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치의 길에서” 가진 것 다 바쳐 헌신하고 파=②

-이계안 전 의원이 말하는 ‘잘 사는 나라 따뜻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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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선임기자 박정례= 뿌리는 땅속에만 있는 게 아니다. 마음속에도, 나아가서는 세상 어디에도 있다. 나 하나의 노래가 기억의 저편 속에서 뿌리가 되어 살아 숨 쉰다. 그 뿌리는 한 인간의 평생을 좌우할 만큼 강렬한 의미로 살아나 시간과 사건 속에서 갖가지 조건과 부대끼며 지난한 몸부림의 시간을 갖는다. 시간이 지나고. 어느 한순간 세상 밖으로 나와 활짝 피어난다. 결연히 나부끼는 의지이자 시대의 표상이다.

한 사람의 행동 그 지난한 몸부림

이계안 전의원에 대한 탐구를 위해

풍문과 소문과 진실 속으로....

현대자동차 사장 출신 정치인 이계안, 풍문으로만 들었다. 신문과 방송에 거론되는 이름 석 자로 만 알았다. 성장하는 속도가 우리들 귀속까지 팍팍 들릴 정도로 잘 나가던 굴지의 재벌회사 최고책임자였기에 뉴스를 통해서 듣던 이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정치계로 진출하더니 얼마 안 있어 서울시장에 출마한다는 기사가 떴었다. 40넌 동안 전문경영인 생활을 하다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그, 다시 정치계로 돌아온 그, 속도를 내어 지금 곧장 그를 찾아가 본다.

 

-3단계 인생론을 말씀하셨는데요?

“인생을 3단계로 구분하여 살고자 했다. 태어나서 입사하기까지가 1단계요. 직장생활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한 자아실현기가 2단계, 이타적 삶을 위해 사회에 헌신봉사 하는 3단계의 삶이다.”

이 전의원의 인생 2기는 1976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하여 현대캐피탈 회장으로 퇴임한 2004년 2월15일까지다. 그런데 그의 인생 3단계는 이타적인 삶의 단계로 설정하여 사회를 위한 헌신기로 잡고 있다.

 

-3기 인생에 정치가 포함되었나?

“정치를 하게 된 계기는 밖에서부터 찾아왔다.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세계 굴지의 자동차회사 책임자가 된 나를 성공한 롤 모델로 보고 영입제안이 다각도로 이루어졌던 때문이다. 때마침 대표이사 회장으로 있는 현대캐피탈. 현대카드(주)의 유명한 광고카피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아니었나. 55세를 기점으로 인생 3단계를 구상하고 있던 터에 대학동창들이며 사회 곳곳에서 정말 많은 러브콜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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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만년야당이었던 곳이었다. 이유가 무엇인지..

“나의 베이스는 분명 보수 쪽이다. 재벌회사에서 30년이었으니. 그곳은 양지중의 양지라고 일컬어지는 곳이다. 그러나 나의 가슴속에는 진보의 DNA가 있었다. 조지프 나이의 말처럼 효율성과 정의라는 가치가 상호 충돌할 때 어떤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당시 한나라당이 아닌 열린우리당을 선택하게 된 이 전의원의 설명이다. “정치와 담을 쌓고 한 길로만 달려온 세월이었다. 가난에 지친 가족을 일으켜 세울 책임을 지고 오로지 실력과 부지런한 품성을 바탕으로 한 분야에서 우뚝 섰다. 그렇더라도 고 정 회장으로부터는 사업보국의 가치를 배웠고, 시대와 타협하지 못했던 아버지와 누이동생 계숙이를 통해서는 이타적인 사랑과 실천의 중요성을 배웠다.”

이 전 의원의 가족사는 흥미롭다. 수감생활을 하느라 초등학교 졸업시기가 다 되어서야 얼굴을 마주하게 된 아버지, 연좌제의 희생자가 된 12살 손위 형과 방물장수로 가족을 먹여 살린 어머니 그리고 ‘한신대학교의 ’전설적인 운동권 대모‘였던 동생 이계숙 이들 모두가 ‘사랑과 야망’ 류의 드라마에서나 나옴직한 독특한 캐릭터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는 특히 콩나물무침을 한 양푼 가득 무쳐 후배들 밥걱정을 하며 수배자들을 돌봐줬던 누이 이계숙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것 같다.

“항상 집권하고 항상 잘나가는 보수 세력들이다. 늘 집권만 하던 그들처럼 나 역시 30년을 대기업의 보호 속에서만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탓에 진보운동을 했던 아버지의 후배들이나 심지어 여동생의 한신대 후배들과 주변의 가까운 지인들까지도 나의 선택을 신기하게 여겼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계안의 속마음까지 다 알 리가 없다. 이계안은 평소 회사 동료들에게 “아버지 상(喪)을 당했을 때 조문객이 더 많이 오는 직장이 어디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 현대가 평생직장이고 그런 곳이다”라고 부하직원들을 향해서 말하던 것처럼 그 또한 정당을 결정해야할 때도 편안한 길보다는 “가치에 우선하는 결정을 했다.”고 한다.

이계안을 정치권으로 끌어들이려는 친구들의 권유 앞에서 아내와 함께 찾아간 목사님은 ‘정치도 잘 하면 살아있는 신학이 될 수 있다’고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줬다. 이때 그가 붙잡은 결론은 “정치를 편한 곳에서만 할 수 없다”는 가치기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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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연구소를 운영하시는 이유나 정치인으로서 크고 작은 신념에 대해서 알고 싶다.

“2.1연구소는 해외투자처를 물색하던 중에 나온 아이디어다. 유럽 쪽 거점을 스페인에 두려고 시장조사를 했다. 좋은 조건을 보고 스페인을 점찍고 있었다. 그런데 결정이 임박한 순간에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연구기관으로부터 급히 연락이 왔다. 합계출산율이 최소 2.1명은 돼야 노동력 수급이 가능하다. 그런데 스페인은 출산율이 낮아 공장을 지어놓았다 손치더라도 향 후 노동력수급을 자신 못한다는 보고였다. 그때부터 출산율의 중요성을 깨닫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기업가들의 정보 수집력은 전쟁 중에도 빠르고 정확하다는 속설이 있다. 현대자동차 CEO 이계안, 해외투자처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출산율의 중요성에 눈을 뜬다. 현재 1.21명인 우리나라의 출산율을 2.1명으로 복원하는데 이바지하고자 2.1연구소를 설립하게 됐다.

“나는 세상을 바꾸는 것에 관심이 많다. 출산율과 병행해서 화두로 삼고 있는 것이 3가지인데 기후변화와 인구변화와 남북문제다. 이 3가지 모두 글로벌 이슈이고, 국제정세와 맞물린 중요사안이다.”

 

-정치에서의 신념은 정신이고, 꿈은 목표일 텐데 좀 더 자세히 들려달라.

“정치는 가난한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기회를 상실한 사람에게 도전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를 실행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입법이다. 여성과 소외계층, 사회적인 약자를 위한 법말이다. 법안 마련이 정치다. 정치가는 경제회복을 위한 대안 제시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양심적이고도 성공한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만나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지론이었다. 나는 양 세력이 만나서 약자를 위한 좋은 입법을 하는데 관심이 많다. 나 자신이 성공한 CEO로서의 역량과 진보의 유전자를 갖춘 정치가라고 믿기에 인생3단계를 정치인으로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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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대통령이 기업가 출신이다. 경기후퇴와 국력을 약화시켰다는 여론이 있다.

“경영과 정치와 본질적인 차이를 통찰하지 못한데서 온 때문이라고 본다. 경영은 효율과 혁신이 목표다. 반면에 정치는 정의를 목표로 하는 분야다. 의사결정 과정에서도 경영은 본질적으로 독재지만 정치는 민주주의다. 그래서 정치는 예술인거다. 또 경영은 결과이고 정치는 과정이라는 명제를 놓고 다투는 분야다.” 이어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현대에서 사장을 역임한 회사들을 보면 현대건설, 현대엔지니어링, 현대제철, 현대리바트, 현대엔진 등 고객수가 적은 회사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며 고객수가 적다는 것은 사장이 영업을 다하고 참모들이 중요한 결정에 참여할 여지가 거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는 설명이었다.

과정과 절차를 중요시 하는 정치의 덕목은 사라지고 오로지 독불장군 식 나 홀로 정치로 인해 지금 우리사회는 극심한 가치전도의 혼란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기업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정치로 유턴했는데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말이지만, 나의 몸에는 CEO로서의 ‘혁신’의 피와 진보의 DNA가 동시에 작동한다. 나는 정치를 통해서 ‘잘 사는 사회, 따뜻한 사회’를 이루고 싶다. 2006년도에 서울시장에 출마하기 위해 당내 경선에 참여했었는데 계파도 조직도 등에 업지 않은 탓인지 후보경선에서 밀렸다. 짧은 정치기간에 두 번의 후보경선을 치른 탓에 정치는 한 번만 한다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서울시장 선거를 기억한다. 당내 여론조사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높은 지지율을 보였던 후보가 본선에서는 투표율 61:27로 상대후보와 무려 34% 차이가 났다. 당내여론조사의 거품이 심했다는 증거다.

“경영에서 또다시 8년이 지났다. 이제는 정말 더 늦기 전에 금전이든 경륜이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놓을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열심히 번 재산은 아내와 자식과 3등분으로 나눴다. 내가 태어난 평택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다 바치려고 한다. 내겐 아직도 서울시장후보 경선에 나서던 때의 기억이 선하다. 많이 듣고 많이 이끌어내는 소통의 리더십을 구현하고 싶은, 자치단체장으로서나 정치가로서의 꿈은 아직도 살아 있다.”

 

-평택과 꿈 잘 알았다. 그럼 왜 신당인가?

“앞에서 말했지만 진보 성향의 정당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내 경영 책임자로 되돌아갔다. 이 기간까지 합해서 산업현장에서 보낸 세월이 총 40년이다. 하지만 마음 한가운데서는 제대로 된 정당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때마침 안철수 대표가 2013년 12월부터 당을 만드는 작업을 했기 때문에 새정치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참여했다. 이 같은 인연으로 신당의 후보로 나선 것이다.” 그러면서 이 전의원은 ‘왜 평택 출마인가?’에 대해 부연설명 좀 해야겠단다. “평택은 오랜 독과점 구조로 인해서 소비자가 외면 받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도의원에서부터 시장, 국회의원,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보수여당의 독점정당 체재다. 이런 틀을 내가 나서서 꼭 한 번 바꿔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출마의 변으로 봐도 되겠다.

“그렇다. 평택이 뽑은, 평택을 위한, 평택의 최고 일꾼이 되고 싶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다 내어놓고 싶은 곳이 고향이다.”

이계안 그에게서 연상되는 말은 현대자동차 CEO, 2.1연구소, 칼레의 시민 등이다. 희생자 6명을 내놓으라는 적국의 왕 앞에 죽기를 자원하고 나선 칼레시의 지도층 6인의 이야기에서 ‘잘 사는 나라, 따뜻한 사회’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려는 결심을 읽을 수 있다. 바위와 같이 굳건한 그의 의지가 평택시민들을 향해서 빛나길 빈다.

 

*글쓴이/박정례 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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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6 14:59 2016/02/16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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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계안 전 의원,,,강한 한국 이끌 ‘CEO출신 정치인’-①

-현대자동차 경영할 때처럼 평택 발전에 헌신하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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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선임기자 박정례= 이계안 전 의원이 저술한 책 두 권을 읽었다. ‘누가 칼레의 시민이 될 것인가?’와 얼마 전에 출간한 ‘잘사는 나라 따뜻한 사회’라는 책이다. 이계안 의원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내친김에 그에 관한 인터뷰 동영상도 찾아보았다.

3년 전부터 시작된 본 기자의 독서관, 정치인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지은 책을 우선적으로 읽어 보자.” 이런 호기심이 이계안 전 의원의 책을 읽는데 까지 이르렀다.

정치인들 중에는 뛰어난 사람이 많다. 그들은 다양한 출신 배경과 경력을 가진 사람들로서 피나는 노력과 경쟁을 치러낸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선거(選擧)라는 수단을 통해서 뽑힌 민의의 대변자들, 하지만 국회의원이라고 해서 그들을 막연하게 동경할 일도 없고, 반면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경원시 할 일도 아니라 싶다.

때마침 이계안 전의원과 연결이 되었다. 이 기회를 살려서 이계안 전의원을 만나 우리와 교집합을 이루고 있는 부분은 무엇이고, 그가 구상하고 있는 장래계획은 무엇인지 알아본다. 인터뷰는 평택역 일대에서 유권자를 만나고 있는 이 전 의원과 잠시 틈을 내 이뤄졌다.

 

-현대시절을 회상하는 모습에서 행복한 미소가 흐른다?

“대단했다. 내 개인의 성숙과 회사의 성장과도 맞물리는 시기였잖은가. 우리사회의 발전 속도와도 궤를 같이하는 흔치 않은 시기였다. 사회 초년생으로 첫발을 내딛은 회사가 국가발전과 함께 괄목상대한 성장을 거듭하며 세계 굴지의 대그룹으로 성장했다. 역동적인 시대였다. 두 번 다시 찾아올 수 없는 행운이었다.”

 

-최고위직까지 올라서 더 그런가 보다.

“열심히 하다 보니 뒤따라 온 결과였다. 크고 작은 목표를 이루며 커나가는 기쁨이 무엇보다 컸다. 나를 알아주는 벗 하나만 있어도 인생이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데, 말단사원으로서 그룹의 총수를 대면하게 된 일이며, 정직한 시선으로 바라본 문제점을 용기 있게 말한 것이 받아들여지고 또 그것이 큰 이익으로 돌아와 회사발전의 공헌으로 이어졌다.”

이 전의원이 현대중공업 서울사무소 재정부에 근무할 때 일이다. 일일 자금계획을 짜는 중에 미심쩍은 점이 발견됐다 분식회계가 의심되는 대목이었다. 혼자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다가 이를 상부에 보고했고, 당시의 상관이었던 이현태 전무는 이 대리를 대동하고 정주영 회장에게 달려가 ‘직보’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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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회장님의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한마디로 파격이었다. 일개 대리였던 나에게 울산 본사를 ‘감사’할 수 있는 직권을 부여하셨던 거다.” 또래 학생들에 비해서 한문 실력이 출중한 것을 살려서 국문과나 역사과를 진학하려든 이계안 전의원에게 “가난한 촌놈은 문과를 가선 돈 못 번다.”며 상과대학을 권한 담임선생의 진로지도가 고마울 뿐이었다. 그 덕분에 경영학을 전공했고, 회계학을 수강한 특.장점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 전 의원은 이후로도 현대중공업에서 다년 간 재정파트에서 근무하며 자금운영에 관한 크고 작은 중책을 맡게 된다.

“1979년 5.25 조치로 일어난 고 정주영 회장의 아우인 고 정인영 회장과의 재판, 현대오일 뱅크와 관련해서는 사돈인 장흥선 회장과 경영권을 소재를 두고도 재판을 했다. 사업 확장 부분에서는 충남 대산 지역에 현대석유화학을 건설한 일과 1998년도의 기아자동차 인수문제 등 고 정주영 회장과 정말 많은 일을 경험하는 나날이었다.” 전문경영인으로서 눈 코 뜰새 없이 바쁘게 회사 발전에 올인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 후 현대카드 회장 때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유명한 광고 카피를 최종 채택하는 안목을 발휘하여 만년 하위권이던 현대카드가 “업계의 리더로 변신할 수 있었다.” 리더의 담대한 결정 하나가 회사발전에 얼마큼 중요한지 실증하는 예가 아닐 수 없다.

이 전의원에 대해서 소개가 좀 필요할 것 같다. 우리나라가 산업사회를 거쳐서 오늘날과 같은 경제발전을 이룬데는 이 전 의원과 같은 산업 전사들의 공로가 크다. 현대그룹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종합기획실의 최고운영책임자(Coo)를 거쳐서 현대자동차 최연소 대표이사 사장(CEO)과 현대캐피탈, 현대카드 대표이사 회장을 역임한다. 그는 이후 정계로 진출하여 서울 동작을에서 제 17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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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감이 대단했겠다. 승승장구 아니었나?

“최연소 현대자동차의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른 일은 개인적으로도 전문기업인으로도 최고의 영광이었다. 크고 작은 일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이유도 컸지만 그 중심에는 늘 경제계의 큰 어른이신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님이 계셨다.” 그러면서 정주영 회장은 여느 기업가 하고는 급이 다른 경륜가이자 경세가임을 강조한다.

모든 샐러리맨의 꿈인 대기업 사장, 이를 40대에 이룬 이계안. 이것이 고 정주영 회장이 지상에서 단행한 마지막 인사였다고 한다. 정주영 회장은 “책상머리에는 답이 없어. 현장에 가봐!”하는 짧은 격려사를 남기고 떠났다. 최고의 선물을 받아 안은 자가 할 일은 자신을 영광의 자리로 이끌어준 이의 유지를 잘 받들어 실현시키는 일이었다. 이계안은 ‘현장에 답이 있다.’는 말을 가르침 삼아 현대맨으로서의 자부심을 만개시키기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것이 걸출한 기업가요 경세가인 ‘정주영’ 전 회장을 기억하며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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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 회장을 경세가(警世家)라 칭했는데 어떤 사람에게 해당하는 호칭인가?

“단순한 사업가를 뛰어넘는 개념이다. 기업으로 일가를 이뤘을 뿐만 아니라 그로서 사회에 유익을 끼치는 사람을 말한다. 돈 벌어 나만 잘 먹고 잘 살자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르다. 경제행위로서 만민과 더불어 살자는 의식이 투철한 분을 말한다.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겪은 직후에 현대그룹과 LG그룹 간에 ‘반도체 빅딜’이 성사되었다. 이 결과 LG반도체를 인수한 현대에서는 거액의 세금납부 의무를 이행해야 했다. 핵심경영인 7인 회의서 이문제가 주요 안건으로 올랐는데 한 참석자 중에서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묘안을 짜냈다.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절묘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고 정주영 회장께서는 “세금 내지 않으면 나라는 어떻게 살림을 살아.”하면서 성실 납세를 지시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아, 이분이야말로 그냥 기업가가 아니구나!”하는 뭉클한 감동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소떼 1001마리를 몰고 분단의 3.8선을 넘는 정주영 회장의 세기적인 퍼포먼스, 그릇의 크기도, 창의적인 사고력도 남달랐음을 목도하며 현대그룹에서 이뤘던 모든 성과물들은 “정주영 회장이라는 큰 바다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되뇄다.

 

-현대맨으로서 인상에 남는 일 몇 가지만 더 든다면?

“세무감사를 받을 때 직원에게 주판을 내준 일이 있다.”며 웃었다. 작은 일이지만 감사를 받는 입장에서는 탈 없이 빨리 끝나야 좋은 건데 주판을 두드리며 깐깐하게 감사하라는 꼴이었으니 그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현장시찰을 할 때의 기억도 있다. 한 번은 자재를 쌓아놓은 무더기가 흩어져 도로 한가운데 까지 나와 있는 것을 보며 “이게 뭐라 생각하느냐?”고 다그쳐물었다. 담당자가 “돈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래 돈이다. 그런데 네 돈이면 이렇게 하겠어?”하고 일갈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철렁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물자를 한 결 같이 귀하게 여기는 습관을 길러야겠다.” 현장지도를 톡톡히 받는 순간이었다.

이 전의원 집은 무척 가난했다. 아버지는 사상적인 문제로 운신의 폭이 자유롭지 못한 터라 어머니가 행상을 다니며 살림을 꾸리는 가난한 집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던 초등학교 때의 어느 날 명심보감에 있는 소부재근(小富在勤) 대부재천(大富在天)이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게 됐다. 큰 부자는 하늘에서 내지만 작은 부자는 노력하면 된다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은 그때부터 몸에 밴 유무형의 자산이 되었다. 이습관대로 아침 6시 15분이면 회사 출근을 하곤 했다.

 

-회사 출근이 6시15분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일찍 일어나기를 실천했다. 명심보감을 배우면서 소부재근 대부재천이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게 된 날부터 한 결 같이.

 

-회사를 위해서 원 없이 열정을 바쳤다는 얘긴데...

“1976년도, 25살 때 현대중공업에 입사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좌제법이 시행돼서 공무원 시험도 못 보고, 연좌제에 걸린 사람들은 어디서 뽑아주는 곳도 없었다. 오직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만이 중앙정보부 같은 곳의 눈치 안 보고 품어줬던 거다.” 이계안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회사 일에 혼신을 다 바쳤다. 그 덕분에 동료들보다 빠르게 인정받으며 승진했고, 마침내 사장에 올랐던 거다. “나를 알아주신 분은 고 정주영회장이고, 나는 그분이 제공한 현대그룹이라는 바다에서 마음껏 노를 젓는 수석 항해사였던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산업화의 현장에서 30년 되던 어느 날이었다. 이계안은 정치권의 러브클을 받는다. 이때 그의 선택은 보수 쪽이 아니었다. 그의 정치행보에 관해서는 2부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본다.

►이어 2부 인터뷰

 

*글쓴이/박정례 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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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6 14:44 2016/02/16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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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의 정치재개와 '친노 부역 9적'들의 심판
‘전북출신 현역국회의원’들 물갈이론 민심에 전전긍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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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정치가 들끓기 시작했다. 전북출신 현역국회의원들의 물갈이론을 주장하는 높은 여론을 두고 전북도당 현역국회의원들이 전전긍긍하면서 이를 막아보려 한다는 짓이 정동영 전 의장의 정치재개를 가로 막는 악수만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더민당의 전북도당 현역 국회의원들 9명은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긴다.’는 고사를 의식해서인지 아직 정치 재개를 선언 하지도 않은 정동영 전 의원을 향해서 재를 뿌리고 초를 치는 등 금도를 넘는 행위를 서슴지 않으며 정동영 막기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다.

정동영 전의원의 진격 행보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정 전의원은 남북문제나 국제정세를 거시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탁월한 정치 역량을 가진 정치인이며 개성공단을 연 실질적인 주역이자 경륜과 도덕성을 두루 갖춘 정치인이기에 정 전의원의 정치 재개의 의미는 클 수밖에 없다. 더해서 현역 물갈이론이 거센 전북지역 민심이 정동영으로 인하여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심판의 철퇴가 보다 매서워질까봐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들은 급기야 지역민심의 심판을 피하고 물갈이론을 희석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정동영의 정치재개를 방해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친노친문들의 장기다. 경륜 있고, 실력 있는 지도자가 보인다 싶으면 가차 없이 달려들어 물어뜯고 사지로 몰아 죽이는 특유의 습성 말이다.

지난 2014.7.30재보선 때 얘기를 해보자. 더민당 내 친노 5.86세력들은 정동영과 천정배(이하 경칭 생략)의 출마를 저지시키기 위해서 ‘중견 정치인들이 자기 지역구를 옮겨가면서까지 재보선에 나와서는 안 된다.’는 연판장을 돌리며 정동영과 천정배의 출마를 가로 막고 나섰다. 친노 5.86들이 그 다음으로 벌인 일은 국민들 앞에서 벌인 ‘OK 목장의 결투’에 버금가는 활극이었다. 광주에 사무실을 내고 개소식을 하루 앞둔 기동민이 난 데 없이 동작 을에 나타나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허동준과 막장 극을 벌인 것이다.

이런 추태로 인해서 당시 새정련은 동작을에 자당후보를 등판도 못시켰다. 노원병이 지역구인 노희찬 정의당 후보가 난 데 없이 날아와 선거를 치르는 바람에 새누리당의 나경원 후보에게 당선 증을 헌납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도 죽고 너도 죽자”는 자살특공대 식 친노친문의 무경우가 빚어낸 결과였다.

이들은 같은 친노 계이지만 전자는 박원순 계요 후자는 정세균 계라는 차이점 밖에 없었다. 친노친문 5.86들은 정동영과 천정배를 밀어내고 자기들끼리 아귀다툼 추태를 벌임으로서 야당이 석권할 수 있는 2014.7.30 선거를 보다시피 망치고서도 당시의 지도부인 김한길과 안철수에게 패배책임을 물어 사퇴시킨다.

오늘 날과 같은 야당의 분당사태는 친노들이 등장하는 날부터 예견돼 있었다. 친노들의 당권 장악과 분열을 향한 패권적 악성바이러스는 피치 못할 독소가 되어 당을 두 동강내기에 이르렀다.

이번에 벌이는 더민당의 전북도당 국회의원들이 하는 짓은 친노친문들이 하는 주특기의 연장선이다.‘정동영 전 의원은 전북이 자랑하는 큰 정치인이고, 큰 정치인은 큰 길을 가야한다.’면서‘큰 정치인인 정동영 전 의원은 지역구 출마를 하지 말고 무조건‘복당만 하라’고 윽박지르는 행태 말이다.

그들에게는 국민의 안위와 국가의 존망을 위한 거시적인 대안이 없다. 정치 자영업자일 뿐인 특정 계파가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물론 전북 정치의 미래 또한 있을 수 없다. 큰 정치인 정동영의 진격(進擊)을 계기로 '친노 부역 9적'은 엄중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 전북과 전주 유권자들은 전북출신 현역국회의원’들을 심판하여 전원 물갈이 하는 쾌거를 이뤄야 한다.

경기가 좋지 않다. 남북관계도 예측할 수 없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강국들의 이기적인 국익행보도 한 치 앞을 헤아릴 수 없는 상황이다. 실력 있는 큰 지도자를 세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를 잔재주 부리고 기교를 일삼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패권 집단은 필히 퇴출시켜야 한다. 이번 4.13총선을 기어코 정치발전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박정례/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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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2 15:42 2016/02/12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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