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인상적인 말

'먹는 입'과 '말하는 입'.

말 참 기가 막히게 만든다.

(넓은 의미의) 경제와 정치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더욱이 보편주의를

'먹는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가능성, 즉 함께 먹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가능성'

으로 정식화할 수 있다니.

이게 문학의 힘일까.

굳이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대립시키려는 것에는 찬성하기 어렵지만

문학과 철학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정도로 이해한다면, 뭐.

 

진은영은 랑시에르를 비롯한 프랑스 철학을 가지고

한국에서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에 관해 보여주는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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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419448.html)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0826)

 

‘절차에 갇힌 소통’ 인문학으로 구출을

공동체 위계·폐쇄성 둔 채
규범 따져봐야 ‘불통’ 못깨
현실 뛰어넘는 상상력 필요

 

이대 학술대회 진은영 연구교수 제안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 갈등이 다양하게 분출할수록 누구나 ‘소통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진짜 소통은 찾아보기 어렵다. 정부는 ‘국민들의 뜻에 따라’ 정책을 집행한다지만, 사람들은 ‘소통 없는 정부’를 비판하며 촛불집회에 나선다. 그들에게는 소통 대신 ‘불법 집회 참가자’ 딱지가 돌아온다. 소통만 있으면 어떤 문제든 해결의 실마리가 잡힐 것 같지만, 단지 서로의 입장과 의사를 주고받는다고 해서 소통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이화여대 탈경계인문학 연구단은 지난달 30일 ‘소통을 위한 인문적 상상’이라는 제목의 학술대회를 열었다. 철학자이자 시인인 진은영(40)씨는 ‘소통, 그 불가능성 안의 가능성’이라는 제목의 여는 발표를 통해 진정한 소통의 어려움과 그 가능성에 대해 철학적인 정리를 시도했다.

진씨는 사사로운 이해관계나 편견 등 방해 요소들만 제거하면 왜곡 없는 투명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일반적인 관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소통은 어떤 공식처럼 규범화할 수 없는 행위이며, 각자의 입장 속에서는 이미 보내야 할 메시지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아무리 메시지를 주고받는 ‘절차’에 대해 따져봐도 ‘소통의 불가능성’만 더해간다는 것이다.

그는 한나 아렌트, 위르겐 하버마스 등이 시도한 ‘소통의 규범화’에 비판을 들이댄다. 아렌트는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휘둘릴 수 있는 경제적 사안들이 아닌, 오직 공동의 문제만 다루는 정치적 영역에서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고 봤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 개념을 통해 진실성·진리·정당성 등이 모두 충족되는 말하기만이 보편적인 소통이 가능하다고 봤다. 진씨는 이들의 시도가 ‘먹는 입’과 ‘말하는 입’의 구분을 통해 소통을 보편적 규범으로 만들려 했던 것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진씨는 “먹는 입과 말하는 입의 구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에는 다양한 모습의 현실적인 불평등·불균형이 존재하며, 이는 어떤 종류의 규범화를 통하더라도 끊임없이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동한다. 게다가 경제적인 조건은 말하는 이의 자리를 결정해주는 핵심적인 구실을 하기 때문에 “경제적 사안과 관련된 문제야말로 소통의 핵심적인 주제로 도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한 몸’ 이미지를 통해 소통이 일어나는 공동체의 위계화와 폐쇄성에 비판의 초점을 맞춘다. 공동체 내부 주체들은 소통 주체들이 각자 서 있는 입장이 모두 다르더라도 ‘전체 공동체를 위한 것’을 내세우며, 공동체 내부의 위계질서를 타고 전해져오는 메시지는 별다른 소통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또 공동체 밖에 있다고 여겨지는 ‘절대적 타자’와는 소통하는 방법 자체가 없다. 어떤 공동체가 ‘관용’에 근거해 난민들을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난민 스스로는 아무런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소통의 불가능성이 나타나는 이유는 절차로 굳어져버린 소통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씨는 ‘두 주체 사이에 확정된 의미를 서로 전달·교환하는 방식의 소통’을 벗어나기 위해선 소통의 당사자들이 아예 기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고 본다. 이를테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평등한 현실을 외면하는 대가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사용자와의 협상에서 자신들의 몫을 챙기며 경제적 투쟁에 몰두할 때 그들은 오직 ‘먹는 입’으로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기존 경제적 재분배 방식에 균열을 일으키며 여성·비정규직·이주노동자들의 ‘먹는 입’과 함께 말하기 시작할 때, 그들의 입은 ‘먹기도 하면서 말하는 입’이 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나에게 낯설기만 했던 ‘절대적 타자’로부터 나와 함께할 수 있는 근접성을 발견하는 ‘탈경계적 보편주의’다. 진씨는 이를 “어떤 이들이 우리를 향해 자신들의 고통과 현실에 대해 호소할 때, 바로 그 순간 그 문제가 우리들이 함께 해결해야 하는 공동의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내게 주어진 고정된 정체성을 벗어날 때에만 비로소 소통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사회과학으로 대표되는 ‘소통의 과학’과 다르게 ‘소통의 시학’으로서 인문학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새로운 주체를 만드는 작업에 대해 사회과학이 여러 문제들에 대한 현실적인 분석과 연구를 이뤄낸다면, 인문학은 현실적 조건들을 뛰어넘는 다양한 상상력을 발명해낼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주체를 상상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진씨는 “새로운 주체는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부단한 실천 속에서 만들어지며, 그것은 당연히 기성 질서와의 ‘불화’를 겪는다”며 “그렇지만 이런 불화의 과정이야말로 소통의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것으로 이를 절차라는 이름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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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10/14 22:23 2010/10/14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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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놀라운 무식

어떤 글을 번역하고 있는데

나름 꼼꼼하게 하자는 생각에서

저자가 인용한 책들을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대조하고 있다.

그런데 쪽수가 맞지 않는 인용문도 있고

원문에는 나오지 않은 단어(물론 진짜 원문은 불어이기 때문에 그걸 보긴 해야겠지만

본인이 달아 놓은 참고문헌 자체가 영역본이고, 거기에는 틀림없이 나와 있지 않다)

가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다.

 

뭐 그런 거야 실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대개 큰 흐름 면에서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는데

오늘 발견한 대목은 좀 심각하다.

그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In Structural Anthropology Levi-Strauss argues that kinship systems could not be 'the arbitrary product of a convergence of several heterogeneous institutions..., yet nevertheless function with some sort of regularity and effectiveness.'"

 

그런데 인터넷(책을 잘못 빌려서. ㅋ)에 등록된 원문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No one asks how kinship systems, regarded as synchronic wholes, could be the arbitrary product of a convergence of several heterogeneous institutions (most of which are hypothetical), yet nevertheless function with some sort of regularity and effectiveness."

 

보다시피 원문에는 'could be'라고 되어 있다.

저자는 앞의 'No one'의 'no'를 'could' 쪽으로 당겨온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원문의 뜻과 정반대가 된다.

원문은, 친족체계가 어떻게 이질적 제도들이 수렴한 자의적 산물일 수 있으면서(긍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규칙성과 실효성을 가지고 기능하느냐라는 이야기인데,

저자의 해석은, 자의적 산물일 수 없고(부정), 오히려 규칙성과 실효성을 갖는다는 식이다.

 

내가 레비스트로스를 잘 모르지만

레비스트로스에 관해 최소한의 소양만 있으면 하기 어려운 오독이고

게다가 문맥상으로도 앞뒤 내용이 'nevertheless'로 연결된다고 보기 매우 어렵기 때문에

(자의적이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성과 실효성을 갖는다?)

다른 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저자가 'not'을 잘못 삽입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몇 문장 아래에서 저자는 레비스트로스와 알튀세르를

다음과 같이 싸잡아 비판한다.

"In neither case is any attempt made to justify the belief that all the components of a social system must be necessary and functional elements of that system."

 

그러니까 저자는 레비스트로스(와 알튀세르. 알튀세르 문제는 일단 논외로 치자)를

일종의 기능주의로, 적어도 변이가능성에 대한 부정으로 비판하면서,

그 근거로 위 인용문을 들고 있는 것이니 이건 실수라고 보기 어렵다.

즉 레비스트로스가 자의성을 부정했다는 게 일단 가장 중요한 근거인 셈인데,

아니 레비스트로스가 받아들인 소쉬르의 가장 중요한 명제가 '기호의 자의성'라는 건

약간 ABC 아닌가? 혹여 얼핏 그렇게 봤더라도 이 정도 내용이면

일단 자기 눈을 한번 의심하고 혹시 잘못 읽은 게 아닌지 다시 한번 읽어야 하는 것 아닐까?

 

비단 이 부분만 문제는 아니지만

이건 약간 실소를 자아내는 대목이라 적어둔다.

원어민도 이런 실수를 할 수 있다니, 역시 문제는 단지 어학 실력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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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10/14 19:55 2010/10/14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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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정지

이번 학기에는 (일본어 수업까지 포함)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수업이 있다.

그래서 목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나면 약간 진이 빠진다.

사실 큰 일은 치렀으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미뤄둔 일을 해야 하는데

언제나 닥쳐오는 이 나른함이란...

 

내일도 알바랑 세미나가 있어서

제대로 시간이 나진 않는다.

그러니 지금이 가장 황금시간인데! 그런데...

 

조금 있으면 정신이 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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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10/14 14:41 2010/10/14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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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잖아 비가 오면 바다 정도는 생긴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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