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16. 자생성의 한계

 

 2008년부터 시작된 5년간의 투쟁은 이제 기륭. 쌍차. 한진 노동자 투쟁으로. 강정투쟁으로 대학생들은 등록금 투쟁으로 전이되었다. 아고라에서 토론을 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스스로 기존의 운동권이 장악하고 있던 기회주의적인 시민단체. 정당들을 비판하면서 자신들 스스로 모임과 조직을 결성하며 최후까지 저항하였다. 그러나. 자생적인 변화는 스스로 자생적인 한계점을 노정하고 있었다.

 

 스스로 급진적으로 급조되었지만. 각종선거와 대선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다시 또 민주당이나 통진당에 대한 환상을 갖기 시작했고, 정치적인 인사들도 개입하여 여러 가지 모임등을 결성하면서 정치적인 목적으로 그들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 정치인들과 함께 했던 일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인을 통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아무리 인물이 뛰어나봤자 민주당에 소속되어 있는 한 그들도 새누리당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계급의 양날개일 뿐이다. 또한. 통진당은 야권대연합을 통해 부르주아계급에 편승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오래되고 낡은 기회주의는 노동판에서는 추수주의. 관료주의. 회사측과 타협하는 어용행위(노사협조주의!)로 노동운동을 망쳐버렸다.(기아에서는 1사1조직 흡수통합으로 전투적인 비정규직지회를 무장해제 시켰다.) 대중운동. 시민운동에서도 또한 온갖 추수주의. 비폭력 기회주의로 운동을 말아먹었다. (아직도 그들 자민통이 정규직 노조인 현대차지부나 기아차지부에서 득세를 하는 것은 비단 관료주의의 문제만은 아니다. 정규직 노동자의 정서가 예전에 비해서 많이 달라졌기에, 안정적인 노사화합주의를 주장하는 그들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투쟁의 주요 동력과 혁명의 원동력은 비정규직. 하청노동자, 불안정노동자가 될 수 밖에 없다. 맑스가 말했던 것은 굳이 대공장 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노동자이고  대공장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언급한 적이 없다. 대신에 혁명의 주요 원동력은 노동자 계급. 자신의 계급을 철폐하면서 다른 계급을 철폐하는 생산의 담지자인 노동자 계급 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노동자 계급이란 노동자.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적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반대로 같은 노동자 이면서 부르주아의 이해를 대변하거나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는 자는 노동자계급이 아니다. 고로, 노사화합주의나 비정규직 해체시도를 하는 기아차지부. 현대차지부의 NL 관료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적대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명박에서 박근혜로 정권이 바뀌고 촛불은 다시 타오르고 있었다. 한동안 시국회의 촛불은 광우병 촛불처럼 계속 타오르지 못했다. 시국회의를 주도한 단체가 한국진보연대. 참여연대. 민권연대등 5년전 광우병대책위의 인사들과 별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청광장이나 청계광장에서는 그저 문화제 위주의 집회만 이루어졌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시국회의 집행부의 기회주의성을 비판할 동력이 충분하지 않았거니와. 네티즌들 중의 일부는 그들과 타협을 하기도 하였다. 오히려. 박근혜 정권에 대한 대중적인 불만이 확산되고 폭발되기 시작한 것은 철도파업 때 였다.

 

 시국회의는 국정원 해체도 아닌 해체수준의 개혁이라는 애매한 말로 결국. 민주당의 국정원 개혁과 별반 다름없는 요구를 하였으며. 투쟁의 수위를 조절하여 박근혜 퇴진도 주장하지 말자고 했다. 이번 이남종 열사 장례위원회에도 이들은 발 빠르게 참가하여 다른 사람들이나 단체의 참가를 막았으며 패권주의적인 방식으로. 장례일 당일. 단 하루만에 4일장으로 일정을 순식간에 정해버리고 기자회견을 했다. 열사정국마저 이들은 감당할 수 없기에 순식간에 일정을 서둘러 마쳐버린 것이다.

 

 또한. 철도노조 집행부인 통진당 소속의 위원장 또한. 내부 노조원들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는 직권조인으로 22일간의 파업투쟁을 국회소위원회에 헌납하였다. 민주노총은 총파업 일정을 토요일에 잡는다던가, 느슨하게 일정을 잡았고 민주노총 침탈에도 소극적으로 대응을 하였다.

 

 문제는 자생성이 아무리 발전을 거듭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스스로 혁명적으로 변화되지는 않는다. 자생성은 스스로 자생성의 한계에 부딪치고 만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정치인에 대한 환상 혹은 통진당 인사들의 기회주의적인 한계에 봉착하고 만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그룹들 중 일부는 노동자정당추진위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통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제거 하고자 한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시작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는 진보정당을 건설하면서 당시 분출하기 시작했던 혁명성을 제거하는데 일조하였다.

 

 92년 진정추가 스스로 밝힌 것처럼 폭력혁명을 막는 완충지대 역할을 한 것이 진보정당 이었다. 2013년 김소연 선거운동본부를 통해서 사회주의 세력들이 다시 결집을 시작하였다. 전위를 자처하는 사회주의 그룹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 선거를 통한 노동자계급의 재편 이라는 목적하에 대선을 최초로 치러냈다. 어느 정도 선진노동자를 규합하는 데는 성공 하였지만,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쓰지 말자고 하였고 사회주의 강령조차 제대로 정하지도 못하였다. 정치적인 수준은 오히려 사노위 시절보다 후퇴하였다. 또한. 재능문제에서도 그들은 몰계급적으로 임했다.

 

 또 다른 사회주의 그룹들은 기존의 관료주의. 대공장노조의 운동은 이미 끝났다고 판단하면서 운동의 새판을 짜야 된다고 역설한다. 비공인 파업이나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을 예로 들면서 운동의 새로운 판을 짜야 된다고 말한다. 아니. 이미 새판은 5년 전 광우병투쟁에서도 지금의 안녕들 하십니까?. 철도파업. 부정선거등의 운동으로 인해 이미 계속 짜여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새 운동들이 자생성의 한계에 갇혀서 기껏해야 부르주아 민주주의운동으로 끝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의 목적의식적인 개입이 절실히 필요하다.

 

 내가 관료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일반적인 반관료주의자들의 생각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자민통은 운동의 암적인 존재이며 적대적인 존재였다. 자민통이 민주노총이나 노조를 장악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관료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들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새판을 짠다는 것에는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아니. 이미 새판은 항상 짜여 지고 있었다. 필자는 관료주의가 반성하고 바뀌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장애가 되고 적대적이 되는 기회주의자들. 그들이 제거되고 일소 해야만 우리의 미래가 비로소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비판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의 기회주의성을 철저히 폭로함으로써 노동자대중들이 그들을 불신하고 그들의 패망에 일조하며 새로운 운동의 판을 구성하는데 일조하기 위함이다.

 

 제대로 된 새판을 짜야 된다는 말은 쉽다. 하지만. 그것은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만들어진 새판이 자생성과 기회주의성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사회주의적으로 혁명적으로 변화되기 위해선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운동내부질서에 대한 전복이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서 사회주의자들의 철저한 개입이 있어야 한다. 개입의 형태는 어떠한 것이든 상관없다. 그것이 선전이든. 선동이든. 직접개입이든 적극적인 실천적 개입이 있어야 그것은 혁명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의 사회주의 그룹들은 그 노력이 부족하다.

 

 2012년 사회주의 또 다른 그룹은 총파업을 선전하면서 미조직 노동자를 조직화 한다고 하면서 전국순회를 했는데 그다지 성과는 없었다. 그들은 민주노총에 대한 비판조차 하지 않았다. 비판과 조직화의 문제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비판을 하면서 조직화를 같이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혁명을 말한다면, 우리 운동내부부터 기회주의를 일소하고 혁명적으로 변화 되어야 한디고 생각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