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글을 번역하고 있는데
나름 꼼꼼하게 하자는 생각에서
저자가 인용한 책들을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대조하고 있다.
그런데 쪽수가 맞지 않는 인용문도 있고
원문에는 나오지 않은 단어(물론 진짜 원문은 불어이기 때문에 그걸 보긴 해야겠지만
본인이 달아 놓은 참고문헌 자체가 영역본이고, 거기에는 틀림없이 나와 있지 않다)
가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다.
뭐 그런 거야 실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대개 큰 흐름 면에서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는데
오늘 발견한 대목은 좀 심각하다.
그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In Structural Anthropology Levi-Strauss argues that kinship systems could not be 'the arbitrary product of a convergence of several heterogeneous institutions..., yet nevertheless function with some sort of regularity and effectiveness.'"
그런데 인터넷(책을 잘못 빌려서. ㅋ)에 등록된 원문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No one asks how kinship systems, regarded as synchronic wholes, could be the arbitrary product of a convergence of several heterogeneous institutions (most of which are hypothetical), yet nevertheless function with some sort of regularity and effectiveness."
보다시피 원문에는 'could be'라고 되어 있다.
저자는 앞의 'No one'의 'no'를 'could' 쪽으로 당겨온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원문의 뜻과 정반대가 된다.
원문은, 친족체계가 어떻게 이질적 제도들이 수렴한 자의적 산물일 수 있으면서(긍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규칙성과 실효성을 가지고 기능하느냐라는 이야기인데,
저자의 해석은, 자의적 산물일 수 없고(부정), 오히려 규칙성과 실효성을 갖는다는 식이다.
내가 레비스트로스를 잘 모르지만
레비스트로스에 관해 최소한의 소양만 있으면 하기 어려운 오독이고
게다가 문맥상으로도 앞뒤 내용이 'nevertheless'로 연결된다고 보기 매우 어렵기 때문에
(자의적이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성과 실효성을 갖는다?)
다른 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저자가 'not'을 잘못 삽입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몇 문장 아래에서 저자는 레비스트로스와 알튀세르를
다음과 같이 싸잡아 비판한다.
"In neither case is any attempt made to justify the belief that all the components of a social system must be necessary and functional elements of that system."
그러니까 저자는 레비스트로스(와 알튀세르. 알튀세르 문제는 일단 논외로 치자)를
일종의 기능주의로, 적어도 변이가능성에 대한 부정으로 비판하면서,
그 근거로 위 인용문을 들고 있는 것이니 이건 실수라고 보기 어렵다.
즉 레비스트로스가 자의성을 부정했다는 게 일단 가장 중요한 근거인 셈인데,
아니 레비스트로스가 받아들인 소쉬르의 가장 중요한 명제가 '기호의 자의성'라는 건
약간 ABC 아닌가? 혹여 얼핏 그렇게 봤더라도 이 정도 내용이면
일단 자기 눈을 한번 의심하고 혹시 잘못 읽은 게 아닌지 다시 한번 읽어야 하는 것 아닐까?
비단 이 부분만 문제는 아니지만
이건 약간 실소를 자아내는 대목이라 적어둔다.
원어민도 이런 실수를 할 수 있다니, 역시 문제는 단지 어학 실력만은 아니다.
Posted by 아포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