해서 절망적인 인식을 했던 사람들에게조차 희망버스는 승리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심어주었다. 희망버스는 계급투쟁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희망버스는 이제 줄기차게 계속 될 것이다. 한진에서. 유성에서. 쌍용에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투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계속 민중연대의 아이콘이 될 것이다.

 

 

 

김진숙표 하트

 

  투쟁!!!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이 땅의 노동자가 핍박받지 않고 해방되는 그날까지 우리의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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